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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자였던 바울(사도행전26:9-11)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9-11)

바울 자신도 과거에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인들을 지독하게 박해한 사람이었다고 술회합니다. 갈라디아서1:13-14을 보면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라고 했고, 디모데전서1:13을 보면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대로 박해자가 아니라 어떤 바리새인들보다, 어떤 유대인들보다 심하다할 만큼 예수님의 이름을,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했다는 것입니다. 나도 (진실로) 예수의 이름을 대적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 못지않게 그리스도인에게 대하여 못된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바리새인들을 이해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심히 핍박하고 죽이고 하는 일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충성하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론적으로는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고난 후에 다시 살아난 것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사기꾼이라고 몰아세우고는 핍박을 했습니다.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그러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발본색원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준 권위로 집집마다 다니면서 마치 Nazi의 Gestapo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투옥시켰습니다. 이 회당에서 저 회당으로 다니며 그들을 고소했습니다. 어떻게든지 처벌을 받도록 했습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재판을 받을 때 정죄하는 투표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형선고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되도록 복음이 퍼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각 회당들을 다니면서 강제로 예수를 저주받을 자라고 모독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자신은 이전에는 어떻게든지 그리스도인에게 죄를 주고 되도록 사형을 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바울사도의 박해의 끈은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유대와 예루살렘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전 Roma제국에 그의 손이 닿는 한 성도들을 박해했고, 땅 끝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 박해를 했던 그가 이제는 박해를 당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결코 후회한 적이 없었던 사도바울, 오직 주 예수를 위해서 일생을 바친 사도바울의 열정과 주님에 대한 사랑을 오늘의 우리들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과거 박해자였던 사도바울의 신앙은 후세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귀감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세워졌던 교회는 업그레이드를 시키고, 잘못된 교회들은 고치고, 권면하고 격려했던 사도바울, 진정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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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이었던 바울(사도행전26:4-8)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나만 깨끗하면 돼, 하나님이 아실 테니까 사람에게는 인정을 못 받아도 돼’라고 생각하며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일부 서울의 대형교회 몇 교회 때문에 교회전체가 욕을 먹는 것은 물론이고 그 여파로 인해서 정체상태로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의 증오심 때문에 죄도 없는데도 죄인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부활도 있고, 천국에 대한 소망도 믿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도를 전하는데 유대인들이 태클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과거 에는 바울자신도 바리새인으로서 그 도를 아는데 바리새인들이 태클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예가 많습니다. 죄는 다른 사람이 졌는데 오히려 죄인취급을 받거나 오해를 받는 예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에 교회는 타격을 입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장로 대통령이 세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성도답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이 장로들이 교회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여러 목사들이 교회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로 인해서 성도들이 줄고, 교회에 대한 인식이 점점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Roma에 가기 위해서 황제에게 호소한 것이지, 죄목이 마땅치 않아서 황제에게 호소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Agrivppa"/Agrîppas에게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전체적인 신앙의 핵심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이었다는 점을 말했습니다. 제대로 된 바리새인이라면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Roma의 황제 중에 소위 오현제라고 하는 Marcus Aurelius Antoninus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stoa철학자이기도 합니다. 冥想錄을 저술한 황제입니다. 그러한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엄청 박해했습니다. 한 면만 보면 괜찮은 사람인데, 엄청나게 사람을 괴롭히고 죽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세상은 모순이 많습니다. 인간들의 죄 때문에 정의가 사라지고 불의가 판을 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장 적게 알고 있는 자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자들을 가르치려 하는 세대입니다. 사실 뒤집어보면 유대인들이 죄 값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역으로 아무 죄도 없는 바울사도가 어이없게도 피고인으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실한 성도는 거꾸로 된 세상에 바르게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의 행선지를 위해서 달려가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사람들하고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And

바울의 ‘이미’와 ‘아직’의 구속적 긴장(사도행전26:1-3)

 

박형용 교수는 바울과 오늘날 신학자들은 바울과 똑같은 구속역사의 긴장 속에 처해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구속사역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되돌아보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는 형편에 있었고, 오늘날의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되돌아보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는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 무려 2000이란 간격이 있지만 아직도 똑같습니다. 따라서 바울사도와 우리는 같은 긴장 속에 있습니다. 바울사도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구원사건이 어떻게 인간과 세상에 적용되느냐에 관심을 기울여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오늘날도 같습니다. 바울사도와 함께 ‘말세를 만난’(고전10:11)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되돌아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리는’(살전1:10) 사람들로서 미래를 내다보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사도와 우리는 ‘이미’와 ‘아직’/already-not yet 이라는 구속역사적 긴장 속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사도는 현실만의 말을 하지 않고, 미래적인 요소를 반드시 말했습니다. 우리 역시 구속의 성취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효과가 있느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만 미래적인 요소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순례자(pilgrim)로 살아가야 합니다. pilgrim은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짐이 가벼워야 빨리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성도들은 그러지를 못하게 됐습니다. 이 땅에 너무나 많은 미련을 두고 있습니다. 이 땅에 좋은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서 천국으로 떠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mammoth 교회당, 상아궁전과 같은 집들, 화려한 agit, 최고급 승용차 등이 너무나 좋아서 쉽게 떠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마치 절대로 천국이 없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천국과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과 천국이 불연속선에 있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뒤돌아보고 재림을 기다리는 구속역사의 입장으로 볼 때 긴장이 되지 않습니다. 즉 바울시대보다 현시대는 많이 세속화되었습니다. 성도들은 현실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임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이세상과 오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현실에 너무나 미련을 두고 이 세상을 천국처럼 여긴다고 하면 큰 문제입니다. ‘이미’와 ‘아직’사이를 모르고 현실에만 안주하고 있다면 더는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어떻게든지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Roma에 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말한 죄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의 사정에 밝은 Agrîppa왕 앞에서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의 원수들이 격렬하게 비난을 퍼부었을 때도 담대하게 조용히 변명했고, 지혜와 능력으로 그들의 고소내용을 반증했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깨끗한 양심으로 그들을 대하였습니다. 아직 그의 사명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사명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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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청문회(사도행전25:23-27)

 

Roma제국 안에서 자기종교를 유독 가질 수 있었던 민족들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치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자치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은 유대의 종교법을 사용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전횡을 저지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유대인들은 바울을 이 법에 얽어매려고 했습니다. 바울과 유대인들의 문제를 제3자인 Roma인들이 보았을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극구 죄가 있다고 하지만, Roma측에서 심문을 했을 때 전혀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Roma의 행정관들에게 문제가 붙었습니다. 바울사도가 황제에게 상소를 한 것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정확한 죄목을 서류에 적어서 황제에게 보내야하는데 죄목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바울의 청문회에 당시 엄청난 VIP들이 모였습니다. Agrîppa왕, 그의 여동생이지만 아내인 Bernice가 화려하게 치장했습니다. 최소한 5명의 총독의 참모들(천부장들), 가이사랴의 이름 있는 시민들이 모였습니다. 이에 비해서 바울은 초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세상은 항상 화려합니다. 그러나 그 속은 비어 있었습니다. 바울의 청문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화려했지만, 그들은 천국에서 만나지지 못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화려하게 갖추고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유대의 모든 사람들이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크게 외치며, 예루살렘에서도, 가이사랴에서도 청원하였지만, 내가 심문해본 결과 전혀 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죄 있다고 하지만, 죄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혹 황제에게 상소한 바울의 죄목을 찾을까 해서 아그립바 왕 앞에 세웠다는 것입니다.

Roma의 행정관인 베스도는 바울에게 죄가 없는데 죄를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자신에게서 재판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심리가 있는 재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Roma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시기 전에 삼위 하나님의 2위이신 분으로 하나님은 영이시니(요4:24)라는 말씀이 그에게 적용될 수 있는 영적인 존재이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육신의 모양(롬8:3)을 입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성육신 기간 동안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도 완전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고전15:20,45). 바울사도는 부활체를 입으시고 높아지신 단계로 들어가신 예수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에 대해서 그 정보를 땅 끝 까지 전하기 위한 열정을 가졌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죄수가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당시에 세계중심이라고 여겼던 Roma에 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Roma의 행정관들은 아무리 심문하고 청문회를 한들 그의 죄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Roma에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된 바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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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게 없는 죄목을 어떻게 할까?(사도행전25:13-22)

!Agrivppa"/Agrîppas/아그립바는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27-100). Agrîppa 1세와 키프로스(Cypros/헤롯대왕 형제의 아들 파사엘과 헤롯대왕의 딸 살랍프시오 사이의 딸)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Agrîppa1세가 죽었을 때에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Claudius(주전10년-주후54년)는 Agrîppa2세를 그의 아버지 후계자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큰 나라를 다스리기가 불가능하다고 주변에서 권고했습니다. 따라서 Agrîppa1세가 다스리던 지역은 총독 관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AgrîppaⅡ세의 숙부이자 매부인 갈시스의 왕 헤롯이 죽은지 2년 후, 50년에 Claudius는 AgrîppaⅡ세를 갈시스 왕으로 삼았습니다. 53년에 Claudius는 AgrîppaⅡ세에게 갈시스의 영토 대신에 빌립의 영토인 Abilene와 드라곤 지방과 Arca를 주었습니다. Nero는 54년에 황제가 된지 얼마 안 있어 Agrîppa에게 갈릴리 지방의 도시인 디베랴와 Tarichea와 그 주변의 땅과 베뢰아 지방의 도시 Julias와 아빌라와 그 주변의 땅을 주었습니다. Nero의 호의에 감사하여, Agrîppa는 수도 가이사랴 빌립보를 확장하여 그 도시를 Neronius라고 개명했습니다. Agrîppa는 추가된 여러 영주들과 아빌레네의 세 독립 영토, 베뢰아와 Arca의 영토들과 함께 빌립의 영토를 통치했습니다.

AgrîppaⅡ세의 사생활은 문란했습니다. 그의 누이 Bernice는 숙부 갈시스 왕 헤롯이 48년에 죽은 후에 아그립바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되었습니다. 근친상간(相姦)에 관한 풍문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녀는 길리기아의 Polemo와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Bernice는 얼마 있다가 아그립바에게 돌아 왔습니다. 이 근친상간은 로마의 일반적인 화제였습니다.

66년 5월에 팔레스틴에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Agrîppa는 폭동을 진압하지 못했습니다. 66-70년의 유대전쟁에서 그는 주저하지 않고 Roma를 지지하였습니다. 68년 6월 9일 Nero가 자살한 후 Vespasian은 Agrîppa를 동반시켜 그의 아들 Titus를 로마로 보내어 신임 황제 Galba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Roma에 도착하기 전에 Galba가 암살(69.1.15일) 당했습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Titus는 팔레스틴으로 돌아갔지만 Agrîppa는 Roma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Vespasian이 애굽 군단과 수리아 군단에 의해 69년 7월1일에 황제로 추대된 후에 Agrîppa는 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팔레스틴으로 돌아갔습니다. Agrîppa는 팔레스틴에서 전쟁수행을 하고 있던 티투스의 편이 되었습니다. 70년 8월 5일 예루살렘 함락 후 Agrîppa는 자기 백성을 멸망시킨 Roma의 개선식에 참석했던 사람입니다. 이에 Vespasian은 아그립바가 전에 다스린 나라의 소유권을 승인하고 등록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영토까지 추가로 주었습니다. 75년에 그와 그의 누이 Bernice는 Roma에 갔습니다. 그 곳에서 Bernice는 팔레스틴에서 했던 것과 같이 Titus의 情婦가 되었습니다.

Agrîppa의 종교에 관여한 것을 보면, 그는 그의 숙부 갈시스의 왕 헤롯처럼, 성전의 금고와 대제사장의 제복(祭服)을 관리하였고 대제사장의 임명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종교문제에 관하여 Agrîppa와 상의하였습니다.

Roma의 행정관들은 황제에게 호소하는 죄수를 로마로 보낼 때는 그의 죄목을 기록한 서류를 함께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서 뚜렷한 범죄사실을 찾지 못했습니다. 피고가 죄가 없어서 황제에게 어떤 사실을 기록해서 보낼지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유대의 풍습이나 전통에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아그립바와 논의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논의한들 어떤 죄들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그립바는 베스도의 말에 바울의 말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의도를 전혀 몰랐습니다. 황제에게 호소하는 진짜 이유를 몰랐습니다. 명분은 황제에게 호소한 죄수였습니다. 그러나 실은 복음의 도를 전하기 위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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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igula와 유대인(사도행전25:6-12)

Caligula는 Roma의 제3대 황제입니다(재위37-41). 칼리굴라의 본명은 Gaius Caesar Germanicus입니다. 즉위 초에는 민심수습책으로 원로원, 군대, 민중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낭비와 증여로 재정을 파탄시켰습니다. 잔혹한 독재정치를 강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점차 자신이 인간세계에 나온 神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혔습니다. 광포한 행동을 자행하다가 근위병의 한 장교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Orient에서 우수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유대인과 Greece인들이었습니다. 우수하기 때문에 두 민족들은 모든 면에서 이해가 서로 대립되었습니다. 경제적인 대립, 학문적인 대립으로서 그 도가 지나칠 만큼 심했습니다. Alexandros대제 시절에 시작된 300년의 Hellenism 시대에는 두 민족의 처지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Cleopatra의 죽음으로 그리스인의 마지막 보루가 Roma의 손에 들어간 주전30년부터 두 민족은 지배자인 Roma인 밑에서 피지배자로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Caesar와 Augustus, Tiberius로 이어진 한 세기가 유대인에게는 그래도 살기 좋은 시대였습니다. 과거의 Greece인 지배시대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자신에게 권력이 주어지고 힘이 생기면 인간은 타락한 존재라 자신을 다르게 생각합니다. 자천이든 타천이든 Caligula는 Roma황제가 신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이라고 여기던 Caligula가 병이 들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제물까지 바치며 그의 쾌유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유대인들은 난처했습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Greece인은 다신교였습니다. 다신교인들은 신이 하나쯤 늘어난다고 해도 문제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로 Greece인과 유대인들이 마찰하기 시작했습니다. Egypt의 Alexandria는 Greece인과 유대인들의 도시였습니다. 100만 명의 도시로서 Greece인과 유대인들의 비율을 6:4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마찰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Caligula가 즉위한지 1년 뒤인 주후38년 Alexandria에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Greece인들이 Caligula의 이름을 빌어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Greece인들은 항구에 정박해있는 유대인 소유의 배를 모조리 불태웠습니다. 유대인 거주지역의 집들도 불에 타고 약탈당했습니다. 유대인이 집단 거주 지역으로 나오면 그 이유만으로 살해했습니다. Greece계 주민은 유대회당 안에 Caligula의 상(像)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이럴 때 싸움을 공명정대하게 수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황제대리로 수습하러 온 사람은 Egypt에 온 Flaccus장관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중재자로서 온 것이 아니라 Greece편에 서버렸습니다. Flaccus는 황제의 눈치를 본 것입니다. 신을 자처하는 Caligula가 젊기에 황제로 오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Caligula를 신이라고 부추긴 그리스인들을 강경하게 진압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Alexandria폭동은 유대인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이었습니다. 항상 최고자리에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명색이 수사관이나 수습관이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수사나 수습할 수 없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권력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하지 못합니다. 잘못하면 자신의 밥줄과 생명이기에 공명정대하게 하고는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권력입니다. Flaccus는 토요일의 안식일을 폐지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Alexandria의 5개 지구 가운데 2개 지구에 거주했습니다. 하지만, Alexandria에서도 경치가 아름다운 구역에 살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1개 지구에 몰아넣었습니다. 유대인의 구역이었던 곳은 400채의 저택이 불탔습니다. 회당도 불에 타고, 36명의 제사장들은 경기장으로 끌려가 Greece계 주민들의 조롱을 받으며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유대인의 공장은 폐쇄되고 무역도 정지되었습니다. Alexandria의 경제는 거의 절반이 마비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유대인들은 Caligula에게 호소했습니다. 이때 사절단의 단장은 Philo였습니다. Philo는 석학이었습니다. 학식이 풍부하고 유대인이면서 Greco-Roman의 문화에 정통했습니다. 재산도 있어서 사절단의 비용도 자부담이었습니다. 또한 Philo의 친동생 가이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유복한 금융업자였습니다. Roma의 시민으로서 Caligula의 할머니의 재산을 맡아서 운용했습니다. Philo의 아들들 중에는 Roma군단의 대대장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Philo는 주후38년에 Roma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만나줄 것 같은 Caligula는 여러 이유를 들어서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결국Caligula는 유대인의 불리한 환경을 개선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Greece인들이 Alexandria에서 횡포를 부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확연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는 같은 세대에 있지만,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의 명령을 따릅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에서는 정의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세속화된 교회도 정의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교회의 line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교만하기 쉽고, 변하기 쉽기에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참고: 로마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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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berius와 유대인(사도행전25:6-12)

Tiberius는 유대민족의 특수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Syria 총독 Kurêvios를 계속 중용한 것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타협책을 취한 것도 Tiberius가 유대인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반면에 유대인을 이해했기 때문에 특수한 유대민족이 보편을 지향하는 Roma제국에 가져올 위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법을 따르는 유대인과 인간의 법에 따라 다스리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동방에서는 연중행사처럼 일어나는 Greece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충돌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Greece인들은 다신교였습니다. 그래서 Greece 사람들은 Roma와 친숙할 수 있었습니다. Roma인과의 동화에 별다른 저항감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다신교와 일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도저히 섞일 수 없었습니다.

Tiberius에게는 Alexandria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Tiberius 당시에 Alexandria의 인구는 100만 명이었습니다. Alexandria의 주민은 5개 지구에 나누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3개 지구에는 Greece계 주민이 살고 있었고, 나머지 2개 지구에는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비율로 봐서 Alexandria에 유대인이 최소한 40만 명은 넘었을 것입니다. Antioch도 비슷할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Roma에서는 14개의 행정구역 가운데 1개 지구에만 유대인 거주가 허용되었습니다. Roma에는 유대인들이 2만 명 정도였습니다. Tiberius는 Augustus가 예루살렘의 유대인에게 허용한 사법권을 동방의 여러 도시에 있는 유대인 에게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습니다. 예루살렘과 같이 사형집행만은 Roma의 총독이나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동방의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재판을 받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또한 Tiberius는 토요일마다 안식일을 갖고 싶어 하는 유대인의 의식을 인정해주었습니다. 종교의 자유도 이주의 자유도 인정하고 유대교 특유의 관습도 인정해주었습니다.

주후19년에 유대에서 Kurêvios총독이 유연하게 진행하고 있을 때 Roma에서는 유대인들이 사회불안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Tiberius는 Roma에 사는 유대인들을 모조리 이탈리아에서 추방했습니다. Tiberius는 유대인이 많이 사는 동방에서 Caesar와 Augustus의 정책을 계승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칫하면 격렬해지는 Greece계 주민들과 유대계 주민들에 대해서 Roma는 중재자역할을 함이었습니다. 이리하여 Roma제국의 동방은 Greece인과 유대인 없이는 존속하지 못했습니다.

Tiberius는 예루살렘과 유대를 헤롯 아그립바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능하지만 책임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를 시리아 총독에게 맡긴 것입니다. Tiberius는 죽을 때까지 Roma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위와 같은 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유대 쪽으로 볼 때 Caesar와 Augustus, Tiberius의 때에는 그런대로 만족한 관계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참고: 로마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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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ce인과 유대인(사도행전25:6-12)

 

Greece에서 조국을 떠나 의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하는 diaspora는 오늘날에는 유대인만의 전용어처럼 여기고 있지만, 조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주하는 일에서는 Greece족이 유대인들보다 먼저였습니다. 하지만 Greece인의 이주와 db대인의 이주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Greece인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을 기지로 하여 수공업이나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미 존재하거나 번영하고 있는 도시로 이주하여 수공업이나 무역업,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주전1000년에 시작된 그리스인들의 이주로 지중해 세계는 서방과 동방을 막론하고 곳곳에 Greece인 도시가 건설되었지만, 유대인이 건설한 도시는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통일왕국이었기 때문에 굳이 가나안을 떠나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주전주후를 아우르는 시대에도 지중해의 동방에 있는 여러 도시에는 대규모 유태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Roma를 비롯한 서방도시에는 동방만큼 규모 가 큰 유태인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Pax Romana의 확립과 사회간접자본의 보급은 서방의 경제력을 향상시켰습니다. 그때까지는 불균형했던 동방과 서방의 경제력이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지배자인 로마로 부가 집중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로마 제정시대에 제국의 3대 도시는 Roma와 Alexandria와 그리고 Antioch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방은 Roma였고, Alexandria와 Antioch은 동방이었습니다. 지배자인 Roma인 자신이 제국전역의 부의 흐름은 중요시했지만, Roma에만 부가 집중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속주세도 피지배자가 지배자 Roma에 바치는 상납금이 아니라 그들의 거주지역을 포함한 제국전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안전보장비였습니다. Augustus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방의 경제력향상은 유대인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민족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 서방에도 갖추어진 것입니다. 이 시기에 황제에 즉위한 사람이 Tiberius였습니다.

불신자들 편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편협하게 보였습니다. 물론 당시의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들을 비교할 때도 역시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섬겼고, 돈을 좋아했으며, 하나님을 수시로 떠난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헬라인과 유대인들은 서방에서 양대 산맥처럼 행세하였습니다.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헬라인은 헬라인대로 서로 자신들이 잘났다고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Roma내에서 많은 충돌이 있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지식이나 권력, 그리고 재물들은 바람 앞에 겨와 같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Roma의 영광, 헬라의 영광, 유대의 영광은 지금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영원한 것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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