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74)
교회소개 (1)
교회약도 (1)
후원계좌 (1)
대요리문답1 (2)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4)
소요리문답 (1)
좋은글들모음 (48)
설교자료 (10)
연관 블로그 (2)
성경의 공인 (1)
홍수까지의 연표 (1)
이스라엘 분열사 (1)
10대 박해 (1)
성경숫자의 상징 (1)
-------------------- (0)
창세기새벽강해 (142)
출애굽기 새벽강해 (262)
마태복음 새벽강해 (267)
사도행전 새벽강해 (366)
로마서새벽기도 (216)
빌립보서 (0)
- 에베소교회 (1)
- 서머나교회 (1)
- 버가모교회 (1)
- 두아디라교회 (1)
- 사데교회 (0)
- 빌라델비아교회 (0)
- 라오디게아교회 (1)
성경 개관 (0)
- 에스라, 느헤미야 (1)
- 학개 개관 (1)
- 스가랴 개관 (1)
- 사도행전 (1)
- 고린도전서 (2)
- 고린도후서 (2)
- 빌레몬서 (1)
- 야고보서 (1)
기도 (1)
성경 각 권의 주제 (1)
예배순서 (4)
예화 (2)
찬양 (0)
- 온전히 (1)
- 창세기 (4)
- 출애굽기 (1)
- 레위기 (2)
- 민수기 (1)
- 신명기 (1)
- 여호수아 (1)
- 사사기 (1)
- 룻기 (1)
- 사무엘상 (1)
- 사무엘하 (1)
- 열왕기상 (1)
- 열왕기하 (1)
- 역대상 (1)
- 역대하 (1)
- 에스라 (1)
- 느헤미야 (2)
- 에스더 (1)
- 욥기 (3)
- 시편 (1)
- 잠언 (1)
- 전도서 (1)
- 아가 (1)
- 이사야 (2)
- 예레미야 (1)
- 예레미야애가 (1)
에스겔 (1)
- 다니엘 (1)
- 호세아 (1)
- 요엘 (1)
- 아모스 (1)
- 오바댜 (1)
- 요나 (1)
- 미가 (1)
- 나훔 (1)
- 하박국 (3)
- 스바냐 (1)
- 학개 (2)
- 스가랴 (1)
- 말라기 (1)
- 마태복음 (3)
- 마가복음 (7)
- 누가복음 (1)
- 요한복음 (3)
- 사도행전2 (2)
- 로마서 (1)
고린도전서 (0)
고린도후서 (0)
- 갈라디아서 (1)
에베소서 (0)
빌립보서2 (0)
골로새서 (0)
데살로니가전서 (0)
데살로니가후서 (0)
디모데전서 (1)
디모데후서 (0)
디도서 (0)
빌레몬서 (0)
히브리서 (0)
야고보서 (0)
베드로전서 (0)
베드로후서 (0)
요한일서 (0)
- 요한이서 (1)
- 요한삼서 (1)
- 유다서 (1)
- 요한계시록 (1)
붓글씨 (9)
수채화 (1)
공지사항 (0)
- 게시판 (29)
철학.인문학 (7)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24.08.19
    미미한 이 세상에서의 교회 1
  2. 2024.07.14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스라엘은 나치에게서 무얼배웠나? 1
  3. 2024.07.13
    유대인의 오산
  4. 2024.05.19
    말의 힘
  5. 2024.04.27
    기독교
  6. 2024.01.07
    우리의 기도는
  7. 2023.12.21
    콘스탄틴 황제의 세례에 대하여 1
  8. 2023.11.14
    히브리인의 달력 체계

미미한 이 세상에서의 교회

 

마가복음4:26-30

 

 

속담은 상징성, 관습성, 대중성, 일상성을 바탕으로, 오랜 세월에 거쳐 정착된 표현으로 삶의 지혜를 전달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겨자씨는 지름이 1-1.5mm입니다. 말이 1-1.5mm이지, 거의 가루입니다. 겨자는 팔레스타인 게네사렛 평원에 많이 서식하며, 4m 정도의 크기로 자란다고 합니다.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일년생 풀입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에서 나무라고 부릅니다. 씨가 작아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한 비유가 되기도 합니다. 새들이 그 씨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인데 나중에는 새가 깃들일 만큼 커진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점진적으로 그 영역을 넓혀가는 하나님 나라를 비유한 말씀입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우리가 성경을 보고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대제사장은 안나스의 사위인 가야바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티베리우스였습니다. 그의 유대 총독은 빌라도였고, 유대의 왕은 헤롯 안티파스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아마도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한 젊은이로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불치의 병을 고쳐준, 감사하지만, 불쌍한 한 젊은 사람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에서 가장 치욕적인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로 명성 없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Galilee사람 하면 종교 우월주의자들의 시각에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비교되는 낙후되고 소외된 자들’, ‘천하고 무식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지나친 선민의식에 젖어있던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이 유대적인 요소와 이방적인 요소가 혼재된 곳이자 방언이 특이한 지역이라 하여 배타시했습니다. 또 멸시하며 매우 천대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 대부분이 Galilee 출신이었습니다.

 

잠재력(potentiality)이라는 것은 개인이나 조직이 가지고 있는 숨겨진 능력입니다. 그것을 사무엘상16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사울 왕을 버리시기로 작정하시고 새 왕의 선택을 사무엘에게 맡깁니다. 사무엘이 비밀리에 이새의 집에 가서 하나님께서 너의 아들들 중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이새는 여덟 아들 중 일곱 아들을 때 빼고 광내서 사무엘 앞에 서게 했습니다. 오늘날도 모든 사람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무엘은 기름을 들고 장남 엘리압을 보니까 정말 왕의 재목감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름을 부으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도 아니고 셋째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새가 제쳐놓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10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1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2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13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이후로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엄청난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잠재력과 인간의 잠재력은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1mm의 씨앗이 4m까지 자라는 잠재력,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그러므로 4m가 아니라 40m, 400m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잠재력은 엄청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출현은, 땅에 뿌려진 겨자씨에 일어나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겨자씨가 밭에 뿌려지는 씨앗 중에서는 가장 작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 작은 크기가 격언이 되었습니다. 725-760개의 겨자씨가 1g이었습니다. 겨자는 씨에서 자라서 몇 주 안에 4-5m 크기에 도달하는, 팔레스틴 지역에 있는 모든 정원수 중 가장 큰 나무가 되는 일년생 식물이었습니다. 겨자씨와 커다란 가지의 그늘 때문에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가장 큰 나무로 자라는 가장 작은 씨 사이의 대조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현존에서 구체화 된, 미미하고도 심지어 수수께끼 같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지상의 모든 왕국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재림 때 완성될 최종 결과의 위대함과 대조한 것입니다. 새들에 대한 것은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숫자의 단위로 마이크로/micro를 쓰는데 μ작다라는 mikrov"/mikrôs에서 왔습니다. 100만분의 1을 의미합니다. 예로 1000μkg1g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처럼 임한 것을 모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안에 있는 잠재력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온 세상을 다 덮고도 남을 큰 나무임을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완성된 최종적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온다면 사람들은 쉽게 이를 맞이할 것입니다. 아마도 서로 먼저 갈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겨자씨와 같이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오니 쉽게 놓치고 맙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큰 사람들과 권위자들은 겨자씨의 모습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습게 보았습니다. 작은 것 속에서 온 세상을 덮는 하나님 나라를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설교 핵심 주제였습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 나라를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3:1). 유대인들은 그들의 적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개입을 기대했습니다. 약속된 Messiah가 하나님 나라로의 길을 열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현재는 우리가 타국의 속박을 받고 있지만, 강력한 하나님의 왕권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이 오래도록 대망했던 시기가 도래했음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 같아서 유대인들은 긴가민가했습니다.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그 자신의 인격과 사역 가운데 도래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어 사단의 권세가 깨뜨려진 사건 속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 용서는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일환이었습니다. 영원히 죽어야 할 죄를 아무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충분히 용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누가복음7: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누가복음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사도행전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래가 아니고 현재 제공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Messiah성은 세례와 변화산에서 변형하심으로써 현재적 실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충만한 권세를 받았습니다.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지켜온 율법을 완성시키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기 생명을 주러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비결은 곧 예수님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아직은 잠정적으로만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잠정적이지만, 예수님의 이적은, 악의 권세가 영원한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을 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비유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는 비밀스럽게 자라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부분적인 좌절도 있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 즉 자신의 겸허한 순종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현세적인 질서가 끝날 때 이 세상 왕국들에 대한 권세를 행사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겨자씨 같은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모든 구원 행위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여 그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총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왕의 명령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가시화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영역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이 미치는 곳에서는 개인의 삶이 변화될 뿐 아니라, 한때 자연 종교의 지배를 받던 공동체가 기독교의 영향을 입었을 때 보여진 것처럼 전체적인 삶의 양식이 변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보여 주는 하나님 나라는, 그 축복과 구원으로 세계사에 침입하는 것과는 달리 가시적입니다. 모든 것을 정복하는 평화와 구원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재림 시의 최종적이며 우주적인 고비를 통해서뿐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 된 곳입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의 특권과 위치를 이어가는 곳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 특권을 박탈당했습니다.

 

5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11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특권을 박탈하시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교회를 선택하셨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지만, 이스라엘과 같은 민족성이 구심점이 된 집단은 아닙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마태는 Messiah의 거룩한 족보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Messiah 사상을 다윗에게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더 멀리 올라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하였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생애가 이스라엘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복임을 암시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고 아브라함의 선택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복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상입니다. 쐐기를 박은 것은 족보에 수록된 네 여인입니다. ,모압 다말가나안, 라합가나안, 우리야의 아내가나안가 이방여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했습니다(3:29).

 

세상 사람들이 미미하게 생각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의미의 교회는 제도적 실체가 아니라 초자연적 실체입니다. 완성과 내세를 향해 성장. 발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머리 되신 자격으로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시는 기관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영적 은사를 활용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속 발전시키는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가 수행하는 모든 사역의 주권자이십니다. 예배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 백성과 만나시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대인 대사회적인 봉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정신을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사역은 우선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주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3대 사역은

 

khvrugma/kêruigma 케리그마 말씀 선포, 예배, 전도, 교육

diakoniva/diakonîa 디아코니아 봉사, 구제와 건덕, 사회개발

koinwniva/koinonîa 코이노니아 교제, 성도간의 화목과 친교, 공동체 의식

 

성도는 사회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교회는 수양하려고, 산속에 들어가 은둔하는 곳이 아닙니다. 성도는 지금 당장은 세상에 매여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거듭난 천국의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는 미래 시점의 천국과 현재 시점의 세상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아예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립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천국의 도래를 생각지 않고, 지상낙원을 세울 수 있는 양 세상 것에만 탐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 다 모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 완전히 임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법적으로는 거듭났습니다. 천국 시민권을 단번에 완전히 획득하였으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전히 임할 때까지 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 자신의 전인격을 점점 더 거룩하게 점진시켜 나가는 성화과정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천국을 도래시키지 않고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과 또 성화를 요구하시는 명령에 따라 세상에 살아가면서 사회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개인 신앙생활의 실천의 장으로서 자신의 신앙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상의 구현을 통하여 선교적 소명을 다해야 합니다. 구속사적 소명을 다함으로써 천국의 도래를 앞당기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사회 참여를 해야 합니까? 겨자씨 같은 잠재력 때문입니다.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였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오로지 사회를 통해서만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고 또 구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개인의 의지와 변화는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사회의 체계와 문화는 각 개인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영원합니다. 성도는 수동적 의미에서라도 이미 사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체제의 구속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 사회는 여러 면에서 부패한 나머지 우리의 양심을 극도로 압박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신앙생활의 장소가 바로 사회입니다. 나아가 구속사의 전개에 따라 각 개인이 맡아야 할 소명인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위해서라도 성도는 사회에 능동적 의미에서 참여하여 사회의 변화 개혁을 주도하여야 합니다. 현대는 극도로 조직화되고 광역화되었지만 산업사회의 부산물로 비인간화된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입각한 기독교문화의 창출을 해야 합니다. 사회에 공헌하며 복음화해야 한다는 사회선교적 사명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에 참여하는 것은 기독교가 세상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함입니다. 사회참여는 사회의 불의와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고쳐나가는 개혁적인 측면과 더불어 하나님의 공의와 선포를 통해 더 이상의 사회적인 오염을 방지하는 보수적(保守的)인 측면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Closing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지 40년도 못 되어서 복음은 로마세계의 모든 위대한 문화적 중심지들과 많은 외딴곳에까지 퍼졌습니다. 그때 이래로 복음은 계속 퍼져 모든 종족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고 생활의 전 영역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오늘날도 이를 행하고 있습니다. 겨자씨 같은 작은 시작에서 커다란 결과가 전개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잠재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과정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섭리에 좌우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비천하게 시작되었다고 실족하여 뒤로 물러가지 않도록 우리들을 격려하십니다. 겨자씨 같은 우리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크신 일을 이루십니다.

And

http://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061421240241143

 

"이건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다"…이스라엘은 나치 독일에 무엇을 배웠나

지중해에 맞닿은 중동 팔레스타인 가자(Gaza)는 비전투원들을 마구 죽이는 전쟁범죄가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는 곳이다. 이스라엘 군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

www.pressian.com

 

'설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대인의 오산  (0) 2024.07.13
콘스탄틴 황제의 세례에 대하여  (1) 2023.12.21
히브리인의 달력 체계  (0) 2023.11.14
레위기를 위한 책  (0) 2023.08.22
회당  (1) 2023.01.07
And

http://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071212043318726

 

"유대인이 기독교도를 때려?" 나치 학살로 이어진 러시아 포그롬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離散)를 겪은 불운한 민족이라 말한다. 로마제국에 맞서 3차에 걸친 반란(서기 66년, 115년, ...

www.pressian.com

 

'설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스라엘은 나치에게서 무얼배웠나?  (1) 2024.07.14
콘스탄틴 황제의 세례에 대하여  (1) 2023.12.21
히브리인의 달력 체계  (0) 2023.11.14
레위기를 위한 책  (0) 2023.08.22
회당  (1) 2023.01.07
And

총에 맞은 상처는 치료할 수 있어도 말에 입은 상처는 고칠 수 없다.

                               페르시아 격언

'좋은글들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0) 2024.04.27
우리의 기도는  (0) 2024.01.07
구원에 관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0) 2023.09.17
하나님의 표상이신 그리스도  (0) 2023.04.02
신화  (0) 2023.03.18
And

기독교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섭을 이룬다.

 

세종시 베어트리 파크

정원에 피어있는 클레마티스

'좋은글들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의 힘  (0) 2024.05.19
우리의 기도는  (0) 2024.01.07
구원에 관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0) 2023.09.17
하나님의 표상이신 그리스도  (0) 2023.04.02
신화  (0) 2023.03.18
And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가 얼마나 우아하고, 얼마나 균형이 잡혔으며, 얼마나 내용이 다양해야 하는지를 조금도 헤아리지 않으신다. 또 당신의 기도가 얼마나 감미로운 목소리로 진행되고, 얼마나 논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지도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가 얼마나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를 주목하신다.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공인되며 허용되고 기록되고 또 보상을 받는 기도란 없다. 다만 진실하고 온전한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가 있을 뿐이다. 진정한 어머니는 두 마음을 가진 자식을 낳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애통하는 심령을 사랑하신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분리된 마음을 혐오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머뭇머뭇하거나 둘로 나뉜 마음을 사랑하지 않으신다.

                                                                          Thomas Brooks

 

'좋은글들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의 힘  (0) 2024.05.19
기독교  (0) 2024.04.27
구원에 관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0) 2023.09.17
하나님의 표상이신 그리스도  (0) 2023.04.02
신화  (0) 2023.03.18
And

우리는 콘스탄틴 황제가 왜 죽을 때 세례를 받았는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구원을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하는 추측으로 죽을 때에야 세례를 받은 것을 두고 콘스탄틴황제를 많이 비판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궁금증은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으면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도 세례를 연기했기 때문입니다. 고백록 제1권 유아기와 소년기 제11장을 보면 세례의 연기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11장_ 세례를 연기함

(17) 내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영생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 영생이란 교만한 우리들에게 친히 내려오신 우리 주 하나님의 겸손을 통해서 약속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당신을 굳게 믿고 있었던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태어난 후 바로 십자가의 표시로 인 침을 받았고, 당신의 소금으로 간이 배어 있었습니다.

오, 주님, 내가 어렸을 때에 갑자기 배가 몹시 아파서 죽게 되었던 일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그때도 당신은 나를 지키시는 자였으니 내 어머니와 우리 모두의 어머니 되신 당신 교회의 경건에 감화되어 내가 얼마나 열렬한 믿음으로 내 주 하나님이신 당신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려고 열망했는지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내 육신의 어머니는 대단히 당황하며 당신을 믿는 경건의 마음으로 나의 영생을 낳아 주기 위해 또 산고를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여, 그리하여 내가 당신께 참회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의 성례로 깨끗이 씻겨지고, 구원받은 자들의 무리에 들도록 어머니는 열심히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병은 즉시 나았습니다. 이리하여 나의 죄 씻음은 늦어졌으니 그 이유는 내가 만일 더 오래 살면 더 더럽혀질 것이 불가피한 것이었고 또한 세례를 받은 후에 지은 죄는 더 크고 위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脚註/각주 고대교회는 세례를 받은 이후의 죄를 대단히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강경파는 세례 이후의 지은 죄는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고 믿었고, 온건파는 세례를 받은 후에 지은 죄는 두 번까지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믿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교인들은 세례를 의도적으로 죽을 때까지 연기하기도 했다. 그 예로서 기독교 황제였던 콘스탄틴은 337년 임종시에 유세비우스 감독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그때 나는 이미 믿는 자였고 아버지를 제외한 온 집안과 어머니가 다 믿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직 믿지 않았어도 내 안에 있는 어머니의 경건의 영향을 넘어뜨리거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신앙을 방해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어머니는 온 노력을 기울여 내가 그보다 당신을 나의 아버지로 삼을 것을 원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 당신은 어머니로 하여금 그녀의 남편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영적으로는 아버지보다 탁월하셨으나 계속 그에게 잘 순종하였습니다. 이렇게 순종하는 것이 실은 어머니가 당신께 순종하는 것이었으니 이것을 명하신 분이 당신이었기 때문입니다.

(18) 오, 나의 하나님, 내가 당신께 묻사오니 그때 내 세례가 무슨 목적으로 연기되었는지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때 고삐가 늦추어져 죄를 더 짓게 한 것이 참으로 나에게 좋은 것이 되었 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늦춰지지 않았어야만 했습니까? 그렇다면 왜 지금도 사방에서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그를 내버려두어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어라. 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다’ 라고 합니까? 그러나 육체의 건강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를 내버려두어라. 더 상처를 받게 내버려두어라. 그는 아직 치료되지 않았으니 말이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그때 만일 단번에 치료가 되고 계속 나와 내 친구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당신의 보호하에 안전하게 인도되어 왔다면 얼마나 더 좋았겠습니까? 진실로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에게 훨씬 더 좋을뻔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고 큰 유혹의 (바다의 파도가 유년기 후에 나에게 닥쳐왔습니까? 이것을 미리 본 어머니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이루어져야 할 무형의 진흙 덩어리와 같은 나를 그 파도에 맡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설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스라엘은 나치에게서 무얼배웠나?  (1) 2024.07.14
유대인의 오산  (0) 2024.07.13
히브리인의 달력 체계  (0) 2023.11.14
레위기를 위한 책  (0) 2023.08.22
회당  (1) 2023.01.07
And

 

 

'설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대인의 오산  (0) 2024.07.13
콘스탄틴 황제의 세례에 대하여  (1) 2023.12.21
레위기를 위한 책  (0) 2023.08.22
회당  (1) 2023.01.07
에릭 리델 선교사  (0) 2022.12.17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