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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나교회를 격려하시는 주님
요한계시록2:8-11
개인의 유익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자기와 자신의 가족의 안녕만을 위해서 삽니다. 그래서 자신과 자신들의 가족을 위한다면 역사와 민족 앞에서 비굴한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굴욕의 시대에 자신들만 살겠다고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를 총독부에 팔다시피 했습니다. 교회의 헌금으로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했습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목사들을 회유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빼앗았습니다. 자신들은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와 자신의 가족들을 뛰어넘어 교회와 국가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자들이 일본에 협력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 이들은 만주벌판에서, 백두산에서, 지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인들을 몰아내고자 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어서 그래도 우리나라가 희망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당시에도 이런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유익만 생각하는 사람들과 공동의 유익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8절에서 9절을 보면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주님은 사도요한에게 서머나 교회에게 편지를 쓰라고 했습니다.
I.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8-9절)
Smuvrna/Smyrna는 ‘몰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머나 市는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로마로 가는 통상로였습니다. 서머나는 과학이 발전했던 도시였습니다. 서머나에는 의학학교가 있었습니다. 멋지고 웅장한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2000년 전에 넓은 포장도로로 유명했습니다. 서머나에는 술의 신(酒神) 박카스(Bacchus)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시인 호머(Homer)의 출생지가 바로 서머나였다고 합니다. 서머나는 에베소와 같은 항구도시로서 경쟁하다가 결국에는 에베소를 누르고 아시아 제일의 항구도시였습니다.
서머나는 우상숭배가 극심한 지역이었습니다. 서머나 사람들은 소아시아 도시 중 최고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로마제국은 황제숭배를 위한 신전건축 후보지 12곳을 놓고서 박빙의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서머나 市는 신전건축을 유치했습니다. 소아시아 제1도시라는 호칭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서머나 市는 항상 처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서머나는 에베소, 버가모 등과 항상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그 결과 황제의 흉상이 있는 화폐를 주조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던 극성스런 도시였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을 괴롭히는 유대 배교자들이 서머나에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서머나에 있는 성도들을 무척이나 괴롭혔습니다.
이러므로 서머나 교회는 안 좋은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심한 환난 속에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또한 견딜 수 없는 궁핍 속에 있었습니다. 서머나의 성도들은 로마제국의 시민으로서 황제숭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심한 제재를 받아야 했습니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들이 피해를 본다.’ ‘서머나 사람이라면 황제를 모두 섬겨야 하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냐?’하면서 모든 혜택을 끊어버렸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일자리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서머나의 성도들은 카드에 ‘요주의 인물들’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굶주려야 했습니다. 심한 환난과 압박과 빈곤과 굶주림, 투옥, 화형, 사나운 짐승의 위험이 언제 올지 몰랐습니다. 이러므로 여간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꺼려했습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탈을 쓴 자들이 성도들을 항상 훼방했습니다. 이름만 유대인이지, 실상은 사단의 자식들인 이들은 성도들에게 늘 적개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법정에다 성도들을 열심히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언제 고발당할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듯 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당하며 성도들이 매일 위험 속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환난과 궁핍의 끝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볼 때 안개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주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알고 있다(ei[dw)고 했습니다. 네가 황제숭배를 거부한 것을 안다. 네가 그것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난 것을 안다. 다른 사람들은 진수성찬의 밥을 먹는데, 너희는 매일 끼니를 걱정하고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유대인들의 고소고발도 알고, 로마의 행정관이 너희를 압박하는 것도 알고 있다. 너희가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람들은 서머나 교회를 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작고 가난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성도로서 여러 어려운 일들을 만납니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처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힘든 일들을 견디고 만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는옆에서 누가 알아주기만 해도 힘이 납니다. 따끈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힘을 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 알고 있다.” 우리의 형편을 주님께서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민들이 무엇입니까? 힘들지 않게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처럼만 살게 해주십시요’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다른 사람들처럼만 같게 해주십시오.’가 우리들의 소원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내가 다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주님께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을 아신다면 좀 도와주십시오.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지금 안 도와주고 언제 도우시려 하십니까?’
1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붙잡고’의 “kratw'n/크라톤”은 “kravto"/크라토스/권능”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어떤 것을 지배하는 힘이 ‘붙잡고’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이 붙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들을 붙잡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모든 상황을 정확히 아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켜주시고, 인도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처럼 유명한 사람들만 붙잡으시는 것이 아니라, 작고 낮은 우리들을 꼭 붙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권능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잡고 있는 한 누구도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를 몰라주신다면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아신다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신 주님께 모든 고통과 어려움들을 모두 맡겨버립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모두 주님의 수레에 옮겨 실읍시다.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 우리의 수고의 짐들을 모두 맡겨버립시다. 가정문제도 맡기고, 사업문제도, 맡기며, 자녀들 문제도 모두 주님께 맡기십시다. 한 사람도 주님께 맡기지 않은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 두 번째로 아시는 주님께서
II. 우리에게 두려워말라고 하신 주님(10-11절)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성도들 모두 100%가 편안하고, 교회에 사람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의 꿈이기도 하고, 성도들의 바램이기도 합니다. 에베소교회와 서머나 교회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머나교회에서의 문제는 에베소교회에서는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굶는다, 환난을 당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재정적인 문제가 원활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재정적인 문제가 대두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후 107년에 순교한 ‘이그나티우스’라는 교부가 있습니다. ‘이그나티우스’가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선행과 화목한 사랑을 가진 사랑의 사람, Oneimus 목사아래에서 훌륭한 지도를 받은 에베소 교회는 ‘정말 행복한 교회’(deservedly happy church)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그런 여력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압박에 서머나 교회는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어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성도들이 앞으로도 계속 우리교회에서 지켜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대체적으로 교회가 편안해지면 목회자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합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려고 합니다. 본질이 아닌 것에 신경을 씁니다. 교회가 편안해지고 어려움이 없어지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보다 행사나 하고 사업에 뛰어들려고 합니다. 노인사업, 어린이 사업, 교도소사업 등입니다. 이러한 사업들이 순수하고 복음의 진보를 위한다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의 돈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은 이러한 것들을 경계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부탁하신 것을 발목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했는데, 끝이 항상 돈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정말 신앙상 어려움이 오면 하루아침에 무너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앙생활이 제일 좋은가는 성경을 사랑하는 신앙이 제일 좋은 신앙입니다. 이것을 배제하면 위기의 때에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왜 일본의 침략시대에 교회가 부흥했습니까? 왜 초대교회가 부흥했습니까? 왜 종교개혁시대에 교회가 부흥했습니까? 대적들이 성경을 믿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로부터 일차적으로 빼앗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만 없으면 넘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곧 말씀의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넘어지려고 하다가 곧 일어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줄입니다. 말씀을 믿고 기도하고, 또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말씀으로 위안을 받고 응답을 받으면서 뜨겁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때 이상한 면이 많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에게 즉시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너희들에게 곧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너희 중 몇 사람을 시험하려고 감옥에 넣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너희가 10일간 환난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givnou pisto;"
a[cri qanavtou/기누 피스토스 악슬리 싸나투 ’하셨습니다. 직역하면 ‘네가 죽기까지 믿어라’입니다. 우리말로는 ‘충성’과 ‘믿음’이 뉘앙스가 다릅니다. 그러나 헬라어는 같은 말입니다. 즉 네가 죽기까지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대가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서머나의 행정관들은 로마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황제를 위한 신전도 유치했습니다. 아시아 제일의 관광명소로 만들었습니다. 마치 그와 같이 너희 서머나 교회는 죽기까지 믿으라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환난과 고난을 한정해 놓으셨습니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계속 고난과 환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일 동안’입니다. ‘열흘’이란 정확하게 10일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 이상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열흘이라는 것은 제한된 짧은 기간입니다.환난이 짧은 기간만 있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인내할 용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54:8을 보면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도여러분! 자비로운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오래도록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오랜 날을 환난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역경때문에 조금이라도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고통은 항상 순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나놓고 보면 고난이 가벼운 것을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영원하고 긴 편에 비해서 고난은 순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열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영원한 복에 비하면 아부 짧은 것입니다.
주후 80년에 태어나 165년 경에 순교한 폴리갑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후 사도시대를 연결해주는 교량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시도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달했던 교부입니다. 그는 선생인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보존하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순교행을 떠났을 때 20대였습니다. 그때 서머나의 감독이었습니다. 자신도 언제인가는 반드시 순교할 줄로 믿고 신앙을 항상 바르게 했습니다.
폴리갑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때에 로마군에 체포되었습니다. 로마군은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된다고 본보기를 보이고자 일부러 먼 길로 폴리갑을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형장에서도 온갖 유혹을 다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총독은 황제에게 맹세하시오, 그러면 풀어 주겠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86년간 한 번도 나를 부인한 적이 없는데 당신은 나더러 무어라고 하는거요? 하면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게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 그대로 그는 순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형편을 내가 모두 안다. 너의 고통도 알고, 네가 받는 환난도 알며, 네가 어떤 형편에 처해져 있는지 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를 계속 믿고 충성하기 바란다. 그러면 네가 결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꼭 믿음을 지켜 세상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서머나 교회처럼 환난과 고통이 적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두려운 것은 죄를 지을 확률이 높은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머나에서 활동했던 마귀가 이 시대에 우리를 무차별공격을 감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타락해 가는데도 목숨을 걸고서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은 목숨과 바꾸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빼앗기면 우리들의 모든 것을 뺏기는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께로부터 온 진리, 그 말씀을 지키고 끝까지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음(사도행전11:25-26)
안디옥에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큰 무리가 주께 더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바나바는 다소로 사울을 찾아 나섰습니다. 혼자서는 벅차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만난 바나바는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일 년간 같이 지냈습니다. 그리고 큰 무리를 가르쳤습니다. 이때 안디옥교회 밖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Cristianouv"/Christianoûs)이라는 말은 마치 하는 일들이 그리스도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와 동일시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크리스티아누스(그리스도인들)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들은 제자, 믿는 자, 예수님의 추종자들이라고 불렸는데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는 것은 큰 은혜였습니다. 발전하는 그리스도교의 헬라적 환경에서 크리스토스가 고유명사의 의미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은 큰 의미가 되었습니다. 원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이방인들이 경멸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름을 오하려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칼빈주의(Calvinism)라는 말도 원래 좋게 사용하지 않은 말입니다. Calvin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만든 말입니다. 그러나 후에 이 말은 개혁주의를 말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위그노(Huguenots)라는 盟友(맹우)라는 뜻입니다. 위그노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른 것은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스위스와의 관계를 맹우라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프랑스의 위그노운동은 스위스의 제네바에 위치한 제네바신학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위스를 사보이공국이 제네바시의 자치권을 박탈하려 했습니다. 이에 제네바시에 있는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은 제네바시가 사보이공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열렬히 찬성했습니다. 그래서 위그노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이 말이 후에 프랑스의 개신교들에게도 확대적용했습니다. 아이드게노쎈(Eidgenossen)은 독일어로 역시 盟友(맹우)라는 말입니다. 1291년 스위스사람들이 오스트리아에 대항해서 독립전쟁을 할 때에 자기들을 아이드게노쎈이라고 불렀습니다. 영국의 청교도(Puritans)라는 말도 원래 경멸적인 말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39개조령을 발표했을 때, 카톨릭의 잔재제거, 즉 성직자의 제복착용금지, 오르간 연주, 세례줄 때 성호를 긋는 일, 성찬식때 무릎을 꿇는 것, 종교적 축일 및 휴일을 줄이고, 성화, 성상, 성유물숭배금지, 결혼식 때 반지사용금지, 주일날에는 음주금지, 극장구경금지, 도박금지, 승마금지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바리새인 같은 자들이라고 개신교를 청교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한 결 같이 영국국교회를 개혁코자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예수쟁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교회에 가는 사람들을 볼 때 예수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쟁이라고 불림을 받는 것.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는 것은 여러 가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는 행동이 예수님과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정도 예수님의 말씀과 같아야 하고, 결과도 예수님과 같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많은 욕이 예수님께 갑니다. 그러니까 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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