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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죽으신 후/성소의 휘장이 찢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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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간과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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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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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8.30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구레네 시몬

예수님이 죽으신 후/성소의 휘장이 찢어짐(마태복음27:51)

이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고”. 휘장은 출애굽기 26:31-33을 보면 성소와 지성소를 분리하는 휘장입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들어올 수 있고,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속죄제를 드릴 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짰습니다. 거기에 금으로 그룹들을 수 놓았습니다(출26:31). 두꺼운 천으로 짠 휘장은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했습니다. 제사장들은 매일 성소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고 그곳에 놓인 진설병과 기름을 새로 갈았습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대속죄일에 제물의 피를 들고 들어가 언약궤에 뿌렸습니다. 휘장은 기본적인 영적실재를 상징했기 때문에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지만,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면전에 자유롭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간단한 베로 된 휘장일까? 그래서 사람이 능히 찢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짰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서는 찢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황소 두 마리의 힘으로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찢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로 통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 휘장은 곧 예수그리스도의 육체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하고 단번에 드린 제사로서 그의 백성들을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더 이상의 희생제사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성전시대는 종식된 것입니다. 히브리서6:9절과 10절을 보면

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10:20을 보면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성전휘장이 갈라짐으로 인해서 율법시대는 종식되었으며, 예루살렘시대 역시 종식되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의 시대도 종식된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라도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모든 백성을 위해서 대제사장이 되셨고, 희생제물이 되셨으며, 그로 인해서 우리들의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처럼 약한 육신을 입으시고, 약한 우리들을 몸소 체휼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를 믿지 않는 것은 교만입니다.

And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간과하시는 하나님(마태복음27:45-46)

45절 46절을 보면 예수님의 절규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hjlivv hjliv lamav sabacqaniv)였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말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이며 ‘사박다니’는 ‘내버려두다’라는 아람어 ‘쉬바크’의 음역이며 ‘당신이 나를 버렸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입니다. 이 상황은 제6시로부터 제9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계속된 후 제 9시에 하신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시간들은 약간 다릅니다.

밤중기점(로마식)

새벽기점(유대식)

시간

성경

요한복음

공관복음

아침

마16:3

제 6 시

제 0 시

오전 6 시

요19:14

제 9 시

제 3 시

오전 9 시

마20:3

제 10 시

제 4 시

오전 10 시

요1:39

정오

행22:6

제 12 시

제 6 시

오전 12 시

마20:5

제 3 시

제 9 시

오후 3 시

마20:5

저녁

마16:2

제 5 시

제 11 시

오후 5 시

마20:6

제 6 시

제 12 시

오후 6 시

요4:6

제 7 시

제 1 시

오전 7 시

요4:52

제6시는 유대의 시간입니다. 로마식의 시간으로는 제12시로서 오전12시입니다. 제9시는 오후3시입니다. 그러므로 오전12시부터 오후3시까지 암흑의 시간이었습니다. 오후3시쯤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절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언뜻 생각하면 마치 아버지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신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과연 이 외침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외침과 암흑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그가 대신 받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주님께서 피하지 않고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이었습니다. 흑암은 곧 심판으로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세 시간동안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습니다(갈3:13). 하나님은 예수님의 인성을 제한된 의미에서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자기 백성의 죄를 인하여 철저하게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버림을 받고 있다고 탄식했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한 외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 깊숙이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 외침은 우리들이 져야 할 죄의 형벌들입니다.

And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대제사장과 장로들(마태복음27:41-43)

사람의 시기심은 큰 산도 불태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시기심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있습니다. 다만 이 시기심을 어떻게 제어하느냐입니다. 시기심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일들이 큰 손해를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은 유대의 상위그룹들입니다. 즉 많은 기득권들과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방에서 박사들이 유대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묻는 말은 청천벽력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유대의 왕이 어디에서 나느냐?’고 물었습니다(마2:2). 그들에게는 유대의 왕이 필요 없었습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에 어느 때보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헤롯은 왕위가 위태로울까봐서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의 정적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틈을 잡지 못했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스파이를 보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로부터 정말 반가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것도 밤에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혹시 잘못될까봐 그 밤에 거짓증인을 내세워 기획재판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최종 재판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술수를 썼습니다. 민란이 나려는 것같이 해서 그 고비도 넘겼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큰 정적을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최소한 예루살렘에 종교최고책임자들이라는 사실도 잊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나가는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희롱했습니다(41절). 군중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입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조소는 증오와 시기로 섞여 있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가증스럽고 야비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공격한 것입니다. ‘네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능히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53:3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에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120명의 사람들입니다. 그의 제자들입니다. 그의 치료를 받고 나음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이외는 모든 유대인들이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은 마귀에 얽매어 있었습니다. 죄로 온통 꽉 차있습니다. 그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비하의 신분 중에서 가장 절정입니다. 그러나 곧 이 세상을 심판하고 마귀의 왕국을 송두리째 파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과 마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분들은 삼위의 하나님이었습니다.

And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지나가는 사람들(마태복음27:39-40)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는 것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목격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무죄라는 것을 모두 알 것입니다. 무죄한 사람이 사형을 당하는 것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이 사람들은 전혀 그러한 마음들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데 불쌍한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기를 구원하라’고 조롱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모욕했습니다. 말로만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고 하지말고 우리의 눈에 보이게 하라고 모욕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공개처형의 날, 십자가형이 집행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저희가 나를 본즉 머리를 흔드나이다(시편109:25).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시편22:7). 머리를 흔들며(kinevw)는 긍정적인 흔듦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흔듦입니다. 메시아라면 표징을 보이라는 흔듦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그들은 아예 신이 난 듯 했습니다.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시펀22:8).

그들이 주님을 조롱했던 것은,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는 아들로서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죽는 순간까지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주님자신과 우리를 동시에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했습니다. 이 표현도 그들이 놀라움이나 존경의 태도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인간적인 냉담함을 보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교회를 조롱하고, 복음을 믿지 않습니다. 복음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복음에 대해서 예단(豫斷)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자신들을 위해서 죽었지만,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티그리스도가 나오고,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리에 지식이 들어있다고 해서 이 세상의 주관자를 몰라보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그들의 요구대로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될까? 참으로 아찔하기만 합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 후에 그 조롱으로 인하여 조롱을 당할 것이 뻔한데, 왜 조롱하는지 그 영혼들이 불쌍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은 예언된 대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필연적으로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주님의 깊은 뜻을 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해서야 그때의 정경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인간들의 죄가 이토록 큽니다. 그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And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예수님과 함께 죽임 당한 강도들(마태복음27:38,44)

예수님과 함께 그날 그 시에 함께 사형당한 사람들은 강도 둘이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았습니다(38절). 이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어서 예수님의 능력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다른 사람들처럼 욕하고 능력을 보이라고 했습니다(44절). 마가요한도 역시 마태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강도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같이 살자고 했습니다(막16:32). 그러나 누가복음은 더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23:39-43을 보면

2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Hendrikson은 주석하기를 진실하게 회개한 모든 죄인들에게 귀한 위안을 주는 기사라고 했습니다. 두 강도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했습니다(마 27:44, 막15;32). 그러다가 한 사람이 침묵하고 회개했습니다. 그 사람이 오른편 강도라는 것은 신빙성이 없습니다. 둘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동료 강도를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자신들은 마땅히 형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가 회개했을까? 우리는 잘 모르지만 추론은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내세를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태도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령께서 역사하셨음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주님께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낙원은 어디인가? 우리에게 낙원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낙원(paravdeiso")은 천국입니다. 이 낙원은 과거의 성도들이 현재 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도 역시 이 세상을 떠나면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완성된 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완성된 천국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집니다. 모든 성도들이 부활 후에 영혼과 변화된 육체가 합해져 완성된 천국에 가게 됩니다. 따라서 강도들이 가 있는 곳에, 베드로도 있고, 사도요한도 있으며, 아브라함도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은혜의 구원입니까? 죽기 전에 구원받는 다는 것은, 정말 귀한 구원입니다. 따라서 숨이 붙어 있을 동안에 구원입니다. 숨이 떨어지면 그 영혼은 인간이 어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도 그 영혼에 손댈 수 없습니다. 만일에 손을 댈 수 있다고 하면 사기꾼입니다. 죽기 전에 구원입니다.

And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마태복음27:37)

로마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면서 죄 패를 붙였습니다. 죄 패는 유대인의 왕(oJ basileu'" tw'n jIoudaivwn)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도 역시 유대인의 왕이라 썼습니다(막15:26). 누가복음 역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입니다(눅23:38). 요한복음에는 좀 길게 썼습니다. 요한복음19:19-22을 보면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 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시리아의 총독인 빌라도가 죄 패를 썼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썼습니다. 이 죄패는 2국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 말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의 죄 패에 대해서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Calvin은 3개 국어로 쓴 것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수치를 줄 목적으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습니다. 너희들의 왕이 이렇게 로마의 형법을 적용받아서 사형에 처했다는 것을 빌라도는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의도하지 못했지만, 이 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멀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아람어)야 유대인의 언어지만, 라틴어와 헬라어는 이방인들의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인들만 알면 되는데 굳이 3개국어로 기록된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이후로 여러 곳에 퍼졌습니다. 유월절절기로 인해서 로마제국의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죽음이 회자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만왕이 되신 것입니다. 이제 복음은 더는 유대인의 것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부활이후로 복음은 유대인의 담을 넘었습니다. 유대의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 로마의 군병들, 빌라도 등이 예수님을 정말 우습게보았습니다. 신성모독의 죄를 씌우고, 자기들의 뜻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이미 구약시대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마련하신 것이기에 오차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길에는 천상천하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약한 죽음으로 마귀를 이기고, 그것으로 자신의 백성을 살리신 예수그리스도는 그들의 말대로 유대인의 왕이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약한 인간 예수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군병에 꼼짝 못하는 예수님, 세상의 권력에 꼼짝 못하는 예수님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심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의 한 사람, 박애주의자인 예수님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And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골고다(마태복음27:33-36)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곳은 ‘해골의 곳’ 즉 골고다입니다. 골고다(Golgoqa')는 아람어의 ‘두개골’의 음역입니다. 아람어 ‘골고다’는 히브리어 굴고레트(tl,GOl]Gu/gulgôleth)민1:2/수,해골)와 같은 말입니다. 누가는 셈족어를 쓰지 않고 헬라어 ‘크라니온’(kranivon)으로 번역해서 썼습니다(눅23:33), 이것은 ‘갈보리’(calvaria/라틴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영어 Galvary리는 라틴어 읽기에서 유래했습니다.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 다메섹 문 북동쪽 230m지점에 위치한 약 20m 높이의 작은 언덕입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골고다에 도착하자 쓸개를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었습니다. 이것은 몰약입니다(막15:23). 그런데 예수님은 맛을 보신 후에 마시지 않았습니다. 마취제였기 때문입니다. 마시지 않은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마취제는 아무래도 고통을 경감시킵니다. 따라서 완전한 대속자가 되기 위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을 온전한 의식 중에서 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리고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가졌습니다. 그리고 지켰습니다.

십자가형은 유대의 처벌법이 아닙니다. 십자가형은 Semiramis가 고안한 것입니다. 페르시아, 앗시리아, 이집트, 칼타고, 스키타이, 그리스, 로마, 게르만 사람들의 사형법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강도들과 암살자들과 반역자들을 처형할 때 사용했습니다. 노예들이 죄수가 되었을 때 처벌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중간 부분에 나무로 된 막대나 뿔 같은 것이 튀어 나와 처형된 죄수의 몸이 그 위에 걸쳐졌습니다. 십자가는 높이가 약3m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서는 죄수의 옷이 벗겨졌습니다. 이 옷들은 집행자들에게 부수입이었습니다. 죄인은 사지가 쭉 뻗게 된 상태에서 십자가에 묶였습니다. 커다란 쇠못이 팔과 다리를 박았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불쌍한 죄수는 죽을 때까지 방치되었습니다. 보통 죽는데 2-3일이 소요되었습니다. 죄수가 죽은 후 그 시체는 굶주린 새나 야수들에 의해 뜯어먹게 버려졌습니다.

히브리서 13:11-13절을 보면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출발점입니다.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음으로 구원의 기초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골고다는 치욕의 장소입니다. 골고다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수치의 장소이며, 저주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저주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고, 사람들의 오랜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장소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생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골고다의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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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구레네 시몬(마태복음27:32)

십자가 죽음으로 정죄된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가다가 구레네 사람 시몬(Sivmwn)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가시다가 기진맥진했습니다. 예수님은 밤새 불법재판과 기획재판으로 인해서 육체적으로 심히 탈진했습니다. 그래서 멀리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때 구레네 시몬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시몬을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했습니다. ‘억지로 같이 가게 하다’ 앙가류오(ajggareuvw)는 페르샤어에서 유래했는데, ‘억지로…시키다’입니다. 당시에는 급한 일들을 보내려고 하여도 우체국이 없었습니다. 고레스왕은 왕의 명령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제국의 각 지역에 전달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모든 대로를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기사들을 배치하였습니다. 배치된 기사는 그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기사에게,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전해 줌으로써 정보를 신속하고 안전하게 전달하였습니다. 페르샤의 종복이나 사신은 필요할 경우에는 말, 선박, 심지어 그가 만나는 사람들까지도 강제로 징용하여 일을 시킬 권리가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징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인들은 예수님이 쓰러지셨을 때 속국에 대한 명령권을 행사했습니다.

시몬은 아프리카에 있는 구레네로부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기독교회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로마서16:13을 보면 바울의 문안인사가 나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했습니다. 구레네 시몬과 그의 아내와 아들 알렉산더 루포가 로마교회의 구성원이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도록 했지만, 시몬에게는 큰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어느 누구도 그 무거운 십자가를 같이 지고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도왔습니다. 시몬은 처음에 마지못해서 십자가를 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있었던 주님의 말씀과 행동에 의해서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몬의 십자가는 처음에는 억지로 했지만, 자신과 가족과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복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왕국을 사모하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같이 지려하는 사람은 많이 없었고, 현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납니까?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맛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판에 뛰어드는 목사들도 생기고 돈만을 아는 목회자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으로 다시 회귀하고 있는 아이러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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