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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방편/하나님의 말씀(로마서8:26-30)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청교도인 Ezekiel Hopkins는 성경은 하나님의 법전으로서, 성경에는 하나님나라의 법의 일반적 체계와 거룩한 삶에 대한 완전한 규칙, 영광된 삶에 대한 확실한 약속 등이 망라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을 받아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들은 성경을 두 개의 중요한 항목 아래 진술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에서는 성경이 모든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기초이자 규범으로 신학적으로 다루어져 있습니다. 대요리문답 155-160문답(소요리문답 88-90문답)에서는 성경이 은혜의 방편으로 목회적으로 다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의 가장 중요한 방편은 성경입니다. 대요리문답은 은혜의 방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혁주의 견해를 아래와 같이 진술했습니다.

155: 말씀이 구원에 이르는 데 어떻게 효력이 있습니까?

: 하나님의 성령이 말씀을 읽는 일 특히 말씀 선포를 사용하여 죄인들을 깨우치고 정죄하며 겸손케 하는 유효한 방편이 되게 합니다. 그리하여 자아가 깨어져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리고 그의 형상을 본받으며 그의 뜻에 복종하게 됩니다. 또한 그들을 강건케 하여 유혹과 부패를 대적하게 하며 은혜 안에서 세워주고 거룩함과 위로를 통해서 죄인들의 심령을 굳세게 하여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156: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합니까?

: 비록 모든 사람이 다 공적으로 회중에게 성경 말씀을 읽는 것이 허용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종류의 사람들은 각각 혼자서 또는 기족과 함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이같은 목적을 위해서 성경은 원어에서 자국어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57: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 성경은 매우 경외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또한 성경이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하나님만이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이해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고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과 깊이와 넓이를 알고 열심을 가지고 읽되 묵상하며, 삶에 적용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읽어야합니다.

158: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 설교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의 말씀은 충분하게 은사를 받고 그 직분에 합당하게 인정되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만이 설교할 수 있습니다.

159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직분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설교해야 합니까?

: 말씀 사역에 힘쓰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건전한 교리를 선포하되 첫째는 열심히(diligently)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해야 합니다 둘째는 알아듣기 쉽게(plainly)해야 합니다. 셋째는 충성스럽게(faithfully)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넷째는 지혜롭게(wisely)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필요와 능력에 맞추어 설교해야 합니다. 다섯째는 열정적으로(zealously)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영혼에 대해 열정적이고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여섯째는 성실하게(sincerely)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변화를 받아 튼튼하게 되어 구원 받는 것을 목표로 해서 설교해야 합니다.

160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듣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듣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들이 요구됩니다. 첫째는 열심을 가지고 준비된 마음으로 그리고 기도로 주의하며 들어야 합니다. 둘째는 들은 것을 성경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셋째는 믿음과 사랑과 온유와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넷째는 말씀을 묵상하고 숙고해야 합니다. 다섯째는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여 생활에서 그 말씀이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의 효능/ 이상의 요리 문답들은 성경을 은혜의 방편으로 보는 바 개혁주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는 성경이 전체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감 되고 무오한 말씀이요,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의 과정을 통해서 교회의 소유가 되었으며, 따라서 성경이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 유일한 명제적 표현이라는 확신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효능에 대해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흔히 연말연시에 성경카드 뽑기를 합니다. 과연 그 말씀대로 우리에게 임할까요? 미리 성경의 좋은 구절들만 선택했습니다. 그 성경구절이 우리의 일 년 생활과 그대로 맞을까요? 절대로 맞지 않습니다. 성경을 그렇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로 루터파(Lutheran)의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을 읽는 일과 선포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적으로 역사하여 구원을 효과적으로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Luther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그 기록된 말씀에는 본유적 권세가 있다고 했습니다. Luther의 이 같은 주장을 따라 루터파 신학자인 프로이스(Robert Preus)는 성령의 권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씀에 전달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기록되고 선포된 말씀은 본유적 권세를 가지고 있어서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회심시킨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성직과 교통으로 말미암아 성경과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에는 중생하고 회심케 하는 권세가 본유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록되고 선포된 말씀이 그 자체 안에 모든 사람을 회심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권세를 본유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하는 루터파의 이 같은 주장에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어도 즉각적으로 그리고 예외 없이 회심되지 않는가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 일치하게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복음방송과 언론들이 있습니다. 만일에 Luther의 견해가 옳다면 듣고 읽는 즉시 회심하고 교회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불신자들이 성경을 상당히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Luther의 견해대로라면 성도여야 합니다.

사람들의 구원은 항상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주권적인 통치아래 있고, 구원이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미암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하려면 그들의 마음속에서 말씀을 통하여 말씀을 가지고(by and with the Word) 직접적으로 성령이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1항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그 모든 사람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신다. 그래서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에로 인도하신다.

은혜의 방편으로서 말씀의 효능에 관한 개혁주의 입장은 비록 성경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지만, 그것이 특별 은혜의 방편으로 효력이 있게 되는 것은 본유적으로나 자동적으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성령이 직접적으로 역사함으로써 가능합니다. 개혁주의 교회는 신령한 생명을 주는 것은 생명을 주시는 자(Giver of life)이신 성령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속에서 효과적으로 일하는 경우 말씀이 은혜의 방편으로서 타락한 사람들을 구원히는 일과 성도들을 믿음으로 굳게 세우는 일에 불가항력적으로 유효한 것입니다.

말씀이 어떻게 사람들을 변하게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1:21). 참된 복음 선포(곧 전도)가 성경적으로 기초되어야 하기 때문에 대요리문답(159문답)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에게 권하여 건전한 교리를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말씀의 사역자가 하나님께서 그 말씀이 선포되기를 원하시는 대로 그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리문답은 이 교리를 선포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여섯 개의 부사 곧, 열심히, (알아듣기) 쉽게, 충성스럽게, 지혜롭게, 열정적으로, 성실하게 등입니다.

말씀의 사역자가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은 사역자로서의 그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입니다(벧전4:11). 어떤 사역자라도 말씀에서 떠나거나 말씀 아닌 것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의 메시지가 성경의 진리 자체와 일치하는 때에만 권위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또 유념해야 할 것은 그의 권위가 사역적이며 선포적일뿐 고압적이고 입법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오직 사역자의 권위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서 섬길 때 하나님 자신의 권위입니다. 어떤 누구도 성경의 위에 자신의 주장을 둘 수 없으며, 성경을 폐기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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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은혜의 방편(로마서8:26-30)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람들은 육신을 가졌습니다. 영혼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육신을 가졌다는 것은 육신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공해줘야 합니다. 잠시라도 제공하지 않으면 육신은 쇠패하고 바로 죽어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공기 중에 있는 산소를 공급하지 않으면 곧 육신은 견디지 못하고 죽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생물들은 영양분을 공급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필요한 대로 공급해야 합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며 자야하고 쉬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필요한 것들이 무기화되어버렸습니다. 거의 국방비 즉 사람들을 살상하는 무기에 천문학적인 돈을 나라마다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필수품들이 부족합니다. 또한 국가가 부유하다고 해서 개인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재산은 상위1-5%가 거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 있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25장 3항을 보면

이 보편적인 유형교회에게 세상 끝날까지 이 세상에서 성도들을 모으는 일과 온전케 하는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성직과 말씀과 규례를 제정해 주셨다. 그리고 그의 약속을 따라 그 자신의 임재하심과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효과적으로 모아지며 온전케 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은혜로 성장하도록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신령한 “음식”이 “은혜의 방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방편”을 통해서 자기의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 은혜를 베푸십니다. 은혜의 방편이란 그리스도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모으는 일에 사용하시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하여 사용하는 은혜의 메시지를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공동체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은혜의 제도적 방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은혜의 방편입니다. 다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 195문답을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모든 방편을 베풀어 복을 주시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들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 그리고 기도입니다.

And

성령의 탄식/탄식의 3가지(로마서8:18-27)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0세기는 비행기 출현, 러-일전쟁,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히틀러등장, 제2차세계대전과 핵무기 출현, 잔인한 일본의 마각을 드러낸 것, 베트남전쟁, 베를린장벽 붕괴와 소련붕괴로 이어진 동서냉전종식과 함께 신국제체제를 맞아서 새롭게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새로운 전쟁이란 경제전쟁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들을 공급해줘야 하기 때문에 필수적인 식량이 절대적으로 모자란 국가들은 잔인하리만치 참혹했습니다. 거기에 내전이 수없이 일어나고 그 내전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습니다. 삶이란 어디서나 힘이 듭니다. 이렇게 힘이 드는 상황에서 죽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모습들이 인생입니다.

누구든지 원하기면 한다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고도의 신인동형동성설(神人同形同性說/하나님이 인간의 모양과 속성과 감정을 가지셨다는 학설)”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의 전지하심대로 되돌아오고 인간의 능력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되돌아오게 된다면 인간의 감정을 하나님에게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은 성도들에게 두 분의 중보 기도자 즉 성령과 그리스도가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늘나라에서 그의 중보기도의 직임을 수행하십니다.

로마서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브리서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요한일서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성령님은 지상에서 수행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의 직임은 우리의 외부에서 수행되며 성령님의 직임은 우리 안에서 즉 바로 우리 마음속에서 수행됩니다.

요한복음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구속사역의 공로가 그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온전히 적용되기를 기도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 속 깊이 숨겨진 필요 즉 우리 자신도 이따금 認識(인식)조차 못하는 필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아버지 즉 전 가족을 위한 가장의 기도와도 같습니다. 성령님의 중보기도는 병든 자녀의 침대 곁에 무릎 꿇고서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간구하는 어머니의 기도와 같습니다.

탄식을 동반한 성령의 중보기도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 이유는 끊임없이 인간의 마음을 살피시는 바로 그분이 이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자기의 영의 생각을 읽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성을 아시는 데 있습니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님은 한 분 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들 사이에 어떠한 마찰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끊임없이 “성도를 위하여”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시된 대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을 살기 위하여 구별된 자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성 삼위일체의 각 위들은 완벽하게 조화가 되어서 탄식이 동반된 성령의 간구하심은 성부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하므로 그 결과 이 탄식으로 간구하심은 항상 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위하고 사랑하십니다.

And

성령의 탄식/탄식의 3가지(로마서8:18-27)

 

18 (왜냐하면)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는 통상 하나님을 믿을 때 일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할 때도 일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특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말이 아닙니다. 조금 있으면 아버지의 원대로즉 성부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죽이시는 일입니다. 자기 땅의 백성인 대제사장들에게 잡혀서 Roma군에 인계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일입니다. 이토록 예수님은 쌍방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일방적인 기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하나님의 의도대로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를 너무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오직 우리가 기도하도록 도우시기만 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기도함에 있어서 갖는 우리의 연약함을 포함하여 그 연약함이 어떠한 성격의 것이든 관계치 않으시고 우리 연약함을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우리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성령의 탄식이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정확히 규명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입니까? 성령님은 성도들의 기도생활조차도 성령에 의하여 인도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을 기도하게 하고 기도에 관해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내적 변호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그것을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알아들을 수 없지만 우리들에게 큰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님께서 성도에게 무한하신 하나님의 직접적 관심에 대하여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곧 복이 되는 것입니다(요일5:13).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시기 때문에 그 응답은 보장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 때 전쟁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의 무기와 다릅니다. 마귀와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곧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기도의 무기가 그것입니다(6:17,18). 우리가 성령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생활은 새로운 지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굴복시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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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탄식/탄식의 3가지(로마서8:18-27)

 

18 (왜냐하면)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3). 세상의 피조물 즉 인간이하의 피조물이 탄식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자신도 탄식한다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자신도 탄식할 뿐만 아니라 서신을 받는 사람도 함께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이었어도 탄식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 우리가 부요하지만 더욱 귀한 부요함에 도달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미 많은 것을 받았으나 아직도 더 많은 것을 위하여 탄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예비 되어 그 모든 충만함을 드러낼 장차 구원의 처음 익은 열매, 또는 보증인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들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볼 때는 아직도 그들이 양자될 것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미와 아직 아니”(already but not yet)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자신들의 위치가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을 기다라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우리의 몸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들의 영혼이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그들의 몸이 변화되어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 위대한 날까지 그들은 이제 소망 중에 기대하고 있습니다. 소망/ejlpiv"/ellpîs 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소망’ (hope)이라는 단어가 아닙니다. 고전헬라어 문헌에서 엘피스는 흉사(두려움)나 길사(소망)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미래사에 대한 예상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단어였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희망이란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났으면 하는 열망입니다. 꼭 일어나리라는 믿음이 더해 진 것 그이상의 아닙니다. 사실 그 희망은 우리를 매우 실망하게 합니다. 따라서 그 희망을 붙잡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다릅니다. 24절의 소망에는 세 가지의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멸망하는 것이 일어나리라는 일종의 확신, 둘째로 수년 내에 오실 우리의 소망처럼 그것을 발생 가능케 하는 인물, 세 번째로 바라는 것을 指稱(지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소망은 만사가 분명해집니다. 이 소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현재의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미 구원은 받았지만 장차 완전한 구원은 주님의 재림 때에 일어납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면 그 구원은 보장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 때에 일어날 구원은 먼저간 성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의 나라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아담의 죄 이전으로 회복될 그 날을 기다리며 탄식합니다. 이 탄식은 우리자신의 탄식/ejn eJautoi'" stenavzomen입니다. 완전한 구속의 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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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의 탄식/탄식의 3가지(로마서8:18-27)

 

18 (왜냐하면)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소위 말해서 자연재해(실제로는 자연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지, 스스로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로 인해서 변한 지역들이 많습니다. 화산폭발이나 지진 등이 대표적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푸르른 산이나 들판이었는데, 하루사이에 용암과 화산재로 전혀 다른 모습들이 되어 우리 앞에 파괴된 모습으로 나타난 모양들을 보면 인간의 죄들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습니다.

19절의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20절의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21절의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2절에서 (모든/pa'sa/pȃsa) 피조물로 변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어떤 것을 포함합니까? 일단 선한 천사들은 포함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선한 천사들은 허무한 데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0절). 그들은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지 않았습니다(21절). 또한 사단과 그의 종들인 마귀들 역시 결코 해방될 수 없습니다(벧후2:4/유6). 그래서 모든 피조물에서 제외됩니다. 또한 결코 구원받지 못할 모든 사람들도 포함되지 않습니다(살후1:8,9). 그리고 선택된 자들도 여기서는 구별된 부류로 취급되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을 苦待(고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때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선택된 자들이 하는 일과 그들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것은 23-25절에 묘사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4가지 부류를 모두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것은 생물과 무생물입니다. 이 4가지 부류의 그 나머지에 해당되는 “모든 피조물”이 목을 빼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고 사도바울은 서술했습니다. 즉 모든 피조물은 영광스런 그 일을 보기 위하여 목을 길게 뽑고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은 생물과 무생물의 회복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 둘은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회복과 영광은 “모든 피조물”의 회복과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란 구절은 매우 아름답고 의미 깊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보상하여 주심이 얼마나 풍요로울 것인지에 대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는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리킵니다(마13:43,단12:3)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 모든 피조물에게 대해서도 영광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을 매우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이 “자기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죄를 지은 것은 비이성적인 피조물이 아니었습니다. 죄는 사람이지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피조물로 하여금 허무한 데 굴복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를 發(발)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에게 누구에게 저주를 발하셨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피조물에 대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만, 보다 더 깊은 의미에서는 인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3:17-19절을 보면

 

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인간은 이 땅에서 결코 안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과 영원한 평화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땅의 피조물들이 인간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백번 말해도 피조물의 비참한 상태는 피조물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피조물도 인간의 회복을 기다리며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자연의 운명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회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보기 위하여 목을 길게 늘이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 것의 이유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th'/ ga;r mataiovthti hJ ktivsi" uJpetavgh,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자연은 힘들어졌습니다. 가능성들이 무단으로 사용되고 억제되며 局限(국한)됩니다. 피조물은 그 성장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부패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피조물은 그 자신들이 열망을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꽃을 피운다고 해서 다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식물이 질병의 저주를 받게 되어 수확이 늘 감소됩니다. 아무리 농약을 개발하고 생명공학을 발전시킨다고 하더라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런 질병 저런 질병으로 식물계나 동물계에 엄청난 손실을 입힙니다.

 

이런 것은 죄로 야기된 인간의 모든 억제가 풀려야 합니다. 그래야 피조물이 자기구현에 이르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러한 열망을 사도바울은 피조물의 열렬한 동경과 고대함을, 해산하는 중에 있는 여인의 탄식(신음)에 비교하였습니다. ‘함께 고통하며’/sunwdivnei/쉰오디네이는 ‘그가 해산의 고통을 겪다’입니다. 그러한 탄식은 고통을 가리키지만 다른 한편으로 소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Calvin은 이러한 탄식들은 해산의 격렬한 고통이지, 죽음의 고통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해산의 격렬한 고통에 현재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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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해야 할 이유(로마서8:18-25)

 

18 (왜냐하면)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왜냐하면(gavr)이란 앞 절을 확대해석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앞 절에서 언급된 영광에 대한 자세한 해석과 확대임을 말하는 접속사입니다. 사도바울은 생각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원뜻은 나는 확신한다.’입니다. 이 단어 logivzomai/logîzomai는 일반 헬라어 문헌의 용법에서 계산하다라는 뜻입니다. William Hendriksen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사도바울의 손에 저울이나 천칭을 들고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천칭은 가운데의 줄 사이로 양쪽에 접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한쪽 접시에는 현재의 고난을 놓고 다른 쪽에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놓았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는 이유는 죄의 결과입니다. 죄가 없었다면 인간은 고난을 겪을 이유가 없습니다(3:16-19). 그런데 저울의 다른 쪽은 은혜의 결과인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서 있어서 고난은 일시적이고 영광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고난을 인내해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일상사가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생각하는 고난은 좀 다릅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의 결과로서 겪게 되는 것들입니다. 19-23,28,38,39절처럼 다른 환란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바울사도는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을 일반적인 의미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당하는 고통으로 질병, 실망, 실업, 빈곤, 좌절 등을 포함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현재의 고난”, 현 세대의 고난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연장되는 고난입니다. 사실 고난은 누구든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이 피폐(疲弊)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소형교회들의 목회자들은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건물 임대금, 공공요금 등도 제대로 낼 수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목사를 하라고 했느냐고 비판합니다. 사실 메가 처치를 인수받은 사람들은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이룬 교회를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신의 직장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찌 소형교회의 목사를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목사가 힘들다고 하면 뭣하러 목사를 했느냐고 빈정댑니다. 그러나 목사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 잘 다니고, 내 일에 열심인데 어느 날 갑자기 sign이 오면 잘나가는 사업, 괜찮은 직장을 정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에 가야되고 교회를 개척해야 합니다. 교회를 개척하는데 좋다고 하는 자리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모두 차지해버렸습니다. 가까스로 비집고 들어가 교회를 개척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하나 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개척교회에 들어가면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편하고 고생스럽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소형교회의 목회자들은 당연히 힘이 듭니다. 어떤 사람을 전도하려고 3년을 그를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들을 하면서 그를 전도하려고 많은 애를 썼습니다. 거의 교회에 나오려고 할 때에 어떤 사람이 다른데서 살다가 이사를 오면서 전도한 그 사람을 그 교회에 나가지 말고 큰 교회로 나가자고 못나가게 한 것입니다. 작은 교회 가봤자 별 볼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목사는 망연자실했습니다. 큰 교회는 예수님이 계시고, 작은 교회는 예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대접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고난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 정말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말하는 영광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그리고 우리 몸의 구속(영광스런 부활)때 즉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나타날 일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바울사도가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th;n mevllousan dovxan ajpokalufqh'nai eij" hJma'")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 영광은 우리에게 와서, 우리에게 들어온 후, 우리를 가득 채우고 우리를 둘러쌈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입니다. 우리는 친히 이 영광의 일부가 될 것이며 구원받은 이들이 서로의 안에서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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