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새벽강해'에 해당되는 글 366건
- 2017.01.04
- 2016.12.27
- 2016.12.17
- 2016.12.10
- 2016.12.03
- 2016.11.12
- 2016.10.29
- 2016.10.22
신구약중간사(사도행전25:6-12)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서 범죄로 인해서 주전586년(북왕국/722)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후로부터 이들은 계속해서 타국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Persia의 고레스에 의해서 유다로 귀환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Persia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Persia(주전450-330)는 유대에 상당히 호의적이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 이후 약200년 간 Persia는 유대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을 허용했습니다. 따라서 이 기간에는 유대의 행정을 책임 맡은 대제사장들이 유대를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전333년에 Alexandros대제가 Macedonia에 주둔하고 있던 Persia군을 격퇴시켰습니다. 이로인해 Persia가 다스렸던 지역이 Greece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Alexandros는 Greece 문화가 세계를 통일시키는 유일한 힘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Alexandros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법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안식년에는 공물이나 세금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이집트의 Alexandria라는 도시를 건설해서 유대인들이 이주해서 살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이주민들에게 Greece인들에게 부여된 몇 가지 특권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Septuagint/주전250년)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대제가 주전323년에 죽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이 제국을 분할통치합니다. 이들은 Kasandros,1 Lysimachos,2 Ptolemy,3 Antigonus4입니다. 이들은 알렉산더대제처럼 단일체제냐, 집단체제로 갈 것인가 하다가 피차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안티고누스를 다른 3명이 제거합니다. 알렉산더 사후 후계자 전쟁(Diadochi War)이 주전323-주전301년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나 Antigonus가 주전301년 Ipsus전쟁에서 죽자 Diadochi시대가 끝나고 네 왕조로 분열되었습니다. 북부 Syria와 Mesopotamia지역을 다스리던 Seleucus, 애굽과 Palestine, 남부 Syria지역을 다스린 Ptolemy, 소아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Lysimachus, 헬라(Macedonia/Greece) 지역을 다스리던 Cassander가 이들 네 지역을 대표했습니다. 이 네 왕국 중 성경역사와 관련되는 왕국이 Ptolemy왕조와 Seleucus왕조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하여 다스리던 왕조는 Ptolemy왕조였습니다. 이들은 이방종교에 관대해 유대인들을 Alexandria에 이주시켰습니다. Ptolemy2세 지원 하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당시 세계적 공용어인 헬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LXX). 헬라어가 당시 세계 공용어가 된 배경에는 Alexandros대제의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전198년, Seleucus왕 안티오쿠스3세가 Ptolemy5세와의 파내우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Palestine 통치권은 Seleucus왕조로 넘어갔습니다. Ptolemy왕조는 유다관습과 전통에 관용적이었던 반면, Seleucus왕조는 Hellenism문화를 강압적으로 이식시키려 하고 많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성전 보물을 약탈도 했습니다. Seleucus의 왕 Antiochus4세는 자신을 스스로 신의 현현(顯現)으로 자처하여 Epiphanes라 칭하였습니다.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성소’를 더럽혔고(단11:31) 주전167년에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지하였으며 12월8일에는 성전의 제단에 ‘제우스 신상’을 세워 숭배하게 했습니다(단11:31). 심지어 율법을 지키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왕의 생일을 기념케 하기 위해 매월25일마다 돼지를 잡아 제단에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Antiochus Epiphanes에 대하여 “네 뿔 중에 한 뿔에서 나오는 작은 뿔”로 칭하고 그가 영화로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하늘군대인 이스라엘 백성을 쳐서 별들을 떨어뜨리고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고 성소를 헐어버린다고 기록했습니다(단8:8-11).
Seleucus왕조의 反유대인 정책은 유대인들의 강력한 저항과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헬라문화의 同化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신앙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바리새파 유대인들과 헬라주의에 동조하는 사두개파 유대인들의 관계가 악화되어 갈 때 유대주의자들이 Antiochus4세가 애굽 원정길에서 죽었다는 헛소문을 내고 다수의 헬라주의자들을 죽였습니다(주전169). 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Antiochus4세는 유대주의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모든 종교행사를 금하는 종교박해를 감행했습니다. 당시 제사장 맛다디아는 제우스 신에게 제사하라는 왕명을 거절하고 제단을 파괴한 후 고프나 산지로 도망하여 경건한 유대인인 하시딤과 합류, 반란의 선봉에 섰습니다(주전167). 맛다디아의 아들 유다 마카비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주전164년에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율법의 규례대로 성전을 정화하고 8일간의 봉헌축제(‘하누카’, 또는 ‘수전절’)를 열었습니다. 마카비의 동생 요나단 때에는 이스라엘 북동 지역과 트랜스 요르단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마침내 시몬의 지도하에 주전142년 유다는 Seleucus왕조를 완전히 몰아내어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몬 왕조’를 건립하였습니다(주전142). 하지만 하스몬 왕조는 내부분열과 갈등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주전63년 Roma의 Pompeius(Gnaeus Pompeius Magnus)장군에 의해 다시 예루살렘을 내주고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Josephus에 의하면 Pompeius의 군대가 이무나 접근할 수 없고 볼 수도 없었던 성전을 마구 짓밟았다고 했습니다. Pompeius와 그의 부하들은 대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것까지 보았습니다. 당시 성전 안에는 금상과 금등대와 그릇들과 다량의 향료들과 2000달란트나 되는 돈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손을 대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1 주전358-297/알렉산드로스대왕의 후계자 중 한 사람으로 안티고노스와 대립하였고 입소스 전투 이후로는 나라와 왕국경영에 전념하였다. 아버지 안티파트로스가 죽은 뒤 안티고노스의 후원을 얻어 그리스 본토 지배권을 획득하였으며, 이어 알렉산드로스제국(帝國)의 재상 폴류페르콘을 제거하고 마케도니아에 세력기반을 구축하였다. 주전305년부터 마케도니아 왕을 칭하였으며, 제국 재통일을 지향(志向)하는 안티고노스와 대립하였다.
2 Lysimachos/주전360~281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이며, 대왕의 친위대의 한 사람. 대왕이 죽은 후 트라키아와 소아시아 북서부를 지배하였고 케르소네소스 반도의 기부(基部)에 수도를 건설하였다. 주전306년 트라키아왕이라 하였다. 주전301년 후계자 중 가장 유력한 안티고노스를 입소스전투에서 깨뜨리고, 그 영토 마케도니아를 병합하였으나, 전날의 동맹자 셀레우코스의 공격을 받아, 리디아의 쿠르페티온에서 전사하였다.
3 Ptolemy I 주전367-283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로 동방 원정에 종군하였고, 주전323년 왕이 죽은 후 이집트의 관구를 통치하였다. 그의 치세에 이집트와 시리아의 전쟁이 벌어져, 그는 주전312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많은 유대인을 식민 또는 상인으로 하여 이집트로 데려갔다. 주전301년 유대는 정식으로 톨레미의 판도에 가입되었다. 그의 치세 중에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명한 박물관ㆍ도서관ㆍ세라피움의 성전이 세워졌다. 그는 미술ㆍ문학을 장려, 유클리드와 같은 그리스 학자를 후원하여 알렉산드리아를 학술의 중심지로 삼고 상업에도 힘써 나라를 크게 번영시켰다.
4 Antigonus I 주전382~301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마케도니아 장군으로서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를 창건해, 주전306년 왕이 되었으나, 5년 후인 주전301년의 입소스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바울을 위한 천부장의 역할 (0) | 2017.01.21 |
---|---|
탄로 난 유대인들의 계략 (0) | 2017.01.13 |
황제의 재판을 청원한 바울 (0) | 2016.12.27 |
잘못된 교리에 얽매인 자들 (0) | 2016.12.17 |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들 (0) | 2016.12.10 |
황제의 재판을 청원한 바울(사도행전25:6-12)
베스도는 예루살렘에 8-10일간 있었습니다. 이때 유대의 지도자란 사람들은 베스도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바울을 살해할 기회를 얻기 위해 그들은 베스도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베스도는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바울을 재판하였습니다. 바울을 부르고 유대인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중대한 범인으로 지목하고 고소했지만, 어떤 혐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막상 바울을 고소했지만 죽일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베스도에게 말합니다. ‘나는 유대인에게도, 성전에도, 가이사에게도 전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베스도는 바울보다 유대인의 마음에 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내 앞에서 심문을 받겠는가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Roma의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전혀 죄가 없습니다. 내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불의를 행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어떤 불의를 행하였다면 마땅히 죽음의 벌도 받겠지만, 나를 고소한 일이 무고인데 어떤 사람이든지 나를 유대인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나는 가이사에게 호소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가 가이사에게 항소함으로써 이 사건은 베스도의 손을 떠나버렸습니다.
Roma시민은 지방의 행정관에게 심한 압제를 받거나 중요한 재판문제가 발생했을 때 황제에게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지방관청은 그 호소자를 Roma까지 호소해야 했습니다.
Roma황제 중에 악명 높은 황제는 Tiberius, Caligula, Claudius, Nero입니다. 바울사도가 호소했을 황제는 Nero황제였습니다. Nero황제도 초기(54-62)에는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Stoa철학자 Seneca와 집정관 Afranius Burrus 등의 영향으로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Nero가 황제에 즉위했을 때가 그의 나이 16세10개월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로 인해서 점점 삐뚤어져 결국에는 악한 황제로 변했던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순전히 자신의 신변 때문에 황제에게 호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Roma에 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당시에 Roma는 천하에 중심이었습니다. 천하의 중심인 Roma에 복음을 전하고자 황제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이미 목숨은 하나님께 담보로 잡힌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위하여 바울사도는 죽음도 불사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는 그러한 믿음도 없고 열정도 없습니다. 물론 2000년의 gap이 있지만 오늘의 우리들은 초대교회의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주의하라고 하신 헤롯의 누룩/물질주의, 바리새인의 누룩/외식과 율법주의, 사두개인의 누룩/현세주의 등의 누룩이 교회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건물을 요지에 잡아서 크게 짓고, 교세를 자랑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고난받기를 거부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복신앙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과 권세와 재물을 극히 좋아합니다.
탄로 난 유대인들의 계략 (0) | 2017.01.13 |
---|---|
신구약 중간사 (0) | 2017.01.04 |
잘못된 교리에 얽매인 자들 (0) | 2016.12.17 |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들 (0) | 2016.12.10 |
권력자들의 행태 (0) | 2016.12.03 |
잘못된 교리에 얽매인 자들(사도행전25:1-5)
베스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온지 3일 만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유대의 사정과 유대인들을 접견하고자 예루살렘에 간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산헤드린은 벨릭스 때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좌절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베스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오자 즉시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베스도에게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에서 올라와 심리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청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길에서 자객들이 매복해 있다가 바울을 죽이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끌어들여 사형선고를 내리고 즉시 제고하든지, 아니면 자객으로 하여금 살해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베스도는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갇혀있으며, 나도 곧 가이사랴에 갈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 중에 유력한 자들이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이 만일 잘못한 일이 있으면 법적으로 말하라고 했습니다. Roma인인 바울을 유대인들에게 함부로 내어줄 수 없었으며, 행정상 예루살렘에 간 것이지 바울문제로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새롭게 형성된 그리스도인들을 늘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교리에 목을 맸기 때문입니다.
김광채 교수의 고대교리사에 의하면 교리란 영어로 dogma인데 이는 dogme( 불어), Dogma(독어) 말의 번역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는 라틴어로 dogma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라틴어의 dogma도 헬라어 dovgma/dôgma에서 차용해 온 말입니다. 따라서 dogma의 어원은 헬라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dogma의 헬라어 명사는 dokei'n/dokeîn이라는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dokeîn이라는 동사는 타동사로 사용될 때 “믿다”, “생각하다”, “결정하다”, “결의하다”, “규정하다” 등의 뜻입니다. 자동사로 사용될 때는 “…처럼 보인다” “…처럼 생각된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dovgma는 dokei'n 동사의 수동태 완료분사가 명사화한 to; dedogme;non(중성단수)에서 나온 말로서 “의견”, “생각”이라는 기본적인 뜻 외에 “결정”, “결의”, “명령”, “규정”, “법령”, “칙령” 등의 정치적, 법률적인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철학이나 의학, 법학 등의 학문분야에서 전문용어로 사용될 때는 학설(學說), 주의(主義), 교의(敎義), 교조(敎條), 원칙(原則), 공리(公理)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Platon은 dovgma를 그의 국가론(politeia)에서 통치자들의 “결정” 내지 “명령”이라는 뜻을 지닌 정치적, 법률적 용어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LXX의 다니엘2:13과 6:9에서 “금령”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에스라3:9에서는 ‘도그마’에서 파생된 ‘도그마티제인’이 ‘조서를 내리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누가복음2:1, 사도행전17:7에서 황제의 “칙령”내지 “명령”의 뜻으로 상용되었고, 에베소서2:15과 골로새서2:14에서는 “의문” 즉 “구약의 율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예루살렘 사도회의(49년)의 “결정”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잘못된 ‘dovgma’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세상에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쏘시개로 알았습니다. 그러는데 교회가 이방인도 구원을 받고, 사마리아인들도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눈에서 불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살해대상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유대인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못된 교리로 이단에 빠진 사람들, 이단은 아니지만 세속화된 교회들이 문제입니다. 이들은 정통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dovgma’에 얽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구약 중간사 (0) | 2017.01.04 |
---|---|
황제의 재판을 청원한 바울 (0) | 2016.12.27 |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들 (0) | 2016.12.10 |
권력자들의 행태 (0) | 2016.12.03 |
그리스도인과 뇌물 (0) | 2016.11.12 |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들(사도행전24:24-27)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27절)
벨릭스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했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합니다. 사실 인간들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 이유는 어떤 사람이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욥기4:17-21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 사이에 멸한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장막 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사람이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죽음을 면치 못할 짧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시편39: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시편49:6-14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사람들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영원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 한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로마서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뿐만 아니라 인생은 극히 허무합니다.
욥기7:7-10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찌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전도서12:1-8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인간의 행한 일들(선악)은 하나님께 아무런 힘이 못됩니다.
욥기35:2-8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그 관계를 끊어놓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한 사람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katativqhmi/katatîthemi) 합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 하고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온통 한계 투성이인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더 합니다. 절대로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목사들을 보면 사람을 너무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좀 괜찮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를 끔찍이도 사랑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가차 없이 사람들을 버리는 사람들이 목사들입니다. 참 이율배반적인 일들이 지금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황제의 재판을 청원한 바울 (0) | 2016.12.27 |
---|---|
잘못된 교리에 얽매인 자들 (0) | 2016.12.17 |
권력자들의 행태 (0) | 2016.12.03 |
그리스도인과 뇌물 (0) | 2016.11.12 |
믿으면 좋기는 한데 (0) | 2016.10.29 |
권력자들의 행태(사도행전24:24-27)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2권 13장을 보면 Nero는 소(小) Armenia 왕국을 헤롯의 아들 Aristobulus에게 주었습니다. 아그립바에게는 4개의 도시와 그 인근지역을 주었습니다. 아그립바는 Abila, Julias, Tarichea, 갈릴리의 Tiberias를 다스렸습니다. 이 외의 모든 지역은 벨릭스를 총독으로 파견해서 다스리게 했습니다. 벨릭스는 20년 동안이나 유대를 휩쓸며 약탈하던 Eleazar과 부하들을 생포하여 로마로 압송하였습니다. 벨릭스가 체포한 자들과 처벌한 자들과 십자가에 처형한 자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들을 제거하자 대낮에 도시 한가운데서 살인을 자행하는 Sicarii라고 부르는 자들이 예루살렘에 나타났습니다. 이들의 손에 대제사장 Jonathan도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들 외에도 정권(政權)의 변화와 변혁을 노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벨릭스는 이런 사태의 진전이 반역의 시초라고 생각하여 무장한 기병과 보병을 보내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습니다. 거기에 애굽인 거짓 예언자까지 나타나 그를 따르는 자들이 무려 3,0000명이나 되었지만, 벨릭스는 진압하였습니다. 이들 말고도 예루살렘에 끊임없이 소란을 일으키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이사랴에서도 계속 소요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러다보니 과격진압과 과잉진압이 그치지 않았고 이에 로마에 진정이 들어갔습니다. 벨릭스가 결정적으로 파면당한 이유는 가이사랴의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의 내란 때문이었습니다. 이 내란 때에 벨릭스는 군을 동원해서 중재하려다가 유대의 지도자들의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Roma는 벨릭스의 뒤를 이어 베스도(Festus)를 후임총독으로 보냈습니다. 베스도는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소요를 일으킨 자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대부분을 생포하고 살해했습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행정장관이 바뀌었다고 바울에게 유익한 점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벨릭스는 바울을 억류시켜놓고 떠나면서 자신의 이러한 행동이 유대당국자들에 의해 호의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습니다(F. F. Bruce). Roma로 소환되기 직전까지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습니다. 또한 경험이 없는 새로운 통치자가 과연 바울에게 유익한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바는 부요하고 안락한 삶입니다. 그 부요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서 권력을 잡습니다. 돈을 모읍니다. 그러면 안락한 삶이 충족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권력을 잡으면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오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잘못되어 오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회장이 조금 늦게 나왔다고 대통령의 경호실장이 벌을 주기도 했고, 정권에 잘못 보여서 회사가 압류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정권을 잡으면 신앙을 지키기가 여간 어렵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주님의 말씀이 쓸데없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다수의 권력자들이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직책이 늘 시험의 대상임을 인식하고 늘 주의해야 합니다.
잘못된 교리에 얽매인 자들 (0) | 2016.12.17 |
---|---|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들 (0) | 2016.12.10 |
그리스도인과 뇌물 (0) | 2016.11.12 |
믿으면 좋기는 한데 (0) | 2016.10.29 |
거리낌이 없는 양심 (0) | 2016.10.22 |
그리스도인과 뇌물(사도행전24:24-27)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26절)
구약성경에서 뇌물(dj'vo/shōhad)은 모세오경의 법률 부분에서 발견됩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법관이나 관리가 ‘뇌물’ 즉 부정한 금품을 취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23:8) 법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재판관에게는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되었습니다(대하19:7). 그럼에도 지배자들은 뇌물 받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은 이것을 심히 비난했습니다(삼상8:3/사1:25,5:23, 미3:11).
뇌물의 사전적인 정의는 ‘어떤 직위에 있는 사람을 매수하여 사사로운 일에 이용하기 위하여 넌지시 건네는 부정한 돈이나 물건’입니다. 따라서 주로 뇌물은 직위를 이용해서 부정하게 거래되는 돈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건을 맡았는데 A가 봐달라고 뇌물을 주게 되면, 그 사건은 제대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업무상 뇌물을 받았다면,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당연히 뇌물을 받은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면 뇌물을 주지 않은 사람은 엄청나게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회가 탁해지고 어두워지게 됩니다. 너도나도 뇌물을 받게 되면 정상적인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사회나 국가는 머지않아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뇌물을 받으면 되지 않습니다.
업무와 관련해서 거래가 이루어질 일들은 이 사회에 많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악의 요소들이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벨릭스처럼 돈을 받을까 바라는 마음이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정상적인 돈이 아니기 때문에 받는 마음이나 주는 마음이나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이 막 받아 챙긴다면 양심이 마비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돈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에 돈이 소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제한을 받습니다. 돈을 벌어들이는데도 제한을 받고, 돈을 모으는데도 제한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돈이 벌린다고 해서 아무 직업이나 가질 수 없습니다. 돈이 된다고 유흥업소를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과 상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많은 것들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의 테두리 안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목회자도 어떻게 하든지 편하게 윤택하게 생활하고 싶어집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렇게 생활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모두 그렇게 살았습니다. 환경이 조금 좋아졌다고 해서 수천만원씩 수억원씩의 사례비를 받는 것은 좀 생각해봐야 합니다. 뇌물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들 (0) | 2016.12.10 |
---|---|
권력자들의 행태 (0) | 2016.12.03 |
믿으면 좋기는 한데 (0) | 2016.10.29 |
거리낌이 없는 양심 (0) | 2016.10.22 |
바울의 자기변호 (0) | 2016.10.08 |
믿으면 좋기는 한데(사도행전24:24-27)
바울을 감금시킨 며칠 후에 벨릭스는 아내인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왔습니다. Drouvsilla/Droûsilla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입니다. 바울을 만난 이때(주전57년)도 20세도 안되었습니다. 어린 소녀 시절에 Droûsilla는 동부 Asia에 위치한 Commagene의 태자와 정혼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태자가 유대교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Droûsilla는 그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그의 오빠 아그립바II세가 수리아의 작은 국가인 Emesa/지금의 Homs(리비아 북서부에 있는 도시)의 왕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직 16세일 때에 벨릭스가 Atomos라고 불리는 구브로의 마술사의 도움을 얻어서 남편을 떠나 자기와 결혼하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벨릭스의 세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을 아그립바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79년의 베수비오 화산폭발 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Droûsilla지만 Droûsilla는 그리스도교에게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도 그리스도교를 소개한 것 같습니다(22절). 그러기에 바울을 보고 싶어한 것입니다.
바울은 벨릭스에게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의(dikaiosuvnh)와 절제(ejgkravteia), 장차 오는 심판(krivma)을 강론했습니다. 이에 벨릭스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시방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틈이 있으면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구원은 현세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추후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내세와 현세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망설이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세와 현세가 동일한 패턴대로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내세가 보이지는 않고 그럴 것이다라고 말하니까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이 지구상에 태어난 사람들 10%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백성들은 남은자요, 작은 자들이며, 택함을 받은 사람들뿐입니다. 창조주께서 믿으라고 이스라엘에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천사들을 보내시며 하나님께서 직접 들어오셔서 기적을 베푸시고, 표적을 베푸시며 말씀해도 듣지 않습니다. 왜 듣지 않습니까?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라온 성장과정에서부터 이 세상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교육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교만함과 무지함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신화의 인물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동화에서만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고 역사속의 국가임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교만함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무척 애처로운 일입니다. 인생은 길어야 100년인데 그 100년을 위해서 영원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100년이 영원을 끝내버리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다고 인식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벨릭스는 현세에서는 소유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무척이나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을 위해서는 조금도 단 1%도 신경을 쓰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도 ‘믿으면 좋기는 한데’라고 말하면서 믿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권력자들의 행태 (0) | 2016.12.03 |
---|---|
그리스도인과 뇌물 (0) | 2016.11.12 |
거리낌이 없는 양심 (0) | 2016.10.22 |
바울의 자기변호 (0) | 2016.10.08 |
아나니아/더둘로/벨릭스 (0) | 2016.09.30 |
거리낌이 없는 양심(사도행전24:10-23)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바라노라…’ 양심suneivdhsi"/suineîdesis는 suneivdw/suineîdo/이해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헬라문헌에서 디오, 스트라보, 플루타르크 등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들을 회고해 볼 때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여부에 의거하여 그의 양심이 선한지 악한지를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한양심은 평강을 누립니다. 그러나 악한 양심은 양심의 소유자를 사정없이 괴롭힙니다. 그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헬라문헌은 거의 악한 양심에 관하여 언급했습니다. 이에 반해 로마인인 Cicero는 자주 선한양심과 깨끗한 양심과 좋은 양심에 관하여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양심은 비난과 좌절의 성격을 띠고 나오는 실패와 악에 대한 회고적 지식이었습니다.
한 인간 속에는 두개의 자아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동일한 사물들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봅니다. 그렇지만 동일한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답을 내놓습니다. 질서를 지향하는 세력과 무질서를 지향하는 세력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때 갈등은 과거의 무질서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양심은 미래보다 과거에 대한 평가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이 존재론적인 것일 경우, 자아성찰에 있어서 지식이 크게 작용합니다. 하지만 그 갈등이 윤리적인 경우에, 그 자아성찰에 있어서 도덕적 양심이 크게 작용합니다. 사람이라면 이 갈등을 끊임없이 하지만,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갈등을 하지 않습니다. 무질서와 반윤리적인 행동에 거침없이 손을 댑니다.
후기 Stoa학파에서 양심의 회고적 특성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아 양심의 회고적 특성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들은 양심이란 신이 개개인에게 부여한 감시인(testis/증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양심의 역할은 순리대로 살도록 인간을 인도하고 그의 도덕발달을 지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헬라문헌에서 인간의 양심 속에는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믿을 수 있는 방향표지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양심의 임무는 여전히 주로 이미 일어난 일 혹은 아무리 잘 봐주더라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심판을 내리는 사람의 비판적 항소법원의 임무입니다.
LXX에서 suineîdesis는 전도서10:20에서 ‘마음’을 번역했습니다. 집회서 42:18에서는 단순히 ‘지식’을, 지혜서17:10에서는 도덕적으로 나쁜 ‘양심’을 가리켰습니다. 이 구절에서 나쁜 양심은 사법적인 개념을 지닌 것으로 재판관과 형집행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양심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가 헬라인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문제가 더 중요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말씀(시139편)을 통하여 왔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책임 있는 행위를 가능케 하였던 이 말씀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신30:14). 선과 악은 이 말씀에 의하여 인지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것이 이스라엘에게 선했고, 인간들이 선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하시면 악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시14: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양심은 자아를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조화시키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인은 자기의 자의식을 탐색하는 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책임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하고 그의 율법을 순종으로 준행하고자 한 것이 구약성경의 양심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양심의 소리는 인간에게 그의 처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거룩한 재판관의 소리였습니다. 양심의 기능은 마음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은 내적 불화로 나타납니다(창42:21, 삼상24:5, 25:31).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내적인 불화와 갈등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정죄하고 참회하도록 촉구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회개를 통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인간을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도 했습니다(시51편).
지혜서17:10에서 악은 원래가 소심해서 제 입으로 자신을 단죄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몹시 받으면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양심은 ‘사람 속에서 검사와 판사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필로는 로마인 Seneca가 들은 것만큼이나 높이 외치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양심은 자율적 항소법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형성된 규범적 실체였습니다. 양심의 임무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여 참회케 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일단 깨어나게 되면, 고소자로 등장하여 양심 소유자를 기소하여 죄를 씌우고 수치를 당케 합니다. 반면에 양심은 그를 바로 잡아주며 회개할 것을 권면하는 재판관으로서 지시하며, 양심은 설득하고 나면 기뻐하고 누그러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은 계속적으로 그 죄인을 괴롭힙니다. 양심은 자비하신 하나님 품으로 이 죄인을 이끌기 위하여 이 모든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필로의 양심교리의 구약성경적 기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suineîdesis는 바울서신과 공동서신에서 사용했습니다. 바울서신에서 ‘쉬네이데시스’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피력했습니다(고전8:7, 10:25). 고린도교회에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주장을 암시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양심은 의지와 지식사이의 분열이나 판단과 행위 사이의 분열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는 ‘자아인식’을 의미했습니다. 양심은 아무런 편견도 없는 공평한 판단력이 아니라 뜻과 행위에 있어서의 ‘자아인식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항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질적인 양심에 의해 통제되는 것에서 자유 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다른 사람의 보다 더 민감한 양심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합니다. 바울은 ‘쉬네이데시스’에 어떤 제한을 두었습니다.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자유는 미처 우상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이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연약한 자들을 위한 양심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이질적인 양심에 의해 통제되는 것에서 자유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그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강한 자들을 위한 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연약하여, 더 민감한 양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연약한 자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의혹을 품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하며, 강한 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임의로 먹음으로써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의혹에 빠지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양심만이 변함없고 오류를 범치 않는 안내자라는 사상을 비난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양심이 죽었거나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함으로 해서 양심에 거리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행동의 옳음과 잘못을 결정하는 데는 다른 요소들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 없는 양심은 죽은 양심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사람들 보기에 선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바른 양심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은 조상들에게 깍듯이 섬기는 사람들을 바른 사람들이라고 동양적인 사고에서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보시기에는 우상을 심히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패역한 일입니다.
우리는 많은 청문회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일반사람들은 상상하기는 하지만, 법이라는 테두리가 두려워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그들은 거침없이 행하여 축재를 하고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아무나 하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또한 작금의 목회자들의 윤리적인 문제들이 사회의 issue들이 되어서 회자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학의 교수들이나 연예인들은 잘못하면 바로 사과하고 자신이 맡고 있는 직책에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목회자란 어떤 직업을 가진 자들보다 선명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을 볼 때 양심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양들을 사정없이 잡아먹는 삯군 목자들이 있기도 합니다. 성전을 짓는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크게 시작하여 감당할 수 없는 규모로 짓다가 보니
참으로 우리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점점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양심을 자꾸만 갉아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뇌물 (0) | 2016.11.12 |
---|---|
믿으면 좋기는 한데 (0) | 2016.10.29 |
바울의 자기변호 (0) | 2016.10.08 |
아나니아/더둘로/벨릭스 (0) | 2016.09.30 |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 (0) | 2016.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