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계보(창세기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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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자손(톨레도트)의 계보(기록)가 이러하다. 하나님이 사람(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그를 지으시되 하나님의 형상(데무트)대로
모세는 택하신 백성의 족보를 기록하기에 앞서서 곁가지의 족보를 먼저 간단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즉 아담의 족보에 앞서 가인의 족보, 이삭에 앞서, 이스마엘을, 야곱의 족보에 앞서 에서의 족보를 기록하였습니다.이 계보를 기록하는 이유에 대해서 칼빈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비록 수적으로 적기는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만을 섬기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성경의 족보는 성경 역사를 전달하는 기본형식입니다. 계보는 어떻게 한 세대가 그 영향력과 능력을 확대했는가를 보여줍니다. 또는 역사가 수세기를 통해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는가를 보여줍니다. 모든 인간의 사건과 세대는 성경 역사의 주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더불어 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서 그의 백성과 관련된 사건들을 중심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의 계보 역시 이런 맥락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계보는 역사의 골격이 되는 개요를 제공함으로 이야기의 기억을 도와줍니다. 히브리인들은 구전(oral trandition)을 통하여 신앙을 전수했습니다. 기록 전승 이전 단계나 시대에서 어떤 사건을 이야기로 자녀들에게,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러한 계보는 수세기 동안 첨가되면서 대대로 전수되었습니다. 가족의 전승보다 더욱 중요한 계보들은 오실 메시야의 계보입니다. 메시야가 아브라함의 혈족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성경의 약속을 확증하는 역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계보는 일체감을 상기시켜 줍니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동일 혈통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같은 피와 살을 나눈 인류의 가족입니다. 각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귀중하고 비길 데 없는 창조물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계보는 하나님의 흥미로운 특성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집단으로서만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하나님께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그들의 수명과 후손을 언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수가 엄청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기억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경영하시는 것도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의 앞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의 앞에 문제를 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이 형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은 창1:26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Wnmel]x'B]) 우리의 모양대로( Wnte=Wmd]Ki)···’
초기의 신학자들은 이 용어를 구별했는데 LXX역 번역이(eijkwvva kai; oJmoivwsin; 형상과 모양)으로 되어 있고, 라틴어 벌게이트 역에도 두 단어 사이에 et(과)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에 Irenaeus와 Tertullian은 앞 단어(첼렘)는 신체적 특징들을 가리키고, 뒷 단어(데무트)는 사람의 영적 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Clement와 오리겐은 이러한 이해를 거부하고, “형상”이 사람으로서의 사람의 특징을 뜻하는데 비하여 “모양”은 사람의 “사람됨”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나 수련되거나 상실될 수 있는 자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Athanasius, Ambrose, Augustine, 다마스커스의 John은 그들의 시대에는 후자의 견해가 옳다고 확신했다. 중세시대의 스콜라 신학자들은 이 명사들 간의 구별을 계속해서 강력하게 주장하여, ‘형상’은 이성과 자유의 지성적 능력들을 함축하고 있고, ‘모양’은 원시적 거룩과 의로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로마카톨릭의 신학에서는, 사람은 타락할 때 그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양’을 상실하였으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이로써 타락한 인간은 거룩과 의로움 등 ‘추가적 은사’들을 본질적으로 상실하였으나 도덕적으로 인간 전체는 부패되지 아니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죄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할 성향의 상태에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두 단어들을 구별하는 것을 거부하고 의로움이 인간의 참된 본성에 본래 있다고 생각했다. Luther는 전적으로 원시적 의로움의 관점에서 형상을 이해하여 아담이 타락하던 때에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Calvin은 하나님의 형상이 주로 마음 곧 영혼과 그것의 능력들에 있는 것으로 보면서도, “사람의 어떤 부분도, 심지어는 신체까지도” 어떤 의미에서는 형상의 영광의 광채로 빛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형상은 자연적 재능들뿐만 아니라 원시적 의로움의 영적 자질들 곧 지식과 의로움과 거룩을 포함하였다. Calvin에 따르면,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체 형상이 영향을 받되, 원시적 의로움만 완전히 상실된 것이다. Calvin의 견해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온바 형상에 대한 신학적해석이다.
오늘날에는 ‘형상’이 형식적으로는 인격의 관점에서(이성, 감정, 그리고 도덕적 책임성) 정의되고,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자의 경우 크게 약화됨으로 말미암아 생각하는 일에 실수가 많고 감정이 침체되기 쉬우며 도덕적 책임에 있어서 오판하는 일이 있게 되는가 하면, 후자의 경우는 (전적으로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심각하게 뒤틀려 버렸다. 하지만, 타락의 결과들이 형상의 두 영역에서 가공할 만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의를 사랑하는 일에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의미로 바울이 그들의 죄 가운데 “죽었다”고 사람들을 묘사한 것은 온당하다할 수 있다. 그럼에도 피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참된 형상”곧 완전한 모양이었다. 허나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된 ‘형상’으로 참된 의와 거룩과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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