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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인과 유대인(사도행전25:6-12)
로마인이야기를 쓴 Shiono Nanami 즉 불신자들이 보는 유대인과 Roma인과의 관계입니다. Roma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상과 그리스도인이나 유대인이 생각하는 사상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Roma인들은 패자까지도 자신들과 동화하는데 있음을 자부했습니다. 그럼에도 패배한 여러 민족들 가운데 유독 유대인만이 동화하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승자인 Roma인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민족과의 동화도 유대민족은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제외한 어떤 신도 인정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날들을 유대인들은 다른 신도 섬기기도 했습니다. 허나 웬만한 사람들은 Babylon의 포로로 있을 동안에도, Palestine에 돌아왔을 때도 여호와만의 신앙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고대의 유대인은 Greece인에 버금갈 만큼 이산(離散) 경향이 강해서 웬만한 도시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같은 도시에 많은 사람들과 살면서도 유대인만은 다른 거주자와 동화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금융업이나 장사에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교류가 그 이상으로 진척되어, 동화나 융합으로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Roma인과 유대인은 법률에 대한 사고방식도 달랐습니다. 유대인에게 ‘법’이란 모세의 율법이었습니다. Roma인이 생각한 ‘법’은 원로원이나 민회에서 인간이 결정한 것입니다. Roma가 제국 안에 사는 이민족을 Roma인과 동화시키기 위해 취한 구체적인 방책은 Roma시민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Roma의 시민권은 속주세를 면제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 민족들은 Roma에 동화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Roma군단에 지원하는 유대인도 극히 적었습니다. Roma 병사가 되면 최고사령관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Roma도 이 ‘특수사정’을 인정했습니다. 유대인에 대해서만은 병역을 면제했습니다. 유대인은 언제나 Roma의 이방인이 되는 쪽을 택했습니다. 지배자인 Roma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 선택했습니다. 오래 전에 Alexandros대왕이 Hellenism화한 이후 유대인의 사회적 지위가 그대로 지속되었습니다. 지배자는 Greece인에서 Roma인으로 바뀌었지만, 유대인의 지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Roma인과 유대인이 직접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주전63년에 Pompeius때부터였습니다. 이어서 Pompeius를 패배시킨 Caesar와 유대인의 협정은 유대인의 요망을 그대로 들어주었습니다. Caesar의 뒤를 이은 Augustus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Augustus는 다른 황제들과 달리 Agrippa의 조언에 힘입었습니다. Agrippa(Marcus Vipsanius Agrippa/주전62-주전12)는 Roma의 장군과 정치가로서 Augustus의 정계진출을 도왔습니다. Agrippa의 군사적/외교적인 것에 능했습니다.
Augustus에게는 Agrippa의 도움과 유대에서는 Herod이 도왔습니다. Herod은 순수한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유대의 주권을 장악한 Herod왕은 머리가 기민했습니다. 삶의 달인이었습니다. Pompeius가 Roma의 주권자일 때는 Pompeius에게, Caesar가 유대 왕국을 재건하자 당장 Caesar에게 달려가 Julius라는 가문 이름을 받고서, Caesar의 부하로 변신했습니다. Caesar가 암살되자 Brutus(Marcus Junius Brutus) 일파의 세력이 강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Caesar 암살 주모자인 Brutus와 Cassius(Caius Longinus Cassius) 편에 붙습니다. 그러나 Caesar파인 Antonius와 Octavianus가 반Caesar파인 그 두 사람과 대결했을 때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Antonius와 Octavianus가 권력투쟁 시 Antonius의 세력이 강하다는 이유로 Antonius편에 붙습니다. 이를 고맙게 여긴 Antonius는 Cleopatra가 아무리 간청해도 유대 왕국만은 Cleopatra에게 선물로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Antonius가 패하였습니다. 이에 Herod은 Augustus로 이름을 바꾼 Octavianus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서둘러 Roma를 방문한 Herod을 Augustus는 Roma의 동맹자로 삼고, 유대 왕위를 인정했습니다. Augustus는 Herod의 이용가치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그같이 했습니다. 즉 Augustus가 볼 때 Herod은 전제군주였습니다. 유대에서 전제군주라는 것은 유대교 제사장들이 국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Roma인은 독립된 사제계급을 두지 않았던 만큼, 종교의 정치 개입에는 항상 불신했습니다. 또한 Herod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왕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려면 Orient에 주둔한 Roma군단의 후원이 적극 필요했습니다. Augustus에게는 Orient 일대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Roma의 직할령인 Syria와 Egypt를 잇는 선상의 유대가 Roma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Augustus는 현지에 밝은 Herod을 유대에 상주시켰습니다. Herod은 Augustus의 정책을 충분히 이해하였습니다. Augustus는 Orient 일대에 널리 퍼져 살면서 공동체 network를 형성하고 있는 유대민족을 다스리려면 그들에게 마음의 고향인 Jerusalem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는 어디에 살든 Jerusalem 성전에 일정한 헌금을 바칠 의무가 있었습니다. Jerusalem 성전에 돈이 모인다는 것은 그 돈을 틀어쥐고 있는 제사장들의 권력이 강해짐을 뜻했습니다. 이에 Augustus는 민족주의의 온상이 될 수도 있는 유대교 제사장들을 강권으로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 Herod이라고 판단했습니다. Jerusalem만 안정되면 Orient 일대의 유대인 사회도 안정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전4년에 Herod이 죽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Herod왕은 유대 왕국을 삼분하여 세 아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왕국의 북부는 philip에게, 남부는 Herod Antipas에게,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는 Herod Archelaus에게 남겨주었습니다. 북부와 남부의 통치권은 두 왕자가 별 문제없이 계승했지만, 문제는 Jerusalem이었습니다. Jerusalem의 유대인들이 제사장들의 신권통치 부활을 요구하며 봉기했습니다. 이들은 Herod이 임명한 대제사장을 면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자, 이번에는 비유대교도들을 Jerusalem에서 추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Jerusalem은 유혈이 낭자했습니다. 젊고 미숙한 Archelaus는 Syria 속주 총독에게 군대출동을 요청했습니다. 이 시기의 Syria 총독은 Varus였습니다. 총독은 즉각 군단을 출동시켜 진압하지 않았습니다. Varus는 봉기한 급진파 유대인의 대표가 Roma로 가서 왕정을 폐지하고 제사장의 신권정치를 부활시키고 싶다는 뜻을 황제에게 전달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습니다. 50명의 대표가 황제에게 호소하기 위해 Roma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Palestine에서 Italy까지는 바닷길입니다. 왕복하는 데 걸리는 기간과 Roma에 체류하는 기간을 합하면 반년은 족히 걸립니다. 급진파는 이 기간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자기네 요구를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서 비유대인들과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Varus도 Syria 주둔 4개 군단을 출동시켜 진압하였습니다. 결국 Herod왕의 상투 수단이었던 단호한 무력행사만이 Jerusalem의 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당시 Roma에서는 Augustus가 팔라티노 언덕에 서 있는 아폴로신전 앞에서 유대인 대표들을 만났습니다. Augustus는 신전으로 오르는 계단 밑의 50명의 유대인들의 호소를 듣고 있었습니다. 50명의 대표 뒤에는 Augustus의 허락을 받고 테베레 강 건너편 제14구에 공동체 유대인들이 8000명이나 몰려왔습니다. 그럼에도 Augustus는 유대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Augustus는 왕정을 폐지해달라는 요구는 거부했지만, 대신 조세경감을 약속했습니다. 이 회답을 가지고 귀국한 대표들은 경과를 설명했지만 Jerusalem의 유대인들은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폭동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Augustus도 수습능력이 없는 Archelaus를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정이 폐지된 것입니다. 그러나 Augustus는 유대교 제사장들에게 통치를 맡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헤롯이 Archelaus에게 준 Jerusalem과 유대 중부를 직할통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행정은 Jerusalem의 유력자들로 구성된 장로회의에 맡겼습니다. 내정의 자치권은 유대인들에게 남겨준 것입니다. 주후6년부터 Jerusalem과 유대 중부는 Roma의 속주로 바뀌었습니다. 유대 담당 장관의 관저도 Jerusalem에 두지 않았습니다. Greece계 주민이 많은 교역도시 Caesarea에 두었습니다. 이 도시에 사는 유대인들도 거의 온건파였습니다. Roma는 군사력도 3000명 정도밖에 주둔시키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로마 시민인 군단병이 아니라, Syria에서 모집한 Greece계 지원병이었습니다. Roma는 유대인을 되도록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마찰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Roma는 어떤 지역을 속주화하면,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인구나 재산을 조사했습니다. 이럴 때 유대인은 자신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 그런 조사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속주세를 내야 한다는 것도 유대인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왕에게 세금을 낸다면 모르지만, 멀리 있는 황제에게 왜 세금을 내야 하는가? 다른 민족의 안전까지 지켜주기 위해 돈을 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는지, 유대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속주화가 진행되는 어려운 시기에 봉기나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요소가 로마에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유대민족은 바윗돌처럼 단단히 단결되어 있지 않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항구도시의 유대인과 농민이나 예루살렘 하층민으로 구성된 급진적인 유대교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전자에 속하는 유대인은 대부분 공업이나 금융이나 무역에 종사했기 때문에, Roma의 직할통치로 질서가 회복되는 것은 그들에게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인구조사와 속주세의 필요성도 이해하였습니다. Augustus는 유대를 속주화하기 위해 시리아 총독 Kurhvnio"/Kurêvios를 등용했습니다.
Kurêvios는 온건파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항구도시의 자치권을 재확인했습니다. 유대 중부에서는 Jerusalem뿐 아니라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내정 자치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정책의 목적은 ‘분할하여 통치하라’ 는 Roma의 통치 좌우명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Jerusalem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Kurêvios총독은 Jerusalem의의 특수성을 배려하였습니다. Roma는 Jerusalem과 유대 중부를 직할 통치하더라도 Jerusalem에서는 제사장들이 사법권을 갖는 것을 인정해주었습니다. 다만 사형 판결이 난 경우에는 ‘황제의 대리인’인 유대 주재 ‘장관’이 허가해야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예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Jerusalem의 제사장들로 구성된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유대 장관인 Pontius Pilatus가 집행을 허락했기 때문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제사장들의 압력에 굴복한 Pilatus는 손을 씻는 상징적인 gesture를 보이면서 형을 집행했습니다.
Syria 총독 Kurêvios가 실시한 Augustus의 유대대책은 Tiberius에게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Tiberius는 더욱 철저하게 실시했습니다. 황제가 Tiberius로 바뀐 뒤에도 Kurêvios는 여전히 Syria총독이었습니다. Jerusalem성전에 바쳐진 Roma의 봉납품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것이 없었지만, Tiberius는 이것조차도 신격이 된 선황 Augustus에게 바쳐진 Caesarea의 신전으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Jerusalem성전이 비유대교도의 봉납품으로 더럽혀졌다고 유대교도가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또한 유대교 대제사장이 의식을 치를 때 입는 제의는 Roma측이 Jerusalem 궁전 안에 보관하고 있었지만, 이것도 유대 측에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종교의식을 치를 때마다 제사장들이 그 제의를 빌려와야 했고, 이교도인 Roma인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 더러움을 없애기 위한 일주일의 ‘정화’ 간을 두어야했습니다. Kurêvios가 주후21년에 죽었을 때 Tiberius황제는 조국에 대한 공헌이 컸다는 이유로 국장을 치러주었습니다.
Kurêvios가 죽은 뒤에도, Tiberius는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혹 유대 장관들 중에는 유대민족의 특수성에 무지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Tiberius에게 알려지면 당장 해임될 뿐 아니라, 본국으로 소환되어 재판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주후26년부터 10년 동안이나 유대 장관을 지낸 Pontius Pilatus가 해임된 첫 번째 이유는 군기를 앞세운 부대를 예루살렘에 입성시켰다는 것, 두 번째 이유는 몇 차례에 걸쳐 일어난 주민의 소요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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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의 유대정책(사도행전25:6-12)
Roma로 보아서 유대왕국은 Syria 속주(屬州) 남쪽에 자리 잡았습니다. Syria 屬州는 Hellenism 세계에 속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왕국은 유대 세계였습니다. 불신자들 입장에서 보면 다신교사회와 일신교사회의 차이였습니다. Roma에도 유대인을 위한 예배당이 있으니까 유대 지방에도 다신교 민족을 위한 신전이 있어도 좋지 않으냐고 생각하는 로마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Roma에 유대인을 위한 예배당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유대왕국에 다른 신들을 모시는 신전은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여러 가지의 신상을 놓고 섬기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 차이입니다. Roma에 있어서 이런 지방을 통치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 것이었습니다.
주전63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Pompeius도, 주전48년에 이곳에다 로마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애쓴 Julius Caesar도 유대를 속주화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가 Roma의 패권을 인정하는 동맹관계로, Roma의 우방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Caesar는 Hellenism 세계이기 때문에 Greece계 상인이 특권을 누려온 이 세계에서 그동안 줄곧 제2위를 감수해온 유대 상인에게도 Greece계 상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여, 유대인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의 생활환경은 Greece인이 지배한 시대보다 Roma가 지배한 시대에 훨씬 개선되었습니다. Augustus는 나중에 대왕이라고 불리게 된 헤롯왕을 유대 쪽에 두었습니다. 헤롯왕은 주전73년에 태어났습니다. 헤롯은 내분이 일상다반사인 Orient의 전형적인 군주로서, 친족끼리 죽고 죽이는 가운데 반생을 보내었습니다. 주전40년, 유대를 침공한 Parthia군은 당시의 왕을 생포하고 친파르티아파인 왕의 동생을 왕위에 앉혔습니다. 퇴위당한 왕의 고관이었던 헤롯은 Roma로 망명했습니다. 당시에 Roma는 Antonius와 Octavianus의 공동 통치 시대였습니다. 둘 다 Parthia와 친한 현재의 왕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33세의 헤롯은 명석한 두뇌와 현실적인 사고방식과 강한 의지로 Roma 지도층의 호의와 신뢰를 얻었습니다. 헤롯은 Roma의 힘을 정확히 간파했었습니다. 헤롯은 Antonius와 Octavianus한테서 받은 ‘Roma시민과 원로원의 친구이자 동맹자’라는 칭호를 갖고 유대로 돌아와 반격에 성공하여 유대 왕위에 올랐습니다. 더구나 유대 왕 헤롯을 Roma가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 예로 Cleopatra가 유대왕국을 간절히 원했는데도 Antonius가 유대 왕국만은 Cleopatra에게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Antonius가 죽은 뒤에도 헤롯의 유대와 Augustus의 Roma는 좋은 관계로 남았습니다.
여기에 헤롯을 돕는 Nicolas라는 고문이 있었습니다. 그는 Damascus태생으로서 Greece인이었습니다. Antonius와 Cleopatra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가정교사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유대인과 Greece인으로 민족은 달랐지만, 유대 왕국은 Roma의 ‘clientes’로 존속했습니다. Roma시대에 clientes는 단순한 피보호자가 아니라 보호자를 후원하는 입장이기도 했습니다. 즉 유대의 안전은 보호자(patronus)인 로마가 책임지지만, 피보호자(clientes)인 유대도 제국의 안전보장에 일익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Roma로서는 동쪽의 Parthia와 남쪽의 Arabia에 대한 방어선의 일부를 유대가 맡아주는 셈이었습니다. Roma가 유대의 독립을 존중해준 것은 거기에 대한 당연한 교환조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유대인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헤롯 왕의 친Roma 정책도 철저했습니다. 유대 국내에도 Greece와 Roma의 신전을 세웠던 것입니다. Augustus에 대한 감사 표시로 Samaria를 Sebaste/Augusta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이사랴/Caesarea라는 항구도시도 건설했습니다. Cesarea에는 Roma와 Augustus에게 바쳐진 신전도 세웠습니다. 따라서 Roma와 유대는 상부상조하는 관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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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중간사(사도행전25:6-12)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서 범죄로 인해서 주전586년(북왕국/722)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후로부터 이들은 계속해서 타국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Persia의 고레스에 의해서 유다로 귀환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Persia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Persia(주전450-330)는 유대에 상당히 호의적이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 이후 약200년 간 Persia는 유대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을 허용했습니다. 따라서 이 기간에는 유대의 행정을 책임 맡은 대제사장들이 유대를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전333년에 Alexandros대제가 Macedonia에 주둔하고 있던 Persia군을 격퇴시켰습니다. 이로인해 Persia가 다스렸던 지역이 Greece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Alexandros는 Greece 문화가 세계를 통일시키는 유일한 힘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Alexandros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법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안식년에는 공물이나 세금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이집트의 Alexandria라는 도시를 건설해서 유대인들이 이주해서 살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이주민들에게 Greece인들에게 부여된 몇 가지 특권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Septuagint/주전250년)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대제가 주전323년에 죽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이 제국을 분할통치합니다. 이들은 Kasandros,1 Lysimachos,2 Ptolemy,3 Antigonus4입니다. 이들은 알렉산더대제처럼 단일체제냐, 집단체제로 갈 것인가 하다가 피차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안티고누스를 다른 3명이 제거합니다. 알렉산더 사후 후계자 전쟁(Diadochi War)이 주전323-주전301년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나 Antigonus가 주전301년 Ipsus전쟁에서 죽자 Diadochi시대가 끝나고 네 왕조로 분열되었습니다. 북부 Syria와 Mesopotamia지역을 다스리던 Seleucus, 애굽과 Palestine, 남부 Syria지역을 다스린 Ptolemy, 소아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Lysimachus, 헬라(Macedonia/Greece) 지역을 다스리던 Cassander가 이들 네 지역을 대표했습니다. 이 네 왕국 중 성경역사와 관련되는 왕국이 Ptolemy왕조와 Seleucus왕조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하여 다스리던 왕조는 Ptolemy왕조였습니다. 이들은 이방종교에 관대해 유대인들을 Alexandria에 이주시켰습니다. Ptolemy2세 지원 하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당시 세계적 공용어인 헬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LXX). 헬라어가 당시 세계 공용어가 된 배경에는 Alexandros대제의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전198년, Seleucus왕 안티오쿠스3세가 Ptolemy5세와의 파내우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Palestine 통치권은 Seleucus왕조로 넘어갔습니다. Ptolemy왕조는 유다관습과 전통에 관용적이었던 반면, Seleucus왕조는 Hellenism문화를 강압적으로 이식시키려 하고 많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성전 보물을 약탈도 했습니다. Seleucus의 왕 Antiochus4세는 자신을 스스로 신의 현현(顯現)으로 자처하여 Epiphanes라 칭하였습니다.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성소’를 더럽혔고(단11:31) 주전167년에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지하였으며 12월8일에는 성전의 제단에 ‘제우스 신상’을 세워 숭배하게 했습니다(단11:31). 심지어 율법을 지키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왕의 생일을 기념케 하기 위해 매월25일마다 돼지를 잡아 제단에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Antiochus Epiphanes에 대하여 “네 뿔 중에 한 뿔에서 나오는 작은 뿔”로 칭하고 그가 영화로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하늘군대인 이스라엘 백성을 쳐서 별들을 떨어뜨리고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고 성소를 헐어버린다고 기록했습니다(단8:8-11).
Seleucus왕조의 反유대인 정책은 유대인들의 강력한 저항과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헬라문화의 同化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신앙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바리새파 유대인들과 헬라주의에 동조하는 사두개파 유대인들의 관계가 악화되어 갈 때 유대주의자들이 Antiochus4세가 애굽 원정길에서 죽었다는 헛소문을 내고 다수의 헬라주의자들을 죽였습니다(주전169). 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Antiochus4세는 유대주의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모든 종교행사를 금하는 종교박해를 감행했습니다. 당시 제사장 맛다디아는 제우스 신에게 제사하라는 왕명을 거절하고 제단을 파괴한 후 고프나 산지로 도망하여 경건한 유대인인 하시딤과 합류, 반란의 선봉에 섰습니다(주전167). 맛다디아의 아들 유다 마카비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주전164년에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율법의 규례대로 성전을 정화하고 8일간의 봉헌축제(‘하누카’, 또는 ‘수전절’)를 열었습니다. 마카비의 동생 요나단 때에는 이스라엘 북동 지역과 트랜스 요르단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마침내 시몬의 지도하에 주전142년 유다는 Seleucus왕조를 완전히 몰아내어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몬 왕조’를 건립하였습니다(주전142). 하지만 하스몬 왕조는 내부분열과 갈등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주전63년 Roma의 Pompeius(Gnaeus Pompeius Magnus)장군에 의해 다시 예루살렘을 내주고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Josephus에 의하면 Pompeius의 군대가 이무나 접근할 수 없고 볼 수도 없었던 성전을 마구 짓밟았다고 했습니다. Pompeius와 그의 부하들은 대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것까지 보았습니다. 당시 성전 안에는 금상과 금등대와 그릇들과 다량의 향료들과 2000달란트나 되는 돈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손을 대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1 주전358-297/알렉산드로스대왕의 후계자 중 한 사람으로 안티고노스와 대립하였고 입소스 전투 이후로는 나라와 왕국경영에 전념하였다. 아버지 안티파트로스가 죽은 뒤 안티고노스의 후원을 얻어 그리스 본토 지배권을 획득하였으며, 이어 알렉산드로스제국(帝國)의 재상 폴류페르콘을 제거하고 마케도니아에 세력기반을 구축하였다. 주전305년부터 마케도니아 왕을 칭하였으며, 제국 재통일을 지향(志向)하는 안티고노스와 대립하였다.
2 Lysimachos/주전360~281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이며, 대왕의 친위대의 한 사람. 대왕이 죽은 후 트라키아와 소아시아 북서부를 지배하였고 케르소네소스 반도의 기부(基部)에 수도를 건설하였다. 주전306년 트라키아왕이라 하였다. 주전301년 후계자 중 가장 유력한 안티고노스를 입소스전투에서 깨뜨리고, 그 영토 마케도니아를 병합하였으나, 전날의 동맹자 셀레우코스의 공격을 받아, 리디아의 쿠르페티온에서 전사하였다.
3 Ptolemy I 주전367-283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로 동방 원정에 종군하였고, 주전323년 왕이 죽은 후 이집트의 관구를 통치하였다. 그의 치세에 이집트와 시리아의 전쟁이 벌어져, 그는 주전312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많은 유대인을 식민 또는 상인으로 하여 이집트로 데려갔다. 주전301년 유대는 정식으로 톨레미의 판도에 가입되었다. 그의 치세 중에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명한 박물관ㆍ도서관ㆍ세라피움의 성전이 세워졌다. 그는 미술ㆍ문학을 장려, 유클리드와 같은 그리스 학자를 후원하여 알렉산드리아를 학술의 중심지로 삼고 상업에도 힘써 나라를 크게 번영시켰다.
4 Antigonus I 주전382~301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마케도니아 장군으로서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를 창건해, 주전306년 왕이 되었으나, 5년 후인 주전301년의 입소스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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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재판을 청원한 바울(사도행전25:6-12)
베스도는 예루살렘에 8-10일간 있었습니다. 이때 유대의 지도자란 사람들은 베스도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바울을 살해할 기회를 얻기 위해 그들은 베스도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베스도는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바울을 재판하였습니다. 바울을 부르고 유대인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중대한 범인으로 지목하고 고소했지만, 어떤 혐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막상 바울을 고소했지만 죽일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베스도에게 말합니다. ‘나는 유대인에게도, 성전에도, 가이사에게도 전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베스도는 바울보다 유대인의 마음에 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내 앞에서 심문을 받겠는가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Roma의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전혀 죄가 없습니다. 내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불의를 행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어떤 불의를 행하였다면 마땅히 죽음의 벌도 받겠지만, 나를 고소한 일이 무고인데 어떤 사람이든지 나를 유대인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나는 가이사에게 호소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가 가이사에게 항소함으로써 이 사건은 베스도의 손을 떠나버렸습니다.
Roma시민은 지방의 행정관에게 심한 압제를 받거나 중요한 재판문제가 발생했을 때 황제에게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지방관청은 그 호소자를 Roma까지 호소해야 했습니다.
Roma황제 중에 악명 높은 황제는 Tiberius, Caligula, Claudius, Nero입니다. 바울사도가 호소했을 황제는 Nero황제였습니다. Nero황제도 초기(54-62)에는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Stoa철학자 Seneca와 집정관 Afranius Burrus 등의 영향으로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Nero가 황제에 즉위했을 때가 그의 나이 16세10개월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로 인해서 점점 삐뚤어져 결국에는 악한 황제로 변했던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순전히 자신의 신변 때문에 황제에게 호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Roma에 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당시에 Roma는 천하에 중심이었습니다. 천하의 중심인 Roma에 복음을 전하고자 황제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이미 목숨은 하나님께 담보로 잡힌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위하여 바울사도는 죽음도 불사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는 그러한 믿음도 없고 열정도 없습니다. 물론 2000년의 gap이 있지만 오늘의 우리들은 초대교회의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주의하라고 하신 헤롯의 누룩/물질주의, 바리새인의 누룩/외식과 율법주의, 사두개인의 누룩/현세주의 등의 누룩이 교회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건물을 요지에 잡아서 크게 짓고, 교세를 자랑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고난받기를 거부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복신앙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과 권세와 재물을 극히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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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교리에 얽매인 자들(사도행전25:1-5)
베스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온지 3일 만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유대의 사정과 유대인들을 접견하고자 예루살렘에 간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산헤드린은 벨릭스 때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좌절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베스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오자 즉시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베스도에게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에서 올라와 심리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청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길에서 자객들이 매복해 있다가 바울을 죽이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끌어들여 사형선고를 내리고 즉시 제고하든지, 아니면 자객으로 하여금 살해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베스도는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갇혀있으며, 나도 곧 가이사랴에 갈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 중에 유력한 자들이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이 만일 잘못한 일이 있으면 법적으로 말하라고 했습니다. Roma인인 바울을 유대인들에게 함부로 내어줄 수 없었으며, 행정상 예루살렘에 간 것이지 바울문제로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새롭게 형성된 그리스도인들을 늘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교리에 목을 맸기 때문입니다.
김광채 교수의 고대교리사에 의하면 교리란 영어로 dogma인데 이는 dogme( 불어), Dogma(독어) 말의 번역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는 라틴어로 dogma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라틴어의 dogma도 헬라어 dovgma/dôgma에서 차용해 온 말입니다. 따라서 dogma의 어원은 헬라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dogma의 헬라어 명사는 dokei'n/dokeîn이라는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dokeîn이라는 동사는 타동사로 사용될 때 “믿다”, “생각하다”, “결정하다”, “결의하다”, “규정하다” 등의 뜻입니다. 자동사로 사용될 때는 “…처럼 보인다” “…처럼 생각된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dovgma는 dokei'n 동사의 수동태 완료분사가 명사화한 to; dedogme;non(중성단수)에서 나온 말로서 “의견”, “생각”이라는 기본적인 뜻 외에 “결정”, “결의”, “명령”, “규정”, “법령”, “칙령” 등의 정치적, 법률적인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철학이나 의학, 법학 등의 학문분야에서 전문용어로 사용될 때는 학설(學說), 주의(主義), 교의(敎義), 교조(敎條), 원칙(原則), 공리(公理)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Platon은 dovgma를 그의 국가론(politeia)에서 통치자들의 “결정” 내지 “명령”이라는 뜻을 지닌 정치적, 법률적 용어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LXX의 다니엘2:13과 6:9에서 “금령”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에스라3:9에서는 ‘도그마’에서 파생된 ‘도그마티제인’이 ‘조서를 내리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누가복음2:1, 사도행전17:7에서 황제의 “칙령”내지 “명령”의 뜻으로 상용되었고, 에베소서2:15과 골로새서2:14에서는 “의문” 즉 “구약의 율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예루살렘 사도회의(49년)의 “결정”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잘못된 ‘dovgma’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세상에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쏘시개로 알았습니다. 그러는데 교회가 이방인도 구원을 받고, 사마리아인들도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눈에서 불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살해대상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유대인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못된 교리로 이단에 빠진 사람들, 이단은 아니지만 세속화된 교회들이 문제입니다. 이들은 정통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dovgma’에 얽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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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들(사도행전24:24-27)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27절)
벨릭스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했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합니다. 사실 인간들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 이유는 어떤 사람이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욥기4:17-21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 사이에 멸한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장막 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사람이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죽음을 면치 못할 짧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시편39: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시편49:6-14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사람들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영원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 한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로마서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뿐만 아니라 인생은 극히 허무합니다.
욥기7:7-10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찌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전도서12:1-8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인간의 행한 일들(선악)은 하나님께 아무런 힘이 못됩니다.
욥기35:2-8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그 관계를 끊어놓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한 사람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katativqhmi/katatîthemi) 합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 하고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온통 한계 투성이인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더 합니다. 절대로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목사들을 보면 사람을 너무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좀 괜찮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를 끔찍이도 사랑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가차 없이 사람들을 버리는 사람들이 목사들입니다. 참 이율배반적인 일들이 지금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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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들의 행태(사도행전24:24-27)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2권 13장을 보면 Nero는 소(小) Armenia 왕국을 헤롯의 아들 Aristobulus에게 주었습니다. 아그립바에게는 4개의 도시와 그 인근지역을 주었습니다. 아그립바는 Abila, Julias, Tarichea, 갈릴리의 Tiberias를 다스렸습니다. 이 외의 모든 지역은 벨릭스를 총독으로 파견해서 다스리게 했습니다. 벨릭스는 20년 동안이나 유대를 휩쓸며 약탈하던 Eleazar과 부하들을 생포하여 로마로 압송하였습니다. 벨릭스가 체포한 자들과 처벌한 자들과 십자가에 처형한 자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들을 제거하자 대낮에 도시 한가운데서 살인을 자행하는 Sicarii라고 부르는 자들이 예루살렘에 나타났습니다. 이들의 손에 대제사장 Jonathan도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들 외에도 정권(政權)의 변화와 변혁을 노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벨릭스는 이런 사태의 진전이 반역의 시초라고 생각하여 무장한 기병과 보병을 보내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습니다. 거기에 애굽인 거짓 예언자까지 나타나 그를 따르는 자들이 무려 3,0000명이나 되었지만, 벨릭스는 진압하였습니다. 이들 말고도 예루살렘에 끊임없이 소란을 일으키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이사랴에서도 계속 소요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러다보니 과격진압과 과잉진압이 그치지 않았고 이에 로마에 진정이 들어갔습니다. 벨릭스가 결정적으로 파면당한 이유는 가이사랴의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의 내란 때문이었습니다. 이 내란 때에 벨릭스는 군을 동원해서 중재하려다가 유대의 지도자들의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Roma는 벨릭스의 뒤를 이어 베스도(Festus)를 후임총독으로 보냈습니다. 베스도는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소요를 일으킨 자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대부분을 생포하고 살해했습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행정장관이 바뀌었다고 바울에게 유익한 점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벨릭스는 바울을 억류시켜놓고 떠나면서 자신의 이러한 행동이 유대당국자들에 의해 호의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습니다(F. F. Bruce). Roma로 소환되기 직전까지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습니다. 또한 경험이 없는 새로운 통치자가 과연 바울에게 유익한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바는 부요하고 안락한 삶입니다. 그 부요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서 권력을 잡습니다. 돈을 모읍니다. 그러면 안락한 삶이 충족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권력을 잡으면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오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잘못되어 오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회장이 조금 늦게 나왔다고 대통령의 경호실장이 벌을 주기도 했고, 정권에 잘못 보여서 회사가 압류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정권을 잡으면 신앙을 지키기가 여간 어렵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주님의 말씀이 쓸데없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다수의 권력자들이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직책이 늘 시험의 대상임을 인식하고 늘 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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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뇌물(사도행전24:24-27)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26절)
구약성경에서 뇌물(dj'vo/shōhad)은 모세오경의 법률 부분에서 발견됩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법관이나 관리가 ‘뇌물’ 즉 부정한 금품을 취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23:8) 법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재판관에게는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되었습니다(대하19:7). 그럼에도 지배자들은 뇌물 받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은 이것을 심히 비난했습니다(삼상8:3/사1:25,5:23, 미3:11).
뇌물의 사전적인 정의는 ‘어떤 직위에 있는 사람을 매수하여 사사로운 일에 이용하기 위하여 넌지시 건네는 부정한 돈이나 물건’입니다. 따라서 주로 뇌물은 직위를 이용해서 부정하게 거래되는 돈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건을 맡았는데 A가 봐달라고 뇌물을 주게 되면, 그 사건은 제대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업무상 뇌물을 받았다면,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당연히 뇌물을 받은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면 뇌물을 주지 않은 사람은 엄청나게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회가 탁해지고 어두워지게 됩니다. 너도나도 뇌물을 받게 되면 정상적인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사회나 국가는 머지않아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뇌물을 받으면 되지 않습니다.
업무와 관련해서 거래가 이루어질 일들은 이 사회에 많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악의 요소들이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벨릭스처럼 돈을 받을까 바라는 마음이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정상적인 돈이 아니기 때문에 받는 마음이나 주는 마음이나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이 막 받아 챙긴다면 양심이 마비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돈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에 돈이 소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제한을 받습니다. 돈을 벌어들이는데도 제한을 받고, 돈을 모으는데도 제한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돈이 벌린다고 해서 아무 직업이나 가질 수 없습니다. 돈이 된다고 유흥업소를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과 상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많은 것들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의 테두리 안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목회자도 어떻게 하든지 편하게 윤택하게 생활하고 싶어집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렇게 생활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모두 그렇게 살았습니다. 환경이 조금 좋아졌다고 해서 수천만원씩 수억원씩의 사례비를 받는 것은 좀 생각해봐야 합니다. 뇌물성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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