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1477건
- 2019.08.31
- 2019.08.29
- 2019.08.26
- 2019.08.24
- 2019.08.21
- 2019.08.11
- 2019.08.08
- 2019.07.30
선행(善行)이라는 맹점(로마서3:1-8)
인간의 선이라는 것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운 면을 감추는 면이 있고, 밝은 면을 나타내는 선이 있습니다.
Albert Schweitzer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독일계의 프랑스 의사이고, 사상가이며, 신학자이고, 음악가입니다. 그는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개설한 의사입니다. 철학적으로는 생명에 대한 외경(Ehrfurcht vor dem Leben)을 윤리의 기초로 하였습니다. 또한 원자폭탄 실험에 적극적으로 항의하였습니다.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받았습니다. 신학자로서는 종말론적 요소를 강조하였습니다. 철학가로서는 칸트를 연구하였습니다. 독자의 윤리관인 '생명의 경외'를 주장하였습니다. 음악가로서는 뛰어난 오르간 연주가였을 뿐만 아니라 오르간 개량에 있어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로 추앙을 받았었고, 현재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음악가요, 도덕가요, 사상가이며, 의사였고 신학자였던 Schweitzer. 그런 그가 내세운 예수님에 대한 것이나 종말론을 살펴보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Schweitzer는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묵시적 요소가 그의 가르침의 껍질이 아니라 핵심이라고 주장한 바이스(Johannes Weiss/1866-1914)의 견해에 찬성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하나님 나라의 비밀』(The Mystery of the Kingdom of God 1906)과『역사적 예수 탐구』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영역본 1910)에서 Schweitzer는 예수가 19세기의 사람이 아니라 1세기의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또 유대주의적 묵시의 장르가 비록 19세기의 정신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수의 메시지의 본질적 요소였다고 주장했습니다. Schweitzer에 의하면 ‘망상적 광신자’였던 예수는 자기 자신을 앞으로 오실 인자(coming Son of Man)로 생각하고서 “허황된 묵시적 꿈에 사로잡혀 자기의 삶을 헛되게 내버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전적으로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생전에 올 것이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종말론적 동기를 일관되고 철저하게 적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메시지는 근본적이고 그리고 절대적으로 종말론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보내신 목적은, 마지막 위기(즉 심판)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이전에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마태복음 10장에 진술되어 있는 것과 같은(마10:23) 재림(Parousia)이나 ‘메시야적” 수난이 자신이 예언했던 대로 일어나지 않자, 예수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깨닫고서(“재림”의 첫 번째 지연), 자신을 대속제물로 삼아 메시야적 저주들을 홀로 젊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시대를 강요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상에서 자기의 오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 가운데, 버림받고 완전히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으로(a forsaken and utterly disillusioned man)죽었다는 것입니다(마27:46). 즉 하나님께서 행할 의도를 전혀 갖고 있지 아니한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스스로 무덤을 판 사람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역사적 예수 탐구』가운데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진술에 보면 Schweitzer는 예수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오실(coming) 인자로 알고서 모든 평범한 역사를 끝장내는 마지막 혁명을 항하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여나가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바퀴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는 그 위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러자 바퀴가 움직였고, 그 바퀴는 그를 박살냈다. 예수는 종말론적인 상황들을 가져오는 대신 오히려 그것들을 파괴시켰다. 그 수레바퀴는 앞으로 굴렀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위대했던 그 사람. 너무나도 강하여 스스로를 인류의 영적 통치자로 생각하고서 역사를 자기 목적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의 몸은 그 위에 아직도 매달려 있다 그것이 그의 승리요 그의 통치였습니다.
실제로 Schweitzer의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문장 가운데 있는 “강한’이라는 단어보다는 ‘미친”이나 “망상에 속은”이 더 적절한 단어이다. 더욱이,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의 가르침의 종말론적 내용은 예수에게는 중심적일지라도 오늘의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만 예수의 종교적 가치가 1세기 팔레스틴의 유대인으로서 그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무관한 까닭에 예수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비종말론적 가르침으로부터 어떤 윤리적 강조점들을 배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 짧은 기간만을 위하여 의도된 “한시적 윤리”였을 뿐입니다. 홈스트렴(F. Holmstrom)은 Schweitzer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그러므로 Schweitzer의 결과적(consequent) 종말론은 결과적 자유주의 기독론이다. 그는 형식상으로는 종말론을 옹호하고 있어 보이지만 사실상은 종말론을 배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윤리는 리출의 윤리주의보다도 참된 기독교로부터 훨씬 더 멀어져 버린 도덕주의로 남아 있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역사이래로 선행이 자칫 하나님의 구원과 대치될 뻔했던 예가 아주 많았습니다. 요새는 아마도 더 그럴 것입니다. 그만큼 선행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행은 어디까지나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선행’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다 인정한다 해도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선행이 아니라면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조금의 자극제는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선행자체가 구원에는 절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입니다.
단 하나의 의인도 없다. (0) | 2019.09.05 |
---|---|
죄 아래 있는 인간들 (0) | 2019.09.02 |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의 변명 (0) | 2019.08.29 |
반비례 신앙 (0) | 2019.08.26 |
복음은 의문에 있지 않음 (0) | 2019.08.24 |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의 변명(로마서3:1-8)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그림물감에서 노랑색을 하얀 백지에 칠하면 그리 선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얀색인지, 노랑색인지, 멀리서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깥에 검정색을 칠하면 노랑색이 확연히 돋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검정색이 노랑색을 두드러지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3:4절은 시편51:4절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바울사도는 사람은 다 거짓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참되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편51:4을 인용했습니다. 다윗은 내가 주께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시편51편은 표제에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시편51:3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를 y['v;p]/pĕshâʽay/‘페샤아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간음죄(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살인죄(우리야를 죽게 한 죄)를 졌습니다. 그런데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죄를 삭감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반역죄를 졌다고 고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란 복합적으로 나타나서 어떤 결과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죄란 서로 얽혀서 이렇게 나타나기도 하고 저렇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죄란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항상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릅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은 억지스러운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말하기를 “당신(바울)의 말이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더욱 날카롭게 드러낸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 전능하신 분께서는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기뻐하실 것이 아닌가요? 그러면서도 사람에게 진노를 내리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요?” 이에 대한 바울사도의 말은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고 분노에 찬 말을 함으로써 사악한 생각을 타파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니 네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살 자격이 있으시다. 실제로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불의하실 수가 있느냐?
바울을 시기하고 반대하는 자들은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는 것입니다. 이들의 논리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임한다면, 죄를 많이 지을수록 은혜가 넘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마치 바울이 사람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너 마음에 원하는 대로 계속 죄를 지어라. 그러면 은혜가 더 크게 작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사도는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건전한 교리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왜곡되게 말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들 (0) | 2019.09.02 |
---|---|
선행이라는 맹점 (0) | 2019.08.31 |
반비례 신앙 (0) | 2019.08.26 |
복음은 의문에 있지 않음 (0) | 2019.08.24 |
이면적 유대인과 표면적 유대인 (0) | 2019.08.21 |
반비례 신앙(로마서3:1-8)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유대백성들에게 다른 백성들보다 엄청난 특권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시편147:20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이사야5:5-6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아모스3: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마태복음22:1-8 1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저희가 돌아 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누가복음13: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누가복음14:16,17,24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바울사도에게서 유대인은 참 난감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까지 유대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특별한 지위에 있었음을 믿었습니다. 그 사실은 유대인들 자신도 믿고 여겼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나음이(perisso;n/perissôn/뛰어남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인가? 이전에 바울사도는 할례만으로는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과 전혀 받은 바 없는 이방인들 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을 부인하고 무효화시키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반증을 하려면 할례가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반론을 펴야 했습니다. 할례에 근거한 유대인의 자랑이 그릇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두고두고 써먹었습니다. 오래도록 우려먹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까지 맡기셨습니다. 이 말씀은 명령뿐 아니라 예언과 언약을 포함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 어떤 나라에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유대인에게 맡겨진 것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귀하게 보존하며, 그것에 대하여 모르는 다른 민족에게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특권은 의무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변증은 이스라엘이 이 책임들을 졌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받은 특권만큼 충실했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품위를 확보하기에 충분했다는 것입니다(Calvin). 할례의 유익도 표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의 가치는 지킬 때에 효력을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유대인들 가운데 계속 머무르게 하신만큼 유대인들은 말씀을 안전하게 보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말씀을 분배하고자 하실 때에, 그들은 그 말씀을 온 세상에 널리 알려야 했습니다. 이것을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위탁한 것은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너희는 특별한 백성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생활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특별한 백성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은 특별한 임무였지, 임무의 특별면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약5%-10%의 교회만이 자립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약1%의 교회는 재벌교회입니다. 약90%의 교회는 어려운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재벌의 교회들이 사고를 치고 있습니다. 대형교단들이 계속 사고를 치고 있습니다. 이미 세속화되어 중세교회를 보는 듯합니다. 대사회(對社會)에 대한 책임은 없어지고, 특권의식만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책망을 하게 되면 고치려 하지는 않고 거세고 거칠게 반격을 합니다. 고칠 의도가 전 혀 없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인데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교회의 사명을 망각한 것입니다.
선행이라는 맹점 (0) | 2019.08.31 |
---|---|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의 변명 (0) | 2019.08.29 |
복음은 의문에 있지 않음 (0) | 2019.08.24 |
이면적 유대인과 표면적 유대인 (0) | 2019.08.21 |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누린 특권 (0) | 2019.08.11 |
복음은 의문에 있지 않음(로마서2:25-29)
‘의문’/gravmma/grâmma이란 문자(letter)나 규정(ordinance)입니다. 곧 글자로 기록된 율법입니다.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에서는 Aeschylus이래 그라포/gravfw/grâpho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라페/grafhv/graphê와 같은 의미로서 ‘새기거나 조각된 것’입니다. 후에 ‘기록된 것’이란 넓은 의미를 지녔습니다. 따라서 ‘명각’, ‘그림’, 기록하기, 기록하는 행위와 결과, 기록하는 행위자체, 기록할 수 있는 능력, 알파벳의 개개의 ‘문자’, 책의 글자들, 상징. 편지, 문서, 공문서, 법령과 같이 기록된 것, 문법, 초보적 지식, 학습, 문헌. ‘거룩한 문서’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전의 문서들, 마술에 관한 서적, 그리고 연금술에 관한 문헌과, 신성한 것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황제의 편지와 교령(敎令)에도 적용되었습니다.‘성경’이라는 개념으로도 헬라시대에 사용되었습니다.
LXX역본에서 grâmma는 히브리어 rp,se/sêper/세페르/‘문서, 기록, 책’의 번역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용법에서 ‘의문’은 갈라디아서6:11에서 알파벳 글자였습니다( …글자…), 사도행전28:21에서 grâmma는 기록된 정보입니다(편지). 문자에 의한 의사전달이나 소통입니다. 누가복음16:6에서 grâmma는 ‘채무증서’였습니다(증서). 그런가하면 요한복음7:15에서 grâmma는 ‘학식’입니다(글). 사도행전26:24에서 베스도는 바울의 학문(grâmma)을 깔보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학식이나 학문이란 성경에 관한 지식입니다. 요한복음5:47에서 grâmma는 모세의 ‘글’ 곧 율법을 의미합니다(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디모데후서3:15에서 grâmma는 거룩한 ‘기록’을 의미합니다(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바울사도는 종종 grâmma와 pneu'ma/pneȗma를 대조하였습니다. 로마서2:27,29에서 grâmma는 논증할 수 있도록 기록된 것으로서의 율법입니다. 증명할 수 있는 할례의 표시와 달리, 율법은 율법의 준수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율법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범죄자들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 grâmma는 단순한 글자 이상입니다. 즉, grâmma규정, 규범이라는 의미입니다. 참된 유대인은 grâmma를 이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할례, 즉 영적할례가 필요했습니다(롬2:28-29).
서로 대립되는 savrx/sârx/사르크스(육)와 kardiva/kardîa/카르디아(마음), ejn tw'/ fanerw'//en tȏ phnerȏ/엔 토 프하네로(표면적인/보이는 것 안에)와 ejn tw'/ kruptw'//en tȏ kruiptȏ/엔 토 크륍토(이면적인/감추인 것 안에)는 ejn gravmmati'//en grâmmatȋ/엔 그람마티(율법의 글자에 의한) 할례와 ejn pneuvmati/ejn pneu'mati/엔 프뉴마티(인격적 삶의 결정적인 개입에 의한) 할례 간의 차이에 대응합니다. 사람 안에서 대립되는 것이 있는데, 육과 마음이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며, 기록된 율법과 인격적인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늘 다투고 있는 것들입니다.
grâmma는 pneȗma가 하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기본적인 대조는 성경과 성령 간에 있지 않습니다. 순전히 기록된 규정(prescription)인 율법과 성령 간에 있습니다. 로마서7:6은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단순한 grâmma로서의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섬기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성령이 없으면 율법은 아주 무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grâmma와 pneȗma가 절대적으로 대조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기록된 것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그것만으로 새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3:6-7은 양자의 관계에 개입했습니다. 여기에서 grâmma는 옛 언약과 연관되었습니다. pneȗma는 새 언약과 연관됩니다. 예레미야31:33에 근거하여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단순히 기록된 율법은 우리를 정죄할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마음에 새기신 율법은 생명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할 목적으로 율법으로서의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명을 얻게 하실 목적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3:7의 gravmmasin/grâmmasin (복수형)은 돌에 새긴 글자들(의문)입니다. 율법의 돌판 들을 가리킵니다. 이 글자들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단지 글자를 영에, 혹은 불충분한 글을 참된 의미에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죽음을 가져다주는 옛 계시 문구를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생명을 가져다주는 새 계시에 대립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베일을 제거하실 때에 비로소 옛 율법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이 드러날 것입니다(고후3:14,16). 그리스도께서 완고히 거부당하실 때 하나님의 목적은 감추어집니다.
바울사도가 grâmma와 pneȗma를 구별하는 것은 성경자체를 경시하려함이 아니었습니다. grâmma는 성문율(법)으로서의 율법을 가리키는 반면에, grafhv/graphê/그라페는 바울이 성경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했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운 말씀(롬10:8)은 grâmma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입증된 성경입니다. 비록 우리가 단순한 율법의 글자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성경의 권위가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 규정되므로 우리는 여전히 성경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새 언약은 성령에 의해 생명을 줍니다. 이는 기록되지 않은 율법이 기록된 율법을 대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이 기록된 율법의 내적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의 변명 (0) | 2019.08.29 |
---|---|
반비례 신앙 (0) | 2019.08.26 |
이면적 유대인과 표면적 유대인 (0) | 2019.08.21 |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누린 특권 (0) | 2019.08.11 |
할례와 무할례와의 사이 (0) | 2019.08.08 |
이면적 유대인과 표면적 유대인(로마서2:25-29)
야고보서와 로마서를 보면 상반된 주장을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성경 안에서 심히 다투고 있는 듯합니다. 바울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서 ‘믿음’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로마서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서2:14-26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너희에게 믿음이 있느냐? 그래, 그럼 행함이 있느냐?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 믿음을 구하겠느냐고까지 질문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보여 봐? 너희중 형제자매가 헐벗고 굶주려서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를 만났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하는 말이 ‘평안하게 가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면서 그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다. 그러나 너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겠다고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 믿는다고? 그래? 잘 하는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귀신도 믿고 그 앞에서 떠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허탄한 사람이로구나.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할 때에 어떻게 했느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지 않은가? 기생라합도 이스라엘을 도와서 구함을 받지 않았느냐? 따라서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하박국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믿음을 말하면서 행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대로 직역을 하면 모순입니다. 야고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입니까? 실제로 믿지도 않으면서 위선적으로 믿는다고 한 사람들의 믿음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 예가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일에 제대로 된 믿음을 소유했다면 구원 얻는 믿음일 것입니다. 결국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믿음일 것입니다.
복음은 지리적으로 볼 때 지중해변 구석진 작은 해변의 나라 아주 작은 유대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들어오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심한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수시로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서 말을 했건만 듣지는 않고 아브라함의 표면적인 후손이라는 것만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말씀대로는 살지 않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만 우려먹고 또 우려먹으려 했습니다. 주후70년 로마의 Titus(Titus Flavius Vespasianus)에 의해 그들이 금쪽 같이 여겼던 헤롯성전을 파괴했어도 그 뜻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지금도 유대인, 유대인이라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아니면서도. 유대인이라고 표면적으로만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갈라디아서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갈라디아서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고 이면적인 유대인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 이면적인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어떤 총회들에서는 회의를 할 때 한국의 장자교단, 장자교단 하는데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특별해지려고 하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특별한 교회가 되고자 하면 표면적인 유대인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반비례 신앙 (0) | 2019.08.26 |
---|---|
복음은 의문에 있지 않음 (0) | 2019.08.24 |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누린 특권 (0) | 2019.08.11 |
할례와 무할례와의 사이 (0) | 2019.08.08 |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 (0) | 2019.07.30 |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누린 특권(로마서2:25-29)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지구상) 어디에서든지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은 이 세계에서 가장 혐오스럽고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돈을 거머쥐고서 좌지우지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 때 이방인들은 유대인을 가장 진절머리 나는 종족으로 여겼습니다. 유대인을 가장 비천한 노예의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로마정부로부터 특전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매년 예루살렘으로 성전세를 보낼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이 성전세의 예루살렘의 송금이 주전60년경에 아시아지방에서는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화폐의 수출이 금지되었었습니다. 로마제국 내에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보내려 했던 20톤의 밀수금을 압수당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제국 내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그들 자신의 법정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들의 법에 따라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한 민족이 마치 별다른 민족같이 특정을 누리는 민족으로 살아가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럼에도 로마정부는 유대인의 안식일을 존중해주었습니다. 법률상으로 유대인은 안식일에 재판정에서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백성에게 특별의연금이나 선물 등이 나누어질 때 그것이 안식일일 경우에 유대인은 그 다음날 자기의 몫을 찾아갈 수 있게 규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만 징집면제를 했습니다. 전면면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군사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병역의무의 특별면제가 다른 민족들에게 엄청난 불만을 가진 것은 당연했습니다(William Barclay, 1981, 80-81).
이러한 특권을 누리고도 그 이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특히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썩을 대로 썩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고도 이 사람들은 안심했습니다. 자신은 안심했습니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자심의 육체에 할례의 표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족보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어떤 판정승이 바로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조상은 영의정을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편승해서 나도 보통의 집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아닌데, 맞다는 것입니다. 특권의식만 잔뜩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논증은 유대인이라는 것은 할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행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의문에 있지 않음 (0) | 2019.08.24 |
---|---|
이면적 유대인과 표면적 유대인 (0) | 2019.08.21 |
할례와 무할례와의 사이 (0) | 2019.08.08 |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 (0) | 2019.07.30 |
스스로를 믿는 사람들 (0) | 2019.07.24 |
할례와 무할례와의 사이(로마서2:25-29)
할례는 여러 민족이 행하였습니다. 현재까지도 일부국가에서는 잘못된 할례를 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할례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언약의 표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에 소속한다는 것의 표였습니다. 이 할례의식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길 때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였습니다. 포로기 이후의 유대인들이 Hellenism 시대에 Hellas문화와 구별되게 살려고 할 때였습니다. 처음에는 성인들도 했었습니다(창17:10-14). 그러다가 소년들이 했었습니다. 나중에는 갓난 사내아이들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행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다. 그러나 율법을 범하면 할례가 무할례로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할례가 율법을 범하게 되면 삭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그 무할례자가 오히려 할례를 받은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지킨 무할례자가 할례 받고 율법을 범하는 너희들을 판단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논증은 겉으로의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니고 표면적(보이는)인 육신의 할례는 할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아브라함의 약속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면적(은밀한) 유대인이 진짜 약속받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마음에 받은 할례가 진실된 할례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신령(성령의 능력)에 있고, 의문(문자)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했다는 것이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말씀을 생각할 때에 자칫하면 윤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율법을 행하였느니, 하지 않았느니 논하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론은 그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문제입니다. 거기에 삶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상당히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바알사상이 상당히 많이 교회에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물질이 풍부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어떤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기업경영의 방식,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모으기, 재벌들이나 하고 있는 세습화 등이 세상의 기업인지, 교회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의 모든 성도들을 자신의 교회로 몰려들었으면 하는 것 같습니다. 세속화가 되어도 너무나 세속화되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교회에서 세상을 대할 때 상당한 훼방을 받습니다. 된다하더라도 지연을 받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유대에서 할례란 엄청난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권과 책임이 공존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면 성경대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면적 유대인과 표면적 유대인 (0) | 2019.08.21 |
---|---|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누린 특권 (0) | 2019.08.11 |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 (0) | 2019.07.30 |
스스로를 믿는 사람들 (0) | 2019.07.24 |
심판 주 예수 그리스도 (0) | 2019.07.17 |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로마서2:17-24)
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교회당 건물에는 어김없이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방송설교를 합니다. 방송에 출연하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서 대외에 많이 알려졌습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좋은 것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일, 부적절한 일로 오르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만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전체교회가 욕을 먹습니다. 거기에서만 그치면 괜찮은데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면 전도의 길도 막히고, 교회가 크게 훼방을 받습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이 ‘스스로 믿는/ 스스로 자랑하는’ 것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합니다. 유대인들이 평소 행하는 행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자신이 가르침을 받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은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을 유대인들을 만들려고 혈안이었습니다. 정권이 바뀌거나 정부의 요직에 공석이 생기면 정신 나간 사람들은 전화를 기다립니다. 정부의 부름을 받자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괜찮았습니다. 부르는 즉시 그 직(職)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힘듭니다. 청문회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사람이 정부의 고위직에 앉을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막상 청문회에 들어가면 부동산투기, 군 징집거부 등 부적절한 일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자신을 닦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총리에 몇 사람이 나갔다가 그냥 낙마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면서 도적질에 대해서 악명이 높았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 간음을 했습니다. 우상을 가증하게 여기는 그들은 오히려 신사의 물건을 도적질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Fulvia(로마의 Claudius 장군의 아내)가 로마에 있으면서 유대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바쳐달라고 어떤 유대인들에게 자줏빛 옷과 금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그들의 개인적인 용도에 써 버렸습니다. 그것을 티베리우스 황제가 Claudius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민족들과 달리 특권을 주었는데도, 툭하면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유대인들이 심히 못마땅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로부터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이교의 사원을 수시로 약탈했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증오한다는 열성 유대인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감행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에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신성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으로부터 모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의 행위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 그렇게 하지 못해도 너희들(그리스도인들)은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이 이 세상에서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누린 특권 (0) | 2019.08.11 |
---|---|
할례와 무할례와의 사이 (0) | 2019.08.08 |
스스로를 믿는 사람들 (0) | 2019.07.24 |
심판 주 예수 그리스도 (0) | 2019.07.17 |
예외없는 심판 (0) | 2019.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