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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인 왕권을 행하시는 예수님(마태복음27:27-31)

빌라도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민란이 두려워서 저들의 요구대로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군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27절에서 31절을 보면 로마의 군인들의 행동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로마 군인으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을 조롱하려고 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홍포를 입혔습니다. 가시관을 씌웠습니다. 홀을 들려주었습니다. 경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었습니다. 때렸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려고 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 없음과 왕권을 인정했고,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해서 구속자로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삼중 직분을 모두 행하셨습니다. 선지자 직분(신18:15, 눅4:18-21,13:33, 행3:22), 제사장직분(시110:4, 히3:1,4:14-15, 5:5-6, 6:20 7:26, 8:1), 왕의 직분(사9:6-7, 시2:6, 45:6, 110:1-2, 눅1:33, 요18:36-37, 히1:8, 벧후1:1, 계19:16)을 수행하셨습니다.

선지자직분을 수행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8:26-28, 12:49-50), 백성들과 우리와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으며(마4:17), 미래의 일들을 예고하시거나 예언하셨습니다(마24-25장).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시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켜드리고 교회와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희생제물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롬3:26, 히2:27, 9:14,28). 지금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오는모든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중보 하십니다(요17:6-2, 히7:25, 9:2). 왕의 직분을 수행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택하신 백성을 세상에서 불러내시어 자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사55:5, 요10:16,27). 그들 가운데 관리들과 법을 세워 견책하게 하시고, 이로써 그들을 통치하심을 보게 하십니다. 택하신 백성들이 겪는 모든 시험과 고난 속에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세 가지 직분 모두를 수행하셨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고 그리스도를 공격합니다. 교회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모든 모욕을 모두 참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이 받아야 할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아버지 앞에 순결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러셨습니다. 이제 마귀와 세상은 로마 군인들의 한 행동에 반대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2000년 전의 로마 군인들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한 사람으로 보는 우(愚)를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조롱당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And

바라바를 선택하는 군중들(마태복음27:15-26)

불법으로 인해서 피해를 보는 것 같이 속이 터지는 것은 없습니다. 법이란 애초에 존재할 때 약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현재는 악법입니다. 현재의 법은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입니다. 그래서 약자들은 법의 보호를 오히려 받지 못합니다. 어떤 집에 전세를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은행에 담보를 잡혀 경매에 넘어갔습니다. 이때 약자인 세입자를 정부에서 보호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전세자금 얼마 이상은 받지 못합니다. 그것도 연도별로 계산해서 받습니다. 따라서 거리에 나앉는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 한국의 법입니다. 약자를 죽이는 오늘 한국의 악법입니다. 겨우 어떻게 해서 전세자금을 마련하여 전세를 잘못 들면 망해버리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 수가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그렇게 자랑하는 OECD국가에서 일어나는 악현상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의 불법체포, 기획재판으로 사형을 판결하고, 이제 사법권이 있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사형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아무리 보아도 예수님께 죄가 없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판결한 사형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마지막 카드를 들었습니다. 명절에 죄수하나를 놓아주는 전례를 썼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놓아달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바라바와 예수님을 비교하면 답이 환히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라바를 마태는 ‘유명한 죄수’(마27:16)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한 사람’(막15:17)이라고 말했으며, 누가는 그가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눅23:19)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그를 ‘강도’ 또는 ‘약탈자’(요18:40)라고 불렀습니다.

빌라도와 군중들의 마음에는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물었을 때에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했습니다. 이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선동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재판이 불법재판인 줄을 알았지만, 빌라도는 이 일로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마저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의 피에 대해서 무죄하다고 손을 씻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에게 예수님의 피 값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몰랐습니다. 이후로 유대인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세상은 예나지금이나 무분별한 세대입니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지를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땅에 오신 메시아를 철저하게 배반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입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약시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죄한 예수님은 사형에, 흉악한 죄인은 방면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탄의 계획입니다. 조금 후면 자신들의 왕국이 박살날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And

예수님을 심문하는 빌라도(마태복음27:11-14)

예수님은 산헤드린의 법정에서 대제사장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의 질문에 ‘네가 말했다’고 하셨습니다(26:63,64절). 빌라도의 법정에서빌라도가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고 했습니다(27:11). 예수님의 재판에서 두 가지가 밝혀진 셈입니다. 빌라도의 심문과 대제사장의 심문은 예수님의 무죄성과 왕이심을 강조하였습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그에게 넘겨준 것은 유대인들의 시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18절).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많은 고소를 받았지만 전혀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이 답변이었습니다(4절). 빌라도는 그의 아내가 보낸 메시지를 통하여 예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19절). 빌라도는 유월절을 기념하여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를 풀어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했습니다(7절). 그러나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요구할 때 그는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사형언도를 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했습니다(24절). 바라바를 석방시킬 것을 요구한 모든 백성은 예수의 피를 그들과 자기들의 휴손이 책임질 것이라고 함으로 예수님의 무죄성을 시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한 말 중에 네가 그리스도냐? ‘그렇다’가 주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즉 자기백성을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묵으로 일관하신 것입니다.

사도신경에는 빌라도에 대해서 심히 정죄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죽이려고 기획재판까지 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인데 왜 빌라도가 사도신경에 등재되어 후세에까지 계속 정죄를 당하는가?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그리스도의 최종 수난에 관계된 여러 인물들 가운데 빌라도의 이름만 기록된 것은 어떤 이유인가?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38)은 말하되 ‘그는 어찌하여 재판관으로서의 본디오 빌라도 아래 고난 받으셨는가? 그가 무죄하시되 오히려 세속재판관에 의해 정죄(定罪)를 받으신 것은 그것에 의해 우리를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엄준한 심판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게 함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사적 사실성이 매우 특별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로 가는 길의 여러 계단들의 하나인 빌라도의 정죄를 전기적(傳記的)인 묘사함에 관심두지 않고, 이 수난의 구원적 의의에 치중한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죄의 용서와 영원히 사는 것으로 결론하는 그 신경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하여 이름을 기록한 것은 관원 빌라도가 아니라 로마사람 재판관 빌라도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재판권은 하나님의 주신 바로서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을 선언한 후에 사형을 선고함으로 그의 죽으심이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빌라도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이지만 빌라도는 단지 세속재판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And

가룟 유다의 가치 없는 죽음(마태복음27:3-10)

사람들이 정치판에 들어가면 그 당에 속한 수장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판에서 나와야 합니다. 따라서 정치판은 패거리들의 집단입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정치철학이 좋다고 해서 그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설득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아도 하고자 하는 사업들이 사문화되어 버립니다. 양상은 달라도 유다는 애초에 산헤드린과 나누었던 밀담과는 뜻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기획재판을 받고 정죄됨을 인하여 무엇이 잘못되어가는 상황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무죄한 피값을 받았음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유다는 무를 것을 표방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호구(虎口)에 들어온 먹이를 풀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돈을 다시 주고 예수님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유다는 가책이 되어 예수님을 판값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버리고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이에 돈에 환장했던 제사장들이었지만 피값을 쓸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값이었던 돈을 더러운 돈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즉 비율법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돈을 버려진 땅인 토기장이의 밭을 샀습니다. 그리고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였지만, 그 밭은 후에 그들의 죗값을 묻는 ‘피밭’(1:19)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판값이 예수님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지만, 그들은 묘지를 볼때마다 피 값으로 샀다는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이 행위는 예레미야가 한 말을 성취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에는 ‘정가한 자’라는 말이 없습니다. 스가랴11:12,13절에 있습니다. 은 30은 스가랴당시 노동자의 값이었습니다. 스가랴가 노동한 대가로 은30을 던져주듯이 예수님의 몸값 은 삼십도 토기장이에게 던져졌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베드로와 가룟유다를 비교해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강도 높게 부인했습니다. 어쩌면 유다와 거의 같은 죄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죄가 작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닭이 울자 심히 통곡했습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뉘우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예수님께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자살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실 얼굴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회개했느냐? 안했느냐가 문제입니다. 회개한 베드로는 후에 엄청난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영원한 배반자로 남습니다. 그는 돈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베드로의 죽음과 유다의 죽음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돌아오는 회개가 중요한 것입니다.

And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마태복음27:1-2)

하루사이에 엄청난 일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군대를 보내서 체포했습니다. 그 밤에 불법재판으로 사형을 가결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은 죄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결하는 재판이 아니었습니다. 기획재판((企劃裁判)이었습니다. 이미 각본이 다 짜여져 있었습니다. 증인도 거짓증인을 선택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증언으로 무조건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은 산헤드린의 공회원들 거의였으며, 장로들이었고,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빌라도(Pilavto")는 빌라도(본디오 빌라도)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통치한 다섯 번째 로마총독(26-36/27-37년)입니다. 빌라도는 로마를 위해 본도(흑해 지역)에서 싸웠기 때문에 ‘본디오’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빌라도의 총독본부는 가이사랴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월절과 같은 주요 절기에는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방문객의 쇄도로 무질서가 야기되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유대통치는 분별없는 대실책이었습니다. 그는 우상의 사용을 반대하는(출20:4) 유대인의 사상에 거슬리도록 예루살렘에 로마법을 적용시켰습니다. 그는 무질서를 제압하기 위해 병사를 고용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솔로몬의 연못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수도관을 건설하는데 성전기금을 전용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모세가 그곳에 숨겨두었다고 전해진 성전 황금 기물을 찾으러 그리심 산으로 모여든 무장하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이 마지막 대실책 때문에 그는 로마로 소환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누가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은 이 사건입니다(눅13:1). 그러나 빌라도가 저지른 최고의 실책은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불법재판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획수사, 기획재판으로 인해서 시끄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로잡은 자들은 예수님을 결박해서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함은 사형권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들에게 사형권이 있었다면 바로 그날 저녁에 예수님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증오와 미움이 컸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귀의(歸意)되지 않았을 때는 악해집니다. 인간의 생각과 사상이란 잘못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재판들과 처리들이 엉터리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코로 숨 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으로, 또는 이권으로 굽은 재판을 하는 예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월절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코 그것은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증거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서 그들의 백성을 지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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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나약한 인간성(마태복음26:69-75)

유월절이후의 베드로의 행적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라 했을 때, 베드로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26:33). 그러나 겟세마네에서 주님께서 기도할 때에 베드로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26:38-45). 예수님이 잡혔을 때에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베어버렸습니다(26:51).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제지를 당했습니다. 그후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려고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함께 앉았습니다(26:58).

이들과 같이 있을 때 대제사장의 한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갈릴리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예수와 함께 있었노라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네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이었습니다(69-70절).

베드로는 앞문으로 이동했습니다. 문을 나섰는데 다른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아까보다 강도를 높였습니다.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나는 도무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부인이었습니다(71-72절).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네 말소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갈릴리 사람들은 말투나 어감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두 번째보다 더 강도 높게 말했습니다. 자신을 저주하며 맹세를 했습니다. 내가 도무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닭이 울었습니다. 세 번째 부인이었습니다. 참으로 베드로는 죽고 싶었습니다.

오늘 이 땅에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 많은 설교자들과 성도들이 베드로의 입장에 있었다면 베드로같이 하지 않았을 까?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생명의 위협이 올 때는 비굴해질 정도로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넘어짐은 우리 자신의 연약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건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거울이 베드로의 부인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주님을 부인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부인사건에서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약한 우리들을 그럼에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용감하고 믿음이 있을 줄 알았던 우리들이, 신상에 어떤 사건이 터지면 그야말로 조금의 믿음도 없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평소에는 모두 믿음이 많은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삽니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마치 우리믿음도 카멜레온처럼 변화해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존재할수 없다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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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를 몰라보는 산헤드린(마태복음26:57-68)

산헤드린(sunevdrion/공회)는 쉰(suvn//함께)와 헤드라(e{dra/자리)에서 유래한 말로 ‘함께 앉은 자들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산헤드린은 로마의 세나투스(Senatus/ 원로원회)의 번역어입니다. 유대교에서 산헤드린의 역사는 포로기 이후입니다. 제사장 신분의 귀족들과 여러 지파의 우두머리들은 예루살렘에 원로회의를 구성했습니다. 그 회의의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이 예루살렘의회는 시리아왕 안티오쿠스Ⅲ세의 칙령에 의해 처음으로 게루시아(gerousia/원로회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통치기구는 일찍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이 의회는 하스몬 왕가가 왕직과 대제사장직을 접수했을 때 그 권한을 박탈했습니다. 주전76-67년에 여왕 알렉산드라 치하에서 바리새파 서기관들이 그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산헤드린의 용어가 예루살렘 의회에 대해 최초로 사용된 것은 로마황제 가비니우스(Gabinus/주전57-55) 통치 아래 있을 때였습니다. Gabinus는 팔레스타인을 5개의 쉬네드리아(sunevdriva)로 나누었습니다. 그 후 가이사의 통치 때 예루살렘 회의는 다시 이스라엘 전체를 지배하였습니다. 이 때 산헤드린은 특별히 예루살렘 의회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구성은 71명의 의원, 즉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중 지도급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원래 사두개파 제사장계 귀족들이 세력을 잡고 있었으나 알렉산드라 여왕의 시대에 이르러 그 의원 자격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포함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위한 공회가 아니었습니다. 강도 집단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집단이었습니다. 없어져야 할 못된 집단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의 법정은 낮에 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 여력이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습니다. 가야바 법정에 끌려간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안달이 났습니다. 거짓증거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허사였습니다.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그 말로 채근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그리스도(메시아)인지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맞다고 말했습니다. 재림하실 때 인자의 영광을 말씀했습니다. 이에 세상에 눈먼 대제사장은 신성모독의 죄를 적용하여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침을 뱉으며, 주먹과 손으로 때리며, 희롱했습니다.

시편35:11에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라고 예언되었고, 109:2에는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성취가 마26:59,60입니다. 또한 미가5:1“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찌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했고, 이사야50:6에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했는데, 이에 대한 성취가 마26:67,68입니다. 주님은 예언된 대로 우리들을 위하여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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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당하신 예수님(마태복음26:47-56)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신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어떻게든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있는 한 자신들의 입지가 너무나 좁아졌습니다. 자신들의 과거가 모두 들통이 났습니다.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가 아무것도 안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살아 있는 한 그들은 큰일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람들을 붙여서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간해서 틈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님은 제거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회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회의결과는 회의적이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님을 잡으면 아무래도 민란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자가 제 발로 찾아와 잡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이래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비밀리에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가롯 유다 편에는 큰 무리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공회원들을 모두 소집했습니다. 관계될만한 사람들은 모조리 소집했습니다. 속전속결로 처리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미 가룟 유다와는 사전에 암호를 짰습니다. 유다가 입맞추는 자만 잡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약속한대로 예수님께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사주를 받는 자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손을 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었습니다. 이 제자는 베드로였습니다(눅22:49). 그러나 베드로의 그 충심(?)을 제어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다시 꽂으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잡혀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하는 길이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미 예언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능자께서 이 일을 허락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천사에게 지시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인간의 구속사의 기초를 놓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친구에 의해 배반당할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시편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시편55:12-14 12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찐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찐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

주님은 제자들의 저버림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스가랴13:7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이에 대한 성취가 마26:47-56, 요13:18,13:21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만일에 허락하지 않았다면 로마의 황제를 소환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총독과 대제사장들을 단시간에 목을 벴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인간들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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