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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에게이로”와 “아니스테미”)동사의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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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죽으신 후/예수님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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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9.07
    예수님이 죽으신 후/땅이 진동, 바위가 터짐, 무덤들이 열림

부활(“에게이로”와 “아니스테미”)동사의 태(마태복음28:1-10)

성경에서 부활이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22:23,28,30-31, 27:53, 막 12:18,23, 눅14:14, 20:27,33,35-36, 요5:29, 11:24-25, 행1:22, 2:31, 4:2,33, 17:18,32, 23:6,8, 24:15,21, 롬1:4, 6:5, 고전15:1213,21,42, 빌3:1011, 딤후 2:18, 히6:2, 11:35. 벧전1:3, 3:21, 계20:5-6”입니다.

부활 ajnavstasi" /아나스타시스는 ‘잠에서 깨어나다’입니다(마22:23). 그러나 마태복음27:53에서는 부활을 e[gersi"에게르시스’로 ‘깨어남’입니다. 즉 죽은 사람이 깨어난 것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마태복음28:6을 보면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을 때 에게이로(ejgeivrw)/일어나다)는 동사,직설,과거,수동,3인칭,단수(hjgevrqh)로 ‘그가 일으킴을 당했느니라’입니다. 즉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마가복음16:6도 같고, 누가복음24:6도 공히 수동태로 ‘예수님을 일으키셨다’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20:9에서는 부활이 능동태로 나와 있습니다(ajnasth'nai). 왜 공관복음은 수동태인데 요한복음은 능동태로 기록되었습니까? 그것은 공관복음은 공히 예수님의 인간되심을 강조하여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을 말하고자 함이고, 요한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때 수동형이면 동작의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능동형이면, 동작의 주체가 예수님이십니다. 스스로 일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할 때 “에게이로”와 “아니스테미”의 용법을 고찰하면 삼위일체의 제일위 되신 성부 하나님이 부활 행위의 주체자로서 동작의 책임자이시며, 제이위이신 성자 예수님은 일으킴을 받은 수동적인 입장에 놓입니다. 예수님이 능동적으로 일어났느냐 아니면 수동적으로 일으킴을 받았느냐 하는 문제를 바울서신에서 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서신에서 예수님의 부활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행위가 강조되고, 그 행위의 은택을 입은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에게이로”가 성도들에 관해서 사용될 때도 수동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동사의 주어로서 동작을 받는 수동적인 입장에 있다는 것을 바울은 말합니다. 곧 부활에 있어서 예수님과 신자들의 수동적인 역할을 강조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을 차이를 두지 않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님은 능히 스스로 일어나실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고, 일으킴을 당한 수동태로 말함으로서 죽기까지 복종한 수난을 통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예수님의 수동적인 부활의 입장을 강조함으로서 예수님이 신자들과 동일시되고 더 가깝게 되신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일으키시고,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일으키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And

예수님이 부활하심(마태복음28:1-10)

예수님께서는 부활(Resarrection)하셨습니다.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를 통해 몸과 영을 되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입니다(요6:40,11:24-26, 고전15:54-56). 부활은 어떤 능력으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입니다(행2:22,32,3:15,4:10,5:30,10:40,15:20,30,33-34,37,17:31, 롬4:24,8:11,롬10:9, 고전6:14,15:15, 고후4:14, 갈1:4, 엡1:20, 골2:12, 벧전1:21).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롬4:25, 벧전3:21). 그래서 죽은 자의 부활은 성도들의 산 소망입니다(고전15:12-15, 벧전1:3). 부활은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증거였고 주제였습니다(행2:24,31-32,3:15,4:10,33,5:30-32,10:40-41,17:2-3). 많은 종교들 이교도들은 내세에 소망이 있다고 가르치지만, 부활의 소망이 없습니다(엡2:12, 살전4:13).

성경에는 부활의 여러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막8:31). 신자의 영적인 부활입니다(골2:12). 신자의 육체적인 부활입니다(요11:23-24). 악인의 부활입니다(행24:15).

우리가 무조건 근거도 없이 부활한다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부활합니다(고전6:14).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부활합니다(롬6:5,8:11). 그리스도의 부활이 첫 열매입니다(행26:23, 고전15:13-15). 누가 부활을 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입니다(행2:24). 예수그리스도입니다(요5:28-29). 성령입니다(롬8:11).

언제 우리가 부활합니까? 마지막 날입니다(요6:39-44). 주님 재림하실 때입니다(살전4:13-28). 마지막 나팔소리가 날 때입니다(고전15:51-55).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부활을 믿습니까? 구약성서에 나타난 부활사건들입니다. 사렙다 과부의 아들의 부활입니다(왕상17:17-24). 수넴 여인의 아들의 경우입니다(왕하4:32-35). 엘리사의 뼈에 닿은 어떤 시체입니다(왕하13:21).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부활을 소망(所望)했고, 대망(待望)했습니다. 모세가 소망했습니다(신32:39). 아브라함이 부활을 대망했습니다(히11:19).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소망했습니다(히11:8-16). 에녹의 승천에서 부활을 봅니다(창5:22-24,히11:5). 엘리야의 승천에서 부활을 대망합니다(왕하2:11-22). 욥은 부활에 관해 고백했습니다(욥14:12-15,19:25-27). 시편기자들입니다(시16:9-10,17:15,49:15). 누가의 기록입니다(행2:26-28,35,37-38).

부활에 관한 성경의 예언입니다(사25:8,26:19, 단12:2-3,13, 호3:14).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마28:1-10). 야이로의 딸의 경우입니다(막5:35-43). 과부의 아들입니다(눅7:12-15). 베다니의 나사로입니다(요11:39-40,44). 예수님의 임종 시 성도들의 부활입니다(마27:52-53). 욥바의 도르가입니다(행9:36-40). 드로아의 유두고입니다(행20:9-12).

이미 죽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모두 부활합니다(요5:28, 행24:15, 고전15:20-21, 계20:13).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납니다(살전4:16, 계20:4-6, 마10:28). 불신자나 신자나 모두 부활합니다. 성도들의 부활을 의인들의 부활입니다(눅14:14, 행24:15), 생명의 부활이라고도 합니다(요5:29). 그러나 불신자의 부활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하며, 불의한 자의 부활이라고 합니다(요5:29, 행24:15).

부활한 몸은 보고 만질 수 있습니다(눅24:39, 요20:27,21:12-14, 행10:41). 부활한 몸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덧입은 것입니다(고전15:48-49, 고후5:1-4). 영원히 썩지 않는 몸입니다(고전15:42-44,52-53, 빌3:21, 요일3:2). 다시 죽지 않는 몸입니다(눅20:36).

이런 부활을 사람들이 여간해서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믿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대하여 예수님은 부활 때에 시집도 가지 않고, 장가도 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마22:20-32).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하셨습니다(요5:21,25, 요5:28-29. 마지막 날에 성도들을 모두 다시 살리신다 하셨습니다(요6:39-40,44,54).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요 11:25-26).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행4:1-2). 바울도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행17:18,31-32, 23:6,8, 24:14,15, 26:6-8).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잘못된 사람들도 있습니다(고전15:12-13,35).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하는 정신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딤후2:18).

모든 종교들이 사후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후의 삶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사고(思考)에서는 죽음 이후의 삶이 지속된다고 말하지만, 전혀 없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말하면 믿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부활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우리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의도하신 완전한 영광에 이르는 완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때문에 우리는 부활을 기다립니다. 현재 자고 있는 성도나 살아있는 우리들 모두.

And

예수님이 죽으신 후/무덤을 지킴(마태복음27:62-66)

예수님이 죽으신 날은 예비일입니다. 즉 금요일입니다. 그 이튿날이니까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을 고집스럽게 엄수하려 했던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함께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안식일에는 이방인의 관정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저함이 없이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고자 빌라도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주여’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유혹하던 자’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한 말을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시켜서 무덤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합니까? 무덤을 지키지 않으면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시체를 빼갈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를 찾아 무덤을 굳게 지켜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에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선선히 들어주었습니다. 파수꾼이 있으니 보강하고 싶으면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요구라고 생각했지만,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웬만한 일들은 빌라도에게 일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눈으로 똑똑히 보고 확인을 해두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 군사들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했습니다. 군병들 앞에서 공인이 찍힌 진흙이나 또는 왁스로 덮은 끈을 무덤 입구의 돌에 붙였습니다. 이 인봉을 떼는 사람들은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봉만 했을 뿐 아니라 파수꾼들을 세웠습니다. 로마의 파수꾼들을 세웠습니다. 어느 누구도 시체를 도적질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이 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것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확인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혹시 시신을 예수의 제자들이 도적질하여 부활했다고 소문을 낼까봐 찝찝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를 찾아가 인봉을 하고 파수꾼들까지 동원하여 든든히 지키게 했습니다. 정말로 오랜만에 앓던 이가 빠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말로 골칫거리를 해결했다고 그들 스스로 만족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태어난 이후로 유대와 예루살렘에 이만한 골칫거리가 없었는데 이제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명이 가까이 도래했다는 것을 그들은 알턱이 없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암흑이 세 시간이나 지속되며, 지진들이 나고 무덤들이 열렸을 때 무언가를 감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행위로 인해서 부활의 확신을 더 가지게끔 했습니다. 무시무시한 로마의 파수꾼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부활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로마의 군사들은 무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안심하고 집에 갔습니다. 안식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이후로 조용했습니다. 무덤은 지켜지고, 대적들은 안심했습니다. 누가 봐도 그들의 승리 같았습니다. 예수라는 한 인간이 이제 영원히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원히.

And

예수님이 죽으신 후/부자의 무덤에 장사됨(마태복음27:57-61)

갑자기 아리마대 요셉이 등장합니다. 이 요셉에 대하여 마태는 부자 요셉이며 그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했습니다(마27:57). 마가요한은 그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막15:43). 누가는 그가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눅23:50,51). 사도요한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라고 했습니다(요19:38). 아리마대 요셉 외에 또 한 사람을 말하는데 니고데모였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이면서도 예수님의 처형에 가표를 던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장사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그리스도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 무덤을 제공한 사건은 이사야의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53:9)는 예언을 성취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존귀한 공회의원이었습니다(막15:43).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고대하였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메시야의 통치를 고대했습니다.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눅23:50,51). 그의 의로운 태도는 그의 근본적인 선함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은밀한 제자였습니다(요19:38). 그가 주님을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스승으로서 격찬했지만, 주님을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의 시체를 요구했습니다(마27:58). 그는 예수님이 죽자 곧 예수의 시체매장에 관한 허락올 받기 위해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덤을 그리스도에게 제공하였습니다(마27:59,60). 그는 갈보리 언덕 부근에 위치한 동산에 최후의 안식처로서 암석벽으로 된 매끈하고도 품위 있는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니고데모와 함께 그리스도의 시체를 세마포로 싸고 향품을 바른 채 그곳에 매장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나이가 많았고 어느 정도 부자였던 바리새인으로 산헤드린의 일원이었습니다(요3:19). 그는 공직자로서 일 때문에 낮에 갈 수가 없어서 밤에 예수님을 찾은 사람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올 들올 수가 없었는데 하나님의 권위를 지난 예수그리도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존경했고, 그를 증언했습니다.

제자들도 그를 따라다녔던 사람들도 모두 골고다에서 떠나갔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신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는 것은 많은 비난을 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매장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같은 유력자들이 예수님을 매장한 것입니다. 그 광경을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지켜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확실하게 죽으셨습니다.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뼈를 부수어뜨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미 그는 숨이 멎었습니다.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확실하게 장사지낸바 되었습니다. 그가 완전히 죽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에 주님께서 순종하는 죽음이었습니다.

And

예수님이 죽으신 후/예수님의 사람들(마태복음27:55-56)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거기서부터 줄곧 따라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예수님의 처형현장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 중에 막달라 마라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살로메였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먼 곳에 있었다가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 군사들이 예수님을 의인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입니다. 막달라는 갈릴리 바다 남서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주님은 그녀를 악한귀신 들란 상황에서 구하셨습니다(눅8:2).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마리아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셨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하였습니다(요20:1-18).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마27:61, 막15:47, 눅23:55)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일요일이른 아침에 나갔던 여인들 중 하나입니다(마28:1, 막16:1).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살로메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뛰어난 여인들이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열두 제자 중 요한 외에는 아무도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라와, 그에게 수종들었던 여인들입니다. 그들은 사랑과 동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지낸바 된 것, 부활 후에 나타나신 일 등을 친히 목격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돌보심 하에 교회 신앙의 근거가 되는 구속의 사설을 증거 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과 같이 하는 제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시38:11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시88:8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로 저희에게 가증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사63:3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평소에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도, 베드로처럼 절대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던 제자들도 막상 주님께서 마시는 잔은 같이 마실 수는 없었습니다. 이 잔은 주님 혼자서 마셔야 할 잔이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멀리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는 길은 험하고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아사셀의 길이었습니다. 그가 가는 길은 아무도 함께 갈 수 없었습니다. 한쪽 편 강도가 같이 죽었지만, 예수님의 길과는 판이하게 다른 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성인의 대열에 포함시킵니다. 예수님을 종교창시자로 넣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포함시키는 사람들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그들이 같은가?

And

예수님이 죽으신 후/백부장의 고백(마태복음27:54)

백부장과 로마의 군사들이 예수님의 죽음 후에 지진과 그 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54절).

백부장(eJkatontavrch"/헤카톤타르케스)는 헤카톤(eJkatovn/100)과 에르코(a[rcw/다스리다))에서 유래했으며, 로마의 ‘백부장’을 의미합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다국적 용병들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들은 통솔력이 뛰어났으며, 책임감이 강해 상관들로부터 신뢰를 받았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백부장들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오히려 유대인들보다 나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버나움에 거주하는 백부장은 부하의 중풍병을 고치기 위해 친히 예수를 찾아왔습니다(마8:5-13).

예수님의 십자가 형장에 있던 백부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끝까지 지켜보면서 주님을 가리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였습니다(마27:54).

가이사랴에 거주하는 백부장 ‘고넬료’는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자로서 베드로를 초청하 여 설교를 듣던 중 그와 온 집안 식구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행10:1).

바울 당시 예루살렘의 치안을 담당한 백부장(행22:25) 역시 바울을 도왔습니다.

‘율리오’라는 이름의 백부장은 로마 근위대 아구사도대의 백부장으로서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호송될 때 책임을 맡았습니다(행27:1,6).

이들 백부장들은 이방인임에도 자기 종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거나 직접 찾아갔습니다(눅7:1-7, 마8:5,6).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마8:7-9). 이로 인해서 예수님은 그들을 칭찬했습니다.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차린 사람은 백부장 한 사람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이 이 사람을 특별히 지적하는 것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백부장은 율법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의 체험도 없었습니다. 오직 로마정부를 위해서 속된 명령을 받았던 그가 보는 징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였는데, 백부장은 되어지는 일들을 보고 거룩한 고백을 했다는 것은 본 백성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여, 그 도성이 매우 무서운 저주아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도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하는 말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말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 행세를 했기 때문에 처형 받는다는 소문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이 그리스도를 의로운 사람이요 이런 혐의가 그리스도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동시에 선언한 셈인데, 이것은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가 되었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신령한 무엇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Calv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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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죽으신 후/죽은 자들이 살아남(마태복음27:52-53)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밝은 낮이 캄캄해졌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습니다.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과연 이들은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이 구절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난해구절입니다.

이에 대한 유상섭은 성도들의 부활사건은 옛 시대가 종식되고 부활의 새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구약시대의 많은 성도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했으나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였다고 언급함으로 저자는 이들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에 기인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로써 저자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로 제시한다고 했습니다.

Hendrikson은 이 성도들이 누구인지는 진술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의 부활이라고 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죽는 순간에, 다른 표적들과 함께 발생했고, 그 죽음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변화한 이들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순간에 얼어나 무덤을 떠났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무덤을 떠난 순간부터 소위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기까지 어느 곳에 있었는지 설명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내 보이신 때 이외의 시간 동안에 그가 어디 계셨는지에 대해서도 아무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것을 통하여 볼 때 이들 성도들이 다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틀림없이 그들이 잠시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보인 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늘에 계신 당신께로, 그들의 영혼이 있던 곳으로 데려가셨을 것이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의 재림 때 우리의 영광스런 부활의 보증이 됨을 보여준다고 했다.

Calvin은 예수님이 사망의 감옥에 들어가신 것은 거기에 갇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서 노예살이하며 갇혀 있는 자들을 모두 해방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올 증거하는 전조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누추한 육신의 연약성이 드러난 그 시각에 그의 죽음의 찬란하고 신령한 능력은 지하 세계까지 미쳤다. 이것이 곧 무덤에 갇히기로 되어 있던 그가 다른 사람들의 무덤을 열어 제친 이유다. 그리스도의 임종 시에 무덤이 곧 열렸으며 그의 부활 시에 경건한 자들 가운데 얼마가 숨을 되받아 가지고 나와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던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는 그의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셨으며, 그(예수)는 비로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Matthew Henry는 먼저 일어났던 사람들은 최근에 죽었던 성도이다. 그들이 부활하여 더 이상 죽지 않았으며, 그와 함께 영광스럽게 승천했다고 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상이한 견해로 난해한 구절이지만 예수님이 부활후에 무덤에서 이들이 나온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성도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표론적인 것입니다.(마태복음27:52-53) 2010.1.6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밝은 낮이 캄캄해졌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습니다.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과연 이들은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이 구절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난해구절입니다.

이에 대한 유상섭은 성도들의 부활사건은 옛 시대가 종식되고 부활의 새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구약시대의 많은 성도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했으나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였다고 언급함으로 저자는 이들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에 기인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로써 저자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로 제시한다고 했습니다.

Hendrikson은 이 성도들이 누구인지는 진술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의 부활이라고 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죽는 순간에, 다른 표적들과 함께 발생했고, 그 죽음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변화한 이들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순간에 얼어나 무덤을 떠났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무덤을 떠난 순간부터 소위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기까지 어느 곳에 있었는지 설명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내 보이신 때 이외의 시간 동안에 그가 어디 계셨는지에 대해서도 아무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것을 통하여 볼 때 이들 성도들이 다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틀림없이 그들이 잠시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보인 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늘에 계신 당신께로, 그들의 영혼이 있던 곳으로 데려가셨을 것이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의 재림 때 우리의 영광스런 부활의 보증이 됨을 보여준다고 했다.

Calvin은 예수님이 사망의 감옥에 들어가신 것은 거기에 갇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서 노예살이하며 갇혀 있는 자들을 모두 해방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올 증거하는 전조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누추한 육신의 연약성이 드러난 그 시각에 그의 죽음의 찬란하고 신령한 능력은 지하 세계까지 미쳤다. 이것이 곧 무덤에 갇히기로 되어 있던 그가 다른 사람들의 무덤을 열어 제친 이유다. 그리스도의 임종 시에 무덤이 곧 열렸으며 그의 부활 시에 경건한 자들 가운데 얼마가 숨을 되받아 가지고 나와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던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는 그의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셨으며, 그(예수)는 비로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Matthew Henry는 먼저 일어났던 사람들은 최근에 죽었던 성도이다. 그들이 부활하여 더 이상 죽지 않았으며, 그와 함께 영광스럽게 승천했다고 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상이한 견해로 난해한 구절이지만 예수님이 부활후에 무덤에서 이들이 나온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성도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표론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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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죽으신 후/땅이 진동, 바위가 터짐, 무덤들이 열림(마태복음27:51)

예수님이 죽으시자 흑암이 계속되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다음으로 땅이 진동했습니다. 그리고 바위가 터졌습니다. 이어서 죽어 있던 사람들의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모두 다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찢어지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시에 땅이 진동했습니다. 왜 무덤들이 열렸습니까? 골고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 성전에 있던 사람들은 큰 변고가 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두려운 시간에 지역적인 지진이 왜 하필 예루살렘에 났습니까? 그것도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죄를 심판하시는 듯 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지각변동에 의해서 일어나는 지진은 그 부근의 모든 지역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골라서 일어난 것입니다. 예루살렘 전체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골고다 전체지역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일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천하에 최고의 수행(修行)과 수양(修養)을 쌓았다하더라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천국을 바라보지도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통달했다고 하더라도 천국의 근처에도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믿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연장이 천국인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면 다음 세상으로 편안하게 이어질 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지식, 어떤 종교를 가졌을지라도, 예수 이외에 구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후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기적입니다. 밝은 낮이 밤으로 변했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고, 지진이 나서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렸습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라는 것을 알린 것입니다. 더는 사망의 권세가 이 땅을 다스리지 못함을 알리신 것입니다. 창세 이래 죄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처형을 비웃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사람들 등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사람의 죽음보다 초라했습니다. 초라하기보다 저주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일어난 것은 어떤 사람보다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필두로 지구상에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새 하늘, 새 땅의 주인이신 분, 지진의 주인이신 분,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분 이 이 세상의 심판하는 권한을 가지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렸는데, 이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시기전에 이미 성경에 예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생애도 예언대로 사셨습니다. 이제 죽음마저도 성경을 성취케 했습니다.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사망의 권세를 주님께서 깨트리셨습니다.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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