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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사람들(로마서1:18-23)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써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 세상은 자기들만의 Title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Title은 세상에서 쌓은 스펙(specification)들입니다. 이 세상의 스펙으로 쌓은 것들을 사람들은 자랑하며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정부의 요직에 임명되면 그의 경력과 학력을 이력에 내놓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에서 근무했다고 화려하게 이력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막상 요직을 맡겨보면 별것이 없습니다. 즉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지만 실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혜 있다고 하는 자신의 기만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들입니다. 가장 뛰어난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세련되었다고 하는 민족들이 섬기고 있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오늘날에도 미개한 사람들은 해와 달을 경배합니다. 아니 현재도 세련되었다고 하는 나라도 해와 달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치고는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이집트인들은 황소와 양파를 섬겼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뛰어나다고 하는 Greece인들은 질병과 인간의 병마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Roma인들은 원귀(寃鬼)를 섬겼습니다. 이들을 개종시키노라면 무척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있는 사상이 금강석처럼 가슴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들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현재도 귀신을 섬기고 있는 나라들이 우리 주변에도 많습니다. 일본, 중국, 우리나라 등 아시아에 있는 나라들이 대부분 귀신을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깎아 만든 것들을 섬기기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부어 만들고 깎아서 만든다고 해도 그것은 일고의 가치 없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대상들은 모두 썩어질 것들입니다.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대체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추악한 것들에게 신성을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치욕을 돌립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행위입니다.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엘리트처럼 행세하고 매우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허세일 뿐입니다. 해, 달, 별, 영웅, 짐승, 새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런 것들은 예배할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왜 그런 것들을 섬깁니까? 탐심 때문입니다. 자기욕심 때문입니다.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고 썩어져가는 피조물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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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로마서1:18-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1절 앞에 diovti/diôti/‘왜냐하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으로부터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땅히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에 섬기는 것은 더욱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들이 혜택을 받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태양도, 달도, 땅도, 바다도, 먹고 입고 쓰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영화롭게는 더욱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마태복음5:45을 보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아니라고 해서 태양이나 우로 또는 땅의 복들을 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것들을 모두 드려야 하는데도 전혀 모른 체 하고 있습니다. 그 예를 누가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들은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고 감사하지 않고, 헛생각을 가집니다. 즉 다른 것에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즉 마음이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원래 소유한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을 모르고 감사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어두워졌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노아의 홍수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들은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왜 쌓았습니까? 홍수가 일어나도 탑으로 올라가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섬겨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홍수심판을 해도 걱정이 없다는 심산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두워진 마음입니다. 즉 정당하게 정서가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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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만한 것(로마서1:18-23)

 

양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계시/ 양심/suneivdhsi"/suineîdesis/쉬네이데시스/conscience는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에서 Democritos 이래 쉬네이도/suneivdw/‘함께 보다’,에서 유래했습니다. 당시의 Cassius Dio, Strabo, Plutarchos 등 저술가들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들을 회고해 볼 때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여부에 의거하여 그의 양심이 선한지, 악한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선한 양심은 평강을 누리는데 반해 악한 양심은 양심의 소유자를 사정없이 괴롭혀서 그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한 일례는 모친 살해죄를 지은 Orestes의 비극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양심을 자신을 파멸시키는 질병으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헬라문헌은 거의 악한 양심에 관하여 언급하는데 반해 로마인들, 특히 Cicero는 자주 선한양심과 심지어 깨끗한 양심과 가장 좋은 양심에 관하여 언급했습니다. 양심은 자주 비난과 좌절의 성격을 띠고 나오는 실패와 악에 대한 회고적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양심에 있어서 한 인간 속에 두개의 자아가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동일한 사물들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세력들 즉 질서를 지향하는 세력과 무질서를 지향하는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갈등은 과거의 무질서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양심은 미래에 대한 준비보다 과거에 대한 평가에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이 존재론적인 것일 경우, 자아성찰에 있어서 지식이 크게 작용하는 반면에 그 갈등이 윤리적인 경우에, 그 자아성찰에 있어서 도덕적 양심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요소는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후기 스토아(Later Stoa) 학파(Seneca)에서 양심의 회고적 특성은 피타고라스학파(Pythagoreans)의 영향을 받아 약화되었습니다. 양심의 역할은 순리대로 살도록 인간을 인도하고 그의 도덕발달을 지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양심 속에는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믿을 수 있는 방향표지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임무는 여전히 주로 이미 일어난 일 혹은 아무리 잘 봐주더라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심판을 내리는 사람의 비판적 항소법원의 임무이었습니다.

 

LXX역본의 용법에서 명사 쉬네이데시스는 전도서10:20에서 마음을 번역했습니다. 구약성경은 양심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가 헬라인들과 다른데 있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가 더 중요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말씀(139)을 통하여 왔습니다. 책임 있는 행위를 가능케 하였던 이 말씀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30:14). 선과 악은 이 말씀에 의하여 인지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14: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양심은 자아를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조화시키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인은 자기의 자의식을 탐색하는 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책임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하고 그의 율법을 순종으로 준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고통 하는 양심이 실체에 대하여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는 그 본래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양심의 소리는 인간에게 그의 처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거룩한 재판관의 소리입니다. 양심의 기능은 마음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은 내적불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42:21 삼상24:5 삼상 25:31).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내적인 불화와 갈등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정죄하고 참회하도록 촉구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회개를 통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인간을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51). 악은 원래가 소심해서 제 입으로 자신을 단죄하며 양심의 가책을 몹시 받으면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양심은 한 사람 속에서 검사와 판사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필로는 로마인 Seneca가 들은 것만큼이나 높이 외치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양심은 자율적 항소 법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형성된 규범적 실체였습니다. 양심의 임무는 유죄를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여 참회케 하는 것이 양심이었습니다. 양심은 일단 깨어나게 되면, 고소자로 등장하여 양심 소유자를 기소하여 죄를 씌우고 수치를 당케 하였습니다. 반면에 양심은 그를 바로 잡아주며 회개할 것을 권면하는 재판관으로서 지시했습니다. 양심은 설득하고 나면 기뻐하고 누그러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은 계속적으로 그 죄인을 괴롭힙니다. 양심은 자비하신 하나님 품으로 이 죄인을 이끌기 위하여 이 모든 일을 수행합니다. 필로의 양심 교리의 구약성경적 기반은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바울서신에서 양심은 의지와 지식사이의 분열이나 판단과 행위사이의 분열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는 자아인식을 의미하였습니다. 즉 양심은 아무런 편견도 없는 공평한 판단력이 아니라 뜻과 행위에 있어서의 자아 인식인것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사항을 피력하고 있는데,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이질적인 양심에 의해 통제되는 것에서 자유 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보다 더 민감한 양심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바울은 쉬네이데시스에 어떤 제한을 두었습니다. 그것은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는 우상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이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연약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민감한 양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연약한 자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의혹을 품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하며 강한 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임의로 먹음으로써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의혹에 빠지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C. A. Pierce신약성경에서 양심’(1955)이란 연구논문에서 Piercesuineîdesis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그릇된 일을 행할 때 느끼는 고통이라는 도덕적으로 나쁜 부정적 의미를 지닌 일상적인 헬라어였다고 주장합니다. Pierce는 이 용어가 양심을 표어로 사용한 고린도 교회를 경유하여 신약성경으로 들어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구약성경과 복음서에서 이 용어가 나오지 않으며 고린도서와 후기 서신들에서 이 단어가 널리 사용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 당시의 여러 가지 절박한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 특히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관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양심에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 고기를 먹는 관습이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양심만이 변함없고 오류를 범치 않는 안내자라는 사상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4:4에서 바울은 나는 내 양심에 거리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라는 동사형을 사용하여 양심 그 자체로는 그가 행했을런지도 모를 어떤 비행에서 그를 무죄 방면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양심이 죽었거나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함으로 해서 양심에 거리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행동의 옳음과 잘못을 결정하는 데는 다른 요소들이 있습니다. 기껏해야 양심은 沮止物/저지물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후기 서신에서 바울은 기독교인이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예법에 관한 고린도 교회의 긴급한 문제들에 비추어서 양심의 한계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형제는 우상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알고 있는 강한 형제의 본을 따라서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마음속에 정해진 분명한 행동원칙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연약한 것입니다. 그는 그 고기를 먹고 나서 양심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고전8:7,10,12).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민감하여 동시에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양심입니다. dilemma로부터 헤어날 길은 지식(고전8:11) 의거한 것입니다. 즉 양심에 의해 고통당하지 않는 강한형제를 모방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거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고전8:13). 고린도전서10장에서 양심은 다시 종속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인들은 양심의 문제를 거론할 자격이 없었습니다(고전10:27-29). 이 문제는 보다 약한 사람과 그의 양심에 대한 관심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집니다. 신자는 시장에서 무엇이든 사서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심의 문제들을 제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식물의 출처를 묻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약한 형제가 고기가 우상에 바쳐진 것이었다고 말하면 그것을 먹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이는 고기를 먹는 사람의 양심을 더럽힌다거나 반신반의하는 습관에 젖어 듦으로써 그의 영성을 약화시키는 경우가 아니라 민감한 사람의 양심을 자극하는 것을 피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양심을 행동의 길잡이라고 부르는 것을 오로지 고통을 피하려는 수단으로만 삼는다면, 양심은 대단히 불완전한 길잡이가 됩니다. 어떤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 양심은 지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고전10:25). 이유는 양심 그 자체만으로는 그 고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오로지 그 양심 밖에 있는 도덕적인 원칙들과 관련하여 효과적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청결한 양심이라 해도 의로움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고전4:4). 반면 지나치게 예민한 양심은 다른 근거들 위에서만 해결될 수 있을 뿐인 dilemma로 고통을 당하도록 유도할 수 있습니다(8장과 10). 양심은 끊임없이 무시당함으로 인하여 화인 맞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된 교리와 거짓된 관습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양심이 그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합니다(딤전4:2, 1:15). 역으로, 사사기 11장의 입다(Jephthah)에 관한 기사는 지나치게 민감한 양심입니다. 입다는 가장 불경한 결과를 초래할 서원을 하나님께 했습니다. 양심은 우리를 도덕적으로 분장시키는 오직 하나의 부분일 뿐입니다. 양심의 일은 대체로 부정적입니다. 우리가 그릇된 일을 행할 때 느끼는 고통처럼 양심은 붉은 경고의 신호등처럼 작동합니다. 양심은 우리 행동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이중 점검자로 일합니다. 양심은 주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작용합니다. 그리고 양심은 교육받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도덕법을 범하였을 때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하는 수단과 넓은 의미에서의 도덕적 의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듯합니다. 도덕적 가치와 원칙들을 분별할 수 있게 하는 분별력과 합리적인 사고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시키는 능력과 아울러 좁은 의미의 양심을 포함합니다.

 

Immanuel Kant(1724-1804)에 있어서 양심은 보통 선악을 판단하는 생득적인 능력으로 여겼습니다. Kant는 그것을 인간의 내면에서의 법정의 의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Kant의 양심론은 양심을 내면의 법정으로 삼는 사상으로 일관했습니다. 영국의 Hutcheson, Shaftesbury 등에 있어서 양심은 도덕감정이었지만, 볼프(Wolff)학파에게 있어 그것은 이성에 기원을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Kant1760년대 중반까지 영국 도덕감정론의 영향 하에 있었지만, 비판기에는 스스로 볼프의 전통에 따라서 이성주의적 입장을 우위에 놓았습니다. 그것이 양심을 내면의 법정으로 삼는 사상이었습니다. “인간의 내적인 법정의 의식이 양심이다따라서 거기서 자신의 생각이 서로 고소한다든지 변명한다든지 한다”. 그리하여 양심은 도덕적 자기의식으로 간주됩니다. 양심이 법정인 한에서 고소하는 인격(원고) 내지 판가름하는 인격(재판관)과 고소당하고 판가름당하는 인격(피고)이 각각 다른 인격이지 않으면 불합리한 것입니다. 따라서 양심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피고로부터 보아 다른 인격의 존재가 요구됩니다. Kant에 따르면 양심은 인간의 본질과 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감성계와 예지계의 양쪽에 걸쳐 존재하기 때문에 양심도 동일한 존재양식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해야만 합니다. 예지인(homo noumenon)은 감성인(Sinnenmensch) 내지 현상인(homo phaenomenon)에게 있어 다른 인격이라는 것으로부터 이들 두 인격을 두 계기로 하여 양심법정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객관에게가 아니라 자기(주체) 자신에게 상관하는 관계라는 것으로부터 Kant에 있어서 어떤 행위가 객관적으로 바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지성입니다. 그 점과 관련하여 지성은 자주 잘못을 범하는 데 반해, 양심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행위를 행했는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도덕적 판단력이었습니다. 그 점과 관련하여 양심은 잘못을 범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Kant형식적 양심성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양심의 활동은 시간적 질서에 따라서 (1)행위(결심) 이전, (2)행위 중, (3) 행위 후로 나눕니다. (1)은 경고하는 양심입니다. (2)는 원고와 변호사가 등장하는 양심입니다. 즉 가책을 깨닫고 변명을 하는 양심입니다. (3)이 재판관의 판결로서 나타나는 양심입니다. 즉 후회를 깨닫는다든지 마음의 평안함을 깨닫는 양심입니다. Kant에서 양심의 개념은 언뜻 보아 주된 흐름을 차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개념은 도덕법칙이나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의 생각 또는 이성의 사실이라는 사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통합하고 있습니다.

Hegel에 있어서 양심이란 원래 동일한 자기 내부에서의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서는 대화적인 구조입니다. 대화의 한편은 개별적인 행위를 직접적인 자발성을 지니고서 실현하는 자기입니다. 다른 한편은 그 행위의 윤리성을 판단하고 비평하는 자기입니다. 양심의 가책에서는 전자가 재판되는 것, 후자가 재판하는 것입니다. 헤겔은 양심의 이러한 구조에 착안하여 이 구조 자체가 그것에서 유래한다고 생각되는 두 사람의 개인 사이에서의 대화를 상호인정론으로서 전개합니다. 요컨대 그는 이러한 상호인정을 행위 하는 양심과 비평하는 양심 사이의 운동으로서 보아가고자 했습니다.

 

옛날에는 서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주인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단지 약간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곡식이나 과일을 훔쳐 먹는 일종의 장난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잃어버린 사람이나 별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당시 세시풍습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의 것을 훔치는 일입니다. 당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그리고 수없이 훔치지 말라고 마음에서 외칩니다. 왜 그럴까요?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양심은 거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심은 하나님의 스파이로서 인간의 감시자이기도 합니다. 양심은 마음속에 있는 목사입니다. 양심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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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만한 것(로마서1:18-23)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워터루(Waterloo/Belgium중부의 마을로서 1815NapoléonWellington에게 참패당한 곳)가 하나님이었도다!”라고 관용어 같은 말이 있습니다. Wellington 대신에 Napoléon이 승리를 거두었다면 Europe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최근 세계전쟁의 결말은 결국 역사상의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사실을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연합국이 승리하지 않고 추축국인 독일, 일본, 이탈리아가 승리했다면, 지금 세계는 어떻게 돌아갈까요? 구 쏘련과 중공 같은 공산국가와 대립했을 때, 이들이 승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히틀러, 무쏠리니, 메이지유신 같은 작자들이 세계를 집어삼켰다면, 스탈린이나 모택동 같은 사람들, 안중근 의사의 심판의 총탄에 이등박문이 죽지 않았다면, 아마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강력하고 의로운 국가들에 의해서 고대의 부패한 국가들이 패배했던 사실을 소급해서 말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복자도 대개는 사악했지만, 피정복자만큼 그토록 도가 지나칠 정도로 죄악에 꽉 차 있지는 아니했습니다. 시편기자는 제왕과 나라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들어 있노라고 담배하게 선포했습니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니라”(75:6,7/13:1). 바울은 하나님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오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심이라”(17:26, 27)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기독교의 체계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에 관한 하나의 계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러 나라와 관계하고 계신다고 언급했습니다.

 

애굽(9:13-17, 9:17, 46:14-26)

앗수르(10:12~19; 31:1-14, 3:1-7).

바벨론(50:1-66, 51:1-4)메데 바사(44:24-45)

메데 바사와 희랍(8:1-8, 15-21)

알렉산더 제국이 멸망한 후 일어난 4왕들(8:9-14, 22-25, 11:5-35)

로마제국(7:7,2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보다 사악한 나라로 하여금 보다 덜 사악한 나라를 정복토록 허용하시기는 하지만, 결국에 이르러서는 보다 덜 사악한 나라보다는 보다 더 사악한 나라를 호되게 다루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1:1-2:20).

이스라엘은 전쟁만 약3000번을 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강국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조그만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시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해 지니고 있는 신관(神觀)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관계하시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지니고 있던 신관은 특기할만합니다. 온 세계가 다신론(多神論/polytheism)과 범신론(況神論/pantheism)에 절망적으로 빠져 있던 순간에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많은 조상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이고 무한하시며 거룩하시고 자기계시적 하나으로 알았으며, 또 우주의 창조주와 보존자와 통치자로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편만 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했을 때는 호되게 이스라엘을 다른 나라를 들어서 질책하셨습니다. 그러다가도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설 때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이스라엘과 열방에 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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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만한 것(로마서1:18-23)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연(실은 창조물이라고 해야 함) 가운데서 하나님에 관한 계시를 항상 보아왔습니다. 많은 은사를 받은 사람일수록 시편기자들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말한 언어와 유사한 언어로 자기들의 확신을 자주 피력해 왔습니다.

 

시편8:1,3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시편19:1,2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이사야40:12-14,26 12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13누가 여호와의 신을 5)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도행전14:15-17 15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16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로마서1:19,20 19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3)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영국의 Hume은 회의론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Adam Ferguson과 별이 뜬 밤을 거닐다가 아담아, 저기 하나님이 계시는구나라고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Voltaire는 알프스 산의 천둥치는 폭풍우에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자연과학 및 생물학 분야의 많은 저명인사들이 자연은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신성과 자비의 현현으로서의 우주를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과학자들은 일반계시는 인간을 구원하는 데에는 불충분하며, 단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관한 보다 충분한 계시를 찾도록 촉구하며,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부르심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자연에 나타난 계시로 인해서 하나님께 연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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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만한 것(로마서1:18-2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신학의 가능성은 두 가지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계시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인간의 타고난 기능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계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계시(The Revelstion df God): Pascal은 하나님을 숨겨진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숨겨진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신이 없기 때문에 계시도 없습니다. 그런데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찾으러 사람들이 나선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없는 신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이라면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을 알 길이 없습니다.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열어 보이시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것이 계시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계시/일반계시: 일반계시는 자연, 역사, 양심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일반계시는 자연과 역사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현상을 매개로 전달됩니다. 일반계시는 모든 지적인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전달됩니다. 일반계시가 목적하는 바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자연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줍니다. 하나님을 찾도록 설득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의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확실한 자기계시를 자연과 역사 그리고 인성(personlity)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사도가 말한 인간에 대한 심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Millard J. Erickson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정죄하는 것이 정당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알지도 못한 채 죄인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인간이 특별계시 없이도 하나님의 정죄를 피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로마서2:14에서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이 율법의 요구들을 다 이룰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 이들조차도 해낼 수 없는 것이다(로마서3장뿐 아니라 갈3: 10-11을 보라). 바울은 또한 갈라디아서3:23-24에서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깨달아 알게 해 주는 몽학선생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믿음에 이르도록 인도해 준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내적 율법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율법이 수행하는 것과 같은 기능을 행한다. 자연에 나타난 계시로부터(1) 인간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그리고 내적인 계시로부터(2) 인간은 그 기준에 맞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함을 깨달아야 한다. 도덕적인 법조항의 내용은 여러 다른 문화적 상황 속에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들이 고수해야 하는 하나의 내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만일 그들이 그것을 억누르지만 않는다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제공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 채, 그 하나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맡겨 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구약의 신자들과 같은 형편에 있지 않은 것인가?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역에 대한 교리들은 아직 그들에게 온전하게 계시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준비된 것과 그들 자신의 공로로 인하여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온전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복음의 형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원받았다. 만일 자연을 통해 알려진 하나님이(바울이 사도행전17:23에서 주장한 것처럼 보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면, 한 분의 능력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어떤 행위로 말미암은 의를 단념하고 그 선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구약의 성도들이 그랬듯이 용납될 것이다 비록 그 연관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구원을 위한 작업이 준비되었는지 모르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의 근거가 신약과 구약에서 분명히 동일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구원은 항상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3:6-9). 이 구원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3:10-14, 19-29). 그렇다면 로마서2:1-16에서 바울이 언급한 내용들로부터 우리는 어떠한 추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 특별계시가 없어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이러한 이론상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론상의 가능성일 뿐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특별계시를 받지 않고서도 실제로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의문시된다. 바울은 로마서3장에서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10장에서 그는 사람들로 믿도록 하기 위해 복음(특별계시)을 전파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계시의 빛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서도 그 진리를 의도적으로 억눌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일반계시란 사실상 율법처럼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를 정죄하는 일을 한다.

 

신자와 불신자 혹은 복음과 불신자의 생각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된 기반 또는 접촉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핑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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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자들(로마서1:18-2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신학을 학문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組織神學/Systematic Theology을 여왕의 면류관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神學思潮는 신학이 학문이며, 또한 신학이 학문의 여왕이라는 관념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James Orr(1770-1816. 아일랜드의 시인)

 

모든 사람은 종교에 있어서의 흔히 敎義/dogma라고도 불리어지는 교리에 반항코자 하는 커다란 편견적인 탈선행위가 있음을 지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신학적인 것에 대하여 분명하고도 조직적인 생각을 시도하는 것을 불신하여 불쾌하게 여기는 태도이다. 사람들은 이런 신학적인 문제에 관련해서는 불투명하고도 불명료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더 좋아하더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유동적이며, 틀에 박히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생각이 시대에 따라 변하기를 바라며, 또 자기들의 생각 위에 쉬지 않고 비쳐온다고 보는 빛에 따라 변하기를 바라면서 간단없이 새로운 형태를 취하고 낡은 형태는 뒤로 남겨두고 끝없는 사상의 변화가 생겨나기를 바라고 있다.

 

고 했습니다. 갈수록 實用主義의 통속적인 철학에 영향을 받은 현대 신학자들이 문제입니다. 이들은 신학을 연구할 때에 전제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즉 신념이라는 것은 현재 연구에 이용되고 있는 假說을 넘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신념(믿음과 신앙)을 확정적이고도 최종적인 것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전제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취하기를 거절합니다. 성경도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유동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확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헤겔의 정반합 사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확연한 구분이 있습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중간이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들어 놓았습니다. 연옥입니다. 얼마나 편리합니까? 살아있는 사람의 형편과 행동으로 인하여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니. 그러나 연옥이란 성경 어디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연옥을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종교별로 소위 좋은 곳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종교를 동일선상에 올려놓고서 우리들은 천국, 자신들은 좋은 곳으로 분류를 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의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을 막아버립니다. 한 영혼의 귀한 길을 영원히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 사회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과 마귀는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사이는 이단들과 연합한 목사와 교회들이 많습니다. 이교와 연합한 목사와 교회들이 많습니다. 세속화된 교회는 너무나 많아서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념으로 인해서 세상을 편 가르는 목사와 교회들이 많습니다. 이래서 이래저래 성도들만 헷갈립니다. 목사 말을 듣자니 진리에서 떠나고, 안 듣자니 면전이고. 지금은 혼란시대입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이단들과 야합을 하고 있습니다. 이교들과 야합을 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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