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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바돌로매(사도행전28:30-31)

 

바돌로매/Barqolomai'o"/Bartholomaȋos는 아람어 바르탈메(탈메의 아들)의 음역입니다. 바돌로매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마10:3, 막3:18, 눅6:14, 행1:13). 바돌로매는 납달리 가문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요한이었으나 주님께서 세베대의 아들인 그의 사랑하는 요한 때문에 바돌로매로 개명했습니다. 바돌로매는 나다나엘(하나님의 선물)과 동일인입니다.

탈메의 아들이란 이름은 예수그리스도 시대에 흔하지 않은 이름입니다. 바돌로매란 자신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그의 아버지를 나타내는 이름입니다(Herbert Lockyer 1982, 94). 웹스터 사전에서 부칭(父稱)은 아버지나 부계조상의 이름과 관련된 접두사(接頭辭)나 접미사(接尾辭)를 부가하여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Johnson은 John의 아들(son)입니다. 바돌로매는 44년에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바돌로매를 보시고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1:48,50)고 하셨습니다. 바돌로매는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속속들이 읽히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 양을 만납니다. 안드레와 요한이 그분을 따르며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빌립을 만나십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빌립과 안드레가 주님과의 사제 간의 높은 단계로 맺어지기 전, 그들에게는 우정의 유대내지는 친척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신실하고 올바른 유대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구세주로서 오신 그분을 기꺼이 맞이한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소개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빌립은 자기가 메시야에 대해서 얘기했던 것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는 나다나엘에게 두려움과 망설임 없이 그가 보고 들을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귀를 기울이면서 듣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우리가 나사렛 예수를 만났다”고 외치면서 나다나엘을 찾아갔을 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요1:46)라고 했습니다. 나사렛은 조그마한 벽지였습니다. 그리고 평판이 별로인 동네였습니다. 나사렛/Nazarevq/Nazarêth은 하부 갈릴리의 마을입니다.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지역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는 3일 길의 거리였습니다. 디베랴에서는 8시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나사렛은 탁월한 인물을 낼 수 없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입니다. 즉 나사렛에서는 큰 인물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업신여기고 무시를 당하는 동네에서 나온 사람이 어떻게 우리의 주의를 끌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작은 동네였습니다. 메시야가 나사렛에서 나셨다는 소식은 우선 나다나엘에게 믿을 수 없는 느낌이 들게 하였습니다.

편견이나 선입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John Fitzgerald Kennedy를 미국의 자존심이라 불렀습니다. 미국인들이 Kennedy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을 큰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어떤 특정한 사람, 특정한 지역이 유명한 것이 아닙니다. 편견입니다. 편견은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과 그의 진리에 대한 천박한 거부입니다. 이러한 거부는 진리에 이르는 길을 막습니다. 동서양의 역사에서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이 편견 때문에 우리나라가 지금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큰 상처를 입었었고, 또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편견은 나쁜 것입니다. 다행히 ‘와보라’는 빌립의 초청에 응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인생을 실패해서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그의 인간됨과 생활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맨 처음 뵈었을 때 그분의 ‘전지하심’에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나다나엘은 자기 주님의 ‘전능하심’에 깊은 경외를 느꼈을 것입니다.

사도들 중에 성경에 많은 활약이 나오지 않은 사도들이 많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바울 등은 성경에 지면을 많이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저희들을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들 보기에 약하고 강한 것입니다. 주님의 보시기에는 강하고 약한 사도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인식하기에 따라서 이 세상은 많은 편견에 사로잡히기 마련입니다. 열두 사도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졌지, 몇 명의 사도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역사에는 숨겨진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드러난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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