남은 자(로마서 9:27-29)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남은 자(remnants)라는 개념은 종말론의 핵심적인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남은 자란 미래의 소망을 집약(集約)한 말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남은 자’ 사상은 여러 문학 형식에 등장했습니다. 신화, 전설, 서사시(敍事詩), 예언, 기도, 편지와 연대기 등에 등장했습니다. 왜 그러했습니까?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7:23을 보면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수로 모든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여덟 명만 남았습니다. 따라서 ‘남은 자’란 구속사적 의미를 강하게 강조하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남은 자의 구원에 관한 소망을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장애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특히 소망이라고는 전혀 없을만한 상태인 바벨론의 포로기간에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처참했습니다. 칼에 베임을 당하고, 메어침을 당하였습니다. 잔혹한 상태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복음서에서는 남은 자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직접 ‘남은 자’란 말을 사용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사야10:22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중 오직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바벨론 포로가 죄악에 대한 무서운 형벌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이란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구제되어 선조들의 땅으로 돌아온 새 집단을 남은 자라고 했습니다. 사실 남은 자는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전의 엄청난 인구에 비하여 볼 때 새 집 단 즉 남은 자는 멸망을 간신히 모면한 일부였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그들이 다시 풍성한 민족으로 자라날 일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남은 자들이 자신들의 어떠한 역량에 의해서 남았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백성들을 망하게 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남은 자들은 바벨론에 흡수되지 않았습니다. 즉 자신들의 신앙을 어떻게든지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지키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멸망당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구원코자 하셨을 때, 그가 원하셨던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소수였습니다. 멸망 중에서 건짐을 받았던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귀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회복을 예표 한 것입니다(Calvin). 현재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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