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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29
- 2016.04.30
주님을 만난 바울(사도행전22:5-16)
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우리가 흔히 지나가다가 누구를 만났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만났다는 것은 내가 상대방을 눈으로나 다른 감각에 의해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만남은 스치는 만남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만남이 깊은 만남입니다. 그래서 만난다는 것은 상호적입니다. 상대가 나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내가 상대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만남이 이러할진데 잘못된 만남이 있고, 좋은 만남이 있습니다. 나를 파괴하려고 접근하는 사림이 있는가하면 나를 도우려고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만남으로 해서 인생이 파괴되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좋은 만남으로 해서 그 인생이 꽃을 피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2차세계대전의 원흉들, 히틀러, 무쏠리니, 천황이라고 하는 작자들을 만난 사람들은 엄청난 피를 흘린 것들을 볼 수 있고, 가까운 예로서 국가가 잘못된 정치인들을 만나서 힘든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하늘로서 갑자기 세찬 빛이 둘렀습니다. 당연히 사도바울은 엎드러질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일은 이전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사도바울은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시더니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생 들어보지 못한 음성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더니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말씀에 바울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바울은 음성의 주인의 신분을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러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같은 일행들은 빛은 보면서도 말씀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바울에게만 일어난 일입니다.
바울은 이제 주님께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일단 다메섹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네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알려줄 것이라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주님을 만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곧 주님을 핍박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핍박할 때 예수님이 자신을 핍박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핍박하는 사람들로서는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볼때 핍박자들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자신을 핍박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핍박자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전능자를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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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역한 유대인들(사도행전21:27-36)
바울사도는 야고보의 중재에 의해서 유대의 결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결례일이 끝나갈 무렵에 예루살렘성전 뜰에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소아시아 특히 에베소지방에서 소동을 일으켰던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선동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사도가 3년간을 사역하면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적으로 간주해서 살해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좋은 기회를 포착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사람 드로비모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드로비모’Trovfimo"/trôphmos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드로비모는 에베소의 이방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아시아에서 바울과 동행했습니다(행20:4),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에 줄 선물을 가지고 예루살렘까지 동행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인 드로비모가 이스라엘의 뜰(Court of Israel)에 바울과 함께 있을거라고 지레짐작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의 뜰’에 들어가는 것은 사형을 당할만한 범죄였습니다. 하지만 성전의 바깥뜰에는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방인들이 성전의 안뜰에 들어갈 때는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로마당국조차도 유대인의 종교적인 금기사항을 지킬 정도였습니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당시 로마의 총사령관인 디도(Titus)가 예루살렘성전 경비병들에게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고 주지시켰다는 것입니다. 설령 로마시민이라고 할지라도 금지된 지역 안으로 들어갈 때는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에베소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일으키며 그 뜻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성이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실체들이 있습니다. 천사들입니다. 그리고 마귀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반면에 마귀는 사탄의 편에서 사탄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사주를 받는 존재들이 또한 존재합니다. 교회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끌고 간 유대인들이 사탄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명분을 가지고 일합니다. 자신들은 율법에 충실하고 유대인으로서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은 성전을 심히 더럽히는 자들입니다.
사람이 의식화되고 정형화되면 다른 것들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한번 박혀버린 사상이 그래서 무섭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자신의 정형화된 사상에 반하는 사람들은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을 제지할 어떤 근거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정형화로 인해서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복음이 더디어졌습니다. 그러나 더욱 복음전파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을 뻔 했던 불행한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