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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송사할까?(마서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송사하리요 ejgkalevsei/engkallêsei고소하다ejgkalevw/engkallêo의 미래동사 능동형 3인 단수형으로 그가 능히 송사할 수 없다입니다. ejgkalevw고전 Hella어 문헌에서의 최초의 의미는 마땅히 해야할이란 뜻이었습니다. 즉 당연하게 요구거나 청할 권리로서 요구하다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주장하다라는 의미로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고발(고소)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대개 실제적이거나 위협적인 법적인 소송절차를 나타내는 문맥에 나옵니다. 초대교회 당시 재판은 주로 시장에서 사도바울이 왜 세상법정에 소송을 제기한 그들을 신랄하게 말합니까? 당시의 로마 법정은 가난한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평민들은 쉽게 갈 수 없었습니다. 낮은 지위를 가진 자로서 법정에서 판결을 받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로마의 법정은 agora의 중심부에서 열렸습니다. agora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시민의 정치, 경제에 관련된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곳입니다. 아고라는 광장으로 시민총회나 공개재판의 관행이 일찍부터 있었던 그리스 도시국가(폴리스) 특유의 공공시설입니다. 시장 특히 불신자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로서는 큰 수치였습니다. 재판을 한 교회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시대에는 부자와 권력자들만 상대를 법정에 세울 수 있었습니다. 낮은 계급이 높은 계급을 고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살림이 망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높은 계급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수탈할 목적으로 재판을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성도들을 완전히 제거할 목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랬고, 초대교회를 싫어하는 무리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고발자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을 항상 각을 세워서 고발하려고 합니다. 스가랴3:1-4을 보면

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그때 사단도 그 우편에 섰습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고소할 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드디어 고소거리를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호와께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옷을 갈아 입혔습니다. 스가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사단은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여호수아를 대적했습니다. 그 모습을 여호와께서 스가랴에게 보이셨습니다(1). 그때 여호와께서 사단을 책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사단을 책망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단 앞에서 이스라엘이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하셨습니다(2). 그때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있었습니다(3). 그 모습을 보신 여호와께서 대제사장의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과를 제하여 버렸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셨습니다(4). 그때 스가랴가 정한 관을 그(여호수아) 머리에 씌우소서 소원하니까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웠습니다(5).

사실 대제사장은 정결해야 했습니다. 백성보다 정결해야 했습니다. 레위사람들보다 더 정결해야 했습니다. 성소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정결해야 했습니다. 제사장들보다 더 정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수치와 비난거리의 죄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습니다. 더러운 옷은 !yaiXoh'(하초임/그 더러운 옷)으로서 가장 간악하고 혐오스러운 성격의 더러음을 표현하는 강력한 히브리어입니다. 그런데 이 더러운 오물이 묻은 옷을 대제사장이 입었습니다. 스가랴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 이러한 옷을 입고 있음에 놀랐습니다. 거기에 이스라엘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단은 대제사장을 하나님 앞에서 강력하게 힐난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벌을 주어야 마땅하다고 참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옷을 갈아입히라고 했습니다. 죄를 깨끗이 제하셨습니다. 바로 단호하게 사단의 입을 막아버리셨습니다. 불은 Babylon의 포로를 상징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로 말한 것은 포로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한 것입니다. ‘더러운 옷을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입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부정함을 상징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부정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연회장에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Red Carpet을 밟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옷을 말끔하게 갈아입히셨습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몸이 부정했습니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였습니다. 예식적으로도 정결하지 못한 심히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몸과 예식적으로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거듭났습니다. 원고는 있는데 피고가 없어졌습니다. 원고인 사단은 어마어마한 law firm을 꾸려 이스라엘을 고소했는데, 피고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스라엘이 용서받은 것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는데 누가 우리를 고소하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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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대적할까?(마서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바울사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가정을 떠나 공동생활을 하려고 하면,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부딪힙니다. 아니 가정에서도 부딪힙니다. 우리보다 잘 나고, 우리보다 똑똑하며, 우리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탁월한 사람들을 부주기수로 만납니다. 당연히 이들과 우리가 같이 살다보면 부대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직접 대적하는 무리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사도바울 당시에 성도들을 박해하는 무리들은 지금보다 더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Roma인들이 핍박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성도들을 반기는 지역은 많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바울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그때만은 못해도 꾸준히 교회를 공격해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어떤 권세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여기에서 누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입니다. 사탄을 비롯해서 그의 비호를 받고 성도들을 괴롭히는 이 세상의 수많은 권세들입니다. 이 권세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세상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로, 지적으로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세들도 하나님의 성도들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영국의 주석가 Matthew Henry의 아버지인 Philip Henry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떠나기에 적합한 자가 되게 하시고, 또한 남아 있기에 적합한 자가 되게 하소서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날지 모릅니다. 우리의 미래는 항상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삶의 날이 많이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적게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살면서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대적하는 자가 상시 우리에게 적대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우리를 대적할 자가 실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있다하더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우리의 대적을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우주만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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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마서8:31-39)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

바울사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밖에 없는 자기아들을 내주신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은사/carivzomai/charîzomai값없이 주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것은 형벌의 장소에 내몬 것이요, 죽음의 장소에 내어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습니까? 괜찮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러셨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력이 이사야53장에 고스란히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인간의 비참함이 이 말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 양같이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벨론포로를 앞두고 한 말입니다. 유다는 바벨론의 압제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습니다. 다 양 같다고 했습니다. 양의 부정적인 측면을 말한 것입니다. 양을 비유하여 인간의 잘못됨을 말한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양이라 하면 긍정적인 면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양은 제멋대로 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18:12-13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양은 풀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오직 먹을 것을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나운 뿔이나 사나운 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습니다. 맹수를 만나면 꼼짝없이 물려 죽을 수밖에 없는데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오직 풀만 바라보고 나가기만 합니다.

이사야7장을 보면 유대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꾸 국제화를 시도했습니다. 앗수르와 가까이 지내려 했고, 시리아와 가까이 지내려고 했습니다. 애굽과 가까이 지내려했습니다. 국제화를 하려고 안달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 행하였습니다. 이사야7장을 보면 아하스가 유다의 왕이었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의 베가와 시리아의 르신이 연합하여 유다를 침범했습니다. 그때 아하스왕과 백성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왕과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더라 고 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아하스를 만나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침범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단호하게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했습니다. 자신만의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하스의 믿는 구석이 무엇입니까? 앗수르입니다. 당시의 앗수르는 유대의 북쪽에 있었습니다. 유대의 북쪽으로 북이스라엘, 아람, 그리고 앗수르였습니다. 아하스의 생각에는 대국인 앗수르와 동맹을 맺으면, 자신을 괴롭히는 북이스라엘과 아람을 거뜬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로서는 아하스의 제안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람과 북이스라엘과 유대를 치고 이집트를 공격하려고 했는데 유대가 동맹을 제안하니 너무나 좋았습니다. 아하스 zj;;a;/’āhāz란 뜻은 그가 붙잡았다란 의미입니다. 주전731-71616년간 유대의 12대 왕이면서 하나님을 붙잡지 않고 우상을 붙잡은 악한 왕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두 이스라엘 사람의 이름을 나온다. 아하스은 20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왕하16:2/ 대하28:11). 처음 3년간은 그의 아버지 요담(11대왕)과 공동통치를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주전741-725년까지 단독통치를 했습니다(왕하16:2/대하28:1). 곧 아하스는 가증한 우상숭배의 길을 좇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을 산채로 불태워 우상에게 바쳤습니다(왕하 16:3/대하28:2-4). 아람의 신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대하 28:22,23). 우상을 만들었습니다(2:8). 우상숭배를 위한 단을 만들어 숭배했습니다(왕하16:11-14). 대신 성전을 폐쇄시키고 산당을 세웠습니다(대하28:22-25). 결국 이로 인해서 쇠락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결과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일들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것을 교회로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And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마서8:31-39)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

어떤 사람이 그리 크지 않은 죄를 졌습니다. 그런데 법은 과도하리만치 이 사람의 형량을 엄중하게 적용시켰습니다. 죄에 비해서 말이 되지 않는 형량을 적용시켜서 이 사회와 격리시키려 했습니다.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 국가의 수반이 면회를 왔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 죄인에 대한 구명운동이 벌어졌습니다. 특별 변호사팀이 조직되었습니다. 특별검사들이 조직되어 다시 한 번 수사했습니다. 재판장은 재판장대로 심층 법리검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재판이 열리자마자 풀려났습니다.

바울사도는 이 일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까? 할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바울사도의 뜻은 이러한 일들이 우리를 어떠한 결과로 인도하는가?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사도는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누누이 말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율법아래에서 꼼짝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움직이거나 생각만 해도 율법을 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헛일이었습니다. 이방사람들과 똑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은 이방사람들이나 유대인이나 구원하시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온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상처투성이었습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얻어맞아서 상처투성이었습니다. 누구도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죄로부터 기인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비호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호(庇護)할 자신들도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의 추악하고 용서받지 못한 죄들을 모조리 용서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독생자를 그들의 주인으로 모시면 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왕 같지 않았습니다. 악독한 군주같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들과도 같지 않았습니다. 오직 죄인들만을 생각하는 왕입니다. 그는 그러면서도 모든 일에 능하셨습니다. 죽음도 이기시고 사망도 그 앞에서는 꼼짝을 못했습니다.

이런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라고 한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단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그것은 가정도 아니고 실재입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지를 위해서라면 능히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마치 항공모함이 수백 척과 달랑 소총하나 가지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이것은 game이 끝난 것입니다. 사탄의 제원(諸元)은 우수하고 어마어마한 것 같으나 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허세를 떨고 허풍을 치는 것이 사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game이 끝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결코 놓치지 않으십니다.

 

And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예지와 예정(마서8:26-30)

 

로마서8:29-30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도 혹은 계획의 또 다른 측면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proevgnw/proêgno/언약에 근거한 사랑) 이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하시고(prowvrisen/proôrisen),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prowvrisen) 또한 부르셨다(ejkavlesen/ekâllesen/역사 속에서)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먼저 영원한 계획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미리 아시고(마음에 두시고)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8:33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을 택함 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사실 택함 받은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구약시대 때 그렇게 많은 양들이 죽임을 당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제사도 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의 후손이 올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속죄가 필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아 때 홍수심판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언어를 혼잡케 한 바벨의 심판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러나 여인의 후손으로 구원하실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약속대로 자신의 땅에 오셨습니다. 약속대로, 약속대로, 약속대로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미리 아신(proevgnw/proêgno)이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언약에 두신 것입니다.

 

창세기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세기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출애굽기2: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시편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144:3;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예레미야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호세아13:5;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아모스3: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마태복음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고린도전서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디모데후서2: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

 

이상의 구절에서 동침하매, 택하였나니, 권념하셨더라 등 밑줄 친 구약성경의 단어들은 히브리 동사 [d'y:/yâdaʽ 끌어안다. 애정을 품다와 헬라어 ginwvskw/ginôsko ‘알다는 로마서8:29절의 proevgnw/프로에그노는 예지적(叡智的)의미보다는 야다기노스코와 유사한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사랑하신 이유가 그들의 믿음이나 선행이나 인내 혹은 그들에게서 비롯된 어떤 조건이나 원인을 내다본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누차 가르치고 있는 핵심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élite들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크다 할 이유가 없습니다. 괜찮다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의 선행이란 인간을 구원할만한 힘이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실 분은 예수그리스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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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로마서8:26-30)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사도신경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모는 면에서 우리 구속의 값을 치루기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였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의 그 멍에 아래 잡혀 있었는데 그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 주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 세력에 내맡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신 것이다”(히3:32)라는 말도 이러한 의미이다. 그가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죽지 않을 것임을 보증하셨고,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살도록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가 우리와 다른 것은 그는 죽으심으로서 자신이 삼킨바 되었는데 이는 그 깊은 연못가운데 빠진 것이 아니고 도리어 우리를 삼켜 버리려했던 그것을 삼켜 버렸다(벧전3:22). 그는 친히 죽음을 따랐지만 그 죽음의 세력에 압도당해 버린 것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의 쓰러진 상태를 보고 기뻐 날뛰었을 때 결정타를 가하셨다. 또한 그 목적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함이었다(히2:14-15). 이것이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첫 열매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또 다른 효과는 우리가 그것에 참여함으로서 그의 죽음은 우리의 지상적인 지체가 죽어버림으로서 더 이상 효능을 다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 우리 안에 있는 몇 사람을 죽여 버림으로서 번영과 질서를 맺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사 지낸바 된 것도 같은 효과를 가지는데 우리가 그것에 참여함으로서 그와 함께 죄에 대하여 묻혀 버리게 된다. 바울사도는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느니라”(롬6:5). 또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죄에 대하여 장사 되었느니라”(롬 6:4). 이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뭇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뭇박히게 하기 위함이요(갈2:19/6:14), 이는 우리가 그와 함께 죽기 위함인 것이다(골3:3) 라는 등의 말들로서 바울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범으로만 삼으라고 권면하는 것만 아니고 그의 죽음을 무용하고 열매 없는 것으로 돌리고자 하는 뜻이 없는 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야 할 효과가 그 죽음 속에 있다는 것까지 명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에 이중적인 복을 누리게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묶여 있던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과 우리 육신의 죽음 등 두 가지다.

라고 했습니다.

 

John Murray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경이로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탁월하게 시현(示顯)된다. 그리스도가 주어지고 보내심을 받은 것은 성부의 뜻에 의해서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뜻에 의해서였다. 그리스도는 구원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유일한 선택은 온 인류가 멸망 받는 것이었다(요3:16). 예수만이 홀로 구원의 대장이시다. 그분 외에 그 누구도 구속을 수행하지 않았으며, 그분 외에 그 누구도 죄를 위해 속죄하지 않았고, 화목제물이 되지 않았으며, 화목을 행하지 않았다. 우리 인간들이 이 장중한 성취에 어떤 부분을 담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것이겠는가!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9:26).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단 하나의 유일 무이성, 그것이 나타내는 은혜의 지극히 크심, 그것이 가져오는 구원의 완전한 효력을 바라보는 바로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엡2:7)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과 작용을 우리들이 짓는 어떤 구성요소에 의해 조건 지으려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인지 드러난다. 우리가 죄 가운데 죽었을 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라는 바울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지, 그 어떠한 것도, 그 어떠한 사람도 개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의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교도 그들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선한 행위자체가 구원에 개입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속(代贖)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이교도도 죽은 이후로 부활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귀에 속고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가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창세기11장을 보면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각종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스스로의 구원, 심판배제 등 하나님과 관계된 것을 모두 끓으려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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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구원 주 예수그리스도(로마서8:26-30)

 

마태복음1:21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4:12을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보아도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자체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는 저희 죄에서 aJmartiva/hamartîa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마르티아aJmartavnw/hamartâno라는 고전 헬라문헌에서 Homer 이래 빗맞추다, 놓치다, 실수하다, 실패하다이며 비유적으로, ‘지적으로 부족하다, 잘못하다, 등 도덕적으로, ’잘못(그릇) 행하다'를 의미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하마르티아표적(과녁)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표적에서 빗나간 존재입니다. 단지 이 빗나감은 수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총은 얼마든지 수정을 할 수 있습니다. 가늠자를 수정하여 원하는 표적을 맞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이미 쏜살입니다. 연습이 없습니다. 실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는 이 세상에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죄를 인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Calvin의 기독교강요 제2167항의 십자가에 달림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는 자신을 저주에 내맡겼다는 뜻이 된다. 그래야했던 것이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아니, 오히려 우리 위에 임한 모든 저주가 그에게 옮겨짐으로서 우리로부터 제거되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율법에도 예시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 죄를 드리는 제물과 보상을아쉬모트라고 불렀다. 이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성경은 죄로 인해 저주를 받은 정화의 제물과 같은 것임을 암시하려 했다. 모세의 제사에서 비유적으로 묘사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완전한 보상을 치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v'a:/’âsham) 즉 선지자들의 말 그대로(53:10), 죄를 위한 보상적 제물로 드렸는데 그 때문에 우리의 더러움과 형벌은 다소 제거되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은 그치게 된다. 사도는 이 사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고 가르침으로서 더욱 분명하게 증거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일체의 허물도 없는 전혀 무죄한 분이지만 우리의 불의함으로 인해 부끄러움과 욕을 친히 담당하시고 그 대신 우리에게는 그의 순결로 옷 입혀 주셨기 때문이다. 바울이 죄에 판하여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셨느니라”(8:3)고 한 것도 같은 의미이다. 아버지께서는 죄에 대한 저주가 그리스도의 육신에 옮겨질 때 죄의 세력을 멸하셨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희생을 통하여 모든 보상을 다 치르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보상의 제물로서의 죽음을 아버지께 드리셨다는 것이다. 이제 선지자의 여호와께서는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라는 말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즉 불의로 인한 더러움을 제하여 버리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셨다. 사도의 증거와 같이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가 이를 상징해 준다(3:13-14). 베드로역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못으로 우리 죄를 담당 하셨느니라”(벧전2:24)고 함으로써 같은 것을 말하였다. 이는 저주의 바로 그 상징에 의해서 우리가 괴로움을 당하던 짐을 그가 지게 되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에게 눌린 저주에 굴복하여 쓰러졌다고 보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자신이 저주를 친히 담당하심으로서 그 전체의 세력을 분쇄하고 파괴하고 혼비백산하게 된 것으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유죄선고를 인하여 무죄선고를 받게 됐고, 그의 저주를 언하여 복을 받게 되었음을 믿음으로서 납득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치욕으로 가득찬 십자가상에서 얻은 승리를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는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 하셨느니라”(2:14-15)고 말하였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더구나 그 죽음으로 우리가 큰 용서함을 받고, 큰 구원을 얻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삶을 얻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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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마서8:26-30)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속죄제물로서 우리의 죄로 인해 상함을 입었습니다(53). 대예수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28:38). 또한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69:5).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22:22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대로 (십자가로) 가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2:23절에서 베드로는 그가 하나님 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뿐 아니라 베드로의 말 속에서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의 중심이라고 믿을 만한 명백한 근거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에 따라 사도행전4:24-28절에서 온 교회는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그것을예수에게 행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3:20절이 영원한 언약의 피를 말하면서 의도한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의해 그리고 그 사역 안에서 가능하게 됩니다. 이 피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과 연관된 것이라면, 십자가는 다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중심으로 나타납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뿐 아니라 그분의 희생적인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십자가대속사건을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그 익숙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예수님의 죽으심이 비정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외입니다. 그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힘없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분입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부와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말씀이시며, 영원 전부터 선재하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함께 계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셨던 그가 육신이 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성부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이셨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음은 모순이었습니다(John Murray). 그럼에도 그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짊어지지 않으셨다면 그는 인간들 죄의 형벌의 결과를 처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형벌의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를 허용하고 방치하는 것은 하늘에 속한 타당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죄의 책임과 결과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죄의 책임과 존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죄에 관한 모든 세부적인 사항까지도 다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수없이 사람들에게 외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희생, 화목 제물, 화목,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항들은 죄의 의미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반드시 죄책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예수의 희생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책을 위해 예비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킵니다. 따라서 죄가 있고서는 화목할 수 없습니다. 바로 화목제물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예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버렸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순전히 그의 백성들을 위함이십니다. 죄는 우리를 죄 자체의 종 즉 사단의 종이 되게 합니다. 구속은 이러한 종 됨을 위해 예비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속전(購錢)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죽음 그 자체를 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무엇을 제일 두려워합니까?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멸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과거 에덴에서 하나님께 패역한 죄를 져서 영원한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을 죽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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