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창세기12:4-9)
많은 주석들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즉시 떠났다고 말합니다. Matthew Henry도그의 순종은 지체함이 없는 신속한 것이었다고 했고, Keil and Delitsch도 아브람은 주님의 부르심을 기꺼이 따랐으며 말씀하신대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람이 갔느냐? 하나님이 보내셨냐?’에서 갈등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문을 설교할 때 아브람의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이 좋아서 즉시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의 아브라함을 이해할 때 아브라함이 두 단계에 걸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갈대아 우르에서(11:31, 15:7, 행7:3), 그리고 하란에서(11:32, 12:12)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나안으로 하나님이 보내셨는가? 아니면 말씀 한 마디에 즉시 떠났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바로 떠났다면 “아브람이 점점 남방(네게브)로 옮겨 갔더라”라는 구절에서 부딪히게 됩니다. 네게브만 넘으면 애굽입니다. 믿음이 충만했다면 사실 가나안에 도착한 후 네게브로 방향을 잡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실패하는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인물들을 설교할 때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주입식인 인물설교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 말을 믿고 나갔는데 안 되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세울 때 그 사람을 기준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하심이 어떠한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와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손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칫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한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Calvin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다시 격려하여 나아가게 하셨다고 주석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창세기12:4-9절의 아브라함을 주시해야 합니다. 마치 사무엘상 6장에 나오는 벧세메스의 소처럼 되라는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채널을 성경의 위인들에게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추어서 고정해야 합니다. 노아라든지, 에녹이라든지, 모세라든지, 아브라함 등등은 오직 하나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역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우리역시 같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일뿐입니다. 성경을 볼때 이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칫하면 주객이 전도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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