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세 아들(창세기9:22-27)
셈과 야벳은 노아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함, 특별히 가나안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받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녀의 장래에 부모의 행위가 상당히 영향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직접적인 죄는 함이 했는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 질문할 수 있습니다.
Thompson은 함의 미래가 가나안의 미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가나안과 함께 복합적으로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Open성경은 가나안 족속의 타락한 성격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했습니다(수9:23, 삿1:30, 대하8:7-8).
Matthew Henry와 송병현은 이스라엘이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의 조상이 이미 오래전에 저주를 받았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 정복군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한 듯하다고 했습니다.
Calvin은 그 형벌이 그것의 가혹성을 더 분명하게 나타나게 하려고 그의 후손에게까지 옮겨진 것이라 하였습니다.
Keil과 Delitzsch는 가나안이 이미 그의 아버지의 불경건함과 죄악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거나 노아가 가나안의 이름에 중요한 징조를 깨달았다 했습니다.
Walter Brueggemann은 부모의 권위와 비밀을 보호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어떤 특정한 성적인 문제를 반영한 저주라고 했습니다.
손석태 교수는 함을 저주하지 않고 가나안을 저주한 것은 성경이 침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노아의 실수로 인하여 함이 저주를 받아 가나안이 영원한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함의 불경함과 셈과 야벳의 세심한 배려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과 주해를 참고하면 죄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더 악한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태도에서 심사숙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폭로하는 데는 두 가지 동기가 있는데 하나는 죄를 폭로함으로써 선을 이루고자 할 때이며, 슬픔과 수치를 무릅쓰고 행합니다. 다른 하나는 단지 즐기고 웃음거리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죄를 지적하면서도 또 다른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실수와 죄에 대하여 들었을 때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charity)은 우리에게 최고 중요한 덕성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