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74)
교회소개 (1)
교회약도 (1)
후원계좌 (1)
대요리문답1 (2)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4)
소요리문답 (1)
좋은글들모음 (48)
설교자료 (10)
연관 블로그 (2)
성경의 공인 (1)
홍수까지의 연표 (1)
이스라엘 분열사 (1)
10대 박해 (1)
성경숫자의 상징 (1)
-------------------- (0)
창세기새벽강해 (142)
출애굽기 새벽강해 (262)
마태복음 새벽강해 (267)
사도행전 새벽강해 (366)
로마서새벽기도 (216)
빌립보서 (0)
- 에베소교회 (1)
- 서머나교회 (1)
- 버가모교회 (1)
- 두아디라교회 (1)
- 사데교회 (0)
- 빌라델비아교회 (0)
- 라오디게아교회 (1)
성경 개관 (0)
- 에스라, 느헤미야 (1)
- 학개 개관 (1)
- 스가랴 개관 (1)
- 사도행전 (1)
- 고린도전서 (2)
- 고린도후서 (2)
- 빌레몬서 (1)
- 야고보서 (1)
기도 (1)
성경 각 권의 주제 (1)
예배순서 (4)
예화 (2)
찬양 (0)
- 온전히 (1)
- 창세기 (4)
- 출애굽기 (1)
- 레위기 (2)
- 민수기 (1)
- 신명기 (1)
- 여호수아 (1)
- 사사기 (1)
- 룻기 (1)
- 사무엘상 (1)
- 사무엘하 (1)
- 열왕기상 (1)
- 열왕기하 (1)
- 역대상 (1)
- 역대하 (1)
- 에스라 (1)
- 느헤미야 (2)
- 에스더 (1)
- 욥기 (3)
- 시편 (1)
- 잠언 (1)
- 전도서 (1)
- 아가 (1)
- 이사야 (2)
- 예레미야 (1)
- 예레미야애가 (1)
에스겔 (1)
- 다니엘 (1)
- 호세아 (1)
- 요엘 (1)
- 아모스 (1)
- 오바댜 (1)
- 요나 (1)
- 미가 (1)
- 나훔 (1)
- 하박국 (3)
- 스바냐 (1)
- 학개 (2)
- 스가랴 (1)
- 말라기 (1)
- 마태복음 (3)
- 마가복음 (7)
- 누가복음 (1)
- 요한복음 (3)
- 사도행전2 (2)
- 로마서 (1)
고린도전서 (0)
고린도후서 (0)
- 갈라디아서 (1)
에베소서 (0)
빌립보서2 (0)
골로새서 (0)
데살로니가전서 (0)
데살로니가후서 (0)
디모데전서 (1)
디모데후서 (0)
디도서 (0)
빌레몬서 (0)
히브리서 (0)
야고보서 (0)
베드로전서 (0)
베드로후서 (0)
요한일서 (0)
- 요한이서 (1)
- 요한삼서 (1)
- 유다서 (1)
- 요한계시록 (1)
붓글씨 (9)
수채화 (1)
공지사항 (0)
- 게시판 (29)
철학.인문학 (7)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23.01.21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았던 마태 3
  2. 2023.01.14
    신플라톤주의 1
  3. 2023.01.07
    회당 1
  4. 2022.12.25
    학문과 교양
  5. 2022.12.24
    악한 전쟁
  6. 2022.12.18
    필요한 지식
  7. 2022.12.17
    에릭 리델 선교사
  8. 2022.12.11
    믿음이란 무엇일까? 1

마태복음2:13-14 

 

 

회당 sunagwghv/sunagwgê은 주전 6세기경에 생겼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에 포로 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모세오경을 연구하고 토의하기 위하여 지역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원래 회당은 제사의 장소가 아닙니다. 기도와 교육의 장소로서 생겼습니다. 회당은 신약 시대 유대인의 집회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다른 기관보다 유대인의 신앙의 특성을 보여 주는 이곳에서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만났으며 율법을 배웠습니다.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회당은 공동체 생활의 중심역할을 했습니다. 복음서는 회당을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곳(4:16)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사도들은 회당을 복음 전도의 출발점(13:5,14)으로 활용했습니다. 회당은 그 회원들을 훈육하고 징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장로들이 다스렸습니다. 회당장(5:22)은 예배를 감독했습니다. 시중드는 사람들은 두루마리를 나르고(4:20) 율법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들에게 징계를 내렸습니다. 통역자는 구약 말씀을 고유 언어인 아람어로 풀어 읽었습니다. 적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습니다(4:16; 13:15).

그러나 예수님 당시 회당의 문은 예수님께 잘 열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회당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유대 정통주의를 수호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의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호숫가에서 가르쳤습니다. 야외가 교회였습니다. 푸른 하늘이 천정이었고, 산기슭과 어선들이 강단이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장소에서 추방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를 걸으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랍비가 가르치는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유대의 랍비들이 이곳저곳으로 길을 걸어갈 때 또는 야외에서 산책할 때 그의 제자들이 몰려와 함께 걸으면서 랍비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랍비들이 하는 것처럼 가르치셨습니다.

 

갈릴리는 고대 교통로의 중심지였습니다. “유다는 어디든지 통해 있지 않으나 갈릴리에서는 어디든 통한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육로입니다. 모든 육상 교통은 그곳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해상의 대도로는 다메섹에서 갈릴리를 경유하는 가버나움을 통과해 갈멜로 내려가 샤론의 평원을 따라 가사를 지나 애굽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세계 최대 도로 중 하나였습니다. 또 하나의 도로는 해안의 아크레에서 요단강을 건너 아라비아 제국의 경계에 이르는 군대와 대상들이 통과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유다는 로마의 행정관 관할 하에 있는 로마의 속주였습니다. 갈릴리는 혜롯대왕의 아들 중 하나인 헤롯 안디바에 의하여 지배되었습니다. 고라니티스를 포함한 동방의 영토 테라코니티스와 바타내어는 헤롯의 또 하나의 아들 빌 립에 의하여 지배되었습니다. 헤롯빌립의 영토에서 헤롯 안디바의 영토로 오는 길에 여행자가 들리는 최초의 거리가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국경도시였으므로 세관의 중심지 였습니다. 당시에는 수출입세가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은 이런 세금을 징수하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레위 마태가 일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삭개오처럼 로마를 위해 열심히 충성하지는 않았습니다. 마태는 헤롯 안디바를 위해 일했으나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는 세리였습니다. 마태는 왜 미움을 받았습니까? 고대 사회에서 세리들은 매우 미움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금을 얼마나 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세리들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남는 것은 그들의 배를 채웠습니다.

 

이런 일은 법률적 명령이 내려진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공관복음의 세 복음서 모두에 레위 마태가 제자로서 부름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소명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 있어서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세리는 유대인들 사이에 도적이나 창기처럼 가장 나쁘게 평가되었습니다. 세리는 압제자 로마 정부와 그 속국인 헤롯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은 당시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초과 징수, 뇌물, 강제 징수 등 온갖 협잡과 부정으로 백성의 돈을 착취했었습니다. 때로 레위 같은 세리들은 일정한 지역에 대한 조세 단독권을 얻어 각종 세금으로 폭리를 취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이방인과 죄인과 같이 취급하여 교제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회당 출입을 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당시 마음속에 아픔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군중의 외곽에서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마음속에서 충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마태는 자신의 직업을 미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당시 정통적인 선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마태는 매우 더러운 인간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그와 같이 일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를 따라 걷고 있을 때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마태는 즉시 일어나 좇았습니다. 사도들 가운데 마태가 가장 많은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마태는 문자 그대로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다시 어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한 번의 행동으로, 순간적인 결심으로 그는 직업을 영원히 버렸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버린 후에는 다시 그 직업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위대한 결심에는 위대한 인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언젠가는 결정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어느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트무어(Dartmoor)로 가는 긴 시골길을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쉽게 건너기에는 폭이 넓은 개천에 다다랐을 때 그가 언제나 처음 한 일은 건너편으로 저고리를 벗어던지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한 일은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건너갈 결심을 했고, 견디어 내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Matqai'o"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레위는 히브리식입니다. 마태는 헬라식이름입니다.

 

미운 물건이었던 마태

유대인들은 딴 나라 사람들이 굶어 죽는 곳에서도 돈을 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돈에 대한 욕심의 DNA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고질적인 죄악으로 지니고 있었던 마태가 얼마나 비열한 방법으로 재산을 긁어모았겠습니까? 오죽하면 유대인의 회당과 그들의 사회에서 쫓겨나는 가장 엄한 출교를 당했겠습니까? 레위는 제사장이 아닌 세리가 되었습니다. 세리란 오늘 우리로 말하면 친일파요 왜놈의 앞잡이입니다. 가이사의 세금 징수원은 보통 로마인 귀족으로서 로마제국의 각 식민지에 파견되어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독립군에게 있어서 가장 비열한 자들은 왜놈들의 앞잡이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밀정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 추악한 직업에 종사한 사람들은 모두 가이사가 정한 것보다 더 많이 착취하여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다른 이름은 흡혈귀였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자기가 가난한 자의 것을 조금이라도 토색한 일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19:8)고 그리스도께 고백하였었는데, 이것으로써 그는 자신이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음을 암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동족 중 누가 로마 세리의 직책을 맡게 되면 그는 하나님께 불충한 사람이요, 고귀한 유대인 사회를 배반한 사람이라고 여겨 마땅히 죄인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마태는 동료 유대인들의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과중한 세금을 이방에 대한 예속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중한 세금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희망을 꺾어버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으로서 세리가 된 사람은 누구든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사람이요, 그들의 민족적 신앙을 버린 자,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배신한 자로 취급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싫어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찾아 그 직책을 맡겼습니다. 그러므로 세리들 자신, 곧 삭개오 같은 고급 세리나 마태 같은 하급 세리를 막론하고 매우 부정직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로마의 세리보다 더 혐오 받은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세리를 가장 비천한 사람들과 한 부류로 여겼다고 해서 조금도 놀라울 일이 아닙니다. “세리의 집안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그들 모두가 세리요, 도적이요, 강도요, 사악한 죄인들이니라.”라는 속담까지 있었습니다.

더러운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마태가 잃은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가족을 팔았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정통 유대인 친구들 그리고 친지들과의 사귐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조국을 팔았습니다. 동족들이 로마의 학정과 압제 밑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그는 로마를 섬기는 직업을 택하여, 천박한 욕심으로써 애국심의 불길을 꺼버렸습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양심을 팔았습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신앙도 팔아먹었습니다. 그의 본명인 레위는 그가 제사장들의 계열의 선조인 야곱의 아들 레위에까지 이르는 경건한 조상들의 후예였습니다. Emerson돈의 가장 사악한 점은 그것을 얻는데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돈 때문에 마태는 동족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또한 모든 종교적인 저주의 말을 뒤집어쓴 채 회당에서 출교당해야 했습니다.

 

Victor Marie Hugo의 레미제라블에는 엉뚱한 사람이 범인의 누명을 쓰고 노예선으로 보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내면과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는 Jean Valjean입니다. 그는 자신이 바로 범인이요, 혐의를 받는 사람은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럴듯한 논리로써 자신의 양심을 호도하고, 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을 구하려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자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질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비록 사람들이 그의 가면만을 본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의 참모습을 보고 있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웃들은 그의 겉으로 사는 모습만을 볼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의 양심을 꿰뚫어 볼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4월이 되면 연인들이 라일락 꽃을 따기 위해 찾아가는 파리 근교의 조그만 숲을 기억합니다. 그는 라일락이라는 이름의 도시를 찾아갑니다. 거리에는 적막이 흐릅니다. 사람들이 말없이 벽에 기대어 서 있습니다. 모든 나무와 문의 뒤, 그리고 길모퉁이에도 사람들이 말없이 서 있습니다. 음침한 땅, 납빛의 하늘! 그는 무거운 회초리를 들고 그 적막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징벌하기 위해 말을 타고 들어오는 벌거벗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Jean Valjean은 공포에 질려 그 도시를 도망치지만, 이번에는 군중들이 침묵에서 벗어나 소리를 지르며 그를 쫓아옵니다. “너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인 것을 모르느냐?” 군중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기의 양심을 속였던 Jean Valjean은 자칫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뻔하였습니다. 이것이 Victor Marie Hugo가 말하고자 한 양심의 소리입니다.

 

마태는 명예를 팔아먹어 버리고 양심은 거의 목졸려 있었기 때문에 마태는 오랫동안 죽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Dr. W. Graham Scroggie는 마태가 의 의미로 데나리온대신 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점, 그리고 세겔의 이적을 기록하고 있는 장면에서 그의 前職을 추적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17:22~27, 22:19과 막12:15).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돈 이야기가 많이 나오며 희귀한 동전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렙돈’, ‘고드란트’, ‘데나리온등 가치 없는 동전의 이름만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렙돈고드란트그리고 므나가 나옵니다. 하지만 돈을 만지는 직업에 종사했던 마태는 당대의 가장 가치있는 동전들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달란트같은 것인데, 이것은 므나에 비해 약 60배의 가치를 가진 동전이었습니다. 마가가 , 누가는 이라고 한 것을 마태는 금이나 은이나 동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세금을 징수할 때 이런 돈을 많이 만져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회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그들이 있었던 곳에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걷고 계실 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나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다소의 사울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 대낮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의 반역적인 행위는 즉시 중지되었습니다.

마태는 다메섹으로부터의 대서(大西) 간선 도로(The Great West Trunk Rood from Damascus), 지중해의 동쪽 맨 끝에 위치한 가버나움의 세관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마태는 당시 일어나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사건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습니다. 그런데 얘기로만 듣던 갈릴리의 그 이상한 사람이 돌연 그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에게 다가와 일어나 나를 좇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는 새 스승께서 자신의 유명한 산상수훈을 설교하고 계실 때, 마태는 아마 거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 경청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마태를 세관에서 만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얼굴에서 그의 속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 마태가 즉시로 응답할 것임을 아셨다는 점입니다. 짧은 권면, 당당한 명령에 마태는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마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직업과 동료들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오랫동안 생각만 했던 자유와 평강의 땅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마태는 그의 억눌렸던 본성이 즉시로 속박에서 풀려나고,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죄악이 사라졌습니다. 그의 머리는 기쁨으로 기름 부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믿고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부르심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구원얻는 믿음의 부르심과 구원받은 사람의 mission미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마태는 겸손함의 깊이를 체험한 후 가장 고귀한 특권을 지닌 지위에까지 높여졌습니다. 전에는 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자신을 팔았었지만 이제 그는 가이사보다 더 위대한 왕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렸습니다. 마태는 주님이 주시는 영적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돈이 잘 벌리는 직장을 팽개치고 물질문제의 해결에 대한 가망이나 약속도 없는데 예수를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마태로서는 얼마나 힘든 시험이었겠습니가?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지만, 마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많은 재산을 포기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신의 직장이라고 하면 연봉이 2-3억정도가 넘습니다. 요새 같으면 연봉이 1억원이라도 신의 직장입니다. 마태 정도 되면 신의 직장이었습니다. 그런데 180도 달라졌습니다. 신의 직장을 포기한 것입니다. 마태는 신속한 판단력과 강력한 의지, 명확한 견해로써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나섰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지체 없이 따라나섬으로써 그는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주님에 의해 책상에서 일어나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Richard Glover는 그의 마태복음주석서에서 주님의 부르심과 세리 마태에 대한 응답에 관련된 몇 가지의 기이한 일을 말했습니다. 부르심의 엄숙함. 그것은 미지의 위험한 미래를 위해 재산과 직업과 옛 습성을 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부르심의 은혜 사람들은 세리의 친구가 되려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죄인의 구주요, 친구가 되셨습니다. 부르심의 약속.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마태는 혼자였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구원과 사귐과 인도와 보호의 약속이었습니다. 변화에 대한 여명. 마태는 어제는 죄인들과 한 무리였지만 오늘은 사도요, 내일은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부르심의 영광.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가 어떻게 한 죄인에게 그의 동역자요 사도가 되는 영광을 주셨는지를 증거 합니다. 부르심의 본질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의 핵심이 되는 것은 신조가 아닌 한 인격(a person)에의 복종입니다. 주님의 명령 안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 고백, 그리고 그와의 사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일어나 예수를 좇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5:28). 그런데 마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볼 때 그는 자기의 그같은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9:9).

 

누가복음5: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마태복음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태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사실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부르시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마태의 결단의 용기와 열심. 용감한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순종의 지혜란 이러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과 평강과 영광을 가져 왔습니다. 마태는 후에 전 인류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복을 안겨 준 복음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만약 마태가 한 부자 관원처럼 예수님께로부터 등을 돌려 버렸었다면, 교회는 그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 것인가! 하지만 그는 순종했습니다.

 

Closing 우리도 부르심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오늘날에도 마태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지혜란 하나님 곧 어떤 상황에서든지 인생을 크게 복되게 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일어서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을 주님은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은 도저히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곳에서 부르셔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부름의 끝은 별로입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영원한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심에 응답하십시다.

And

▮신플라톤주의主義/Neo-Platonism 플라톤에게 영감을 받은 헬레니즘 철학 학파 중 하나. 플로티노스는 매우 독창적인 인물이자 신플라톤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실재가 선의 형상인 일자로부터 일련의 위계를 거쳐 유출된다는 점과 다시 一者일자에게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질을 경시하고 금욕적 실천을 함양하는 이 철학의 경향성은 수많은 교회 교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참조. 관념론, 존재의 사슬]. 

▪ 플로티노스/신플라톤주의(P'lwti'o" 205년-270년0는 고대 그리스의 후기 철학자이다. 플로티노스는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가 작품 54편을 보존해서 전한다. 포르피리오스는 스승의 전 작품을 9권씩 묶어서 총 6집으로 편집했다. 북아프리카 리코폴리스(Likopolis)에서 태어났고, 비교적 늦은 나이(28살)에 본격적으로 철학에 몰두했다고 전한다. 처음 암모니우스 삭카스에게서 플라톤의 가르침을 전해 듣다가 플라톤의 사상에 크게 감동하였고, 이후 ‘플라톤 철학의 해석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플라톤 사상에 몰두해서 가르쳤기에 사람들은 그를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라고 평한다. 플로티노스는 로마 제국의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활동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고, 후에 갈리에누스 황제와 그의 부인 살로니아의 신임을 받아 플라톤 왕국의 건설을 제안받기까지 했다. 몸소 네 번이나 신적 체험을 했다는 그는 만 49세의 나이가 되어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병으로 풍을 앓아 시력이 좋지 않았지만, 언제든 토론을 즐겼던 성격의 소유자라 때로는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고서라도 몰입하는 열정을 자주 보였다고 한다. 부드러우면서 공정한 인품 때문에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를 후원해 주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플라톤의 사상에 심취했던 만큼 육체에 비해 영혼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였으니, 그의 가족 및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그의 중심개념 ‘하나(Hen)’가 플라톤의 사상과 차별화된 것이라고도 연구자들이 지적하지만, 그럼에도 이미 그 개념조차 플라톤이 알고 활용했던 개념이다(특히 《티마이오스》 안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어찌 ‘하나’에서 다수가 흘러나왔는지?”하는 당시 새롭게 제기된 물음에 집중하여 사상을 펼쳤다는 사실에 있다. 소위 영원한 것이 그대로 완전한 채로 머물러 있지 않고, 이 세상의 불완전한 다수로(다양한 것들로) 존재하게 되었는지? 하는 ‘난해한 물음’에 대해 답변하고자 하였다. 중기 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아직 제기되지 않았던 이 같은 물음이 플로티노스로 하여금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관심사인 “유출(Emanation)” 개념에 몰두하도록 이끈 셈이다.

 

▪ 엔네아데스

플라톤의 사상에 심취했던 만큼 육체에 비해 영혼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였으니, 그의 가족 및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포르피리오스의 『플로티노스의 생애』 중에서). 다행히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에 의해 그의 작품 54편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전해져 온다. 포르피리오스는 스승의 전 작품을 9권씩 묶어서 총 6집으로 편집했다. 이때 그는 나름대로 스승의 뜻을 숙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숫자 9(enneas)는 ‘완성’의 의미를 띠었기에, 그렇게 스승의 가르침이 완전한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작품을 가리켜 《엔네아데스(Enneades)》라고 칭한다. 6집으로 배치된 작품들의 내용 및 주제를 보더라도 포르피리오스가 막연하게 편집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제1집은 일상적인 주제, 제2집은 대자연, 제3집은 인간의 삶, 제4집은 영혼, 제5집은 정신, 제6집은 하나(궁극적인 선이자 존재)에 관하여 다룬 작품들로 구성했다.

 

▪포르피리오스(Parfuvrio", 234~305)는 3세기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로, 티로스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인 자신의 스승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집대성한 논문집인 《엔네아데스》를 출판하였다.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그가 다룬 주제들은 호메로스 서사시와 같은 서양 고전으로부터 철학, 논리학, 수학의 학문들과 기독교와 미트라교 등의 종교와 채식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대하고 다양하였다.

그의 저서 《입문서(Εἰσαγωγή Isagoge)》는 논리학과 철학에 관한 입문서로서, 이 책의 라틴어 번역본은 중세 논리학 교과서의 표준이 되었다. 유클리드의 《원론》에 대한 포르피리오스의 주해는 알렉산드리아의 파푸스에 의해 인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포르피리오스는 자신의 저작들 중 대여섯 저작들, 그 중에서도 특히 《신탁에서 유래한 철학(Philosophy from Oracles)》과 《기독교에 대한 반론(Against the Christians)》으로 인해,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과 논쟁을 벌여야 했다. 그의 저서 《님프의 동굴에 대하여(De antro nympharum)》에는 로마 제국 시대의 신비 종교였던 미트라 신비 가르침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포로피리오스는 페니키아의 무역도시 티로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선 당시의 풍습대로 아테네에 유학하여 롱기누스에게 배웠다. 그 후 로마로 나가, 플로티노스와의 해후(解逅)로 그에게 쏠려 문하에 들어갔다. 스승의 논문을 정리하여 《엔네아데스》를 편집하고 스승의 학설 보급에 진력하였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 저작했다고 전하는데, 그 태반은 단편적으로 전해졌다. 그는 채식주의자였다고 전하며, 그 관점에서 《육식의 기피(忌避)에 관하여》를 내놓았다. 또 기독교를 적대시하여(그리스도를 적대시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만년에 여섯 아이를 가진 미망인 마르셀라와 결혼하였으나 그녀에게 보낸 서간에는 그의 이교(異敎)의 제신(諸神)에 대한 경건한 심정이 나타나 있다. 그 밖에 호메로스의 시 해석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관계 저서의 주해와 입문서 등이 있다.

 

▪ 이암블리코스

이암블리코스(Iamblichus: 고대 그리스어: Ἰάμβλιχος, c. 245-c. 325) 또는 이암블리코스 칼키덴시스(Iamblichus Chalcidensis)는 아시리아 태생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이다. 시리아파의 창시자. 플라톤 철학, 신플라톤주의의 기초 위에서 자연학 ·윤리학 ·형이상학의 연구를 통하여 철학과 신비학의 새로운 결합을 시도했다. 이암블리코스는 후기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암블리코스는 피타고라스 철학에 관한 개요서를 저술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암블리코스가 저술한 것으로 간주되는 저작으로는 《신성 마법 또는 이집트의 신비 가르침(Theurgia, or De Mysteriis Aegyptiorum》과 《피타고라스와 피타고라스주의자의 삶(De Vita Pythagorica)》을 비롯한 다수의 저작이 있다. 이암블리코스는 온갖 종교적 의식, 신화를 포섭할 수 있는 종합적 다신교적 신학을 시도하였다.

▪프로클로스

프로클로스 리카이우스(412.2.8-485.4.17)는 계승자라고도 불린 고대 그리스 신플라톤주의자이고 마지막 주요 고전 철학자 중 한 명이다. 아테네 학파의 마지막 영수(領袖)로, 그리스도교가 크게 득세하던 시기에 그리스 철학의 전통을 끝까지 수호하였다. 그의 사상은 일자(一者)의 부동적 성격과 동적 성격의 공존을 통한 상호 모순으로 인한 생성의 원리(일자→정신→영혼→물질)와 이를 관통하는 인식으로서 변증법을 발달시킨 그는 제일 세련되고 발전된 신플라톤주의 체계 중 하나를 세웠다. 그는 철학의 고전 시대의 거의 끝자락에 활약했다. 그의 주석서는 이후 중세사회의 철학 담론 형성에 일정 영향을 주었으나, 그가 가진 철학 사상은 인간의 자력(自力)을 통한 자기 해방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졌기에 부분적으로만 허용되었다.

프로클로스의 변증법은 멈춰져 있는 것과, 무한히 운동하는 것 사이의 대립을 다룬다. 그는 이러한 대립 운동이 만유를 산출한다고 보았다. 그는 부단한 실천과 이성적 사고의 통일 노력을 통한. 인간과 일자와의 합일을 말한다. 이는 이론지(理論知)와 실천지(實踐知)의 합일을 통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기에, 이후 형성된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프로클로스의 삼분적 부정 변증법은 금기시되었다.

프로클로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계를 비판하였다. 그는 천체의 행성이 정해진 궤도에 따라 움직인다는 전제, 즉 이심원과 주전원을 상정하여 행성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이론을 비판하였으며, 행성의 움직임은 정신에 의한 영혼의 산출 운동의 복잡한 양상을 운동이라는 현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천체의 행성 운동이 프롤레마이오스가 정해놓은 궤도에서 이탈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중력 변수의 변화로 인해 행성 운동이 정해진 궤도에서 충분히 이탈할 수 있다는 현대 천문학의 관점과 유사하다.

서구 근세 이후 프로클로스의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대항하는 성격으로서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일부 과학자와 개혁적 신학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파라켈수스, 쿠자누스, 브루노, 헤겔은 프로클로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다.

프로클로스는 대립의 근원을 부동과 운동 사이의 관계로 보았고, 헤겔은 존재와 무 사이의 관계로 보았지만, 절대정신의 타재로서 현실, 변증법적 사유 도정으로서 정신으로 나아가는 헤겔의 부정철학은 프로클로스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이었다.

'철학.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증주의  (0) 2023.02.05
그리스도인과 철학  (0) 2023.01.22
실존주의  (0) 2022.10.29
실재론  (0) 2022.09.05
철학용어  (0) 2022.01.26
And

회당/sunagwgê의 기원은 주전 6세기 바벨론에 포로 된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전과 분리되었을 때 율법을 이행하려는 노력으로서 모세오경을 연구, 토의하기 위하여 지역적 모임을 가진 것을 그 기원으로 본다. 그러나 회당은 제사의 장소가 아니고 기도와 교육의 장소로서 생겼다. 회당은 신약 시대 유대인의 집회 장소이다. 어떤 다른 기관보다 유대인의 신앙의 특성을 보여 주는 이곳에서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만났으며 율법을 배웠다.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회당은 공동체 생활의 중심역할을 했다. 오늘날도 회당은 유대인의 종교 생활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출애굽 광야 시절에는, 회당이 교훈을 받고 기도를 하는 장소로 부각되었던 것 같다. 그 기원에 대한 근거는 에스겔20:1에서 찾을 수 있다. 회당의 발전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AD 1세기경에는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회당이 세워졌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명의 성인 남자들이 필요했 다. 큰 도시에는 수많은 회당이 있었으며, 전해 내려오는 한 이야기에 따르면, AD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될 무렵에는 회당이 394개나 있었다고 한다. 복음서는 회당을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곳(눅4:16)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사도들은 회당을 복음 전도의 출발점(행13:5,14)으로 활용했다. 회당의 건물 형태는 예루살렘 성전을 본땄던 것 같다. 율법서와 선지서 두루마리를 담고 있는 하나의 언약궤가 출구 맞은편 한쪽 끝에 있었다. 언약궤 앞과 출구와 회중 맞은편에는 종교지도자들이 앉는 최고의(혹은 주요한) 자리들(막23:6)이 마련되 어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구획에 앉도록 되어있었다.

회당은 그 회원들을 훈육하고 징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장로들이 다스렸다. 회당장(막5:22)은 예배를 감독했으며, 시중드는 사람들은 두루마리를 나르고(눅4:20) 율법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들에게 징계를 내렸다. 그런 다음 통역자는 구약 말씀을 고유 언어인 아람어로 풀어 읽었다. 적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다(눅4:16; 행13:15). 안식일 예배는 다섯 부분으로 행해졌다. 1. 쉐마를 읽었다(신6:4-9; 11:13-21; 민15:37-41); 2. 18개 간구문과 축도문을 포함한 기도문들을 암송하였다; 3. 율법서 중 한 부분을 원래는 3년 주기로 읽었다; 4. 읽는 자가 임의로 선택한(눅4:16이하) 선지서 중 한 부분을 읽었다; 5. 성경을 상세히 설명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예배를 마치는 축도가 있었다.

'설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브리인의 달력 체계  (0) 2023.11.14
레위기를 위한 책  (0) 2023.08.22
에릭 리델 선교사  (0) 2022.12.17
회당  (0) 2022.08.13
홍수이전의 조상들  (0) 2021.04.21
And

자기는 학문이 있고 덕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어리석고 썩은 냄새를 풍기는 무지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스스로의 진면목을 알지 못할 뿐이고 오히려 그 무지를 자랑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반대로 화학이나 천문학 그리고 라디오의 원리조차 모르는 사람들과 그보다 더 무식한 사람들 속에도 유덕한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진면목을 알고 있으나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학문이 높다고 생각하고 자만에 빠져 자신의 실상을 알지 못한채 세속적인 지식만 절대시하고 있는 앞서 말한 자와 같은 인간을 딱하게 여길 따름이다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에서

 

'좋은글들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화  (0) 2023.03.18
자기부인  (0) 2023.03.05
악한 전쟁  (0) 2022.12.24
필요한 지식  (0) 2022.12.18
그리스도의 영광  (0) 2022.12.08
And

세상 악 중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악이 가장 크다.

                  톨스토이 인생독본에서

'좋은글들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부인  (0) 2023.03.05
학문과 교양  (0) 2022.12.25
필요한 지식  (0) 2022.12.18
그리스도의 영광  (0) 2022.12.08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0) 2022.11.29
And

아무런 이익도 없는 것을 많이 배우느니보다 쓸모 있는 몇 가지를 배우는 편이 낫다.

                                   Ceneca

'좋은글들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문과 교양  (0) 2022.12.25
악한 전쟁  (0) 2022.12.24
그리스도의 영광  (0) 2022.12.08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0) 2022.11.29
혼인  (0) 2022.11.18
And

https://youtu.be/SdCxOzbjDo4

 

'설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위기를 위한 책  (0) 2023.08.22
회당  (1) 2023.01.07
회당  (0) 2022.08.13
홍수이전의 조상들  (0) 2021.04.21
이스라엘의 세 성전  (0) 2020.01.06
And

마가복음1:40-45 

 

월버 체프맨이란 사람이 대학생 때 어느 날 무디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날도 구원에 대해서 말씀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체프맨이 무디를 찾아왔습니다. “무디 목사님, 저는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무디는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저는 믿기는 믿는데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무디는 요한복음 5:24절을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무디가 체프맨에게 믿느냐고 묻자,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에게 영생이 있습니까?”라고 다시 질문하니 글쎄요.”라고 했습니다. 무디가 한 번 더 읽으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당신은 믿습니까?” “제가 믿는다고 여러 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당신에게 영생이 있습니까?” “제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이때 무디가 큰 소리로 나무랐습니다. “당신이 무엇인데 하나님을 무시합니까?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면 있는 것이지.” 그의 고함에 깜짝 놀라며, “그러면 나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있는 것이지하는 무디의 말에 월버 체프맨은 자신이 여태껏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학을 하고 D. L, 무디가 은퇴했을 때, 그 교회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늘상 믿음을 말하고 있지만, 정작 그 말을 써야 할 때, 믿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항상 당황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이성과 믿음이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말하고,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만 그 믿음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 함부로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을 믿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완전하게 분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을 완전히 분석하면 믿겠는데 조금도 분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었는데 배신을 한 예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전 2세기에 씨저가 Brutus에게 배신당했습니다. 21세기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에게 배신당한 예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어야 할 대상을 한 차원 높입니다. 자기들이 믿어야 할 대상을 신으로 정합니다. 그런데 신으로 정하는 것도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정하면 안 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정한 신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잃게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자신이 정한 신에게 “all in”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도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영혼과 모든 것을 “all in”하지 않아야 할 곳에 “all in”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종교에 “all in”한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 종교가 별 희한한 소리를 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나의 미래에 대해서 “all in”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40절에서 45절을 보면

 

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나병 환자 곧 한센씨 병은 지금도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문둥병은 癩菌나균으로 인해 생기는 만성 전염병입니다. 잠복 기간이 매우 깁니다. 눈썹이나 코, , 귀 등에 도토리만한 크기로 도드라지는 결절이 생깁니다. , 발 등의 관절이 녹아 손가락, 발가락 등이 떨어져 나갑니다. 피부에는 탈색된 반점이 생기고, 외부의 충격에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병원균을 발견한(1874) 사람의 이름을 따라 한센 씨(Hansen, 1841-1912) 병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징벌과 연관된 질병으로 여기거나 죄를 상징하는 병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래서 문둥병 증이 발견되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칩니다. 윗입술을 가립니다. 타인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 amef; amef;w]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칩니다. 제제 조치로 제사장은 문둥병으로 판명된 자를 진 밖으로 추방되어 격리 수용했습니다(13:46). 죽으면 격리된 장소에서 장사 지냈습니다(대하26:23). 성직을 수행할 수도, 성물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모든 성회(집회)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문둥병이 들리면 평생 격리되어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병이 의심되는 자는 의원이 아닌 제사장에게 가서 병증을 진단받도록 하고 있습니다(13:8).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은 Messiah적인 이적이 베풀어졌다는 말입니다. 문둥병을 고친 사람이 곧 Messiah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형벌이요, 인간의 의지로는 결코 치유할 수 없는 문둥병을 일순간에 치유할 수 있는 이 놀라운 이적은 Messiah만이 이뤄낼 수 있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께서 그 문둥병자에 손을 대셨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그의 병을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셨습니다. 그만큼 저를 불쌍하게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이 간단한 말씀에 그의 문둥병이 즉시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리고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하신 메시아 비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즉각적인 정치적/민족적 구원을 갈망하던 유대 민중들의 그릇된 Messiah 대망론에 불을 붙이기를 꺼리셨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자가 치유되었다는 소문은 사람들에게 종말론적인 예언자를 생각하게 했을 것이었습니다(왕하5:8).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제부터 격리된 곳에서 가족공동체에 들어가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말로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상담사들이 말로 정신질환의 종류의 병을 치료하고 있지만 완치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몸에 나타난 불치의 병은 치료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료하셨습니다. 이에 문둥병 들린 환자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간절하게 부탁한 것입니다. 원하시면 곧 예수님께서 치료해주시려는 마음만 있다면, 고쳐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문둥병 들린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앞에 있었던 귀신을 쫓아내신 일(1:26),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일(1:31), 그리고 각색 병과 귀신을 쫓아내신 일들을(1:34) 들은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나의 문둥병쯤은 거뜬하게 고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면. 따라서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이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를 말씀으로 만드셨기에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고 후회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 로마에 있는 신들, 이 세상에 신으로 믿는 것들과 기본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리스 로마에서 이야기하는 많은 신은 자연의 법칙 로고스에 의해, 로고스에 따라가는 존재들입니다. 자연의 질서가 있고 질서에 의해 종속되는 존재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그리스 로마에서 이야기하는 다신교들의 특징입니다. 실제로 신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여호와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로고스 위에 있는 로고스,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여호와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중요한 시기나 혼란기에 내가 위로를 찾고 싶을 때 뭔가 구원받고 싶을 때, 내가 자연의 법칙에 또는 세상의 여러 가지 질서에 종속되는 신에게 의존하고 싶을 것 같습니까? 그걸 넘어서서 거기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신에게 손을 내밀 것 같습니까? 어리석은 자가 아닌 바에야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 힘에 의해서 자연의 법칙을 넘어선, 자연의 법칙까지도 지배하는 여호와를 믿는 것입니다.

 

로고스는 뭡니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게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아주 다층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원리, 법칙, 질서 이런 것들을 로고스라고 합니다. 또한 로고스는 인간의 지성, 이성을 이야기할 때도 로고스라고 하고, 로고스라는 단어는 또 어떤 의미냐 하면, 언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는 것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건데 태초에 세상을 지배하는 어떤 원리와 질서가 만들어졌다는 의미로 보면 될 겁니다. 그 로고스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잘 믿은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hn:Wma> pivsti" 믿음이란 말 자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간혹 이 말이 나올 때에는 신뢰하는 의미 정도입니다. 그러나 믿다’, ‘신뢰하다’, ‘소망하다등 여러 단어가 믿음의 개념을 표현했습니다. 시편26:1에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증거로 그의 충실함을 제시합니다.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 또한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믿음을 기본적인 올바른 태도로 요구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올바른 삶으로 표현합니다(37: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반면에 자기 자신의 의나 우상 혹은 인간의 힘을 신뢰하는 것은 비난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든든히 신뢰할만한 반석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은(15:16) 신약성경 저자들에 의해 믿음의 전형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믿음에 해당하는 다양한 단어가 무려 300회 이상 나타납니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하여 믿음이 강조되었습니다. 믿음이란,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존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래서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행위의 결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기준이 모호합니다. 유대 율법으로는 1521(36x36)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현재 유대인 중 단 한 명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1521가지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의존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16:30.31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모두 참되다고 믿는 것은 좋은 믿음입니다.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을 믿고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문둥병으로부터 탈출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네가 깨끗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즉시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누구를 믿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누가 믿었습니까? 문둥병 환자입니다. 문둥병이 의학적으로 치료되는 병입니까? 아닙니다. 과거도 현재도 치료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런데 깨끗이 나았습니다. 점진적으로 낫지 않았습니다. 즉시 나았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즉시입니다. 점진적이지 않습니다.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한순간에 달라진 삶을 살았습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특징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전심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믿음은 종종 병 고침과 연관되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대상은 항상 인격적인 예수님입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믿다는 뜻의 동사가 98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 혹은 그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 그의 본질 곧 그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는 현재 영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전형적인 마음 자세로 봤습니다. 믿음을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율법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유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바울은 우리의 어떠한 행위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바울의 핵심적인 교훈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는 또한 성령을 믿음과 연관시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보증하는 표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의미에서 영생을 확고히 보증하는 계약금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명한 11장에서 믿음을 보이는 것과 대조시킵니다. 그곳에 등장하는 믿음의 인물들은 아무런 외적 증거도 갖지 못했습니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단지 하나님의 약속뿐이었습니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24)고 언급할 때, 얼핏 야고보서가 신약의 다른 책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거부하는 믿음이란 살아 계신 주님께 대한 진실 된 신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할 뿐 그 진리대로 생활하지는 않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서의 곳곳에는 바울과 동일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Closing 믿음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을 의미하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11:6). 믿음은 지식과 의지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날아가는 날개도 있습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