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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정죄할까?(로마서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나치정권에서 Auschwitz 수용소 Guard로 근무한 94세의 Groening이 4년 징역형을 언도받았습니다. 2차세계 대전시, 독일의 Hitler와 일본의 의 군국주의자들의 잔혹상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앞으로는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우리 인류의 한 치부입니다. 수백만명을 학살한 그들은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들입니다.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슬픈 역사의 한장면입니다. 당시 Auschwitz 수용소에서 간수로 근무했었던, 94세의 Groening이 자신이 고백한 죄과에 대한 재판에서 4년 언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독일의 정부와 국민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죄과에 대한 엄격한 법적용으로 공평을 유지 하고져 하는 노력합니다. 이 재판을 받은 독일인은 1921년에 독일의 Lower Saxony에서 출생 했다고 합니다. Hitler가 위세를 떨칠 때, Waffen SS로 불렸던, 청년 유격대에 합류했습니다. 1942년부터 Auschwitz 수용소에서 근무 했습니다. 그의 임무는 감옥에 끌려온 죄수들을 상대로 압수한 현금을 주고 계산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그는 느낀바 있어, 당시 그런일을 한것을 후회하고, 공개적으로 Auschwitz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폭로했습니다. 그럼에도 전범이기 때문에 4년형의 형기누가 를 언도받았습니다. 사실 94살의 4년형이란 감옥에서 인생을 끝내라는 형벌입니다.

 

법정에서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면 사람들은 판결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징역형을 살든지, 사형이라든지 등의 형벌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 형벌이 싫으면 죄를 짓지 않으면 됩니다. 사실 이 세상의 법정도 무섭습니다. 법이 사회와 격리시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과의 완전한 격리의 형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정죄는 두려운 것입니다. 정죄 katakrivnw/katakrîno/카타크리노는 ‘유죄 선고하다’입니다. 카타크리노는 Herodotus이래 ‘~에 불리한 판결을 내리다’라는 뜻을 의미했습니다. 카타크리노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천벌이나 파멸을 말합니다. 인간의 재판에서는 이 단어가 형의 집행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판결만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형집행과 판결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16:16을 보면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정죄하셨습니다. 그 곳을 재로 만들어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영원한 정죄는 어느누구도 내릴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전혀 내릴 수 없습니다. 물론 죽어서 땅에 묻혔던 사람을 다시 파내어 형벌을 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산 사람의 분풀이에 불과합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라면 예외입니다. 죽었던 사람도 정죄할 수 있습니다. ‘누가’tiv"/tîs는 의문대명사(疑問代名詞)입니다. 부정대명사(不定代名詞)입니다. 따라서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정죄할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정죄할 수 있을까? 하고서 예수그ㄹ스도의 죽으심, 부활, 승천하심, 그리고 심판석에 앉으심을 말했습니다. 이사야53:12을 보면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그의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사도의 논증으로는 우리들을 정죄할 분은 하나님 한분이신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자녀로 이미 정립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정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And

시온에 있는 돌/반석(로마서 9:32-33)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들의 생각은 자신들이 항상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자신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무엇을 해도 옳다고 생각하며 바르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18세기의 마지막 몇 해에 끝난 계몽주의 시대는 르네상스의 기초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세적사고와는 궁극적으로 달랐습니다. 인간을 근본적인 사상의 변화에까지 이르게 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나타나는 사상은 하나님을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지위를 격상시키면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인간이해라는 것은 인간을 뜯어보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인간을 높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몽주의 시대나 현대나 인간을 높이는 것은 대동소이합니다.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인간이 주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돌에 부딪힙니다.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행위라는 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죄인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즉 더러운 옷을 입고서 깨끗한 척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행위라고 해봐야 별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선하게 보이는?)를 사람들은 무척이나 좋게 보고 가치 있게 여깁니다. 실상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데 귀하게 여깁니다. 종교의 가치, 각종 행위의 가치가 이 세상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부딪힐 돌에 부딪혀버립니다. ‘부딪힐’ /proskovmmato"/“프로스콤마토스”은 ‘걸려 넘어짐’이라는 뜻입니다. 자신들은 철썩 같이 믿었는데 전혀 엉뚱한 결과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의에 이르지 못한 원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장애물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넘어진 이유는 그리스도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 즉 행위를 의지하는 한 도저히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그리스도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굳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 적부터 쭉 믿어온 믿을만한 전통이 있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문제는 깨끗이 해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확신했고, 철저하게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그리스도는 넘어지는 돌이었습니다. 고금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피하여야 했습니다. 어리석게 보이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야 파멸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6:12-17을 보면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산이나 언덕이 매몰되면 바로 죽습니다. 그런데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습니다. 그리고 산들과 바위에게 말합니다.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고 말합니다. 숨을 곳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산과 바위가 무너져서 자신들을 덮어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종교간 대화? 종교다원화?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이사야28:16과 이사야8:14을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의 파멸을 입증했습니다.

 

이사야28:16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다

이사야8: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될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사람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결코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오직 인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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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위(로마서 9:30-33)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주석을 달고 해석하여 정확하게 율법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 율법이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모를 뿐만 아니라 율법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유대인들은 한 개라도 더 율법을 지키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엄격하게 지킴으로서 자신들의 창고에 잔고가 늘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것들의 잔고를 늘리게 되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빚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절대로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대변이란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사항이었습니다. 누가복음18:9-14절을 보면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은 하나님께 의로움을 쌓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토색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간음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 나쁜 세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반드시 드립니다. 즉 바리새인의 요지는 지킬 것 철저하게 지키고, 해야 할 사항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의무사항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내세울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만 가슴을 칠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잘못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순전히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사람의 행위로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인간이란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全的腐敗전적부패란 조금도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모태에서 나올 때 그의 자연적 상태에 있어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질과 성격에서 전부 오염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부분 지성, 의지, 감성, 감정, 양심 몸 등이 죄로 전부 감염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지성은 어두워지고,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행동하는 의지는 어두운 지성과 반동적인 마음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가슴은 오염되었고, 감성은 왜곡되었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악하고 불경건한 것에 자연히 이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양심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몸은 반드시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이같이 진술하고 있는 구절들로 가득합니다.

창세기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한탄하사

창세기8:21 여호와께서 그 중심에 이르시되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열왕기상8:46 하나님을 대적하여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라고 솔로몬이 선포하였다.

시편14:1-3 어리석은 자(히브리어 나발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흠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바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51:5 다윗이 선언한 바에 의하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시편130: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시편143:2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전도서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전도서9:3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이사야53:6 우리는 다(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이사야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예레미야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능히 알리요

누가복음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요한복음5:42 다만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로마서1:29-32(참고.1:18-28) 바울이 주장하는 대로 사람들은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지를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3:9-2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이어서 온 인류를 열 네 항목으로 기소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만 빼고 시편에서 인용)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계속적으로) 이르지 못하더니

갈라디아서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세상)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죄의 지배의 보편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그렇게 주장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 성경과 다투는 것이다.

에베소서2:1-3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썼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좋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4:17-19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요한11:8-10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15:19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성경은 이토록 타락한 인류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대도 일부 사람들은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는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여 구원에 대한 생각을 달리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적으로 부패했습니다. 전적부패란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정말 사악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몇 가지 보통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생득적인 신의식(1:20-21,32), 양심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들(2:15) 그리고 세속정부(13:1-5)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악하게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예방하고 억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전적부패는 모든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아 그들의 본성의 모든 부분과 능력과 기능에 있어서 그들의 존재의 전체를 통해서 즉 전면적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정신적 결과와 관련해서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와 그의 후손이 짐승처럼 비이성적인 상태(즉 사고의 무능력)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보통 은혜 때문에(1:9), 타락한 사람들이 논리적인 사고(생각)를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고 하면,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정말로 짐승 같은 비이성적 존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미친 죄의 결괴들 때문에 보통 은혜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과학적 사고를 함에 있어서 방해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짓, 부지중의 과오, 논리적 사고에 있어서 발생하는 실수들, 자기 망상과 기만, 환상적 사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부정적 영향, 정신건강에 영향을 주는 신체적 연약성, 파괴된 인간관계, 부정확한 정보의 결과, 죄악 된 이기주의, 정신력의 약화, 내면적 혼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주적 기점으로부터의 그들의 일탈 등입니다. 이 모든 죄의 결과들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들이 지식을 추구할 때 부지중에 무지에 빠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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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dilemma of the Paulos(로마서 9:27-29)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성경은 난해한 구절들이 많습니다. 도저히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이 더러 있습니다. 창세기14:18의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등장하여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줍니다. 이 멜기세덱이 시편110:4에 또 등장합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여호와의 변치않는 맹세를 말하면서 멜기세덱의 반차/hr;b]DI/서열를 좇았다고 합니다. 또한 히브리서5:11을 보면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과 소돔사람을 구출한 후에 소돔에서 만난 멜기세덱을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멜기세덱을 추정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신비의 인물로 묘사하며 제사장과 변치 않음에 대한 인물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사실상 남은 자만 구원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무조건 비판을 하며, 비난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들은 변증해야 합니다. 하지만 변증이 그리 쉽지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바로 그런 논쟁과 반론을 항변합니다. 바울사도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그들 전체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선별과 선택과정이 계속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형제중에서 아브라함을, 이삭과 이스마엘 중에서 이삭을, 야곱과 에서 중에서 야곱을. 이런 선택의 과정이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 선택된 사람들이 어떤 공로가 있는가? 어떤 가치가 있는가? 어떤 쓸모가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 외에는 어떤 것에도 달려 있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이 공평하고 정당하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dilemma이고 우리들의 dilemma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인간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독단적인 선택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과연 그러한 정책이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인가? 라고 비난합니다. 바울의 대답은 한 결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하시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주장을 증명합니다. 첫 번째로 출애굽기33:19을 예로 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어떤 증거를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자신이 택하는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민족의 선택과 그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태도도 오직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즉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힘 있는 애굽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강대국에 자국의 안전을 맡기려고 안달입니다. 누구도 Donald Trump가 대통령에 당선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에 당선이 되니까 세계각국에서 난리법석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국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무능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편에 서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애굽과 바로의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전쟁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전쟁하라고 지시하지 않습니다. 바로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처음으로 바로에게 가서 놓아달라고 요구했을 때 바로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또 그 능력을 거역하는 자에게 그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 바로를 역사의 무대 위에 올려놓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바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하는 한 예로써 역사 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9-16/William Barclay). 우리 생각은 여기에서 dilemma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고 해서 아무 일이나 하실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사실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본 성격에 위배되는 일을 아무것도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로 오늘은 지구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전시키다가 한 달 후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자전시키지 못하십니다. 굳이 하시려고 하시면 능히 하실 수 있지만,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불공정한데 대해서 또 사실상 자신의 법을 어기게 되는 여하한 행위에도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무책임하게 한 사람에게는 자비로 베풀고 다른 사람에게는 베풀지 않으시며, 어떤 왕을 그저 꼭두각시가 되거나 어떤 인물을 그를 통해 하나님의 보복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내세우는 하나님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논리의 基底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공의라는 조건하에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아무 것도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자에게 아무 권리도 주장 못합니다. 언제든지 공의가 들어오면 그 대답은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수 없고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논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절대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주장이 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자비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택과 선별이 계속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난하는 사람들은 바로 비난의 칼을 빼듭니다. 만약에 전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의 선택과 버림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배척한 사람을 나무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잘못은 전혀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잘못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홍수 이야기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경건치 않은 후손)과 셋의 후손(경건한 후손)들의 연합으로 인하여 세상이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물로 세상을 쓸어버리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즉시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120년 후에 물로 세상을 쓸어버린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멸망을 바로 앞에 두고 어떻게 했습니까?

마태복음24:38을 보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멸망된다고 하는데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먹고, 마시고 혼인식을 계속했다는 말씀입니다. 즉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노아를 통해서 심판을 경고했는데, 무시해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말이 그렇지 120년이란 세월은 짧지 않은 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하나님께서 공평하시지 못하다고 비방합니다. 유치한 반론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의 대답은 퉁명스럽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누구도 하나님과 논쟁할 아무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그 그릇은 토기장이에게 대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꽃병이 되고 싶은데, 왜 물그릇을 만드느냐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그것에 대해 절대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덩어리의 진흙에서 한·그릇은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한 목적을 위해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흙은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반항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이 말을 예레미야에서 인용했습니다(18:1-6).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이에 대하여서 William Barclay는 바울사도가 이 말했을 때 독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이 귀절을 기록한 것은 마음의 번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의 백성이, 바울 자신의 골육이, 하나님 자신의 아들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왜 못 박았냐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난처한 사실입니다. 로마인들 즉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얼마든지 배척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것도 골육들이 앞장서서 예수님을 배척한다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도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의 말을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백성의 눈을 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바울은 그 논쟁을 거기서 끝내지 않았습니다. 이 유대인의 배척은 이 방인에게 문호가 개방되게 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사도는 dilemma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환경을 사용하여 거기서 선한 것을 끄집어냈다고 하는 말과, 하나님께서 악한 환경을 칭-조하여 거기서 선한 것을 끄집어냈다고 말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선한 것이 나오게 하기 위해 악을 행했다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의식적으로 이방인이 들어올 길이 열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생각을 어둡게 하고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굳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바울의 논리는 dilemma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 대한 어떤 타당성 있는 이유를 찾기에 그 마음이 절망하고 있는 사람의 변론입니다. 결국에 가서 바울이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해답은 그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것은 바울은 유대인들과 논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 논증을 방어하려면 그들 자신의 성경의 인용문으로 보강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유대인의 배척과 이방인 측의 받아들임이 이미 선지자들에게서 예언되었다는 본문을 인용한 것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2:23).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10). 그는 어떻게 이사야가 이스라엘이 남아있는 자들이 없었더라면 전멸되었을 환경을 미리 본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10:22-23, 13:10). 이스라엘은 그 백성이 이해만 했더라면 그들의 운명을 미리 알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논조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은 자기 백성에 대한 절망적인 번뇌 속에서 어찌해서인지는 모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하신 일이라는 사실에 매어 달렸다는 것입니다.

신명기10:17을 보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말해도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의 윤리적 거룩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무한 영원 불변하신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의롭다qyDIx'/‘차디크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힘입니다. 사람을 일단 외모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이명박이란 사람을 지지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과거에 CEO였으니까, 잘할 것이라는 엉뚱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또 속였습니다. 그리하여 4대강을 死大江으로 파괴해버렸습니다. 해놓고보니 빠른 시기에 파괴해야만 할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아주 나쁜 대통령이었습니다. 외모라는 것은 이만큼 사람들을 심히 오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성적 피조물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들의 행위와 관련해 항상 같으시되, 의로운 자들은 항상 용서해 주시고 죄 있는 자들은 항상 정죄하십니다(23:7). 모든 세상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길과 판단에 있어서 항상 의로우십니다(18:25). 모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여호와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행하심)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 무망하신(그릇 행함이 없이 진실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32:2).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 재판관은 그들 위에 있는 법에 충실하면 의로운 재판관인데 반하여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경우는 그의 사법적 결정을 내리는 표준이 되는 자기 위에 있는 율법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의 표준은 그 자신의 거룩하고 의로운 진리입니다. 따라서 피조물 된 자들은 하나님이 변덕스럽게 판단하실까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의 무한한 지혜와 지식, 그리고 진리 및 윤리적 거룩하심에 근거하고 있어서 공평할 것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그 자신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본성의 표준에 따라서 되어집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공의는 성경에 보복적일 뿐 아니라 보상적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복적으로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공의로 판단하십니다.

시편7:11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시편9:7-8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시편96:10-13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찌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이사야5:16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다니엘9:14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니

로마서2:5-6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도다

로마서2:5-6 그러나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데살로니가후서1:5-7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하나님의 공의를 보복적인 것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지만, Herman Bavinck가 지적한 대로,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원리로 일반적으로 제시되어 있는하나님의 의와 함께, 하나님이 의로운 자들을 의롭다 하시어 그들을 높여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는 속성으로서그 의와 함께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미래를 대망하되,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그는 의로운 가지요(23:5), 의로우시며(9:9),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고 공의로 하시며(11:3-5), 따라서 그의 심판은 이러할 것이다: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72:12-14). 그런 까닭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의는 특별히 궁핍한 자들을 건지시는 가운데 나타납니다. 궁핍한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는 은혜와 긍휼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이는 그가 그들을 세우신 까닭입니다(7:9). 또한 도우시고(31:1), 응답하시며(65:5;143:1), 건지시고(143:11), 소성케 하시며(119:40), 죄를 용서하시고(34:22), 그들에게 합당하게 공의대로 행하십니다(35:23). 이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는 그의 진노와는 달리 그의 인자하심과 대립되지 않습니다(69:24).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나타내실 때 동시에 그의 은혜를 보이십니다. 죄 용서마저도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그 의의 계시는 구속의 행위요, 구원의 행위입니다. 어떻게 온 세계의 의로운 재판장이 죄인들에 대하여 공의로 용서하고 공의를 베푸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의함으로 정죄를 당하지만, 그들은 의로운 대의를 얻으며 여호와를 신뢰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공의를 베푸실 것과, 그들의 싸움을 싸워 주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승리를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특별히 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죄 용서를 허락하시고, 그들의 심령에 성령을 부어주시며,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그의 율법을 그들의 마음 판에 새기시며, 이로써 하나님 면전에서 온전하게 행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죄인일지라도 오직 여호와만이 그들을 이 죄에서 건져주실 수 있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는 대로는 여호와는 자기의 언약에 충실하심으로 의로우시고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으며(45:25),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를 그들에게 가깝게 함으로 구원이 지체되지 않게 하십니다. 구약에 나타나 있는 이 의의 원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신약의 계시를 위한 준비였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허락하실 수가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선택된 자들의) 전에 범한 죄들을 간과하신(용서하신) 근거입니다. 그리고 그 구속사역이 현세대에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고, 하나님께서 의로우실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 될 수 있게 합니다.

통상 다음의 성경구절(구약/3, 신약/1)을 하나님께서 엄정한 공의로 사람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개념을 반대하여 흔히 인용되었습니다.

이사야40:2 너희는 정다이(부드럽게)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힘든)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yIl'p]K/i키플라임)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예레미야16:18 내가 위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hnEv]mi/미쉬네) 갚을 것은

예레미야17:18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hnEv]mi/미쉬네)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요한계시록18:6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dipla'/플라) 갚아 주고 그의 섞는 잔에도 갑절이나(diplou'n/디플룬) 섞어 그에게 주라

고 했습니다. 위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이 죄인에 대하여 갑절의 위험을 행할 수 있고 또 행하신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한 달란트 무게의 죄에 대하여 두 달란트 무게의 형벌을 부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저울에 불균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 같은 분명한 윤리적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성경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 Kline은 이 구절들에서 ”(또는 갑절”)로 번역된 히브라어와 헬라어 단어들은 여기에서는 사실 대응하는또는 맞먹는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를 부인하는 대신에,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심에 있어서 엄정한 공의를 따라 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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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남은 자(로마서 9:27-29)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남은 자(remnants)라는 개념은 종말론의 핵심적인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남은 자란 미래의 소망을 집약(集約)한 말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남은 자’ 사상은 여러 문학 형식에 등장했습니다. 신화, 전설, 서사시(敍事詩), 예언, 기도, 편지와 연대기 등에 등장했습니다. 왜 그러했습니까?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7:23을 보면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수로 모든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여덟 명만 남았습니다. 따라서 ‘남은 자’란 구속사적 의미를 강하게 강조하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남은 자의 구원에 관한 소망을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장애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특히 소망이라고는 전혀 없을만한 상태인 바벨론의 포로기간에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처참했습니다. 칼에 베임을 당하고, 메어침을 당하였습니다. 잔혹한 상태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복음서에서는 남은 자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직접 ‘남은 자’란 말을 사용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사야10:22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중 오직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바벨론 포로가 죄악에 대한 무서운 형벌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이란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구제되어 선조들의 땅으로 돌아온 새 집단을 남은 자라고 했습니다. 사실 남은 자는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전의 엄청난 인구에 비하여 볼 때 새 집 단 즉 남은 자는 멸망을 간신히 모면한 일부였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그들이 다시 풍성한 민족으로 자라날 일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남은 자들이 자신들의 어떠한 역량에 의해서 남았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백성들을 망하게 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남은 자들은 바벨론에 흡수되지 않았습니다. 즉 자신들의 신앙을 어떻게든지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지키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멸망당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구원코자 하셨을 때, 그가 원하셨던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소수였습니다. 멸망 중에서 건짐을 받았던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귀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회복을 예표 한 것입니다(Calvin). 현재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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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참으시는 하나님(로마서 9:22-26)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진노의 그릇/skeuvh ojrgh'"이란 강퍅한 사람(18/sklhruvnw)을 말하는데 강퍅하다는 뜻은 능동태(能動態)로는 굳어지다이며, 수동태(受動態)로는 굳게 하다입니다. 헬라어문헌에 의하면 스클레뤼노는 본래 의학용어(醫學用語)입니다. 그러므로 Hippocrates의 저작에서 최초로 발견되는 용어입니다. 70인 역본에서는 카셰/완악한의 번역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진노의 그릇이란 멸망받기로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은 죄인의 형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창세기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세기18:26-32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열왕기상21: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느헤미야9:17 거역하며 주께서 저희 가운데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두목을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시편10:8-14 8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9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11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13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2)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15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16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시편86:15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시편145;8,9 8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9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이사야5:1-4 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3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에스겔18:23,32 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찌니라

에스겔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누가복음13:6-9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요한계시록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인자하셔서 구원받지 못할 자들에게도 오래 참으십니다. 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도 유예기간(猶豫期間)을 무려 120년이나 주셨습니다. 이 기간에 혹시 얼마라도 노아의 하는 일과 전도를 받고 마음을 돌릴까 했으나 허사였습니다.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마태복음24:38-39을 보면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신들의 하는 일들은 반드시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습니다. 120년이라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유예기간이었습니다. 오래 참는다/makroqumiva/마크로뒤미아체념, 감수, 강제적인 수락을 의미합니다. 그런가하면 자포자기적인 인내라는 뜻도 있습니다. ‘'지연, 지체, 행동을 연기하거나 미루는 것'’입니다. ‘고난과 재난을 참는데서 보이는 것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죄 속에 있는 인간에게 이미 명백히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진노하심은 오래참으심 후에 진노의 날에 절정에 달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순전히 인간의 회개를 기다리고 게시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어떤 대상입니까? 물로 쓸어버려야 할 만큼의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멸하기로 준비된(복수)”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철저하게 구분하시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을 구원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25절과 26절을 부르면 호세아서를 인용합니다.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주전8세기경의 이스라엘은 더욱 패역했습니다. 이 시기에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큰 승리들을 계속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재촉하고 가속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내부로부터의 영적, 도덕적 부패에 의하여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앗수르가 주변국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복하면서 접근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생존자체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모르고 이스라엘은 번영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운하를 만들면 우리나라는 곧 일등국가가 될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천문학적인 국가의 재정을 낭비했습니다. 국익이라고 하는 것은 단 1%도 없는 4대강공사를 밀어붙여서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을 죽이는 공사였고, 주변공간을 죽이는 공사였으며, 국민들의 마음을 훼손하는 공사였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고멜이라는 여인과 혼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혼인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음행을 즐기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음란한 자식들을 낳았습니다(2:4). 그들의 이름은 이스르엘/la[er]z]yI/“하나님이 씨를 뿌린다입니다. 예후의 유혈혁명(流血革命)과 그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로루하마(hm;j;rU aOl/“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함입니다. “로루하마는 호세아의 둘째 아이()에게 붙여진 상징적 이름으로서 여호와께서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세 번째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를 낳았습니다. 로암미는 이름은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이름입니다. 왜 이렇게 선지자에게 가혹한 혼인을 하라고 하십니까? 그들의 이름은 주님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의 상태를 상징하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호세아는 자기의 부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집을 나가버린 행락지로 가만히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사 가지고 옵니다. 이어서 긍휼을 베풉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로 하여금 예전의 명예로운 위치에 다시 앉혀줍니다. 그로 인해서 자녀들의 이름이 바뀝니다. “나의 사랑하지 않는 자나의 사랑하는 자, “내 백성이 아닌 자내 백성으로 바뀝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9:25에서 호세아를 인용합니다. 사도바울은 호세아가 고멜의 죄와 형벌과 회복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언의 죄와, 형벌과, 하나님의 사랑에로 회복시키심을 말합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인의 회복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에 대하여 말하면서 호세아를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회복이든지, 이방인의 개종이든지, 회복과 구원의 원인은 어디서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회복 혹은 전향을 가져다주는 것은 언제나 전능자 하나님의 능동적이고 강력하며 주권적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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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감취어진 섭리(로마서 9:19-21)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항상 부족했습니다. 원래는 전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서 모든 것들이 부족하게 되었습니.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무엇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반드시 노력해야 했고, 그 대가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항상 경쟁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해의식을 자연히 느끼게 됩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더 가지지 않았을까? 저 사람과 내가 과연 평등할까? 이런 의구심이 인간역사에 팽배했습니다.

19절의 말씀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하나님의 감취어진 섭리상의 뜻과 교훈적인 계시된 뜻을 구별하지 못했기에 하나님께 불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질문하는 사람이 어리석고, 염치없으며, 무감각하다고 꾸짖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문제 삼기 때문입니다(William Hendriksen). 바울사도의 요지는 하나님의 선택이 매우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성경적인 입증을 제사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이 자주적인 것을 아무도 비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조병수). 대체적으로 하나님께 불만을 품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자가 멸망할 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듣게 되면 분노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의 대적들이 미리 반론할 것들을 앞질러 손을 쓰고 있습니다. 경건치 못한 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큰 소리로 공격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변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잘못이 있는 것으로 핑계하면서 주장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정죄 받게 된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버립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하여 분노를 터뜨립니다. 그들은 분노를 속에 항상 품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폭군이라고 비난합니다. 또한 궤변론자들의 학파들은 소위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에 대해서 허튼 소리를 해댑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 자신의 의를 망각하고서 모든 것을 혼돈시켜 자기의 권위를 시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치 못한 자들은 무슨 까닭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를 내실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반문합니다(John Calvin). 14절을 보면 의문변화사 ) mh;/있느뇨가 있습니다. 가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하나님께 불공평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Lenski).

창세기5장을 보면 셋의 후손들이 나열되었습니다. 창세기4장에는 가인의 후손들이 나열되었습니다. 이들이 각각 평행으로 갔으면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창세기6:1-9을 보면

1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이 합해졌습니다. 이 땅은 죄로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물로 온 세상을 심판했습니다. 노아의 가족만 빼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언어만 혼잡하게 되었고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애굽에서 성장시켰습니다. 430년 후에 애굽에서 빼내십니다.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그러므로 거룩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받지 못합니다. 다른 국가들은 제외하고 이스라엘에서조차 그 명령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국가와 민족들은 어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 말대로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사람마다 가는 길이 모두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로, 어떤 사람은 불교, 어떤 사람은 Roman-Catholic, 어떤 사람은 힌두교, 어떤 사람은 이슬람교 등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감취어진 섭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정하신 영원한 계획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정하셨으며, 그분께서는 창조와 섭리의 사역을 통해서 실행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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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주권/토기장이와 진흙(로마서 9:19-29)

 

이사야29:1645:9을 보면

이사야29:16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이사야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찐대 화 있을찐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예레미야18:1-10을 보면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8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하스는 유다의 15대 왕입니다. 아하스 왕때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연합하여 유대를 침범했습니다. 그 이유는 북쪽의 앗수르가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이 동맹을 해서 앗수르를 막아보자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아하스에게 높은데서 구하든지, 낮은데서 구하든지 구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여호와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에게 사자를 보내어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아하스가 이사야 몰래 은밀히 앗수르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였던 것처럼, 히스기야통치 초기에 친 애굽파들은 가능한 한 예언자에게 숨기고 애굽과 동맹을 체결할 계획을 꾸몄습니다. 친앗수르파, 친애굽파, 친바벨론파로 인해서 유대의 정국은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친애굽파들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책망 받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여호와의 예연자로부터 숨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들의 비밀을 아시고 예언자도 여호와의 빛을 통해 그 전체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는 여호와의 피조물인데도 여호와를 불필요한 존재처럼 버리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토기가 저를 만들어 놓은 토기장이에게 그는 총명이 없다(그는 나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호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이 여기고 자신들이 지혜로운 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이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무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전능하시고 창조적인 영광과 온전한 지혜를 가지신 예언자의 하나님께서는 이 거만하고 사특한 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시고 가난하고 가련한 이들의 기쁨이 되도록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45:9을 보면 이미 유대는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졌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유대는 자꾸 패역의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죄만 더하고 패역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불평은 많았습니다. 하니님께 불평하는 인간은 질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질그릇 중에서도 깨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진흙자체가 그것을 만드는 이에게 절대로 불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18:1-10에서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예레미야는 가서 진흙을 취급하는 토기장이를 봅니다. 그 후에 그에 대한 하나님의 해명을 얻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그의 눈에서 사람과 진흙, 하나님과 토기장이의 비교를 암시하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 번 히브리인들에게 있었던 비교입니다.

욥기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

욥기33:6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왜 드셨습니까? 여호와께서 상징으로 백성에게 열방에 대해 그의 뜻대로 행하실 수 있는 주의 권세를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것이 이스라엘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본 구절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설정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인간은 동격(同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종속(從屬)된 관계입니다. 그것도 존재론적 위계의 관계로 창조하신 분과 피조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하시거나 만들기 위해서 사람의 동의(同意)를 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무한한 자율성(自律性)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버리심이냐? 은혜냐? 할 때에 불평등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자가 있는 것은 무한한 긍휼을 입음이요, 멸망당하는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죗값대로 받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관용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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