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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예지와 예정(로마서 9:6-13)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창세 이래 아담 이후, 노아 이후부터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었더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는 이중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요소와 긍정적인 요소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 안에는 참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구원은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안에 참된 이스라엘이 있다는 말입니다.

 

통상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자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란 그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어떤 요소(예를 들면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자녀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요한복음1:13절을 보면 애초에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만 내 자녀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스라엘’이라는 공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스마엘=에서=유대인…’이라는 사람들이 끼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100%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다가 영원한 구원을 놓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거부하는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정에 대하여 예지적 견해(선견, 앞선 지식)라는 입장을 받아들여버립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입니다. 예지적 견해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일지, 거절할지를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택하기도 전에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선택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지식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을 선택하려는 사실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들이란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나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은 전혀 관계가 없게 됩니다. 이 견해에는 하나님의 결정에 관한 자의적 요소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명백히 어떤 잘못된 행위로부터도 벗어나 계십니다. 우리에 대한 궁극적 심판의 기초는 그리스도를 배척하느냐 아니면 받아들이느냐 하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로마서8:29-30절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의 豫知에서 시작하여 신자들의 영화에까지 이르는 일종의 순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지적 견해에서 볼 때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예지가 예정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이 구절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선택할 것을 미리 아신 그 지식에 근거하여 선택 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언급되어 있지도 않고 암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들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여기에서 하나님이 예지를 가지셨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전혀 모르고 계시는 사람들을 선택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시기 위하여 먼저 야곱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시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의 선택을 근거로 야곱을 택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서8장에 나오는 예지-예정의 순서에 대해서는 예지적 견해와 더불어 논쟁거리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구절에 나타나고 있는 사건들의 순서는 예지-예정-부르심-칭의-영화의 순서입니다. 바울사도가 여기에서 “부르심”이라는 표현을 통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한 가지 방법 이상으로 설명합니다.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을 발견합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그것을 듣는 사람마다 부르심을 받거나 그리스도 앞으로 초청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외적 부르심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들을 수 없는 귓가에 복음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외적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만이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칭의(稱義/justification)는 믿음으로 연유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외적전파를 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믿음으로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모든 자들을 의롭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여기에서 모두를 첨가한다면 이 구절에 있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게 됩니다. 바울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 가운데 일부만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지적 견해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예정이 사람들의 외적 부르심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할지를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하신다면 어떻게 예정된 자들 가운데 오직 일부만이 부르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정확하게 아시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만 부르시는데. 부르심을 받지도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셔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예정 받은 자들 가운데 일부가 부르심을 받지도 않고 예정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르심에 반응할 것을 미리 아신 지식에 근거하여 예정하시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부르심이 없는 데에 대하여 아무도 응답하는 사람이 없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예지하실 수는 없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결코 일부라는 말을 내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황금사슬은(롬8:29,30) 필연적으로 모두라는 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황금사슬에 일부라는 말을 첨가시킨다면 그 결과는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에 치명적이 되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부르시지도 않은 자들을 예정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즉 예지적 견해는 하나님의 예정이 복음의 부르심에 대한 사람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하고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부르심 없이도 예정되었다면 그 견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 됩니다. 모두라는 말을 덧붙여도 역시 예지적 견해에 치명적 결과입니다. 이러한 난제는 칭의에 대한 부르심의 관계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만일 부르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된다면 그 구절은 아래의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a.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의롭게 된다. b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두 의롭게 된다. a를 취한다면 복음을 들은 적이 있는 각 사람은 모두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를 견지하고 있는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음을 들은 사람마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인 구원론자 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든지 안 들었든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예정에 관한 주된 논쟁이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예지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다 만인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외부적으로 복음(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을 듣는 사람들 중에도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아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a의 입장은 예지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개혁주의적 견해의 옹호자들에게나 모두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의롭게 된다는 b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란 무엇입니까? 외적 부르심은 복음전파입니다. 복음전파는 인간인 우리가 하는 어떤 일입니다. 외적 부르심은 성경을 읽음으로 “들을 수도”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이 기록한 하나의 문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외적입니다.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 속에서 내적으로 역사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에 즉각적인 영향력을 일으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는 단지 외적으로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말들이 마음속에 파고들 수 있을지는 모르나 나의 능력으로 그렇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내적으로 부르실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믿음의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즉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b의 입장이 사도의 의도였다면 그 의미는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내적으로 부르신 모든 자들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모든 자들이 내적 부르심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예지에는 인간이 택하는 자유로운 결정에 대한 단순한 선지식(先知識) 이상의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가 복음에 반응할 것이며 누가 반응하지 않을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단순한 수동적인 방관자의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구를 내적으로 부르셔야 할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내적으로 부르신 모든 자들을 또한 하나님은 의롭게 하실 것입니다. 즉 황금사슬은 하나님께서 내적 부르심을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적 부르심을 주시기로 예정하신 모든 자들은 의롭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보장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내적 부르심을 통하여 택한 자들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b의 입장이 황금사슬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으신 어떤 종류의 부르심을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의롭게 되는 것이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므로, 부르심이란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 깊은 행위라는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로 예정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예정되지 않았는가? 그 해답은 인간 속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있는가? 예지적 견해의 옹호자들은, 하나님이 오직 일부의 사람들만을 내적으로 부르신 이유는 누가 내적 부르심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누가 반응하지 않을지를 하나님이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적 부르심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 부르심에 호의를 가지고 반응할 것을 미리 아신 자들에게만 내적소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 가운데는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가?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어떤 특권이라도 있는가? 내적 부르심이 자신의 힘으로 거기에 반응할 것을 아신 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실질적 능력이 없는 내부적 영향력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외적 부르심을 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는 어떤 특권을 일부 사람들에게만 예정하셨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인간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영향력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내적 부르심이 전혀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 아니라면 구원을 위하여 아무런 의미도 없고 황금사슬의 무의미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 사람들이 믿기 전 곧 믿음으로 반응하기 전에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적 부르심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어떤 특권을 예정하셨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인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슨 역할을 합니까? 이러한 dilemma는 예지적 견해에 있어서는 결코 달랠 수 없는 큰 고통이 될 것입니다(R.C.Sproul, 1998, 126-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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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바울의 근심과 고통(로마서 9:1-5)

 

로마서는 크게 네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a. 서문 1:1~17

b. 구원과 교리 1:18~1l:36

c. 그리스도인의 삶 12:1~15:13

d. 결론 15:14~16:27

바울사도는 1:18~32에서 이방인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2:1~3:2에서는 유대인의 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방인-유대인)의 죄의 심각성과 심판의 불가피성을 3:3~20까지 부각(浮刻)시켰습니다. 다음으로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3:21~5:11에서, 5:12~8:39에서는 은혜로 인한 구원을 강조했습니다. 9장에서 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김상훈 2006, 143).

특권(privilege)이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 또는 국가기관에 대하여 인정하는 특별한 권리나 이익 또는 의무의 면제입니다. 그래서 특권은 일부에게만 해당됩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특권이란 한정된 권리입니다. 그래서 자칫 특권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마음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는 합니다. 이스라엘은 창조주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었습니다. 수천 년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일상화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버리고, 이방사람들을 버리면서까지 이스라엘만을 위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순종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바라심대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특권이 있기 때문에 괜찮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특권은 위선적인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일차로 유대인의 회당을 찾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저주를 받아에서 저주/ajnavqema 는 고전 헬라어문헌에서 신들의 진노에 바쳐지는 것, (파멸에) 저주의 힘 아래로 떨어진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70인역본에서는 헌신, 금지, 저주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사도의 논증에 의하면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동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어디에 나타나 있습니까?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의 구원을 바라고 있음이 간절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바울의 심정은 정말 간절합니다(1-3). 그것은 바울사도의 근심과 고통으로 이어집니다(3).

어쩌면 특권이 그들을 이상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특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저희들은 자신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엄청 많습니다. ‘우리교회는, 우리교단은, 우리목사는, 우리들은, 우리들의 공동체는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과 같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And

구속과 하나님의 관계(로마서 9:1-33)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구속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속전(그의 피 혹은 죽으심)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예수님 사역의 성격을 구속적이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대속물(luvtron/rûitron)로 주시려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20:28/10:45).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속(救贖)으로 언급되었습니다(1:68/2:38/9:12). 데이스만(Deissmann)은 이에 대하여

1세기에 희랍어 luvtron(ransom/속전)이란 말을 들을 때에 그것은 의당히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지불된 노예매입금으로 생각했다. 86, 100, 91년 또는 107년에 노예해방과 관련된 Oxyrhynchus에서 나온 3문헌이 다 이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많은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의 속전(a random)으로서 사탄에게 지불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에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풀어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바실, 두 분의 그레고리, 알렉산드리아의 시릴, 다마스커스의 존, 힐라리, 루피누스, 제롬, 어거스틴, 레오 대제와 같은 위인들, 그리고 버나드와 루터와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사단을 파멸시키는 일로 이해하는 이러한 견해는 성경적인 근거가 부족했습니다. 그리하여 점차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과연 누구에게 속전으로 지불되었는가? 물론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속전으로서 하나님께 지불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함으로써 그의 거룩하심과 공의가 손상되었기 때문입니다. Anselm은 이와 같은 교부들의 견해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형벌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빚을 지지 않은 만큼 인간이 갚아야 할 모든 것은 하나님께 빚을 진 것이지, 마귀에게 진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역은 구속의 성격상 하나님을 지향하였음을 우리가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신 대속물은 사단에게 지불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지불한 것입니다. 상환을 요구하는 채무(債務)는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기인된 것입니다. 사단은 죄인에게 하등의 법적요구권이 없습니다. 죄인이 석방되려고 사단에게 무엇을 지불할 필요는 전연 없다는 것입니다. Shedd하나님의 자비가 사람을 하나님의 공의에서부터 속량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단에게도 속박되어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Shedd

사단에게 포로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적 효험에 관계하기보다는 성령의 역사에 관계된 것이다. 사단의 속박에서부터의 구출은 칭의 역사라기보다는 성화의 역사의 일부이다. 사탄의 포로에서의 구출은 다른 구출 뒤에 온다. 즉 구출의 성질상, 속죄의 피에 의해 공의의 주장에서 부터의 일차적언 구속이 있은 연후에야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죄와 사단의 포로 빛 속박에서부터의 구속이 가능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Shedd의 의견과 일치하지만, Hodge는 다수의 성경귀절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율법의 형벌과 율법자체와 능력으로서의 죄와 사단과 그러고 모든 악에서부터 구속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율법의 형벌에서부터의 구속 또는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3:13절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함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자체에서 구속함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7:4).

 

 

 

 

 

And

유대인의 구원문제

 

그리스도교는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Levant(동부지중해 연안제국)종교로 출발했습니다. 이후에 그리스도교는 세련되었다고 하는 서구인으로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사막의 원주민에 이르는 거의 세계의 모든 국가와 모든 민족의 신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그 신자를 뺏기지 않은 종교가 하나도 없습니다(Stephen Neil 1999, 9, 15).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때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는 땅들은 정치적으로 로마가 다스렸습니다(Williston Walker 2008, 17). 사도요한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요1:11). 그런데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자기 땅, 자기 백성은 물론 유대와 유대인입니다.

유대교라고 하면 유대인들의 종교입니다. 유대교가 생겨난 것은 바벨론 유수로부터였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란 AD 70년까지만 하더라도 구약의 사상들을 수정하거나 확장시킨 것을 의미했습니다. 70년에 있었던 성전 파괴 이후에야 비로소 유대교의 존재가 확연해졌습니다. 구약에서 유대인이란 유다 왕국의 백성을 의미했습니다(느1 :2). 그러나 신약에서 유대인이란 유대교 신앙을 지닌 자 혹은 예수님과 그 복음을 대적하던 무리들을 가리켰습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난 신약성경에서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긋지긋하게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고 내쳤습니다.

William Barclay는 9-11장에서 사도바울은 교회가 해결했어야 할 가장 곤란한 문제 즉 유대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은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중에서 독특하고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자 그들은 바로 배척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처형까지 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paradox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부족과 아울러 그들의 잘못된 신앙관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9장에서 11장은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바울은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은 자기 형제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버릴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유대인이 선민이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입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성전의 예배와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러운 임재까지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인간 족보상으로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속에서 유대인의 특별한 위치를 바울은 전체문제의 원리이며 시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my-way를 외친지가 수천 년이 지났습니다. 바벨론 포로부터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my-way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이 하나의 민족으로서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국민인 것이 사실이나 유대인 모두가 다 그를 배척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들 중 얼마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이나 로마제국 내에 있었던 초기 신자는 모두가 다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역사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아브라함으로부터의 육적인 혈통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유대인의 역사에는 여러 번 되풀이 하여 하나님의 선발과정(선택)이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 아브라함의 육적자손 중 어떤 이들은 선택되고 어떤 이들은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출생한 이삭은 선택되었습니다. 단순히 자연적인 과정과 욕망을 통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은 선택되지 못했습니다. 이삭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아들 야곱은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쌍둥이인 에서는 선택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선택은 인간의 공로와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선택된 사람들이 어떤 권리로서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의 지혜와 권능의 일입니다.

참으로 선택된 백성은 절대로 전체민족이 아닙니다. 의로운 남아있는 자들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척할 때에도 하나님께 신실한 소수자이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모든 백성이 바알을 따라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신실했던 7000명의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교훈의 본질적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롬9:27,사10:22)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도는 아무 때라도 전체 백성이 선택된 백성이었던 때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항상 하나님 편에서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러하심이 과연 공정하시느냐는 것이 사람들의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버린다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이냐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 잘못으로 기인되지 않고 누구는 택함을 받고 누구는 버림을 받는다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한다고 해서 어떻게 그들을 비난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어떻게 그들을 칭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는 이러한 논쟁은 우리를 망설이게 할뿐 아니라 위축하게 만듭니다. 실로 바울의 변론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좋아하시는 것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결정이 제아무리 난해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반문할 아무런 권리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진흙은 그 옹기장이에게 반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이 자기를 만든 장인에게 반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장인이 두 개의 그릇을 만들 때 하나는 영광스러운 목적을 위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한 목적을 위해 만들 수 있으되 그 그릇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 관해 가지고 계신 권리라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로마서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바로는 하나님의 보복의 능력을 과시하는 도구가 되게 하기 위하여 역사의 무대 위에 올라서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의 선택에 관하여 미리 경고를 받았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가 말한 대로“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호1:10,롬9: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 배척은 예사롭고 목적이 없으며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문은 이방인에게 열려지기 위해서 유대인에게는 한시적으로 닫힌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마음을 굳게 하고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면 하나님께서 그리하셨고 그것은 이방인들을 신앙 안으로 들어오게 할 길을 열어 줄 궁극적 목적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불필요한 모든 것을 다 떼어놓고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어느 사람이나 어느 민족에게 대하여도 당신이 하고 싶은 때 할 수 있으며 이방인들이 들어오게 되기 위해서 유대인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눈을 감게 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까닭 없이 유대인들이 잘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유대인들에게 근본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근본적인 실수는 그들이 인간적 노력 즉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그들은 혼자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고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하나님 말씀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길이라는 것과 인간업적은 아무런 효험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야만 했습니다. 이사야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사28:16/롬10:11)고 했습니다. 요엘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욜2:32/롬10:13). 사실 아무도 하나님의 제언을 듣기 전에는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제언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한 인격적 업적방법을 줄기차게 고집했습니다. 그들은 행위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줄기차게 그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떻습니까? 이방인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마련한 것입니다. 이방인이 들어올 수 있게 허락되게끔 마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자만심을 갖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 감람나무 순과 같은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 구원을 스스로 이룩하지 못합니다. 사실상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에게 의존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접붙인 가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와 줄기는 여전히 선민입니다. 이방인들의 선택됨과 유대인의 버림받음에 이방인들은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만은 곧 버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대로 영원히 쭉 가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갔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뒤늦게 자신들을 그런 관계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원을 하게끔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신32:21/롬10:19). 결국 이 방인들은 유대인이 구원을 얻게 하는 바로 그 수단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11:26). 구원하시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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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1-33에서 본 유대인의 미래

 

9장부터 11장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법은 역사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약속은 믿지 않는 나라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남은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그러했습니다. 현재에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불신앙으로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항상 거절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인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9: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11:1-6,26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구원은 언제나 믿음으로 받습니다. 이 법칙은 종족의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됩니다. 유대인의 불순종은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구원이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시기를 불어넣어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으로 안도했는지를 바울은 보여 주고 있습니다(11:11,30,31).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구원의 사건은 11:33-36의 찬양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구원의 길은 동일하게 이신칭의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하여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9장에 와서도 자기의 주제를 결코 망각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민족이라고 어떤 편견을 가지지 않습니다. 실상 9:3-5에서 어느 정도 확대된 형태로 열거된 “유대인들이 향유하는 특별한 이점들은 2:17,18, 3:1,2을 반영하였습니다. “참된 이스라엘이 된다는 의미는(9:6)는 2:28,29을 반영한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율법의 행위는 제쳐놓고 이신칭의를 왜 그렇게 강조했습니까? 바울사도는 9:6에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대체로 하나님의 가장 귀중한 약속을 오해하여서,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육의 후손을 위한 것이며, 따라서 그 약속의 성취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인간의 공로를 그 조건으로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인간의 마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본성적으로 교만해서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기”를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냐는 로마 교회 자체가 교리 상 순결할 필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교인들은 자신들의 확신이 국외자들 즉 불신의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 의하여 공격당할 때에 그 확신들을 방어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9-11장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선의의 초대가 여전히 유대인들에게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유대인에게서 손을 떼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즉 현 세대 혹은 은혜시대 전체를 통하여, 그들의 거절은 결코 그치지 않으며(9:6,27) 결코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며(10:21), 결코 절대적이거나 무제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11:14,26).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라도 긍휼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바울도 과거와 현재의 많은 유능한 학자들의 견해대로 9-11장의 기록 목적 중의 하나는 안류역사의 종국에 이르렀을 때, 혹은 거의 가까이 갔을 때, 그 때에 지상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나라 전체, 유대인의 무리, 전체 나라에 대하여 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폭넓은 불신 유대인의 종말적 회복이 될 것입니다.

Nazis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을 때인 1942년 3월 16일에 고백교회를 향해 행한 설교에서 슈미트(K. L. Schmidt)는 로마서 9~11장이 그 위험한 시대의 신앙열쇠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이 세 장에 걸쳐 나타난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소망이 암울한 어둠 속의 빛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그것은 단순한 계시의 반짝임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현현이었습니다. 9~11장에서 시종일관 하나님의 영광이 울려 퍼지고 있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비극에 깊이 개입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문제 미래 문제 유대인 문제는 동일한 문제’라고 했습니다. 얼핏 듣기에 이상해 보이는 이 진술은 로마서 9~11장에 대한 균형 잡힌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유대인의 불신앙 문제를 숙고하면서 결국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미래의 소망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 추론은 현재의 역사에 관한 어느 한 견지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강퍅해진 이스라엘의 현재상황은 진실로 하나님의 신실하심 복음 선포 속에 나타난 그 신실하심을 오히려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유대인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지금 복음을 통해 무엇을 행하고 계신가라는 선행문제에 좌우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각각의 생각대로 성경을 해석합니다. 자유주의, 세대주의, 시온주의, 보편주의, 근본주의 등 여러 각도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성경대로 해석한다고 하는데 자칫 성경에 자신들의 생각을 많이 가미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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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을 수 없다(로마서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요새 홍만표, 최유정 변호사로 정계와 법조계가 떠들썩합니다. 이미 SNS상에도 파렴치한 이 사람들의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과거 이명박 시절에 노무현전대통령을 기획 수사하여 언론에 일일이 알려서 언론수사로 수치심을 느끼게 한 그로 인하여 결국에는 죽음으로 몰고 가게 한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탈세와 변호사법 위반 혐의를 받고 27일에 검찰에 출두했습니다. 정운호 Nature Republic 대표의 전관 로비 의혹에 연루되었기 때문입니다. Nature Republic은 한국의 화장품 브랜드입니다. The Face Shop(한국의 화장품 업체로 LG생활건강의 자회사)중간 이사진들이 나와 Nature Republic을 2009년도에 창립했습니다. The Face Shop이 LG생활건강에 인수되면서 나머지 멤버들이 나와 만든 화장품 브랜드인 Nature Republic을 만들었습니다. 2009년 명동점을 시작으로 출시했습니다. 이 회사의 점포인 명동월드점이 입주하고 있는 건물은 한국에서 가장 비싼 부동산입니다.

과거 ‘특수통 검사’였던 그가 탐욕스런 ‘전관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변호사 개업4년 만에 형사처벌을 앞두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부장판사 출신인 최유정 변호사도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부당한 수임료 등에 관한 것들입니다. 100억 원이라 하니 통도 큽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1억-3억 원의 돈을 받으려면 한 직장에 평생을 바쳐야 합니다. 국민의 약90%이상이 그렇습니다. 한 달에 100만원 미만의 수입을 올리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현재 젊은 사람들은 아르바이트생이요, 비정규직이며, 제대로 된 직장이 없어서 난리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건당 수임료(受任料)가 100억 원이라니, 이 계통에 있는 사람들은 딴 나라 사람들 같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수많은 법조계의 비리를 담은 drama나 영화가 왜 흥행이 되는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법은 절대로 약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통상 법대로 하자고 하는데 법은 힘이 있는 사람편이지, 약자의 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상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보다 공평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법원의 상징은 평형저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법(法)이라는 단어는 ‘삼수’변에 ‘갈 거’자입니다. 모든 이치가 물이 흐르듯 흘러가야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개별적인 죄악과 사회적인 죄악 그리고 국가전체적인 죄악들이 법의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사회의 근거는 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렇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까지의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것이 이 세상사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죽이려고 쫓아오지만, 그전에 그들이 먼저 당합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고 유대인들을 진멸하려고 했지만(에3:12), 정작 죽임을 당한 사람은 하만이었습니다(에7:12). 바울사도가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면서 환난이나 곤고나…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나열했던 것들은 당시에 무시무시한 것들입니다. 당시의 무적 Roma의 형벌도구였으며, 이것을 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다른 어떤 피조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나열한 것 중 에는 초자연적인 것들도 있지만, 그런 것들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확고부동한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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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까(마서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말씀이 Roma에 계속 퍼지고 있었습니다. Roma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만 할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속주인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나온 기독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대로 놓아두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제재를 해야 할 것인가? Roma에는 그 자체의 종교가 있었습니다. Zeus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Roma사람들은 그 신들이 나라를 세우고 왕성하게 하여 대제국으로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신들의 도움으로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Roma에는 얼마나 신들이 많든지, 걸어다니면 발에 걸리는 것들이 신이라고 했습니다. Roma는 주전 27Augustus 때가 전성기였습니다. 그로부터 200년 년간 Roma는 참으로 평안하였습니다. 약간의 충돌이 국경에서 있었을 뿐, 내전도 없었고 경제는 번영했습니다. 따라서 문학과 예술도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법은 북아프리카에서 북해까지 그리고 아라비아에서 영국까지 적용되었습니다. 대제국이었습니다. Roma는 여러 민족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화는 사람들을 나약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도 원로원에서 선출하지 못했습니다. 군부에서 황제가 나왔습니다. 당연히 힘으로 밀어붙였습니다. 황제는 명분만 민주공화제였습니다. 실상은 독재였습니다. 황제의 철권정치였습니다. 이러다보니 사람들은 황제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최고의 권좌에 오르면 하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신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황제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도 행여 지진이나 전쟁에서 안 좋은 조짐이라도 보이면 여지없이 다른 곳에 눈을 돌리게 했습니다. 기독교가 있으니까 안 좋은 상황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사도가 이 말을 할때에 막연하게 이런 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나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를 쓰기이전에 이미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을 체험하였습니다. 외적으로 환난을 당하여 내적인 곤고를 느꼈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들이 수없이 밀려왔습니다. 왜 이런 못된 것들이 예나지금이나 성도들을 괴롭힙니까? 우리의 원수들이 주님과 우리사이를 단절시키고자 불리한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고백합니다.

남녀간의 사랑은 주고받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이나 내가 잘못할 때는 가차없이 끝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가면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탄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 예수믿니?’ 그런데 네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인데 예수께서는 아무조치도 취하시지 않지않아? 그러니까 소용이 없는거야.라고 하면서 우리들의 역경을 바라보며 하나님 믿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자꾸 빈정거립니다. 그리고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실제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고 우리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주님께 매여 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해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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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정죄할까?(마서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나치정권에서 Auschwitz 수용소 Guard로 근무한 94세의 Groening4년 징역형을 언도받았습니다. 2차세계 대전시, 독일의 Hitler와 일본의 의 군국주의자들의 잔혹상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앞으로는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우리 인류의 한 치부입니다. 수백만명을 학살한 그들은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들입니다.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슬픈 역사의 한장면입니다. 당시 Auschwitz 수용소에서 간수로 근무했었던, 94세의 Groening이 자신이 고백한 죄과에 대한 재판에서 4년 언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독일의 정부와 국민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죄과에 대한 엄격한 법적용으로 공평을 유지 하고져 하는 노력합니다. 이 재판을 받은 독일인은 1921년에 독일의 Lower Saxony에서 출생 했다고 합니다. Hitler가 위세를 떨칠 때, Waffen SS로 불렸던, 청년 유격대에 합류했습니다. 1942년부터 Auschwitz 수용소에서 근무 했습니다. 그의 임무는 감옥에 끌려온 죄수들을 상대로 압수한 현금을 주고 계산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그는 느낀바 있어, 당시 그런일을 한것을 후회하고, 공개적으로 Auschwitz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폭로했습니다. 그럼에도 전범이기 때문에 4년형의 형기를 언도받았습니다. 사실 94살의 4년형이란 감옥에서 인생을 끝내라는 형벌입니다.

 

법정에서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면 사람들은 판결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징역형을 살든지, 사형이라든지 등의 형벌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 형벌이 싫으면 죄를 짓지 않으면 됩니다. 사실 이 세상의 법정도 무섭습니다. 법이 사회와 격리시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과의 완전한 격리의 형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정죄는 두려운 것입니다. 정죄 katakrivnw/katakrîno/카타크리노는 유죄 선고하다입니다. 카타크리노는 Herodotus이래 ‘~에 불리한 판결을 내리다라는 뜻을 의미했습니다. 카타크리노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천벌이나 파멸을 말합니다. 인간의 재판에서는 이 단어가 형의 집행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판결만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형집행과 판결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16:16을 보면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정죄하셨습니다. 그 곳을 재로 만들어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영원한 정죄는 어느누구도 내릴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전혀 내릴 수 없습니다. 물론 죽어서 땅에 묻혔던 사람을 다시 파내어 형벌을 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산 사람의 분풀이에 불과합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라면 예외입니다. 죽었던 사람도 정죄할 수 있습니다. ‘누가tiv"/tîs는 의문대명사(疑問代名詞)입니다. 부정대명사(不定代名詞)입니다. 따라서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정죄할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누가 정죄할 수 있을까? 하고서 예수그스도의 죽으심, 부활, 승천하심, 그리고 심판석에 앉으심을 말했습니다. 이사야53:12을 보면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그의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사도의 논증으로는 우리들을 정죄할 분은 하나님 한분이신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자녀로 이미 정립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정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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