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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Roma행(사도행전27:1-8)
1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우리라는 것으로 보아 바울사도는 혼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 곁에는 항상 바울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행복한 사도였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이 함께 하시며, 그리고 늘 그 곁에 누가와 그외 다른 성도들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21:18에서 ‘우리’라는 말이 나온 후로 뚝 끊겼다가 다시 시작합니다.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아마도 바울이 구금되어 있었을 때 누가는 가이사랴 근처에서 바울사도의 동향을 살폈을 것입니다. 2년간은 바울사도가 구금되어 있을 때였습니다.
바울사도는 Roma의 황실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Roma의 행정관은 Roma에 보내기로 작정하여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죄수 몇 명과 함께 Roma로 출발했습니다. 바울사도를 호송할 책임자는 Augustan부대 소속의 백부장 Julius였습니다. 그는 Roma까지 가는 동안에 다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출발하여 그들이 탄 배는 소아시아 북서쪽의 Lesbos섬의 맞은 편에 위치한 Mysia의 항구도시인 아드라뭇데노에 속한 배였습니다. 이 배는 연안을 항해하는 배로서 아시아 각도의 여러 항구에 머무를 예정이었습니다. 이 항구 중에서 Roma로 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중에 마케도니아의 데살로니가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승선했다고 했습니다. !Arivstarco"/Arîstarchos는 역시 바울의 신실한 여행 동반자였습니다. Arîstarchos는 에베소에서 소요에 연류되었습니다. Arîstarchos는 에베소에서 바울의 전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업에 위협을 느낀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폭동을 선동했을 때 흥분한 폭도들에게 잡혀 연극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폭동은 진정되고 그는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Arîstarchos는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에 동참했습니다(행20:4). Arîstarchos는 바울과 함께 로마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골4:10). 이런 신실한 동역자들이 항상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바울의 Roma행은 결코 외롭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열악한 교역자들은 인물난입니다. 대형교회에는 일할 사람이 넘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형교회, 어려운 교회는 사람이 없어서 인물난입니다. 참 아이러니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점점 현대교회는 멀어져 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생의 항해 (0) | 2017.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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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생각들 (0) | 2017.10.03 |
바울의 무죄를 선언한 Roma 행정관들(사도행전26:30-32)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바울과 Roma의 행정관들이 생각하는 바울의 죄에 대한 관점은 달랐습니다. 유대의 법에 통달한 아그립바도 바울의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베스도도 어느 누구도 바울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가 있다고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지만, 바울에게서는 전혀 죄만한 것들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그립바는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석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베스도는 황제에게 보낼 바울의 건에 대해서 충분하게 납득했습니다. 죄는 없지만 황제에게 호소했기 때문에 문서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선교라고 하는 것, 전도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 등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사항입니다. 누구나 공동적으로 받은 사명입니다. 특별히 선교에 열정을 가진 성도들은 자신의 모든 것들을 접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참 이상한 일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 또 실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접어버리고 오지의 선교지로 훌쩍 떠나는 뒤에 혀를 끌끌하고 찹니다. 이것이 세상과 교회와 다른 점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교회의 가치관은 다릅니다. 성도의 가치관과 불신자들의 가치관은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도 다릅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도 다르고 실천이 다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색다른 사람들입니다. 2세기경의 저자미상의 작품으로 Diognetus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색다른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언어 혹은 풍습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도시에 살거나 어떤 이상한 방언을 말하거나 혹은 어떤 독특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이 가르침은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의 재능이나 사색에 의해 고안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하듯이 단순히 인간적인 가르침을 전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면 헬라의 도시와 외국의 도시, 어디에나 살았다. 그들은 의복과 음식 그리고 삶의 다른 면들에 있어서 지방의 풍습을 따랐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시민권의 놀랍고 유별난 형태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고국에 살고 있으나 이방인이다. 시민으로서 그들은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 그러나 이방인처럼 모든 어려움을 겪는다. 모든 외국은 그들에게 고국과 같고, 또한 모든 고국은 외국과 같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하고 자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원치 않은 아기를 죽이지 않는다. 그들은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하지만 잠자리를 함께 하지는 않는다(성적문란이 없음을 가리킴). 그들은 “육신”으로 존재하지만 “육신을 따라” 살지 않는다. 그들은 지상에서 그들의 생애를 보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들이다. 그들은 제정된 법을 준수하고 또한 그들 자신의 삶에 있어서는 그 법보다 탁월하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나 모든 사람은 그들을 박해한다. 그들은 무명하나 비난받는다. 그들은 사형을 당하나 생명을 얻는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부요해지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모자라지만 모든 것이 풍족하다. 그들은 굴욕을 당하나 그 굴욕을 통해서 영광을 얻는다.
그들의 이름에 누명을 씌우나 그들은 깨끗하다. 그들은 조롱당하나 대신 축복한다. 그들은 부당하게 다루어지나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행동한다. 그들이 선을 행할 때 그들은 악행자처럼 처벌받는다. 처벌을 받을 때 그들은 새 생명을 얻은 자처럼 기뻐한다. 그들은 외국인으로서 유대인의 공격을 받으며, 헬라인의 박해를 받는다. 그러나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은 그들의 적의의 어떤 이유도 제시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몸에 대한 영혼의 관계는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영혼은 몸의 모든 지체를 통하여 퍼져 있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모든 도시들에 걸쳐서 존재한다. 영혼은 몸 안에 있으나 몸에 속하여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
성도들은 분명히 색다른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렇고, 사도들이 그러하며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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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 그리스도(사도행전26:24-29)
요한복음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3:15-18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사도행전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소요리문답 제7문답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정하신 영원한 계획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정하셨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종교적인 전설(saga)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의도된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천지창조는 실제(fact)입니다. 그래서 천지창조는 히브리적인 우주기원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의 것들이 야기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틀림없이 확실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자격을 구비해야 합니다. 창조주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믿어야 하는데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요한복음3:16절에서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서 않고의 헬라어 부정어가 mhv/mê 입니다. 헬라어에는 否定語가 두 개가 있습니다. ou;/oû 와 mhv/mê 입니다. 직설법에서는 ou;를 사용하고 그 밖의 법에서는 mhv 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mhv는 이 ou;와 달라서 ‘…하면 안 되므로’라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멸망치 않고’는 ‘멸망하면 안 되므로’라는 뜻입니다. 즉 멸망하면 안 되므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종교간 화합이라는 말을 과연 써야 할 말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론 사람간의 관계는 얼마나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에 관하거나 교리나 도에 관한 것들은 화합이 될 수 없습니다. 없는 것은 없다고 하고 있는 것은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없는 구원을 있다고 하고 있는 구원을 타종교와 화합하기 위해 양보내지 없다고 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 구원시킬 자격증을 주신 일이 없고 앞으로도 주시지 않습니다. 오직 모든 사람들을 구원시킬 자격을 예수그리스도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이지, 다른 어떤 사람, 어떤 것에도 구원은 없습니다.
바울의 Roma행 (0) | 2017.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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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생각들 (사도행전26:24-29)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바울의 변명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누구나 바울에게 죄가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런 재판의 청문회를 해야 하는지도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법에 대해서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바울의 증언을 들은 사람이라면 바울에게 죄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유대적인 변명과 도를 들었던 베스도가 갑자기 큰소리로 바울에게 말하기를 미쳤다는 것입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에게 성경을 너무 많이 알더니 미쳤다고 했습니다. 바울을 조롱한 것입니다. 바울은 미친 것이 아니고 똑똑한 정신으로 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 도에 대해서 베스도는 잘 알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말합니다. 선지자를 믿는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그립바도 적은 말로 권해서 나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말이 적으나 많으나 오늘 나와 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에 붙잡혀야 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4:3을 보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 층이 다양합니다. 국가도 다양하고, 쓰는 언어도 다양합니다. 그리고 학력도, 직업도, 연령층도 다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사단에게 눈이 어두워진 불신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미련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행여 전도를 당할까봐 그들은 걱정을 합니다. 그리고 대신할 것을 찾습니다. 열왕기하5:8을 보면 엘리사가 요단강물에 일곱 번 씻으라고 했을 때 나아만은 시리아의 ‘아마나’와 ‘바르발’강에서 씻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시대마다 불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복음을 대체할 어떤 것을 찾았습니다. 실상(fact)은 없는데 그들은 있다고 합니다. 복음을 대체할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픈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불신자들이 지옥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안심하고 갑니다. 막상 지옥문을 통과해서야 늦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지옥에 가서야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그러기 전에 복음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복음을 대체한다는 교만한 자신감 때문에 복음을 우습게 여깁니다. 세상에 종교는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것도 허구입니다. 오직 복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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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전한 도(사도행전26:22-23)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바울의 변명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누구나 바울에게 죄가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런 재판의 청문회를 해야 하는지도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법에 대해서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바울의 증언을 들은 사람이라면 바울에게 죄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유대적인 변명과 도를 들었던 베스도가 갑자기 큰소리로 바울에게 말하기를 미쳤다는 것입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에게 성경을 너무 많이 알더니 미쳤다고 했습니다. 바울을 조롱한 것입니다. 바울은 미친 것이 아니고 똑똑한 정신으로 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 도에 대해서 베스도는 잘 알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말합니다. 선지자를 믿는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그립바도 적은 말로 권해서 나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말이 적으나 많으나 오늘 나와 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에 붙잡혀야 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4:3을 보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 층이 다양합니다. 국가도 다양하고, 쓰는 언어도 다양합니다. 그리고 학력도, 직업도, 연령층도 다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사단에게 눈이 어두워진 불신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미련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행여 전도를 당할까봐 그들은 걱정을 합니다. 그리고 대신할 것을 찾습니다. 열왕기하5:8을 보면 엘리사가 요단강물에 일곱 번 씻으라고 했을 때 나아만은 시리아의 ‘아마나’와 ‘바르발’강에서 씻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시대마다 불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복음을 대체할 어떤 것을 찾았습니다. 실상(fact)은 없는데 그들은 있다고 합니다. 복음을 대체할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픈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불신자들이 지옥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안심하고 갑니다. 막상 지옥문을 통과해서야 늦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지옥에 가서야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그러기 전에 복음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복음을 대체한다는 교만한 자신감 때문에 복음을 우습게 여깁니다. 세상에 종교는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것도 허구입니다. 오직 복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0) | 2017.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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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을 죽이려고 한 유대인들 (0) | 2017.09.08 |
순종하는 바울 (0) | 2017.08.28 |
하늘로부터 들리는 음성 (0) | 2017.08.14 |
바울을 죽이려고 한 유대인들(사도행전26: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재판은 입증입니다. 누가 확실한 입증을 하느냐에 따라서 죄질의 輕重이 판명됩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울을 잡아서 죽이고자 했습니다.
사도행전21:31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사도행전21: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사도행전22:22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사도행전23:12-15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 여명이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알아볼 양으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전임총독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풍습을 몰랐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을 볼 때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베스도가 볼 때 바울이 엄청 큰 죄를 지은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달랐습니다. 아그립바 는 유대의 풍습을 잘 알기 때문에 실상 바울에게 죄가 없는데도 바울을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한 이유를 알았습니다. 베스도는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보고할 내용을 이제야 인지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의 풍습을 잘 아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조리 있게 변명했습니다.
‘죄’라는 것은 관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집니다. 예로 이등박문을 처치한 안중근의사를 일제들은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안중근의사를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등박문을 천하에 존재해서는 안 될 잔인무도한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우리나라를 아예 말살하려고 한 일제가 죄인이지 이를 저지하는 사람들은 죄인이 아닙니다. 요새 새로운 교과서를 낸 머리 없는 사람들은 백범 김구선생을 ‘항일테러활동을 했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라고 언급했습니다. 명성황후를 '민왕후'라고 격하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을 누가 죄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일제시대로 인해서 근대화가 되었다는 극히 친일적인 교과서학자들이 죄 없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습니까? 바다건너 일제는 점점 태평양전쟁 때로 가려고 하는데 거기에 동조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 그들을 죄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Roma인들이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죄를 뒤집어씌워 무참히 살해한 ‘죄’, 그들이 말하고 적용한 ‘죄’는 법이라는 것을 이용한 것뿐입니다. 바울을 고소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한 그들이 오히려 ‘큰 죄인’인 것입니다.
순종하는 바울(사도행전26:19-20)
아그립바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아니했습니다. 거스르다 ajpeiqhv"(/apeithês는 부정접두어 a와 peivqw/peîtho(납득시키다)의 합성어로 ‘불순종하는’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불순종하고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되 철저하게 돌아왔습니다. 회개하고/metanoei'n는 이전의 길이 잘못됨을 깨닫고 완전히 그 반대로 180도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심히 잔해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길로부터 돌아서서 박해를 했던 그 일을 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부르신 목적은 예루살렘과 유대 그리고 이방인에게까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는 일에 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자 곧 turn을 한 것입니다.
순종하다의 구약적인 의미는 [m'v;/shāmaʽ 의 기본개념은 메시지 또는 단순히 소리를 인지한다는 것입니다. ‘듣다’라는 기본적인 의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확대됩니다. 대개 효과적인 들음이나 경청을 포함합니다. 순종/ obedience 은 말하는 사람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순종은 하나님의 권위와 또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스스로 계시하심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구약에서는 가끔씩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명령에 순종하라는 말을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 종교적 헌신을 한다 할지라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를 대신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삼상15:22). 옛 언약에는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출19:5). 새 언약에도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이 누릴 수 있도록(렘31:33) 마련하신 하나님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믿음은 곧 순종이며 불신앙은 곧 불순종입니다(롬6:17,10:16).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순종이란 곧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는 것이고(벧전1:15,16),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을 닮는 것이며 (요13:14,15,34,35), 하나님이 설립하신 권위구조에 전적으로 복종히는 것입니다(롬13:1, 엡6:1).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순종한다고 하는데 실은 순종이 아닌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전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이제는 선택적인 신앙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싫고, 저것은 좋고 하는 신앙은 전인적인 신앙이 아니라고 볼수 있습니다. 사실 믿음이란 아골골짝에도 가야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순종이라는 말을 쉽게 내뱉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순종과 오늘의 우리들의 순종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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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부터 들리는 음성(사도행전26:12-18)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바울의 다메섹행은 정의감과 진리감에 불타서 다른 사람들은 바울처럼 열심히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독히 바울은 더했습니다. 그렇게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정오쯤에 하늘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에게 쏟아졌습니다. 중동의 사막은 태양빛이 다른 지역하고는 다릅니다. 작열하는 태양빛은 그 어떤 것하고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작열하는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쏟아진 것입니다. 그 밝은 빛으로 인해서 가던 사람들이 다 엎어졌습니다. ㅅ그리고 하늘에서 히브리방언으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이 말은 오직 바울밖에는 듣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해봤자 너 자신만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본 것과 주님의 재림 시에 나타날 일에 대하여 바울을 종과 증인으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유대인)과 이방인(Roma인)의 손에서 구원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보내시는 목적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움에서 빛을 보게 하시고 사단의 권세에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병원마다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그만큼 아픈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요양병원에도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옛날보다 수명은 늘어났지만,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병원에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세상에 오래 있기를 원합니다. 죽음 저 너머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래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면 차라리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잠깐 살다가 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람마다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 구원받음에 있어서는 누구나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종교나, 인품이나, 학벌이나, 재력이나, 선행이나 불구하고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바울을 돌아서게 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일에서 돌아서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 저 너머에 있는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사명이 큽니다. 책임도 크고 부담도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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