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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베드로(사도행전28:30-31)
유능한 회사에서 사원을 뽑으려면 많은 것들을 걸러냅니다. 사원에 대한 많은 기준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사원들을 선발합니다. 그 기준에는 회사만을 위한 기준입니다. 인격, 부지런함, 성실함, 희생정신 등 오직 회사를 위한 기준만 들어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생산량이 증대되고 회사가 번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격사유가 될 만한 것들을 걸러내려고 입사시험을 치를 때 많은 항목을 만들어 놓습니다.
좌충우돌이란 이리저리 치고받고 부딪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상당히 피곤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떤 조직 내에 있으면 사람들이 항상 경계하고, 항상 조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조직에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있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돌발행동을 수시로 하는 사람과 같이 생활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피곤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하고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전술했지만 예수님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오늘의 회사경영원칙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시려면 성경에 능통한 서기관이나 유대의 전통에 정통한 산헤드린을 선택하셔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곳에서 한 사람의 제자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다 자격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세상 끝까지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한마디로 말해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요나(요한)의 아들 곧 바요나 시몬입니다(마16:17-요21:15). 베드로는 게바라고도 했습니다(요1:42). 시몬/Sivmwn/Sîmon은 들음이란 뜻으로 히브리어를 음역한 유대이름입니다. 게바/Khfa'"/Kephȃs는 아람어의 음역으로 반석이란 뜻입니다. 베드로/Pevtro"/Pêtros는 게바를 헬라어로 표기한 이름으로 ‘(4074, 페트로스) 바윗 조각, 돌, 바위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요한(요나)의 아들이며((마16:17-요21:15), 안드레의 형제(마4:18)입니다. 베드로는 결혼을 했고(막1:30, 고전9:5), 그리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행4:13). 가버나움에 살았으며(막1:21,29), 어부였습니다(마4:18, 5:1-7, 요21:3). 형제인 안드레에 의해 예수께 인도되었습니다(요1:40-42).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마4:18-20, 눅5:11).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셨습니다(마10:2). 믿음으로 갈릴리 바다 위를 걷기도 했습니다(마14:28-31).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야)라고 고백했습니다(마16:16-19).6:69). 그런가하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예수를 말리다가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마16:21,22, 막8:31-33). 경솔하게 예수의 물으심을 가로채서 답변하기도 했습니다(눅 8:43-45).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들 고치는데 참석하기도 했습니다(막5:37, 눅8:51).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의 변모하심을 직접 목격했습니다(마17:1-4, 막9:2-6) 예수님께 여러 가지를 물었습니다. 용서에 대하여 물었습니다(마18:21). 더럽히는 것에 대하여 물었습니다(마15:15-18). 종의 비유에 대해 물었습니다(눅12:41).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에 대해 그 내용을 자세히 물었습니다(막13:3,4). 예수님의 유월절 예비를 위해 요한과 함께 보냄을 받았습니다(눅22:8,9,22:13).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주신다고 할 때에 거절했습니다(요13:6-10).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마26:33-35). 예수님을 잡아가는 말고의 귀를 칼로 내려쳤습니다(마 26:51). 잡히신 예수님을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 가만히 들어갔습니다(마26:58). 잡히신 예수를 세번 부인하고 회개했습니다(요18:17,18,25-27, 26:69-75). 부활하셨다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눅24:12). 부활한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보리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막16:7). 그럼에도 다시 이전처럼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요21:1-14).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눅24:32-34). 베드로가 예수님임을 알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요21:7).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요21:15-19).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했습니다(28:16-20).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행1:12,13),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합심 기도했습니다(행1:12-14). 유다의 죽음에 대해 증언한 후 새로운 사도의 선택을 제안하였습니다(행1:15-22). 오순절에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성령의 강림에 대해서 말했으며(행2:14-41),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행2:37-41).
베드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좌충우돌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기도 하는가하면 심한 책망도 받았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바다 위를 걷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이 잡혔을 때에 면전에서 부인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회개했습니다. 그런 후에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다시 사명을 받았을 때,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주님의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순교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앞두셨고 말씀하셨을 때,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자랑스럽게 내가 주를 위해서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까이 함께 가겠노라고 주님께 말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일들을 다 경험합니다. 혹독한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순교했습니다. 그야말로 주를 위하여 한 말이 그에게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릴 만큼 좌충우돌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베드로를 다듬으셨습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기 위해 처음에는 거친 흙을 채취합니다. 거기에는 돌도 들어있고 티끌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토기장이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걸러냅니다. 돌이나 티끌들은 그릇을 만들 때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릇을 빚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걸러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치고 주무른 다음에야 그릇을 빚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해서 바로 완전한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확정적인 성화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성화가 있습니다. 점진적인 성화와 확정적인 성화입니다. 우리는 부르심, 중생, 칭의, 양자됨을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한번 부르시고 중생함으로서 확정적인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주하는 죄로 인해서 갈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 안에 여전히 내재하는 죄와 신자가 아직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세에서의 신자의 상태는 정적인 현상유지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John Murray 2001, 308). 즉 구원을 받았으니까 마음대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좌충우돌했던 베드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던 베드로였지만, 말년에 베드로는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빚으시고 다듬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들도 늘 좌충우돌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우리를 맡기면 주님께서 베드로처럼 우리를 다듬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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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마태(사도행전28:30-31)
사람들은 출신성분을 많이 따집니다. 특히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지역, 혈연, 학력으로 평가합니다. 특정지역의 사람이라야 인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학교출신이라야 괜찮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편견입니까? 이들이 나라를 망치고, 사회를 망치며, 그들이 있는 곳에는 부패와 비리가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것들을 따지고 치며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삼으실 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사람들을 쓰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예도 있습니다. 마태는 로마를 위한 세금징수원이었습니다. 말이 세금징수원이지, 로마의 앞잡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이런 로마를 전복시키려는 사람도 예수님은 제자로 불렀습니다. 시몬은 열심당원 이었습니다. 로마의 앞잡이들을 제거하고 독립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바로 열심당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마태와 시몬은 원수지간입니다. 그래서 늘 싸워야 타당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제자로 삼으셔서 한 목적을 세우고, 한 목적지로 가게 하셨습니다.
마태/Matqai'o"/Matthaȋos는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마가와 누가는 그의 이름을 ‘레위’로 나타냅니다. 마태는 유대사회에서 경멸받는 세금 징수원으로 로마에 봉사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마태는 다메섹과 지중해 사이의 육상 관세통로에 위치한 가버나움에서 통행세를 징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이 부름 뒤에 마태는 ‘큰 잔치’(눅5:29-32)를 베풀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힐난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시면서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세리는 유대인들 사회에서 도적이나 창기처럼 가장 나쁘게 평가했습니다. 세리는 압제자 로마정부와 그 속국인 헤롯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은 정상적인 세금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친 로마 유대인들은 로마에 가서 조세 단독권을 획득하여 유대에서 도급을 주었습니다. 도급을 하청 받은 사람들은 그 돈을 만회하려고 엄청난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돈을 내지 않으면 폭력배로 하여금 위협을 가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초과징수, 뇌물, 강제징수 등 온갖 협잡과 부정으로 백성의 돈을 사정없이 착취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이방인과 죄인과 같이 취급하여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회당출입을 금했습니다. 마태는 세리이며, 마태처럼 제자 되기에 부적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마태가(마9:9, 눅5:27),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마9:9),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보편적이고 공의로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로마인의 앞잡이였지만,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마태는 직업과는 다르게 경건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쓴 복음서를 보면 구약과 랍비의 전통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이런 전통을 잘 안다는 것은 그가 유대교에 관한 것에 정통했다는 것입니다. ‘레위’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예비하고 섬기는 일을 위하여 성별된 족속에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갈릴리 태생이었습니다. 레위라는 뜻은 ‘연합하다’입니다. 따라서 마태는 헬라 이름입니다. 세리마태라 함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통상 우리들은 괜찮은 직장이나 잘 나가는 직장에 근무하고 있는데, 그 직장을 그만두고 떠나라 할 때에 떠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망설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요새같이 평생직장이 없고, 직장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라면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직장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이로 인해 전에는 Roma의 황제를 위해서 일했지만, 이제는 만왕의 황제이신 위대한 분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의 유대적인 필치로 하나님께 붙잡혀서 오늘의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나라를 더 잘 알리게 한 것입니다.
열 두 사도/빌립 (2) | 2018.0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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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사도 요한(사도행전28:30-31)
참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말들을 합니다. 지옥에 있는 자도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고 하고, 성경에도 없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지점을 만들어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의 공로여하에 따라서 구원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한다고 하는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두 번째의 기회를 주셨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영원한 운명이 이미 결정된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취지로 죽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이미 지옥에 있던 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할 취지로 죽지 않으신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에베소서4:8-10 ‘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과 베드로전서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을 근거로 죽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후에 회개할 기회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9:27과 누가복음16:26절을 보면 이미 죽은 사람의 운명은 바꿀 수 없음을 우리들은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Robert L. Reymond 2004, 857).
요한/!Iwavnnh"/Ioânnēs이란 ‘그에게 여호와는 은혜롭다’라는 뜻입니다. 사도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이며(마4:21), 야고보의 형제입니다(행12:1). 사도요한은 어부였었습니다(눅5:10).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주님을 좇았습니다(막1:19-20). 그리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마10:2).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 하는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막5:36,37, 마17:1, 막9:2, 눅9:28, 마 26:36,37, 막14:33). 요한은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 주의 보좌 좌우편에 앉기를 간구하기도 했습니다(막10:35-37). 요한은 성질이 불같아서 불로 사마리아인들을 멸할 것을 예수님께 요청하였다가 책망을 들었습니다(눅9:54,55). 예수님께서 요한의 형제에게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막 3:17). 사도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유월절을 예비했습니다(눅22:8).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같이 있었고(막14:33),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요18:15,16).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을 지켜보았습니다(요19:26).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봉양했습니다(요19:27). 부활하신 예수님을 갈릴리 해변에서 알아봤습니다(요21:7). 예수님의 승천을 목도했습니다(행1:10). 베드로와 함께 앉은뱅이 된 자를 성전 미문에서 고쳤습니다(행3:5-8). 베드로와 함께 갇혔지만(행4:3,13-15), 관원들에 의해 협박을 받고 다시 풀려났습니다(행4:17,21). 베드로와 함께 사마리아로 파송 되었습니다(행8:14). 박해 시에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계1:9).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요21:24). 요한1서,2서,3서를 기록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계22:8,9). 사도들의 삶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요한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다른 사도들보다 항상 주님과 가까이 있었고, 더 오랫동안 주님과 절친한 교제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성경을 기록하면서도 자신을 최대한도로 절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은 자기들 방식대로 주님을 닮아갔습니다. 그러나 개성이 파괴되거나 억제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더욱 다듬어지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과 사도요한은 사제지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스승과 제자는 모두 주님을 증거 했습니다. 요한은 세례요한이 그 당시에 유대와 복음에서 요한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양 그에게 어떠한 자격이나 혈통관계를 기술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전체 21장의 어디에서도 결코 자기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복음서 중에서 자기 자신이 속한 열 두 사도의 명단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겸손했던 요한은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아무런 암시를 던져주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야고보의 동생입니다. 요한은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러나 교회 중에서 가장 오래 남은 사도였습니다.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가 그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녀의 삶과 증거를 통해 그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역을 세례요한의 제자시절에 준비하였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광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언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메시야의 도래를 애타게 기다렸던 요한은 세례요한이 약속된 분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고 천명했을 때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요한은 세례요한이 주님을 가리켜 가로되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하였을 때, 세례요한에게서 주님께로 자신을 이동시켰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때로는 성급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을 믿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급함은 주님의 방식이 아니라 요한의 방식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을 거절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개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죽이자고 하였습니다. 요한의 성질도 아마 베드로 못지않았을 것입니다.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신 것으로 보아 불같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의 모습에서 주님의 가르침에서 점점 주님을 닮아 갔을 것입니다. 결국은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변모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가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요한이 ‘사랑의 사도’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 함께 누린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복음과 서신 속에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사랑을 말했습니다. 주님의 가없는 사랑을 전하다가 주님께로 갔습니다.
열 두 사도/베드로 (0) | 2018.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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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마태 (0) | 2018.05.10 |
열 두 사도/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1) | 2018.0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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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바돌로매 (0) | 2018.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