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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사보나롤라(사도행전21:7-14)
교회의 기능을 사람들에게 말하려고 하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한 두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된 의무는 창조주를 예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진리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권세로 말미암아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성경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교회 자체 내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온 세상에까지 선포해야 할 권세와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셋째로 전도하는 기능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의 진리 증거 기능의 한 측면은 전도와 교회성장입니다 교회를 향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마28:18-20),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전파하며”(눅24:47), “땅 끝까지 이르러” 자신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넷째로 성례시행입니다. 교회는 성례를 시행할 책임이 있고, 교회가 성례를 시행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게 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교회는 봉사해야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성도들을 양육하고 덕을 세우는 고귀한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섯째 기능으로 교회는 질서유지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강의 하나님이시며”(고전14:33), 그분께서는 자신의 교회 내에서 “모든 일들이 질서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심”(고전 14:40)입니다. 일곱 번째로 교회는 구제의 기능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 특히 억압의 결과로 가난하게 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판결이 약자와 고아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의 권리를 유지하며 약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한 자들의 손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셨습니다(시82:3-4). 이런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교회의 기능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John Wycliffe는 영국인이었습니다. John Hus는 보헤미안이었습니다. Jerome Savonarola는 이태리인입니다. Wycliffe와 Hus는 Roman-Catholic의 비정상적인 교훈들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Savonarola는 다른 것을 공격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의 도덕적인 면을 공격했습니다. 부도덕한 습관, 악한생활을 공격한 것입니다. Savonarola는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Savonarola는 1452 년에 Ferrara라는 이태리의 도시출생입니다. 그는 잠시 도미니크파 수도원에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38세 때에 Florence로 갔습니다. Florence는 과학과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암흑과 무지의 도시였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기 시작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군중들, 성직자들, 평신도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부패상에 대한 그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큰 성당 안에 수많은 군중들이 들어차서 죄를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열심을 가지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강퍅한 많은 사람들이 옛 생활을 벗어버리고 회개하였습니다. Florence는 Roman-Catholic의 교훈들이 뿌리박혀 있었지만, 부흥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Savonarola의 영향력은 곧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당시 Florence는 메디치가(the House of Medici)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Savonarola의 강력한 설교의 영향력이 널리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로렌쪼 드 메디치(Lorenzo de Medici)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메디치家는 사보나롤라의 가르침과 윤리에 대하여 동감하지 않았습니다. 로렌쪼는 Savonarola의 설교를 잠재워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Savonarola는 듣지 않았습니다. 로렌쪼가 44세 되었을 때 중병을 앓았습니다. 로렌쪼는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Savonarola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로렌쪼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Savonarola는 그를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어 백성들은 로렌쪼의 아들을 추방하고 사보나롤라를 플로렌스의 통치자로 뽑았습니다. Savonarola는 자기의 개혁활동을 쉽게 수행하리라는 생각에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Savonarola는 3년 동안 플로렌스를 다스렸으며, 善政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엄격한 통치에 반발했습니다. Savonarola는 Florence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범죄의 소굴이 소탕되고 도박이 금지되며 남녀를 불문하고 사치스러운 옷이 금지되고 경건한 생활이 장려되었습니다. 차드, 주사위, 사육제 때에 입는 옷, 음란서적, 음화 등이 소각 처분되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반기를 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Savonarola는 자기가 예언의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이 빗나가자 지지자들마저도 불신하였습니다. 그 결과 Savonarola의 영향력은 줄어들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죄악 된 생활로 유명한 알렉산더 보르기아가 교황이 되어(알렉산더 6세) Florence의 Savonarola를 공격했습니다. 교황은 스페인 사람이었습니다. 역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사악했습니다.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세를 최대한 이용했습니다. 그 자식들의 진로, 결혼 등에 있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가의 문제로 유럽의 정치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목표를 추구해 나가기 위해서는 살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계획이 성취되는 일이라면 독약의 사용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음모와 계략에 도취된 교황은 Savonarola를 뇌물로 매수하려 했습니다. 교황은 Savonarola에게 추기경의 직위를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Savonarola는 “나는 순교자의 면류관 이외에 다른 면류관을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Savonarola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하여 다른 책략을 썼습니다. 수도승들을 설득하여 그를 비방하고 그의 권위를 해치도록 하였습니다. 곧 교황은 그를 파문하여 투옥시켰습니다. 이전에는 Savonarola에게 박수를 보내던 시민들도 이제는 그의 가르침을 철회하도록 고문을 가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이어서 단죄하라고 함께 소리를 높였습니다. 결국 1498년 5월에 사보나롤라는 화형을 당했습니다. Savonarola는 친구 두 사람과 함께 화형대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45세의 나이로 Savonarola는 순교했습니다. Roman-Catholic은 순교자들(당시 세 사람이 화형당함)의 유골을 Arno 강에 던져 버렸습니다.
진리는 항상 자기 디스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억압하고 전하지 못하게 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통해서라도, 어떤 사건을 통해서라도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며, 위협하더라도, 진리와 복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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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요한 후스(사도행전21:7-14)
역사는 항상 정의와 싸워왔습니다. 역사는 정의와의 싸움입니다. 그런데도 정의는 실제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만일에 정의대로 사람들이 산다면 국가와 사회가 이렇게까지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같은 법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10년징역형을 받고 교도소에 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더한 범법을 저지르고도 법무장관을 하며, 대법원장을 하고, 대법관을 하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정의가 죽고, 불의가 살면 역사는 후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지켜야 합니다.
요한 후스(John Hus/1374-1415)는 체코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위클리프는 영국에서 왈도파는 프랑스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Hus는 1401년 사제로 임명되었습니다. 프라하의 찰스 대학에서 가르치고, 찰스대학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설교했습니다. Hus는 저술과 설교에서 삶의 개인적 경건과 순결을 강조했습니다. Hus가 이렇게 한 이유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Hus는 교회내의 권위로서 교황이 아니라 성경을 강조하였습니다. 설교를 교회 예배에서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렸습니다. Hus의 주저 교회론(On the Church)에서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정의하였습니다. 그는 성직자의 전통적 권위를 옹호하였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죄 사함을 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Hus는 어떤 교황이나 추기경도 성경에 어긋나는 교리를 만들 수 없으며, 어떤 그리스도인도 잘못된 자들의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성직자의 부패를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하였고 사람들이 彫像(조상)을 예배하고 거짓된 기적을 믿으며 “미신적 순례 여행”을 하는 것을 비평했습니다. Hus는 성찬식에서 잔을 평신도에게 허락하지 않는 교회를 비판하였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프라그의 대주교는 Hus의 입장을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위클리프의 저서도 그는 배격했습니다. 프라그의 대주교는 이들의 책들을 스스로 모아다가 같이 참석한 사제들이 부르는 Te Deum(하나님이여 당신을 찬양하나이다)의 찬송가가 울려 퍼질 때 자신의 마당에서 책들을 불에 태웠습니다. 미친 개 같은 짓을 한 것입니다.
사실 중세시대의 Roman-Catholic은 교회가 아니고 교회를 빙자한 거대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을 건드리는 것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Hus는 프라하에서 오랜 악전고투 가운데 있었습니다. Roman-Catholic이 Hus를 가만둘 리 없었습니다. 곧 그의 문제는 로마에 회부되었습니다. 1415년에 후스는 그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콘스탄스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에 참석하였습니다. Hus는 황제의 안전 통행증을 가지고 여행하였습니다. 그러나 Hus는 그의 견해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 불법재판을 받고 화형선고를 받았습니다. Hus가 말하려고 하면 사방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Hus의 말이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방적인 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체코인의 민족감정이 일어났습니다. 체코인은 합스부르크(Hapsburg)家가 1620년 정복하여 Roman-Catholic교회를 회복할 때까지 보헤미아에 Hus파 교회를 세웠습니다. Hus의 개혁은 독일의 지배에 대한 체고인의 저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Hus주의자들이 그들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다볼파(Taborites)라고 불리다가 보헤미아 형제단, 모리비안 형제단(the Moravian Brethren)으로 알려졌습니다. Hus는 순교를 당했지만, 그의 사상과 신앙은 오늘의 바른 교회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출처: 기독교회사,중세교회사,교회사핸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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