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77)
교회소개 (1)
교회약도 (1)
후원계좌 (1)
대요리문답1 (2)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4)
소요리문답 (1)
좋은글들모음 (49)
설교자료 (10)
연관 블로그 (2)
성경의 공인 (1)
홍수까지의 연표 (1)
이스라엘 분열사 (1)
10대 박해 (1)
성경숫자의 상징 (1)
-------------------- (0)
창세기새벽강해 (142)
출애굽기 새벽강해 (262)
마태복음 새벽강해 (267)
사도행전 새벽강해 (366)
로마서새벽기도 (216)
빌립보서 (0)
- 에베소교회 (1)
- 서머나교회 (1)
- 버가모교회 (1)
- 두아디라교회 (1)
- 사데교회 (0)
- 빌라델비아교회 (0)
- 라오디게아교회 (1)
성경 개관 (0)
- 에스라, 느헤미야 (1)
- 학개 개관 (1)
- 스가랴 개관 (1)
- 사도행전 (1)
- 고린도전서 (2)
- 고린도후서 (2)
- 빌레몬서 (1)
- 야고보서 (1)
기도 (1)
성경 각 권의 주제 (1)
예배순서 (4)
예화 (2)
찬양 (1)
- 온전히 (1)
- 창세기 (4)
- 출애굽기 (1)
- 레위기 (2)
- 민수기 (1)
- 신명기 (1)
- 여호수아 (1)
- 사사기 (1)
- 룻기 (1)
- 사무엘상 (1)
- 사무엘하 (1)
- 열왕기상 (1)
- 열왕기하 (1)
- 역대상 (1)
- 역대하 (1)
- 에스라 (1)
- 느헤미야 (2)
- 에스더 (1)
- 욥기 (3)
- 시편 (1)
- 잠언 (1)
- 전도서 (1)
- 아가 (1)
- 이사야 (2)
- 예레미야 (1)
- 예레미야애가 (1)
에스겔 (1)
- 다니엘 (1)
- 호세아 (1)
- 요엘 (1)
- 아모스 (1)
- 오바댜 (1)
- 요나 (1)
- 미가 (1)
- 나훔 (1)
- 하박국 (3)
- 스바냐 (1)
- 학개 (2)
- 스가랴 (1)
- 말라기 (1)
- 마태복음 (3)
- 마가복음 (7)
- 누가복음 (1)
- 요한복음 (3)
- 사도행전2 (2)
- 로마서 (1)
고린도전서 (0)
고린도후서 (0)
- 갈라디아서 (1)
에베소서 (0)
빌립보서2 (0)
골로새서 (0)
데살로니가전서 (0)
데살로니가후서 (0)
디모데전서 (1)
디모데후서 (0)
디도서 (0)
빌레몬서 (0)
히브리서 (0)
야고보서 (0)
베드로전서 (0)
베드로후서 (0)
요한일서 (0)
- 요한이서 (1)
- 요한삼서 (1)
- 유다서 (1)
- 요한계시록 (1)
붓글씨 (9)
수채화 (1)
공지사항 (0)
- 게시판 (29)
철학.인문학 (8)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17.03.13
    믿으면 좋기는 한데
  2. 2017.03.04
    거리낌이 없는 양심
  3. 2017.02.25
    바울의 자기변호
  4. 2017.02.16
    아나니아/더둘로/벨릭스
  5. 2017.02.11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
  6. 2017.01.31
    하나님의 섭리하심
  7. 2017.01.21
    바울을 위한 천부장의 역할
  8. 2017.01.13
    탄로 난 유대인들의 계략

믿으면 좋기는 한데(사도행전24:24-27)

 

바울을 감금시킨 며칠 후에 벨릭스는 아내인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왔습니다. Drouvsilla/Droûsilla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입니다. 바울을 만난 이때(주전57년)도 20세도 안되었습니다. 어린 소녀 시절에 Droûsilla는 동부 Asia에 위치한 Commagene의 태자와 정혼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태자가 유대교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Droûsilla는 그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그의 오빠 아그립바II세가 수리아의 작은 국가인 Emesa/지금의 Homs(리비아 북서부에 있는 도시)의 왕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직 16세일 때에 벨릭스가 Atomos라고 불리는 구브로의 마술사의 도움을 얻어서 남편을 떠나 자기와 결혼하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벨릭스의 세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을 아그립바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79년의 베수비오 화산폭발 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Droûsilla지만 Droûsilla는 그리스도교에게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도 그리스도교를 소개한 것 같습니다(22절). 그러기에 바울을 보고 싶어한 것입니다.

바울은 벨릭스에게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의(dikaiosuvnh)와 절제(ejgkravteia), 장차 오는 심판(krivma)을 강론했습니다. 이에 벨릭스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시방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틈이 있으면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구원은 현세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추후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내세와 현세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망설이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세와 현세가 동일한 패턴대로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내세가 보이지는 않고 그럴 것이다라고 말하니까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이 지구상에 태어난 사람들 10%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백성들은 남은자요, 작은 자들이며, 택함을 받은 사람들뿐입니다. 창조주께서 믿으라고 이스라엘에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천사들을 보내시며 하나님께서 직접 들어오셔서 기적을 베푸시고, 표적을 베푸시며 말씀해도 듣지 않습니다. 왜 듣지 않습니까?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라온 성장과정에서부터 이 세상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교육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교만함과 무지함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신화의 인물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동화에서만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고 역사속의 국가임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교만함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무척 애처로운 일입니다. 인생은 길어야 100년인데 그 100년을 위해서 영원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100년이 영원을 끝내버리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다고 인식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벨릭스는 현세에서는 소유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무척이나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을 위해서는 조금도 단 1%도 신경을 쓰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도 ‘믿으면 좋기는 한데’라고 말하면서 믿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력자들의 행태  (0) 2017.03.31
그리스도인과 뇌물  (0) 2017.03.23
거리낌이 없는 양심  (0) 2017.03.04
바울의 자기변호  (0) 2017.02.25
아나니아/더둘로/벨릭스  (0) 2017.02.16
And

거리낌이 없는 양심(사도행전24:10-23)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바라노라…’ 양심suneivdhsi"/suineîdesis는 suneivdw/suineîdo/이해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헬라문헌에서 디오, 스트라보, 플루타르크 등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들을 회고해 볼 때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여부에 의거하여 그의 양심이 선한지 악한지를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한양심은 평강을 누립니다. 그러나 악한 양심은 양심의 소유자를 사정없이 괴롭힙니다. 그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헬라문헌은 거의 악한 양심에 관하여 언급했습니다. 이에 반해 로마인인 Cicero는 자주 선한양심과 깨끗한 양심과 좋은 양심에 관하여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양심은 비난과 좌절의 성격을 띠고 나오는 실패와 악에 대한 회고적 지식이었습니다.

한 인간 속에는 두개의 자아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동일한 사물들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봅니다. 그렇지만 동일한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답을 내놓습니다. 질서를 지향하는 세력과 무질서를 지향하는 세력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때 갈등은 과거의 무질서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양심은 미래보다 과거에 대한 평가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이 존재론적인 것일 경우, 자아성찰에 있어서 지식이 크게 작용합니다. 하지만 그 갈등이 윤리적인 경우에, 그 자아성찰에 있어서 도덕적 양심이 크게 작용합니다. 사람이라면 이 갈등을 끊임없이 하지만,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갈등을 하지 않습니다. 무질서와 반윤리적인 행동에 거침없이 손을 댑니다.

후기 Stoa학파에서 양심의 회고적 특성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아 양심의 회고적 특성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들은 양심이란 신이 개개인에게 부여한 감시인(testis/증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양심의 역할은 순리대로 살도록 인간을 인도하고 그의 도덕발달을 지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헬라문헌에서 인간의 양심 속에는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믿을 수 있는 방향표지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양심의 임무는 여전히 주로 이미 일어난 일 혹은 아무리 잘 봐주더라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심판을 내리는 사람의 비판적 항소법원의 임무입니다.

LXX에서 suineîdesis는 전도서10:20에서 ‘마음’을 번역했습니다. 집회서 42:18에서는 단순히 ‘지식’을, 지혜서17:10에서는 도덕적으로 나쁜 ‘양심’을 가리켰습니다. 이 구절에서 나쁜 양심은 사법적인 개념을 지닌 것으로 재판관과 형집행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양심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가 헬라인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문제가 더 중요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말씀(시139편)을 통하여 왔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책임 있는 행위를 가능케 하였던 이 말씀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신30:14). 선과 악은 이 말씀에 의하여 인지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것이 이스라엘에게 선했고, 인간들이 선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하시면 악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시14: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양심은 자아를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조화시키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인은 자기의 자의식을 탐색하는 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책임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하고 그의 율법을 순종으로 준행하고자 한 것이 구약성경의 양심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양심의 소리는 인간에게 그의 처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거룩한 재판관의 소리였습니다. 양심의 기능은 마음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은 내적 불화로 나타납니다(창42:21, 삼상24:5, 25:31).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내적인 불화와 갈등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정죄하고 참회하도록 촉구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회개를 통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인간을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도 했습니다(시51편).

지혜서17:10에서 악은 원래가 소심해서 제 입으로 자신을 단죄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몹시 받으면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양심은 ‘사람 속에서 검사와 판사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필로는 로마인 Seneca가 들은 것만큼이나 높이 외치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양심은 자율적 항소법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형성된 규범적 실체였습니다. 양심의 임무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여 참회케 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일단 깨어나게 되면, 고소자로 등장하여 양심 소유자를 기소하여 죄를 씌우고 수치를 당케 합니다. 반면에 양심은 그를 바로 잡아주며 회개할 것을 권면하는 재판관으로서 지시하며, 양심은 설득하고 나면 기뻐하고 누그러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은 계속적으로 그 죄인을 괴롭힙니다. 양심은 자비하신 하나님 품으로 이 죄인을 이끌기 위하여 이 모든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필로의 양심교리의 구약성경적 기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suineîdesis는 바울서신과 공동서신에서 사용했습니다. 바울서신에서 ‘쉬네이데시스’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피력했습니다(고전8:7, 10:25). 고린도교회에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주장을 암시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양심은 의지와 지식사이의 분열이나 판단과 행위 사이의 분열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는 ‘자아인식’을 의미했습니다. 양심은 아무런 편견도 없는 공평한 판단력이 아니라 뜻과 행위에 있어서의 ‘자아인식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항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질적인 양심에 의해 통제되는 것에서 자유 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다른 사람의 보다 더 민감한 양심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합니다. 바울은 ‘쉬네이데시스’에 어떤 제한을 두었습니다.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자유는 미처 우상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이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연약한 자들을 위한 양심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이질적인 양심에 의해 통제되는 것에서 자유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그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강한 자들을 위한 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연약하여, 더 민감한 양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연약한 자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의혹을 품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하며, 강한 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임의로 먹음으로써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의혹에 빠지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양심만이 변함없고 오류를 범치 않는 안내자라는 사상을 비난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양심이 죽었거나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함으로 해서 양심에 거리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행동의 옳음과 잘못을 결정하는 데는 다른 요소들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 없는 양심은 죽은 양심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사람들 보기에 선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바른 양심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은 조상들에게 깍듯이 섬기는 사람들을 바른 사람들이라고 동양적인 사고에서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보시기에는 우상을 심히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패역한 일입니다.

우리는 많은 청문회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일반사람들은 상상하기는 하지만, 법이라는 테두리가 두려워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그들은 거침없이 행하여 축재를 하고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아무나 하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또한 작금의 목회자들의 윤리적인 문제들이 사회의 issue들이 되어서 회자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학의 교수들이나 연예인들은 잘못하면 바로 사과하고 자신이 맡고 있는 직책에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목회자란 어떤 직업을 가진 자들보다 선명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을 볼 때 양심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양들을 사정없이 잡아먹는 삯군 목자들이 있기도 합니다. 성전을 짓는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크게 시작하여 감당할 수 없는 규모로 짓다가 보니

참으로 우리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점점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양심을 자꾸만 갉아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과 뇌물  (0) 2017.03.23
믿으면 좋기는 한데  (0) 2017.03.13
바울의 자기변호  (0) 2017.02.25
아나니아/더둘로/벨릭스  (0) 2017.02.16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  (0) 2017.02.11
And

바울의 변명(사도행전24:10-23)

 

진실과 거짓은 상반된 것입니다. 참에 대해서 거짓은 정면으로 덮으려하는 것입니다. 거짓은 있지도 않은 사건이나 말 등을 참에 대항하여 피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은 참을 덮으려 하기 때문에 그 규모가 반드시 커야합니다. 있지도 않은 사건을 참으로 만들려고 하다보니까 유대인들은 엄청난 규모로 총독앞에 섰습니다. 대제사장에 유대의 장로들, 그리고 당시 로마에서 소문난 변호사를 사야 했습니다. 그래야 바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계산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많은 전문적인 사람들을 동원한다해도 진실을 덮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변명을 종합해보면 그들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지 누구나 알 수 있었습니다. 총독에게 발언권을 허락받은 바울사도는 벨릭스가 몇 해 전부터 유대인들의 재판장이 된 것을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불과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가 12일밖에 되지 않으며, 저들 고소자들이 내가 성전에서 어떤 사람과도 변론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회당이나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한 일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소자들이 나를 소송을 걸었지만 어떤 증거도 찾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10-13절).

이어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 즉 그리스도의 도를 나는 좇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나는 유대인들의 조상의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래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믿습니다. 내가 믿는 것은 저들도 바라는 바인데 하나님께 대한 소망입니다. 저들도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고 나 또한 믿는데, 나는 이것을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믿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난 지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위하여 구제할 것과 재물을 가져왔었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중에 법대로 결례를 행하였고, 그때 사람들의 어떤 모임도 없었습니다. 이것을 저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나를 소송하고자 한다면 떴떳하게 나오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인가 잘못이 있기 때문에 저들이 출두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과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 사람들에게 말하라 하소서. 나는 저희들 앞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말했을 뿐인데, 이 소송이 가한 일입니까?(14-21절)

결국 베스도는 바울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문제를 잘 아는 고로 천부장 루시아가 오면 그 문제를 처결한다고 하고 바울을 지키되 누구나 바울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금하지 말라 했습니다(22-23).

항상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나를 아는 사람들이 괴롭힙니다. 그리스도교도 유대인들이 그렇게 싫어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자기들만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할 하등의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자신들 즉 산헤드린이 최고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교만하고 오만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배역한 추악한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으면 좋기는 한데  (0) 2017.03.13
거리낌이 없는 양심  (0) 2017.03.04
아나니아/더둘로/벨릭스  (0) 2017.02.16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  (0) 2017.02.11
하나님의 섭리하심  (0) 2017.01.31
And

아나니아/더둘로/벨릭스(사도행전24:1-9)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Nedebaeus의 아들입니다. 48년에서 58년까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아나니아는 탐욕스러웠으며, 잔인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일반 제사장들로부터 십분의 일세를 받아서 착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개인재산을 불린 사람입니다. 그 돈으로 로마고관들에게 많은 뇌물을 먹였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서 친로마정책을 편 그는 술수에 능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유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나니아를 대단히 미워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66년에 로마와의 전쟁 시에 아나니아의 집을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는 헤롯 궁의 뜰에 있는 도수관 속에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어서 죽였습니다.

더둘로는 ‘거짓말쟁이’란 뜻이며 유대인들의 요청으로 가이사랴 주재 총독 벨릭스 앞에 바울을 고소한 사람입니다. 로마의 지방 검사 또는 변호사일 것으로 추정되며 역시 유대인일 것입니다.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로마이름을 사용한 사람입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천하를 어지럽히는 페스트 같은 존재로 가만히 두었다가는 로마를 어지럽힐 나쁜사람이라고 혹평했습니다. 그는 장황하고 입에 발린 수사학으로 그야말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염병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벨릭스는 로마제국의 제4대 황제인 Claudius(주전10년8월1일-주후54년10월 13일)의 총애를 받고 있는 팔라스의 형제로 유대총독에 임명되었습니다. 벨릭스는 52년경에 팔레스타인의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기간에 끊임없이 소요가 증가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무자비하게 진압을 했습니다. 벨릭스는 잔인하기도 했지만 탐욕의 대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공의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을 구류할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뇌물을 혹시 줄까하고 2년이나 투옥시켰습니다.

오늘날에 아나니아나 더둘로, 벨릭스 같은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부정부패, 비리 등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합니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돈이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파렴치한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세상에만 이런 사람들이 있지만, 교회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분을 하지 못하고, 이권에 연루되기만 하면 교회의 교리도, 헌신짝 저버리듯 하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세상의 어떤 사람하고도 어울리며 어떠한 사상도 두려워하지 않고 접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나니아입니다. 또한 더둘로나 벨릭스 같은 사람들이 교회에도 많습니다. 참으로 교회에 이권이나 기득권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배제되는 예가 허다합니다.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보이는 예가 많습니다. 전횡을 휘두르는 교회의 직분자들 때문에 교회 내외적으로 많은 질타를 받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초등학교 때 배운 도덕내지 윤리를 엉터리로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일단 출세만 하면 어떻게 해보리라 생각하고서 자신이 생각한 자리에 앉자마자 최대한 이용해서 자신의 아성을 쌓습니다. 신앙실종, 신학실종, 하나님을 밀어내버리는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리낌이 없는 양심  (0) 2017.03.04
바울의 자기변호  (0) 2017.02.25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  (0) 2017.02.11
하나님의 섭리하심  (0) 2017.01.31
바울을 위한 천부장의 역할  (0) 2017.01.21
And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사도행전24:1-9)

 

바울사도는 가이사랴에 있는 헤롯 궁에 잡혀 있었습니다. 헤롯 궁은 헤롯대왕이 자신의 권세를 떨치기 위해서 가이사랴에 건립했습니다. 이 궁전이 후에는 로마총독의 관저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고대궁전은 요새도 되었고, 재판장소도 되었으며, 지하에는 감옥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성전에서 붙잡힌 후 5일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와서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더둘로는 법정에서 관례적으로 사용하는 수사적인 용어들을 사용하여 바울사도를 참소했습니다.

더둘로는 벨릭스에게 갖은 아첨을 했습니다. 3절을 보면 그 아첨과 아첨이 극에 달했습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하옵나이다’ 더둘로가 말하는 벨릭스는 더둘로의 말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사람입니다. 당시에 벨릭스의 상습적 잔혹행위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벨릭스는 총독의 특권을 이용하여 뇌물과 여색을 탑하는 등 온갖 악행을 도모했습니다. 자신의 비위를 거스르는 자들을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암살자를 동원하여 살해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말도 안 되는 아첨을 떤 것은 로마의 유대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많은 속주들이 있었지만 유대인들만큼 힘들게 하는 속주는 많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더둘로는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감정을 완화하려고 아첨을 한 것입니다.

유대의 종교자도자라는 사람들은 바울을 아예 죽이기로 공모해서 실패하자 이제는 더둘로라는 유명한 변호사를 사서 말하기를 바울을 ‘반란 음모자’라고 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거짓 메시야들이 출현하여 로마 관리들을 힘들게 햇던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따라서 더둘로는 바울을, 민심을 동요케 하는 이단세력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괴수란 무리중의 첫 번째로 서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유대의 성전을 모독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헬라인들과 달라서 그 나라의 종교를 인정해주었습니다. 따라서 더둘로는 바울을 어떻게든지 법으로 엮으려 하였습니다.

명색이 대제사장이라 하면 유대를 비롯해서 로마제국 내에 있는 유대인들의 대표입니다. 더구나 이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반역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아는 척한 것이며, 또한 권세를 휘두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반역한 것입니다. 오늘도 그러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를 사유화 하는 것입니다. 독선, 독단, 독주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교회를 사유화하여 세습하여 대대로 자신의 것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모자라도 한참이나 모자란 사람들입니다. 이들 때문에 교회가 공격을 당하고, 이들 때문에 교회가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교회를 더럽혀놓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파렴치한 사람들 때문에 교회는 점점 힘들어집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울의 자기변호  (0) 2017.02.25
아나니아/더둘로/벨릭스  (0) 2017.02.16
하나님의 섭리하심  (0) 2017.01.31
바울을 위한 천부장의 역할  (0) 2017.01.21
탄로 난 유대인들의 계략  (0) 2017.01.13
And

하나님의 섭리하심(사도행전23:31-35)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더 확장해서 말을 하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하신 분이 사람을 특히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대리로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피조물 중에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죄만 아니면 고통도 없고, 고난도 없으며, 그야말로 하나님의 필드에서 하나님과 같이 교통하면서 살았을 텐데, 죄로 인해서 모든 것이 헝클어져버렸습니다. 영원한 삶이 영원한 죽음으로, 영생이 끊기고, 대신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고난이 그로 말미암아 파생된 것입니다. 영원한 사람을 살줄 알고서 저지른 죄가 아담자신도 이렇게 가혹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담이후로 죄는 급속히 퍼졌습니다. 바로 아들들에게 죄의 바람은 불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죄의 바람은 광풍으로 번져 노아시대에는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인간을 쓸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유예기간을 두셨습니다. 120년이라는 유예기간을 두시고서 기다리셨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더욱 악해져갔고, 더욱 타락해갔습니다. 120년의 유예기간이 무색해져 버렸습니다. 결국에 인간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물로 전 세계를 심판하셨습니다. 부분적인 심판이 아니라 전체적인 심판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노아의 아들들을 포함해서 여덟명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더는 죄를 짓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죄를 졌습니다. 죄의 탑인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겨야 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죄가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전보다 더욱 타락해져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불러내셔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들어오시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예표한 어린양이 친히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섭리하셔서 인간의 구원을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누구나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하고, 영접하면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모르고, 구원을 얻는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평소에 제자들을 양성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 예수그리스도가 구약시대에서 오실 메시야다. 그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라고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비호를 받았습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노정입니다. 로마군단병들이나 총독은 자신의 임무를 하고 있지만, 그들은 바울을 로마까지 무사히 호송하는 일부의 임무를 맡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수백명의 로마 군병들, 천부장, 백부장과 총독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들은 감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호위병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복음은 이모저모로 보호를 받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나니아/더둘로/벨릭스  (0) 2017.02.16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  (0) 2017.02.11
바울을 위한 천부장의 역할  (0) 2017.01.21
탄로 난 유대인들의 계략  (0) 2017.01.13
신구약 중간사  (0) 2017.01.04
And

바울을 위한 천부장의 역할(사도행전23:23-30)

 

천부장의 이름은 글라우디아 루시아입니다. 바울의 조카로부터 사도바울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한 천부장은 바울을 총독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Fh'lix/Phȇllix/벨릭스는 52-59년에 11대 유대총독이었습니다. Phȇllix와 그의 형제 Pallas는 원래 노예였습니다. 자유인이 된 후에 52년에 Klauvdio"/Kllaûdios/글라우디오 황제에 의해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Phȇllix는 성격이 잔인했습니다. Phȇllix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는 동안에 유대의 반란이 일어나면 잔인하고 사정없이 진압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그를 싫어했으며, 더욱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Roma의 역사가 Tscitus는 Phȇllix에 대해 ‘그는 노예의 근성을 가지고 왕처럼 군림했다’고 했습니다. Phȇllix는 결혼을 세 번했는데 그들은 모두 공주들이었습니다.

천부장은 백부장 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밤3시(오후9시경)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步兵)200명과 마병(馬兵)70명, 창군(槍200)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다가 바울을 태워서 총독인 Phȇllix에게 보내기 위해 짐승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총독인 Phȇllix에게 편지까지 썼습니다. 26-30절을 보면

26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에게 문안하노이다 27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줄 들어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28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송사하는지 알고자 하여 저희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29 송사하는 것이 저희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건이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30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게 하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송사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를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천부장이 바울을 총독인 벨릭스에게 보낸 이유는 천부장은 재판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에게 바울을 보낸 것입니다. 또한 로미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바울을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로마시민권을 가진 바울을 결박하거나 때린 것은 빼버렸습니다.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가이사랴에 보내기 위해서 470명과 짐승들을 준비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는 96km나 되는 거리입니다. 그래서 한적한 밤 시간에 바울을 이동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사노라면 참 힘든 일들이 많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로 인해서 고통을 받기도 하고 환란을 받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여러 가지의 상념 속에 젖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하면서 별별 생각을 다 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사도를 가이사랴에 보내기 위해서 470명의 군인들이 경호를 했습니다. 비록 어려운 일들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어려워도 힘들어도 살 수 있습니다. 살 희망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힘들게 하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  (0) 2017.02.11
하나님의 섭리하심  (0) 2017.01.31
탄로 난 유대인들의 계략  (0) 2017.01.13
신구약 중간사  (0) 2017.01.04
황제의 재판을 청원한 바울  (0) 2016.12.27
And

탄로 난 유대인들의 계략(사도행전23:16-22)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절대적인 비밀은 없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40여명의 테러분자들이 산헤드린과 결탁하는 과정에서 terrorist의 계획이 바울의 조카에게 들린 것입니다. 바울의 조카는 즉시 그 계획을 바울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백부장 한 사람을 불러서 조카를 천부장에게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천부장은 바울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바울도 위험을 느꼈을 것이고, 바울의 조카도 위험을 느꼈을 것이며, 천부장과 백부장들도 위험을 느꼈을 것입니다. terrorist들이 무려 40명이며 산헤드린과 결탁하여 예루살렘이 소동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같이 모두 위험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럴 때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23:11)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즉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 섭리사역을 하십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5장1-4,7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물의 위대한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언행심사를 보존하시고 감독하시고, 처리하시고, 통치하신다. 그는 기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하시며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하며, 그의 무오한 예지와 그 자신의 의지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계획을 따라서 하신다. 이로써 그의 지혜 능력, 공의 선하심 그리고 자비의 영광을 찬미케 하신다. 제1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에 따라 모든 일들이 변함이나 틀림없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동일한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은 제2원인들의 성질에 따라 그 모든 일들이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또는 우발적으로 일어나도록 작정해 두셨다 하나님은 그의 일반적 섭리에 여러 수단들을 사용하신다. 그렇지만 그는 그 수단들 없이 그것들을 초월하여, 그리고 역행하면서도 그의 기쁘신 뜻대로 자유롭게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하신 선하심이 그의 섭리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섭리는 아담의 첫 번째 타락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모든 죄까지도 포함한다. 그런데 그러한 죄들은 단순한 허용에 의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허용하시되 여러 세대에 가장 지혜롭고 강력하게 제한하시고 그 밖에도 명하시고 주관하시어 그 자신의 거룩한 뜻들을 이루도록 하신다. 그러나 죄악성은 오직 피조물에게서 나온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기장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의 조성자이거나 승인자가 아니시며 또한 그러실 리도 없다. 하나님의 섭리가 일반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미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가장 특별한 방식을 따라 그의 섭리로 자기 교회를 돌보시며, 모든 일들을 교회에 유익이 되게 처리하신다.

우리의 사명은 금방 넘어질듯 하면서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에 갈 때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기까지 누구도 바울의 생명을 해할 수 없습니다.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비록 동화처럼 아기자기하지는 못해도, 고통과 고난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와 사탄이 사나운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어도 성도들을 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섭리하심  (0) 2017.01.31
바울을 위한 천부장의 역할  (0) 2017.01.21
신구약 중간사  (0) 2017.01.04
황제의 재판을 청원한 바울  (0) 2016.12.27
잘못된 교리에 얽매인 자들  (0) 2016.12.17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