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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2.12
    소망할 수 없는 중에 믿은 아브라함
  2. 2019.11.09
    바울의 아브라함에 대한 견해

소망할 수 없는 중에 믿은 아브라함(로마서4:13-17)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o}" par j ejlpivda ejp j ejlpivdi ejpivsteusen/호스 파라 엘피다 에피 엘피디 에피스테우센/이사람이(아브라함) 소망할 수 없는 중에 소망을 가지고 믿었다.

 

믿다/pisteuvw/pisteûo는 고전 헬라어문헌에서 신뢰하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했다는 말입니다. 사람으로서 불가능의 상태는 현재의 어떤 것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의학적으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들,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 홍해가 갈라진다든지(14:21-23), 태양이 뒤로 돈다든지(10:12), 하늘에서 약300만 명분의 만나가 40년간 꾸준히 내린다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불치의 병에 걸리거나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재난을 당하다든지 할 때 우리들은 불가능에 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동양에서 서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까지 생각은 하고 있지만, 사람들로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가능(impossible)에 도전한다는 것은 사실에는 맞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임, 정확히 말하면 사라의 불임은 불가능입니다. 사라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소망이라는 것은 어쩌면 막연한 꿈일 수 있습니다.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일도 소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가능한 것들을 사람들은 소망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전혀 소망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에게 자녀를 가진다는 것은 꿈일 뿐 현실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소망할 수 없는 것을 소망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신 사람의 은혜입니다. 전혀 소망할 수 없는 것을 소망하는 것, 하나님의 사람들만 가능합니다. 무엇으로 소망할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으로 불가능해서 전혀 소망할 수 없는 것들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살이나 되어서 자기의 몸이 이미 끝났음을 알았습니다. 사라의 ()도 이미 불임상태로 끝났음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믿음이 전혀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이루어주실 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소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믿음이 견고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그러함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바울사도는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신 것을 오늘 우리의 믿음도 똑같이 의로 여기신다고 논증했습니다. 아브라함만 의로 여기신것만이 아니라 의로 여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예수님 사역의 두 정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지심과 부활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지심은 인간의 죄의값을 대신 치룬 것입니다. 칭의의 전제조건인 순결상태의 획득을 위한 것입니다. 부활은 칭의(외롭다하심)의 선포자로서의 등장을 위한 하나님편의 약속이행입니다. 소망할 수 없는 중에 믿은 사람들의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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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아브라함에 대한 견해(로마서4:1-25)

 

인류사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부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는데 있어서 한 변법을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전까지는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방법으로 모든 인간을 대하셨습니다. 즉 한 나라나 한 인물을 노아를 제외하고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불순종했을 때, 인류는 홍수로 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부름으로 이 세계적인 접근방식은 바뀌었습니다. 보편적인 방법이 아니라 특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인간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개별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러하심의 의도는 새로운 인간을 길러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여 나라를 선택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역사 가운데서 그의 피조 된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장들을 구체화하시고, 계시하시며, 유효 있게 하시고, 법적으로 기반 닦으시고, 이행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도래는 하나님의 성품의 통합적인 구원사역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이 세상에 임하심은 인류의 구속사에 필연적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성경에서 또는 유대교사상에 있어서도 아주 큰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언약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의 정체성 형성에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역할을 아브라함이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나 성도들에게 있어서 믿음과 순종을 생생하게 인격화시킨 상징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 대한 유대인들과 우리와의 견해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견해는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에게서 듣고 배운 것으로서,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육신의 조상이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연코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논증은 모든 구원받는 자는 아브라함과 동일한 방법으로 의롭게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신앙에 의해서 의롭게 된 것이지, 행위에 의해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위란 율법과 이 세상의 법에 저촉되지 않으며 살아간 행위로 소위 말해서 착한 일을 말합니다. 이 착한 일을 쌓아두는 것, 즉 공적행위(功績行爲)를 말합니다.

오늘의 우리나라도 조상들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소위 세간비를 세워서 우리조상 몇 대조 누구가 조선시대, 또는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 높은 벼슬을 했다하여 족보를 만들어서 큰 산 높은 곳에 비석을 세웁니다. 사람들은 그 조상이 자신들에게 복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앞에 제사합니다. 즉 유명했던 조상들의 행적이, 오늘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것이 유대교적사상입니다.

우리말 속담에 따논 당상(堂上)’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떼어 놓은 당상이 변하거나 다른 데로 갈 리 없다는 데서, 일이 확실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가만히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후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자동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입니다. 할례와 율법이 있는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적인 특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할례와 율법 밖에 있기 때문에 언약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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