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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들을 판단했던 유대인들(로마서2:1-3)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나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많은 목회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너도 잘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단함으로서 엉뚱하게 성경이 해석되어지는 것입니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성경에 기록되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성경의 해석이 그런 사람들에게 맡겨지면 이상하게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그런 의도로 써진 구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의도로 써졌다면 이단을 판단할 필요도 없고, 교회가 잘못해도, 신자들이 잘못해도 일체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18-32을 보면 이방인들(로마교회)의 부도덕한 행위들이 적나라하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두면 반드시 멸망합니다. 무엇보다도 멸망의 근거는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당연히 믿어야 하는데 하나님 자리에 우상을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우상숭배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게 됩니다. 그러면 멸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까지 됩니다. 그리하여 영원까지 하나님과 같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판단했습니다. 우상숭배하고 목매달아 죽인 것을 먹으며, 율법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판단하는 이유는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유대인들도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의롭게 여겼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의롭게 여김으로서 자신을 우상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그것을 지적했지만 유대인들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고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율법의 백성이요, 유대인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특별한 족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함부로 예단하고 판단했습니다. 바울사도는 그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을 판단하면서도 자신들도 역시 판단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모두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이지, 행위로 말미암은 의(義)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자가 있으면 틀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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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 받는 성도들
우리들은 모두 순례자(pilgrim)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순례/pilgrimage의 길을 걷는 생애입니다. pilgrimage란 어떤 목표 없이 여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전환이나 하려고 배낭을 짊어지고 세상구경을 하는 여행이 아닙니다. pilgrim인 우리는 영적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우리의 노정은 평탄하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망망대해를 만나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들을 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깊은 강을 건너야 할 때도 있고, 사막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거친 들판을 가로질러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걷는 가치 있는 路程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평탄한 길만 주시지 않습니다. 가파른 산을 만나게도 하시고, 걷기 좋은 부드러운 길도 만나게 하시며, 깊은 계곡에도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악(粗惡)한 환경과 여러 가지 악조건들을 만나게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렵게 하시는 이유는 正金같은 성도를 만드시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나 모든 성도들이 하나같이 고난의 길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길을 걸었지만, 우리의 선배들은 고난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더 나은 가치를 향해 앞으로만 나아갔습니다. 1절에서 7절을 보면
1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에 있은지 삼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것을 에워쌌더니 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의 묘에 이르러 그 신의 보고에 두었더라 3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의 몇 사람 4 곧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였고 5 또 왕이 지정하여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이는 그 후에 그들로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하려함이었더라 6 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7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다니엘서는 주전605년의 포위된 유다와 예루살렘의 동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전605년에서 주전530년대 중엽까지의 이야기입니다. Nebuchadnezzar이 Daniel과 세 친구들을 Babyion으로 사로잡아간 것으로부터(1:1) Cyrus 제3년(10:1)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로
I. 사로잡힌 다니엘(1-7).
Roosevelt가 대통령으로 재임 중일 때 제2차 세계대전(1939-1945/Second World War)이 발발했습니다. Roosevelt는 미국의 군인들을 해외로 파병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미국은 절대로 중립을 지키겠으며, 유럽전쟁에 어떤 이유로든지 가담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1939.9.5). 그렇게 말한 지 2년 후입니다. 1941년12월8일에 일본으로부터 진주만 기습을 받습니다. 이에 Roosevelt는 자신의 해외정책을 수정했습니다. 미국은 정식으로 세계 제2차 대전에 개입하게 됩니다. 미국은 진주만 기습의 날을 치욕이라 생각했습니다. 감히 쪼그만 일본 따위가 미국을 건드렸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일본이 망할 때까지 응징했습니다. 현재 진주만에 그때 침몰된 배를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또 한 번의 미국의 심장부를 건드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1년의 9·11 terror입니다. 미국본토, 그것도 심장부인 New York과 Washington의 국방부 청사를 공격받은 것입니다. 당시의 사건들은 누구도 상상을 하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첨단방호시스템으로 구성된 미국의 방공망이 그렇게 쉽게 뚫릴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New York의 자존심이자 상징인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가 공격받아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강하다고 하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選民意識은 대단히 강합니다. 세상에서 자신들만 선택됐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나라들을 지옥의 불쏘시개 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選民意識이 강하면 신앙생활도 그렇게 해야 하는데, 신앙은 엉망이면서 選民意識만 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잘하거나 못하거나 변함없이 잘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처참하리만큼 낭떠러지에 떨어졌습니다. 절대로 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나라가 무시무시한 Babyion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자마자 즉시 침략을 당했습니다.
이때가 여호야김 왕 때입니다. 여호야김은 친 이집트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삼 년후에 바벨론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집트가 도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왕하24:7).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해에 Babyion의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왕과 왕족과 귀족들, 그리고 보물들을 바벨론으로 모두 옮겼습니다. Nebuchadnezzar은 인질로 잡아온 자중에서 쓸 만한 자들을 골랐습니다(4절). 왕족이나 귀족이어야 했습니다. 소년이어야 했습니다. 육체적으로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용모가 아름다워야 했습니다. 모든 재주를 통달해야 했습니다. 지식을 구비해야 했습니다. 학문에 능통해야 했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언어를 교육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3년간 전면면제의 장학금 혜택을 주었습니다. 이들을 교육시켜서 쓰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준에 의해서 네 명이 뽑혔습니다. Daniel, Hananiah, Mishael, Azariah였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모두 바벨론식으로 바꾸었습니다. Daniel/Belteshazzar, Hananiah/ Shadrach, Mishael/Meshach, Azariah/Abednego로 고쳤습니다. 이들은 특별히 왕과 같은 음식을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3절을 보면 “또 왕이 지정하여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모두 Cinderella이고 싶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이니까 더욱 Cinderella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상황은 Cinderella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Cinderella는 맞습니다. 그런데, 아직 유리 구두를 신기전의 Cinderella입니다. 집에서 계모와 나쁜 동생들한테 심히 구박을 받는 Cinderella입니다. 유리 구두의 주인을 찾는다는 왕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정작 Cinderella는 모르고 있습니다. 아직 고난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힘이 듭니다. 어떤 때는 하루가 일 년 같습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성도라는 것조차도 잊을 때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고통을 면제받아야 하는데, 왜 이리 어려워지기만 할까 고민하게도 하십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아예 없거나 가벼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더욱 가중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살기가 매우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의 고통은 원칙적으로 죄로 인한 산물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순종할 길을 막아버립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길을 막아버립니다. 죄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길을 가게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현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성숙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정금 같은 신앙은 고통이라는 용광로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들은 고통을 즐기면서 받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고통이 없으면 기쁨도 의미가 없습니다.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아이 귀한 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다만 우리는 어디를 가나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항상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보이게, 때로는 보이지 않게 역사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제단 칼로 이삭을 죽이려 할 때 하나님께서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대적들 앞에서 불을 요구했을 때, 엘리야의 체면을 살려 불을 내리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키자 그를 낫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고통은 주시되 그 고통을 輕勘시키십니다. 따라서 항상 channel을 하나님께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혀갔습니다. 이들이 어떤 일들을 겪습니까? 8절에서 16절을 봅시다.
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9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10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동무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로 보시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까닭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하게 되리라 하니라 11 환관장이 세워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12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13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 14 그가 그들의 말을 좇아 열흘을 시험하더니 15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16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II. 시험받는 다니엘(8-16).
Daniel은 Babylon의 유대인 포로입니다. 그러므로 Babylon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합니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즉시 사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내 나라 백성들도 중하게 여기지 않는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절대왕정 시대에는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입니다. 그러므로 살기 위해서는 시키는 대로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 포로인 Daniel은 그를 감독하는 자에게 Babylon식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왕궁에서 먹어야 할 음식들이 무엇입니까? 왕의 맛있는 음식과 포도주입니다. Daniel은 이 음식이 자신을 더럽히는 음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감독관에게 그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제안은 죽음을 각오한 제안입니다. 당장이라도 왕명이 떨어지면 바로 참수형을 당해야 할 형편입니다. 도대체 그 음식 때문에 목숨과 바꾸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Daniel은 포로로 Babylon에 끌려왔지만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왕의 식탁에서 나오는 음식은 Daniel에게 부정한 음식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금지되었던 음식들입니다. 이방인들은 party할 때에 음식과 음료수의 일부를 먼저 그들의 신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따라서 우상에게 바쳐진 不淨한 음식입니다. 그러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Daniel과 그의 친구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 외에도 Daniel은 Babylon의 관습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감독관에게 청원을 했습니다.
Daniel의 말을 들은 감독관은 참 이상한 일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색이 다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분명히 얼굴색과 몸이 야윌 텐데, 그렇게 되면 감독관인 나부터 목이 달아난다는 것입니다. 이에 Daniel이 제안합니다. 열흘간만 시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과 채식을 먹을 텐데,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는 사람들과 비교하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의 얼굴이 초췌하다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겠다는 것입니다. 감독관은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일 간 시험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Daniel과 그의 친구들의 모습이 훨씬 나았습니다. 감독관은 Daniel의 뜻대로 하게 했습니다. 의외에도 일이 잘 풀려나갔습니다. Daniel과 그의 친구들은 첫 번째 관문을 뚫은 것입니다. 육식보다 채식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기초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의 시험(test)의 장소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험받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시험에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Daniel 등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 전능하심으로 직접 역사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인간 세상에 내놓으면서 때로는 세상의 방법대로 믿음으로 풀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전면에 나서지 않으시고 뒤에서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시험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순종 여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창22:1-14). 그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아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쳐라, 녜”. 아브라함은 두 말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합니다. 이삭이 죽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삭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연단하시기 위해서 시험하십니다(시26:2, 66:10-13, 단12:10, 슥13:9, 벧전1:6,7). 하나님을 경외하고 범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시험하십니다(출20:20). 복을 주시기 위해서 시험하십니다(신8:16). 너무 自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시험하십니다(고후12:7).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알기 위해서 시험하십니다(신13:3).
하나님은 우리들이 시험받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어디 한번 견뎌봐라”하십니까? 아니면 “잘 됐다. 요놈들”하십니까? 아닙니다. 고통의 현장에 같이 계시면서 우리들에게 역사하십니다. 15절을 보면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하나님께서 항상 후방지원을 하십니다. 전쟁을 할 때에 돌격대 옆에 반드시 통신병이 함께 합니다. 위기 때마다 통신병의 무전을 받고 후방에서 화력을 지원합니다. 철수할 때는 헬기를 지원하고, 적진을 폭파하고자 할 때 위치를 알려주면 정확히 폭탄이 날아와서 적진에 투하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섭섭지 않게 대하십니다. 그리하여 시험을 충분히 감당하게 하십니다(고전10:13). 시험 받는 자를 도우십니다(히2:18). 시험에서 건지십니다(히4:15, 계3:10, 벧후2:9). 우리의 기도를 가르치십니다((마6:13, 마26:41).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시험을 받기도 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시험을 받기도 합니다. 찬송하면서 시험을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봉사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시험을 받습니다. 예배의 순서에서도 시험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습니다. 우리가 직장에 있을 때에도 시험을 받습니다. 우리의 사업장에서 시험을 받기도 합니다. 불신자들과 어울려 있을 때 시험을 받습니다. “이거 마셔, 안 마셔” 하면서 우리들이 시험을 받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시험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시험에 넘어지거나 빠지면 문제가 붙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시험을 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죄란 항상 우리들의 복지증진에 걸림돌입니다. 죄는 우리들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들의 발길을 묶으려고 합니다. 우리를 세상의 포로가 되게 합니다. 죄는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것처럼 우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양 행세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같이 하십니다. 다니엘은 적국의 포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적국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따라서 죄는 우리들의 길을 막으려 하지만 항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려 시험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되 더 나은 은혜를 주시려고 시험합니다. 하지만 사단은 우리를 아예 깔아뭉개려고 시험을 합니다. 사단은 물질을 통해서 시험합니다. 혹은 정신적인 문제(명예)를 통해서 우리를 곤란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영적)인 문제를 통해서까지 시험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을 영원히 그의 노예로 삼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동의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우리들을 어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우리들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행하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슨 시험을 받든지 하나님과 함께 하셔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형에 해당한 인간의 죄들(로마서1:29-32)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1. 불의/ajdikiva/adikîa/부정한 행위. 불의한 행위, 부정(불공정)한 행위
2. 추악/ponhriva/ponerîa/사악, 비행, 부정, 계획적으로 행해진 악의.
3. 탐욕/pleonexiva/plleonxîa/탐욕스러움, 탐욕스러운 욕망
4. 악의가 가득함/사악(kakiva/kakîa)이 가득함
5. 시기/fqovno"/자기가 원하는 것을 빼앗는 것.
6. 살인/fovno"/phônos/살인, 살해
7. 분쟁/e[ri"/êris/다툼,분쟁,불화
8. 사기/dovlo"/미끼, 올가미, 기만, 계략
9. 악독이 가득함/kakohvqeia(악의, 원한, 악한 성격)이 가득함
10. 수군수군함/yiquristhv"/psithuristês/중상자, 은밀한 비방자,
11. 비방함/katavlalo"/katâllallos/욕하는 자
12. 하나님을 미워함/qeostughv"/theostugês/하나님을 미워하는
13. 능욕함/uJbristhv"/huibristês/난폭한 사람, 오만한 사람
14. 교만함/uJperhvfano"/huiperêphanos/거만한, 교만한, 자랑하는
15. 자랑함/ajlazwvn/allazôn/허풍선이, 사기꾼.
16. 악을 도모함/kakov"/kakôs(악)을 고안함.
17. 부모를 거역함
18. 우매함/ajsuvneto"/asûinetos/어리석은, 이해력이 없는
19. 배약함/ajsuvnqeto"/ashûinthetos/불충실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20. 무정함/a[storgo"/âstorgos/사랑이 없는, (타고난) 애정이 없는.
21. 무자비함/ajnelehvmwn/anelleêmon/무정한, 무자비한.
인간의 부패한 상태로 버림받아서 나타난 결과의 21가지의 죄악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의 구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고린도전서5:9-1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고린도전서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후서12:20-21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의(義)라는 말은 나라마다 민족마다 다르게 해석되어 왔습니다. 헬라세계에서는 힘이 의가 되기도 했으며, 로마제국에서는 로마의 다른 국가의 점령이 의가 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국가에서 의가 다른 나라에서는 불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의(義)는 구약성경을 배경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Socrates의 제자이며 Aristoteles의 스승이었던 Platon은 dikaiosuvnh/디카이오쉬네/‘의(義)’를 네 개의 주요덕목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정의, 지혜,절제, 용기의 덕목들은 스토아학파(Stoicism)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강조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Hellenism 유대교에서도 차용해서 썼습니다. 헬라어의 ‘의’/dikaiosuvnh/dikaiosûine/‘디카이오쉬네’는 ‘어떤 표준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의 ‘의’는 윤리적인 특성만의 ‘의’가 아닙니다. ‘의롭다’/‘차디크’는 주어진 표준에 순응한다는 뜻입니다. 즉 일차적으로 인격적인 윤리적 특성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의 충실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말씀하셨을 때 윤리적인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의 표준에 부합한 자를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에서의 의는 하나님의 표준에 조금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보기에 ‘의’이기 때문입니다. 즉 윤리적인 ‘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표준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윤리적인 의는 인간의 기준에서 만들어지고 인정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것들을 지키면서도 위의 죄들을 짓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많이 보고 있습니다. 정권의 찬탈을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짓밟아버리는 일들을 먼 과거에서만의 일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것이 ‘의’라고 말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점점 하나님의 ‘의’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의’만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치와 야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과 교회가 야합을 하면 세상은 이익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반드시 불이익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과 야합하다보면 교회가 세속화되어 버립니다. 세속화되다보면 세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을 이해하다보면 죄가 교회에 들어옵니다. 위와 같은 죄가 거침없이 교회의 문턱을 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들을 교회가 조장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 시대에 있었던 죄들은 2000년이 지난 오늘에는 진화되어서 더욱 사형에 해당하는 죄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으면 노도와 같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함을 얻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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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두기를 싫어함(로마서1:28)
사단은 교묘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게 합니다. 즉 종교는 자유인데 왜 기독교만 믿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종교마다 구원의 길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람들은 그 말을 철썩같이 믿습니다. 모든 종교들이 구원이 있다면야 굳이 전도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굳이 모든 종교들이 구원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예수가 낮아지셔서 이 땅에 내려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하러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실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전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과 반대로 행하기를 바라는 죄악의 舞臺(무대)입니다. 세상은 영원한 구원의 길을 훼방하는 무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통을 애써 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역시 사람들은 세상의 뜻대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즉 진리와 완전히 단절되어 버려 영원히 하나님만나는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4절의 마음(…마음의 정욕대로)과 28절의 마음(…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는 전혀 다른 뜻입니다. 24절의 마음은 kardiva/kardîa‘카르디아’/입니다. 고전 헬라어문헌의 용법에서 Homer이래로 본래 생리학적으로, 사람이나 짐승의 신체의 중심기관으로서의 마음에 대하여 사용했습니다. 28절의 마음은 ejpivgnwsi"/epîgnosis/‘에피그노시스’입니다. ‘에프그노시스’란 ‘명확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지식의 차원을 넘는 지식입니다. 깊고 본질적인 지식으로서 하나님과의 바른관계에 이르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할 지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람쪽에서 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는 말이 그것을 반증합니다. 죄로 말미암은 심성입니다.
결국 그들은 진리와 완전히 단절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척한 결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유기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할 지식을 다른대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고귀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일반계시(피조물에 나타난 계시)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끊임없이 막았습니다(18절). 구원하는 하나님의 복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영생하는 구원의 길이 있는데, 자신들의 잘못으로 영원한 형벌의 장으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의 길이 있는데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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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리를 어기는 자들(로마서1:26-27)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6절과 27절은 바울사도당시에 벌써 만연되어 있었던 성적인 방종입니다. 왜 이런 방종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창조물안에 이미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조물을 신격화시켜 창조주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렸습니다. 이러다보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들을 내버려두셨습니다. 온갖종류의 우상숭배, 성적인범죄 반사회적인 범죄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를 쌓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대심판때가지입니다. 그때는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때는 선과 악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때는 무엇이 하나님의 은혜인지 사람들이 확실하게 알 때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배반했던 사람들이 땅을 칙 통곡할 것입니다. 돈만 알고 돈에 환장한 사람들은, 그때 환장한 돈 때문에 통곡할 것입니다. 그때는 배교한 사람들의 대성통곡의 때입니다. 권력 때문에, 명예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한 것을 두고 대성통곡할 때입니다.
바울사도는 여기에서 당시에 만연되어 있는 방탕한 동성애의 행위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죄악을 경시하지 않습니다. 바울사도당시에도 로마제국은 성윤리가 땅에 떨어졌었습니다. 현재는 더합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세계적으로 표를 얻기 위해서 동성애를 합법화하려는 나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수면에 있었던 것들이 이제는 수면위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동성애자들이 시위를 하고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분명히 죄인데 죄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레코-로만시대의 성윤리는 더없이 타락했습니다. 오늘의 시대도 성윤리는 더없이 타락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 땅에서 계속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그대로 놓아두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보복하셨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덮으려고 하지만 덮어질 수 없습니다. 이미 대심판은 예고 되었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서 불에 던진다고 했습니다(마3:10).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지금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는다면 반드시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법칙을 바꾸는 자들에게 그 심판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순리를 어기고 역리하는 자들, 하나님을 섬겨야 함에도 우상을 섬기는 자들, 반드시 보복을 당합니다. 지금 회개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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