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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
  2. 2015.04.02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는 주님
  3. 2015.03.31
    사울(바울)의 소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로마서1:5-6)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인간들의 부르심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들은 어떤 사람을 불러서 평생을 가지 못합니다. 조금만 결점이 있거나 흠이 있으면 가차없이 잘라버립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부름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영원합니다. 웨스트민스터101항과 2항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그 모든 사람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신다. 그래서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에로 인도하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에 관하여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그들에게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 또한 그들의 의지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동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 그렇지만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나아오게 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는 것이다.

이 유효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값없고 특별한 은혜로만 되는 것이며 결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미리 하나님이 보시고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하고 새롭게 된 연후에는 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가 있게 되며 또한 이 부르심 가운데서 제공되며 전달된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또한 104항을 보면

 

택함을 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말씀의 전도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으며, 성령의 어떤 일반적인 역사들을 체험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에게로 참되게 나아오는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구원받을 수가 없다. 또한 기독교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가 없으며 그들이 본성의 빛과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계율에 따라서 그들의 생활을 열심히 꾸려 나간다고 할지라도 구원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단언하며 주장하는 것은 아주 악하며 가증된 일이다.

 

고 했습니다. 이 고백문들은 사람의 거듭남을 통한 유효한 부르심의 성경적 교리의 본질을 핵심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어떤 효과가 있습니까? 어떤 혜택이 주어지며, 어떤 상태에 돌입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이루어집니다(8:28-29, 딤후1:9).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은 그 기원이 하늘입니다(3:1). 그 특징이 거룩합니다(딤후1:9). 한 번 부르셨으면 변경할 수 없습니다(11:29, 고전1:8-9, 살전5:23-24). 그 목적지는 하늘에 있습니다(3:14).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죄인(고전1:26-30)을 그리스도와의 교제(고전1:9)로 부르십니다.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하선 빛에 들어가게 하십니다(벧전2:9). 그를 불러 그의 나라와 영광에 들어가게 하십니다(살전2:12, 살후2:14, 벧전5:10). 그리고 마침내는 어린양의 종말론적인 혼인 잔치(19:9)와 영생(딤전6:12)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 부르심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로(5:13), 한 소망으로(4:4), 거룩으로(살전4:7, 1:7, 고전1:2), 복을 위해 고난을 참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로(벧전2:21, 3:9), 그리고 화평한 인간 사회 관계로(고전7:15, 3:15)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도록(4:1) 권고를 받고 있습니다(Reymond, 2004, 905-907).

우리는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부르심은 영원한 부르심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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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사도행전9:10-18)

다메섹은Damaskov"(다마스코스)은 시리아의 아주 오래된(창14:15)도시입니다. 당시만 해도 상당히 번영한 도시였습니다. 현재도 시리아의 수도로서 약600만명이되는 큰 도시입니다. 유대인들과 시리아는 역사적으로 많은 마찰이 있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서 시리아의 다메섹까지 성도들이 피하며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있던 제자였습니다. 아나니아에게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직가라는 거리의 유다집에서 다소사람 사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가 기도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기도중에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보게 될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사울에 대해서 들은 정보를 말했습니다. 즉 성도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리아에 온 것도 주의 성도를 체포하러 온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지금 네가 알고 있는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신 나의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서 많은 해를 당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유다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안수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라 불렀습니다. 네가 다메섹으로 오던 길에서 만났던 주께서 나를 보내셨다. 예수께서 나를 보내시어 너로 다시 보게 하셨다. 성령으로 너를 충만하게 하신다고 하면서 사울에게 안수를 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즉시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울의 회심은 극적입니다. 가말리엘로부터 철저한 유대의 교육을 받아 누구도 그를 주의 제자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그에게 주님께서는 스데반의 순교를 목도하게 하시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조직적으로 하려는 그를 불러서 엎드리게 하시고 다메섹의 유다, 아나니아를 통해서 사울을 회심하게 했습니다. 사울은 이제 비로소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1절을 보면 ‘주의 제자’(tou;" maqhta;" tou' kurivou/투스 마쎄타스 투 퀴리우), ‘그 도를 좇는 사람들’(tina" th'" oJdou' o[nta"/티나스 테스 호두 온타스/2절), ‘주의 성도(들)’(toi'" aJgivoi" sou/토이스 하기오이스 수/13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tou;" ejpikaloumevnou" to; o[nomav sou/투스 에피칼루메누스 토 오노마 수/14절) 대열에 사울도 서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신실한 주의 사람인 다메섹사람입니다(행22:12). 사울을 바울되게 한 사람 중에 아나니아는 사울의 회심이야기에서 잠깐 나왔다가 사라집니다. 사울을 첫형제로서 환영해준 첫 기독교인입니다. 주의 사명을 사울에게 충실히 전해 준 사람으로서 결코 작지 않은 사명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큰 교회들의 목회자들과 작은 교회목회자들을 과연 같이 취급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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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바울)의 소명(사도행전9:1-9)

사을(바울)의 유대교에 대한 충성심은 여전했습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 가표를 던진 사울은 이제 그 여세를 몰아 시리아 지방으로 피한 성도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가서 시리아의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공문은 최근 예루살렘에서 소요사태를 일으킨 예수의 제자들은 발견하는 즉시 남녀를 불문하고 결박해서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했습니다(1-2). 그런데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하늘에서 빛이 갑자기 사울을 둘러서 비추었습니다. 순간 사울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때 사울을 부르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말씀하시는 정체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들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 일로 인해서 눈은 떴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같이 가던 일행에 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을 볼 수 없었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사울은 이 일을 직접 당했습니다.

사울의 소명과 회심은 극적이었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면서부터 시작합니다.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7:58), “사울이 그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8:1), “사울이 주위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행9:1).사울자신은 당시 가장 옳다고 생각한 유대교에 대하여 충성코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 생각이었습니다. 주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본인의 계획은 유대교였지만, 주님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본인은 유대교가 옳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성경적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다메섹으로 피한 주의 제자들을 핍박하려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나의 제자들을 왜 핍박하느냐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큰 곤경에 처했습니다. 일곱 집사를 세웠는데, 순교당했습니다. 산헤드린은 신이 나서 무차별공격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 중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증거 하는 열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그런 상황에 다메섹도상에서 사울이 ‘주 앞에 엎드러졌다’는 것은 이후에 있을 세계 선교에 가장 중요한 획을 그은 것입니다. ‘핍박자 사울’이 ‘선포자 사울’로 변한 그 길에는 주님께서 계셨습니다. 누구보다 예루살렘을 주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훼방하는 기구가 가장 큰 도구가 되는 계기였습니다.

사울의 이러한 회심은 이방을 위해서 큰 빛이었습니다. 다메섹의 주님의 제자들을 체포하려는 그 열심이 바뀌어 이방에서 마귀를 결박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1세기에 사도바울은 유명한 사도요, 유명한 선교사였습니다. 사도바울을 부르심으로서 민족저그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복음전파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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