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에 해당되는 글 3건
- 2020.01.02
- 2018.01.02
- 2017.01.10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디모데전서1:1-2/ 2019.12.29
2019년도 불과 이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작정하기도 전에 시간은 흘러서 연말이 되었습니다. 번쩍하는 소리와 함께 지난 12개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역시 다람쥐쳇바퀴 돌듯이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계속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아마도 지루하고 애매한 mannerism에 빠져서 살아가기가 힘들 것입니다. 국내외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좋은 소식은 하나도 없습니다. 공수처법, 선거법 Fast Track, 대북제재 등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소식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은 소망을 걸 것이 너무나 많은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귀와 입을 막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어야 합니다.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첫 번째로
I.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1a).
Haydn이 작곡한 천지창조(The Creation) oratorio가 있습니다. Haydn은 만년에 oratorio를 3년 걸려서 완성하였습니다. 전 연주시간이 1시간 50분의 대작입니다. 영국의 여류시인 Lidliey(
Thomas Lidliey/1733-1795)가 구약성경의 창세기와 John Milton의 Paradise Lost 실락원 을 바탕으로 쓴 대본에 의한 작품입니다. 전곡은 3부로 나뉘어, 제1부에서는 천지창조의 제1일부터 제4일까지, 창궁(蒼穹)과 물, 산과 강, 해와 달과 별이 될 때까지, 제2부는 제5일과 제6일, 물고기와 새, 곤충과 짐승, 그리고 인간의 탄생까지, 제3부는 낙원에서 노는 아담과 이브의 즐거운 모양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곡의 연주회를 바로 앞두고 불행하게도그만 병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지휘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지창조는 다른 지휘자에 의해서 연주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Haydn은 연주회장 한쪽에서 지켜볼 따름이었습니다. 그 장엄한 연주와 선율에 너무나도 감격한 청중들은 곡이 끝난 후 일제히 기립박수를 했습니다. 이때 지휘자는 모두 앉으십시오. 이 귀한 곡을 작곡하신 분은 바로 Haydn 선생님이십니다. 그 분께서 지금 저기에 앉아 계십니다. 청중들은 Haydn을 향하여 다시 열렬한 갈채를 보내며 존경을 표했습니다. Haydn은 공손하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게 이곡을 작곡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교만한 사람은 99%가 내 노력이라고 말하고 1%만 하나님의 은혜라고 착각합니다. 구원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구원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돌덩이와 나무로 쪼거나 깎거나 부어 만든 것들이 자신을 구원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구원은 세상에서도 사용되는 말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두고 써먹는 말이기도 합니다. 생의 어려움에서 구원받는다하고 고통 속에서 구원받는다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포괄적으로 생의 어려움과 고통에서 구원받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구원이란 말이 이 세상에서는 그 뜻을 제대로 말하지를 못합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참되게 사용되는 곳은 교회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사람들을 전도하여 구원시키기 원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구원을 받는 사람보다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전도라는 어리석게 보이는 방법을 사용하여(고전1:21) 구원의 방편을 주신 하나님은 자신의 자비하신 은혜로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전도의 미련한 것은 십자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어리석게 보이는 전도의 수단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입니다. 통상 전도라고 하면 전도지를 가지고 사람을 찾아가 전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도/khvrugma/kêruigma는 포고, 선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전도는 개인적이든 대중적이든지 말씀의 선포입니다. 길가에서나, 학교, 강의실, 강단 그 어디에서든 그리스도의 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택하지 않습니다. 이 구원만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 대답이 사도행전16:31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어떤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받습니다.
‘구원 받는다’는 말은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 건짐 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생애가 항상 불안하고,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에 늘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죽을 때까지 우리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구원자는 고통 받는 우리들을 구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에 구애 없이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그 구원자가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들을 제거하시고, 자유하게 하십니다.
구약에서의 구원자는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지키시며 인도하셨습니다.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뜨린 것은 다윗이지만, 그를 이기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연합군들을 단 300명으로 이기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야가 비를 오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이지, 다윗이나, 기드온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나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이 하십니다.
사람들은 거의 육신적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에 집착을 합니다. 몇 년 더 살기 위해 병을 고쳤다고 하면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육신 못지않은 영혼입니다. 우리의 큰 원수는 영원한 멸망에 빠지도록 사람들을 위협하는 영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정복하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탄의 나라를 접수하러 2000년 전에 오셨습니다. 그가 오셔서 인간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야 영혼도 구원받고 우리들의 삶도 구원받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은 세 때(시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과거·현재·미래의 구원입니다. 그 첫 번째가 과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한 것으로 간주하십니다(롬8:3-5).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한 거래가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로 거래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우리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과거에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를 구원하고 계십니다. 즉 구원은 우리의 현재적인 삶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구원을 얻습니다(롬5:10).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됩니다. 예수님께 우리가 연합되므로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해방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면서 그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들을 우리가 받습니다. 그를 믿을 때 우리의 삶이 진보됩니다. 그를 믿을 때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우리의 어려움을 알아줍니까? 친척입니까? 형제들입니까? 친구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구하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의 황제 Augustus를 사람들은 평화를 가져온 구원자로 찬양했습니다. 오늘에는 어떻습니까? 트럼프나 시진핑이 통일의 구원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구주 예수님께서 모든 어려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태어남에서 죽음까지 모든 삶들과 그 후의 모든 생애를 구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사람들이 구원을 헷갈리게 만듭니다. 이단들과 거짓 자들이 우리의 구원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리라고 확신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통해서 완전한 구원을 받습니다. 성결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완전케 됩니다. 이런 미래를 로마서 8:18-39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34누가 정죄하리요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
우리가 왜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영원한 사망의 골짜기에 들어가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옥/gevenna/gêenna은 단순하게 땅 감옥이 아닙니다. gêenna는 !NOhiA@b, yGE/ghêben-hinhôm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입니다. 애곡의 골짜기입니다. 이 골짜기에서 아이들이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왕하16:3; 21:6). 이 골짜기는 황소의 형상을 한 우상 Moloch의 팔이 불로 달구어졌을 때 어린아이들을 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던져진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에서 그렇게 불려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가공스런 희생제사가 요시야 왕에 의해 폐지된 이후 이곳을 혐오했습니다(왕하23:10). 이곳을 모든 종류의 쓰레기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은 동물, 처형되었으나 매장되지 아니한 범죄자들의 시체를 불태웠습니다. 그래서 gêenna는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는 곳이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두 번 죽어야 합니다. 육신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죽습니다. 왜 이렇게 죽어야 합니까? 우리와 너무나 친숙한 죄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죽음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육적인 죽음과는 달리 영적인 죽음은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데 곧 지옥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적인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새로운 삶을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거절하면 지옥에 가야 합니다. 원하지 않지만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지옥은 소망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지옥은 계속해서 죽고 또 죽는 곳입니다. 거기는 사랑이 없습니다. 긍휼이 없습니다. 지옥은 하나님과 분리된 곳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곳입니다. 지옥은 회개가 없으며, 울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며, 기도의 효과가 전혀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지옥의 형벌을 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생의 삶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영생까지 구원하심을 잊지 말고 오직 그를 의지하고 예배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한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1절과 2절을 다시 보면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II.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1b).
찬송가 세월이 흘러가는데(485/534장)의 작시자인 넬슨 목사(D. Nelson)는 방대한 농장과 많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연설을 들었습니다. 넬슨은 그 연설에 감명을 받고 자신에게 속한 모든 노예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노예제도 폐지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당시에는 영농기계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노동을 노예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넬슨은 노예제도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폐지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운동에 앞장서다보니까 이웃에 있는 농장주들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넬슨 목사를 죽이려 했습니다. 이 정보를 들은 넬슨은 3일 동안 숲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매다가 미시피강 가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서 넬슨은 “유유히 흐르는 강 건너편은 자유로운 땅이 있다. 그곳에는 굶주림과 고통이 없다”는 시상이 떠올라 찬송이 작시되었습니다. 소망은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디모데는 나이도 어리고, 약간 소심했지만, 하나님과 바울에게 충성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이 소망은 바울의 소망이고, 디모데의 소망이며, 또한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희망을 찾으려 합니다. Platon은 소망을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향한 충동이라고 했습니다. 소망은 현재의 삶을 초월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헬라사람들은 헛된 소망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Zeus가 소망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사람들 역시 헛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Augustus가 소망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종교는 헛된 소망입니다. 숨이 떨어지자마자 영원한 사망의 곳에 가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곳은 option이 없는 곳입니다. “나 안 갈래요” “나 가기 싫어요.”가 아닙니다. 자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의 곳으로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소망과는 다릅니다. 여호와께서 베푸신 일에 대한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헛된 기대가 아닙니다. 두려운 예상을 전혀 나타내지 않습니다. 항상 어떤 좋은 것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인간의 태도여하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이 객관적인 유익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갈5:5, 골1:5, 딛2:13). 우리가 믿고 바라는 소망의 특징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의 내용은 자기중심적이 아니고 항상 그리스도와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그리고 소망의 근거는 선행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신 역사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의 본질은 좋은 소망입니다. 헛되거나 요행으로 오는 소망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물질에 우리의 소망은 없습니다. 물질에 소망을 두었을 때, 나이라는 것이 그 소망을 제거합니다. 이 세상의 지식에도 우리의 소망은 없습니다. 이 역시 나이가 두었던 그 소망을 제거합니다. 이 세상의 종교들에게도 우리의 소망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들은 바벨탑을 쌓은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의 소망은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있다고 하는 세상의 희망은 막연한 바람입니다. “이루어졌으면”하는 것이지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다릅니다. 우리의 소망은 막연한 꿈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마치 눈으로 보는 것 같은 확신에 찬 기대입니다.
엘리야와 바알 제사장들이 갈멜산에서 제물 태우기로 신앙을 가리자고 했습니다. 바알 제사장들은 85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단신이었습니다. 바알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지지와 왕의 후원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나 홀로였습니다. 누가 보아도 game은 끝이었습니다. 엘리야가 100% 패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바알 제사장들이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힘으로라도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먼저 바알제사장들에게 시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850명의 제사장들이 뛰고 난장을 쳤지만 불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한 마디 말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이때 바알의 제사장들에게 ‘불’은 희망사항이었습니다. 막연하고 막연한 기대였습니다. “불이 내려 와야 할 텐데”하는 기대감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이 내려올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불이 내려올 확실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자마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동행하셔서 확실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불을 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잡신들이 불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확실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떠나라 하셨을 때 소망을 붙잡았습니다. 막연한 기대감으로 도박하듯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확실히 신뢰할만한 소망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 우리들의 소망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소망을 가져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시71:14). 시편138:7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께 소망을 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믿는 소망은 헛된 기대감이 아닙니다. 약속한 것에 대한 확실한 기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언급하는 소망은 우리에게 유익한 소망입니다(갈5:5). 이 소망은 우리에게 확실성을 제공하기 위하여 세 가지가 같이 갑니다.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소망이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들에게 확실성을 줍니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사랑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 사랑입니다.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믿음과 사랑이 무익한 것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소망이 무익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확실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에서도, 경제계에서도, 그리고 종교계에서도 우리의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 소망을 우리가 꽉 붙잡읍시다. 우리에게서 소망이 달아나지 않도록 꽉 붙잡읍시다. 우리의 살 길은 예수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소망(사도행전27:14)
13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14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15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16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20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인간의 소망이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소망이란 사람들 개개인이 동화 같은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은 소망일 뿐 실제가 되지 않습니다. 소위 전설 같은 존재, 신화의 인물이라는 말에 속아(?)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발자취를 쫓으려 하지만 어림없는 말입니다. 그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모양도 내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소망처럼 ‘남풍이 순하게 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넘쳐납니다. 즉 ‘득의한 줄 알고’입니다. 그리고 바라던 항구에 순하게 입항(入港)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순항을 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는가 하면, 풍랑이 일기도 하고, 천둥번개가 난무하는 것 같은 날이 너무나 많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고 배가 가는대로 즉 세상의 풍파에 떠밀려 갈수밖에 없는 상황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항구에 다다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삶의 잔이 너무나 써서 인생을 좋게 기술하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회상해보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어릴적에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어떤 직위를 거의 획득한 상태에서 라이벌로 인해서 그 명단에 들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했는데, 그 사람과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이가 어렸을 때 잃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일찍 부모를 여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아직 어린나이에 가장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소망이 없습니다. 순한 남풍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루한 유라굴로가 시작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인간이 준다고 하는 소망은 항상 기대에 어긋납니다. 인간적인 소망은 씁쓸합니다. 인간적인 소망은 인생의 행로가 어둡습니다. 소망이 아니라 절망적입니다. 인생을 바꾸는 15분, 꿈은 이루어진다. 라는 슬로건은 있지만, 그것은 결코 모든 사람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소망은 인간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취될 것 같지 않은 소망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과 세상적인 소망은 같이 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긍정적인 것은 같이 가지 않습니다. 인간이 준다고 하고, 인간이 생각하는 소망은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아예 파멸시켜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는 소망, 성경적이지 않은 소망에 선뜻 발을 내딛지 말아야 합니다. 유라굴로가 언제 엄습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베드로전서1:1-12
종의 집이 복을 받게 하소서 (0) | 2020.01.01 |
---|---|
치료하시는 예수그리스도 (0) | 2019.02.13 |
하나님 찬양 (0) | 2015.12.30 |
시편십육편 (0) | 2015.01.01 |
믿음은 (0) | 2011.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