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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행적(사도행전1:1-3)

사도행전의 헬라어 제목은 Pra'xei" ajpovstolwn /‘프락세이스 아포스톨론’/사도들의 행적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일을 하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렇다고 성령행전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령이 개입하시지 않은 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절과 2절을 보면 ‘먼저 쓴 글’ To;n me;n prw'ton lovgon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했습니까? 누가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쯤 되면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도 데오빌로에게 헌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눅1:1-4)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사도들을 택하시고, 가르치시며, 성령으로 명하신 일, 그리고 승천하신 일까지를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1-2절에 누가복음을 요약한 것입니다.

고난 받으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목격자는 베드로, 열 제자,열두 제자, 500명의 성도들, 야고보, 모든 사도, 바울(고전15:5-8)과 막달라 마리아(마28:9, 요20:16,17),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눅24:13-32), 도마(요20:26-29), 일곱 제자(요21:1-23)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간이나 저희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데오빌로(Theophilus.)는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가는 이 사람에 대해서 잘 아는 사이이겠지만 이 사람의 이름 외에는 전혀 드러내지 않음으로서, 누가가 서책을 증정하는 데오빌로에 대하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서문(행1:1)을 떠나서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혹자들은 데오빌로의 이름에서 ‘데오빌로’를 신을 사랑하는 자들로서 기독교인 독자들의 상징적 이름이라 하기도 하며, 신을 경외하는 기독교적 교육을 받은 이방인 집단이라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각하’란 용어가 그 논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각하는 당시 로마제국의 높은 관직에 있는 고관에 쓰인 말입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기독교의 기원과 발전을 상세히 기술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배운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문제는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건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았지만, 그것들은 많은 구전과 전설문들인데, 그것들은 기독교 초보자들을 혼동시킬 수 있는 결점과 불완전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그의 서책을 증정했습니다. ①기독교 신앙에 관하여 이미 듣고 알고 있는 신앙에 더욱 굳은 확신을 주고, ②그것으로 어떤 그릇된 전승들에 동요되지 않고, ③어떤 전승들에 대하여 의심이 난 것들과 알고 싶어한 것들이 분명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함이며, ④아마 인간의 기억의 연약과, 한 역사가 다만 구전과 보도에 의했을 때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것에 첨부와 변경, 삭감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모양을 흐리게 하거나 다르게 만들게 된다는 것을 고려했습니다.

누가복음은 데오빌로와 함께 모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역사적 사실의 반석 같은 기초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하며, 데오빌로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서고 교회의 선교에 많은 공헌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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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과 로마(사도행전1:1-3)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품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로마는 교회의 태동을 가져왔다. 헬라는 언어를 통일하여 로마제국의 전체를 언어통일을 이루었다. 그래서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로마는 주전753년도에 건국되었다. 주전343년동에서 272년도에 이탈리아를 정복했다. 주전264년도에서 146년에 칼타고를 점령했다. 주전 215-146년도에 헬라와 소아시아를 정복했다. 주전 133-31년에 스페인,고울, 브리튼, 튜우톤을 정복했다.

주전 146년 로마의 장군 스키파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는 칼타고를 정복한 후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마케도냐, 고린도(Corinth), 아가야(Achaia) 전역으로 통치권을 확장시켰고, 주전190년에는 셀류쿠스의 시리아를 굴복시키고 주전 168년에 애굽의 항복을 받았다. 계속 승리한 로마는 식민지가 넓어지면서이를 다스리는 총독들과 자주 교란이 생겼고 정치의 실권을 잡은 소수인은 평민을 압박하였다. 그러다가 주전133년에 호민관으로 선정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토지 재 분배 법을 통과시켰으나 원로원의 미움을 받아 암살되었다. 주전 70 년경 폼페이(Pompey) 장군이 통령이 되었는데, 로마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동방에 왔을 때 유대의 하스몬가의 힐카누스2간의 정권다툼을 보고 유대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때마침 힐카누스2세가 도움을 요청해 오자 주전63년 폼페이는 시리아 북쪽지역을 멸망시킨 후 다메섹에 이르렀는데 이때는 힐카누스2세와 아리스토블루스2세의 양쪽의 도움을 요청받았다. 폼페이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아리스토블루스의 항복을 받고 반항하는 자들을 살해하였다.

주전31-주후14년까지 아우구스투스(Augustus): 이 때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으며, 12-37년 티베리우스(Tiberius)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다.

54-68년 네로(Nero),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바울이 처형당했다.

아우구스투구스로부터 약 200년 이상 지속된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여러 민족과 종교, 사상 등을 하나의 단일화된 법과 언어하에 묶을 수 있게 한 배경을 제공하였기에 그 배경하에서 복음이 종족과 언어 및 국가를 초월하여 어디든지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강한 군대를 내세워 여러 국토를 통일한 로마는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기치하에 동서와 남북의 벽을 뚫어 훌륭한 군사 및 교통 도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복음이 이러한 rute를 통해 원활하고 신속하게 로마 제국 내 전역으로,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높은 수준의 로마법과 질서 유지는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복음 전도자 바울에게 더 할 수 없는 면의를 제공해 주었다. 따라서 로마는 초대교회의 복음 사역을 위해 인류 역사상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마련된 복음의 온상이요 무대였다.

로마의 행정제도: 500년의 공화정치의 소산인 원로원제도, 집정관 제도, 민회 제도, 지방총독 제도 등은 주전 23년 Augustus에 의해 제국(帝國)시대가 시작되었을 때도 여전히 주요 행정제도로 존립했다. 원로원은 로마제국의 최고 행정기관이었다. Augustus 황제는 최고집정관, 최고원로원, 최고호민관의 직위를 겸임하였으며, 그 아래로 행정사무를 담당할 여러 관료들을 배치시켰다. 로마시(市)는 황제에 의해 직접 다스렸으며, 기타 속주(prvce)들에는 총독이 파견되거나 자치가 인정되었다. 총독으로 파견되는 자들은 대개 임기를 마친 집정관들로 구성되었으며, 원로원에 의해 임명받았다. 그리고 속주들 중에는 황제의 직접적 통치를 받았던 곳도 있었다.

로마의 군대 제도: 로마에는 상비군(常備軍) 제도가 없었으며 필요시 병사들을 소집하였다. 그러다가 마리우스(Gaius Marus/주전157-86)가 극빈계층을 직업 군인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상비군 제도가 정착되었다. 그 후 로마군대는 기본적으로 용병제적(爛兵制的)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부대에 따라 근무 기간이 16~26년까지 각각 달랐다. 모든 군대는 황제휘하에 편성되었으며 황제 친위대와 로마시 주둔군, 군단들(legions), 보조 부대들, 민병대, 함대(fleet) 등 5개 집단으로 분류되었다. 로마제국의 군사체제는 주로 속주들을 방어한다는 차원에서 편성되었으며, 황제 친위대 및 로마시 주둔군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대가 국경 지대의 속주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군단의 병사는 입대와 함께 로마 시민권을 얻었으며 보조 부대의 병사는 제대할 때에 시민권을 받았다. 백부장은 대략 10명으로 구성된 소위 ‘백인대’(白人隊)의 지휘관인데 대개 한 보병대(步兵隊)에는 1명의 백부장이 있었고, 한 군단(軍國)에는 10명의 백부장, 한 군단에는 60명의 백부장이 있었다. 백부장은 천부장의 휘하에서 그 명령에 복종하였으나 일선 지휘관으로서 군의 뼈대가 되는 것은 역시 백부장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전투 부대로서의 한 군단의 규율과 역량을 좌우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백부장들은 말단 졸병에서부터 승진하였으므로 군대 안에서 가장 많은 경험을 축적한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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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과 성령의 역사하심/성령세례(사도행전1:1-3)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순절 사건에 대한 해석문제, 성령세례와 중생과의 관계,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의 문제가 성령론에서 주된 논제가 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오순절 성령세례의 의미와 성령세례의 단어의 어의를 고찰해야 찾을 수 있다.

사도행전에 있어서의 성령역사

가핀은 “성령세례는 한마디로 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이다. 오순절 사건은 약칭 성령세례, 성령강림, 혹은 성령선물 등으로 불리며, 또한 성령에 의한 세례라는 뜻이 있는 동시에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어느 쪽을 택해도 큰 차이가 없으나 이 말의 요점은 신자가 성령에 의해서 영적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뜻이다”고 말했다.

핀녹은 성령세례의 용어에 대하여 특수한 용어가 아니라 융통성 있는 은유적 용어라고 했다. 즉 성령의 임함을 말하는 통칭적인 의미로 받아들여 때로는 성령 충만의 동의어로 볼 수 있으며 회심의 경우를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안영복 교수는 오순절 날에 각 사람위에 '성령이 임한 것'을 가리켜 '성령의 세례'라고 말함이 타당하다고 했고 박영선 목사는 "성령의 부어주심"이라고 표현하면서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와 성령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를 구분했다.

또한 우희영 목사(성실)는 "성령세례란 성령 속에 잠기며 성령 자신으로 말미암아 기름 붓듯, 혹은 물 붓듯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로이드 죤스는 "성령의 보증" 혹은 "성령의 인침"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했고 부루너(Fredick Bruner)는 세례 받는 것이 곧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며 성령의 세례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위스 개혁신학자 파디(Ren'e Pache)도 "성령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책에서 동일한 견해를 표현하였다. 칼빈 또한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동일시했다.

이러한 모든 견해는 대체로 두 가지 주장으로 분류 될 수 있다. 즉 오순절파와 웨슬리안 및 케직파의 견해와 개혁주의(칼빈주의)의 학설이다. 전자는 중생 후에 받는 이차적 경험으로서의 체험을 성령세례라 해석하며, 후자는 중생시에 받는 어떤 것으로서의 성령세례를 말한다. 이렇듯 성령세례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주의 깊게 고찰되지 않으면 그 실체를 분간하기 어렵다.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성령세례라는 말이 7회 나타났다(마3:11, 막1:8, 눅3:16, 요1:33, 행1:5, 11:16, 고전12:13). 여기에 인용된 성구들은 세례요한이 자신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하면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1:8)고 말한 예언적 내용이다. 그리고 행1:5의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 후에 승천하시기 전 사도와 같이 모인 무리에게 하신 예수님 자신의 예언이며 행11:16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쓴 것이고 고전12:31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었던 교훈에 포함되어 있다.

성령세례가 직접 언급된 복음서와 사도행전1:5을 살펴보면 성령세례는 예언과 약속의 성취로서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이다. 성령으로(ejn pneuvmati baptisqhvsesqe aJgivw/)세례요한에 의해 예언되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약속된(행1:5) 성령세례가 오순절 날에 성취된 것이다. 베드로는 구약을 인용하여 이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했다.

Sanders도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내린 성령의 은혜를 가르쳤던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문법적으로 약속된 세례의 태가 수동태(baptisqhvsesqe/세례를 받으리라/ 미래수동태)인 것은 성령세례가 받은 자의 행위의 결과가 아님을 의미하며, 예언과 약속의 성취임을 말해준다. 오순절 사건의 특성과 의의를 살펴보면,

첫째, 오순절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이는 전혀 없었던 성령이 강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은 오순절 이전에도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계셨고 사역하셨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인간을 위한 성령의 주된 사역이 시작됨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시대가 끝나고 성령의 주도적 사역이 시작됨을 알리는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은 역사성을 가진다. 렌스키도 마태복음 3:11절을 주해하면서 “오순절 전에는 성령이 없었고, 오순절 후에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순절 전에는 한 영혼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차이는 구속 사역이 실제로 완성되기 전에는 성령의 사역이 제한된 예비적이었으나, 그 후에 이르러 성령의 충만이 있었다는 차이다.” 렌스키 역시 오순절 사건이 성령의 주도적사역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입장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오순절 사건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것의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성령시대의 시작이다. 고든(Gordon) 또한 오순절 사건을 성령시대의 도태의 축으로 해석했다.

둘째로 오순절 사건은 구속사적인 사건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성역초기에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분이라고 말한 다음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3:17)고 말함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 주는 일이 어떤 일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사역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직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역사상에 구속 성취를 이루시고 그 구속을 받아들이는 알곡은 곳간에 모으고, 그 구속을 배척하는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요엘2:28-32을 인용하여 오순절 사건을 설명하면서 요엘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입장에 비추어 인용했다. 베드로는 요엘서의 '그 후에'를 '말세에'로 고쳤을 뿐만 아니라(행2:17) “저희가 예언을 할 것이요”(행2:18)를 첨가하여 인용하였다. 그 이유는 오순절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아울러 말세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의 오심과 자신의 죽음을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16:7-8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예수님의 생각의 방향은 자신이 죽음과 부활, 승천을 거쳐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에 있음을 본다. 예수님 자신이 죽으신 후 부활해야만 보혜사가 오실 것을 명백히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오순절 사건은 구속적 드라마의 한 부분으로 성취된 사건이며 다른 구속 사건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의 성육신, 수난, 죽음, 부활, 승천과 함께 고려되어져야 한다. 스타트(Stott)와 가핀(GaGaffin)도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의의를 구속사적인 면에서 이해하고 있다. 가핀은 오순절의 의의를 3가지 차원에서 조명하였는데, 기독론적 차원, 교회론적 차원, 그리고 경험적 차원이다. 기독론적 차원에서 볼 때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시는 자는 바로 성자이시다. 오순절은 약속의 성령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날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적이며 기능적이며 종말론적인 섭리사건이다. 십자가로 절정을 이룬 성자의 사역의 절정이었다.

세째, 오순절 사건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가시적 현상의 체험이다.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과 방언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먼저 상징적 의미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예언과 약속이 성취되었고 새로운 언약시대의 도래가 이루어졌다는 확증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가시적 현상이 나타날 수는 있겠으나 모든 경우와 간구에 의해 이러한 동일 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합당치 않다고 하겠다. 성령행전이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성령의 끊임없는 역사가 상존했던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에 방언을 비롯한 가시적 현상이 교회선교사역에 반복되었다는 제시가 없다. 오순절 사건의 가시적 현상들은 주의 깊게 언급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네째, 성령의 충만을 모든 믿는 자들이 받았고 특별한 능력이 임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되고 능력의 은사가 임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목격한 후 분명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님에 대한 간절한 사모와 전혀 기도에 힘쓴(행1:14)의지의 순종이 막 주도적 사역을 시작하시는 성령님을 그들 속에서 충만히 역사하시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역사했던 능력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예정과 인정하심에 의한 것이지만 성령 충만함으로 은사와 능력이 나타났다고 봄이 더욱 보편적이며 일괄성이 있다고 하겠다.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고린도서에 나타난 성령세례의 언어적 의미를 고찰 해보면 성령세례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먼저 세례(baptivzw)라는 말의 헬라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상태 또는 이전의 환경이나 상태와의 관계를 바꾸기 위해서 사람이나 사물을 그 외에 어떤 것과 결합 시켜 놓거나 새로운 환경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으로 정의되며 그 번역은 ‘-로 들여놓다. 또는 -로 끌어들이다’라고 K.S 위스트는 설명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의 31절에서 “성령으로”는 수단을 말하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또는 성령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의 영역에서의 세례를 뜻하며, 성령은 세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K.S 위스트는 말한다. 또한 “믿는 자를 예수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결합으로 이끄는 것이지 성령에 의한 세례가 능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결국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의 헬라어 의미는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와 생명적인 결합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삼으신 것을 의미 한다” 성령이 믿는 죄인을 주 예수께서 살아계신 머리가 되신 그 신비체에 들여놓거나 이끌어 들이는 것을 뜻한다. 렌스키와 칼빈도 요1:33과 행1:5을 주해하면서 세례라는 개념을 구속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이상근 박사 또한 성령의 세례는 위에서 오는 선물로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같이 살아 그의 몫이 되는 것이라 하여 성령세례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연합으로 해석했다. 또한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역사적이든 개인적이든 단회적 사건이다. 막1:18, 마3:11에서 “세례를 주실 것이리라”는 뜻이 단어 (밥티세이)는 미래능동태 3인칭 단수 동사로서 한번 이루어질 것이 예언되었기에 성령세례는 단회적이라 할 수 있다. 요 1:33의 "세례를 주는" 단어 (밥티죤) 역시 현재 분사 능동태 주격 남성 단수 동사로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단회적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고전12:3절도 마찬가지로 그 동사는 과거의 행동을 가리키는 과거 시제이며 단 한번만의 행동을 가리키는 부정과거이다. 이와 같이 성령세례에 관한 주석가들의 해석과 언어적인 의미를 고찰해 보았을 때 성령세례는 죄 씻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표식으로서의 역할과 생명이 임하는 단일성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이상의 고찰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성령세례는 어떤 능력이나 은사의 체험이 중심이 아닌 역사적 구속사적인 사건이요 예수그리스도의 몸과의 결합이며 단회적 사건으로 성령 충만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성도가 성령의 은사는 마땅히 사모해야 하겠지만 성령세례를 사모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1장에서 7장까지는 성령님의 오심에 대한 예언입니다. 8장에서 10장까지는 사마리아와 유대전도를 주도하시는 성령님을 볼 수 있습니다. 13장 2절과 4절은 땅끝 전도의 시작을 주도하신 성령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6장6절에서 19장 20까지는 유럽전도의 시작을 주도하십니다. 20장에서 27장까지는 예루살렘으로 경유하여 로마로 가는 것을 주도하셨습니다.

1 한규상, “사도행전을 엮는 몇 가지 주제들”『사도행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2 신약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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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과 교회(사도행전1:1-3)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앞으로 있을 교회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마16:17 18:17). 교회의 모든 일들을 사도들에게 맡기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두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에서 사마리아에서 땅 끝까지 선교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들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포괄적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를 사도들은 전하는 주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사도들은 부지런히 전했습니다. 스데반이나 야고보는 이 교회를 전하다가 순교하기도 했지만,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교회는 든든히 서갔습니다.

사도행전에 교회라는 용어는 행5:11, 7:38, 8:1, 8:3, 9:31입니다. 8:1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ejkklhsiva/엑클레시아)에 대해 말합니다. 7:38은 모세가 광야에서 인도한 이스라엘 백성을 에클레시아로 부르고 있습니다. 9:31은 예루살렘 공동체뿐만 아니라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사도행전9:31은 교회가 단수(ejkklhsiva)로 써졌습니다. 그러나 15:41에서는 교회가 복수로(ejkklhsiva") 16:5에서도 복수입니다. 11:22, 12:1, 12:5, 15:4, 15:22에 예루살렘에 있는 공동체, 행 13:1 행 11:26 행 14:27 행 15:3의 시리아 안디옥에 있는 공동체, 18:22의 가이사랴에 있는 공동체, 20:17-18 20:28의 에베소에 있는 공동체는 단수로 표기되었지만, 복수개념으로 말한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나 공동체에 대한 개념의 특징은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지금은 도시교회와 농촌교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서열을 자꾸 가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서열이나 상호관계의 문제없이 단순히 교회로 불렀습니다. 지역관계는 무시되었습니다. 단수(ejkklhsiva)와 복수(ejkklhsivai)가 무차별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에클레시아(ejkklhsiva)가 에클레시아이(ejkklhsivai)로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엑클레시아의 총화가 엑클레시아를 만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엑클레시아는 언급된 여러 지역에 존재하며, 이것이 서로 나란히 있는 엑클레시아에 대한 언급으로 영향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회중’과 ‘회중들’이든 ‘교회’와 ‘교회들’이 항상 서로 이해하고 도왔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확연히 구분되었습니다. 회중이 많은 교회와 적은 교회로 구분되었습니다. 세속적 에클레시아는 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력으로 판가름을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집회는 크기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상호보완적이고 상호 서로 돕는 관계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교회를 주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독립적이었고, 공동체적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온전히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나 많이 달라졌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는 초대교회로 다시 가야 합니다. 잃어버린 순수성과 거룩성, 그리고 충성성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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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내용분해(사도행전1:1-3) 2011.10.1

I부 예루살렘에서 증거/1:1-7:60

1:1-2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을 예비하심.

1. 예수님은 그의 제지들에게 명령하시고 승천하심(1:1-11)

2. 성령을 기다림: 유다의 후계자(1:12-26)

2:1-8:1a: 예루살렘에서의 선교사역

1. 오순절 장면; 베드로의 설교(2:1-36)

2. 메시지를 받아들임 ; 예루살렘의 공동생활(2:37-45)

3. 활동, 선포 및 사도들의 재판(3:1-5:42)

4. 헬라파 유대인들; 허용; 스데반의 재판과 순교(6:1-8:1a)

2부 사마리아와 유대에서의 선교사역/8:1b-12:25

1. 예루살렘에서 흩어짐; 사마리아에서의 빌립과 베드로(8:1b-25)

2. 빌립과 가사로 가던 에디오피아 내시(8:26-40)

3.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 예루살렘과 다소로 돌아감(9:1-31)

4. 룻다, 욥바, 가이사랴에서의 베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감(9:32-11:19)

5. 안디옥; 예루살렘, 헤롯의 박해; 베드로의 떠남(11:19-12:25)

3부 바나바와 사울의 이방인 전도 사역; 예루살렘에서 인정/13:128:31

1. 안디옥 교회에서 보냄을 받은 바나바와 사울: 구브로와 소아시아 남동쪽에서의 선교 사역 (13:1-14:28)

2. 예루살렘 회의와 승인; 안디옥으로 돌아감(15:1-35)

15:36-28:31: 땅 끝까지 이르는 바울의 선교 사역

1. 안디옥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그리스로 갔다가 돌아옴(15:36-18:22)

2. 안디옥에서 에베소와 그리스로, 가이사랴로 돌아옴(18:23-21:14)

3. 예루살렘에서 체포됨 ; 가이사랴에서의 투옥과 재판(21:15-26:32)

4. 죄수로서 로마 여행(27:1-28:14a)

5. 로마에서의 바울(28:14b-3l.

1. 예루살렘에서의 증거(1:1-7:60):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악속하신 오순절사건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지 열흘 후에 성취되었다. 성령의 권능을 체험한 제자들은 복음을 담대히 증거 하기 시작하였으며, 놀라운 결실을 또한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내적으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외적으로는 핍박과 순교 사건 등이 뒤따랐다.

2. 유대와 사마리아에서의 증거(8:1~12:25): 교회가 확장되는 가운데에서 세 가지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 집사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활동이 성공적으로 전개되었다. 둘째,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의 회심사건이 등장한다. 끝으로, 이제껏 유대인들만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던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도 증거 하였다.

3. 땅 끝까지 증거 함(13:1~28:31): 13장에서부터 본서의 초점이 베드로에게서부터 바울에게로 옮겨지며, 교회의 근거지 또한 예루살렘으로부터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차츰 대치되었다. 그리고 바울의 제1 전도여행(47-4), 2차 전도여행(50-52), 3차 전도여행(53-55) 이 나오고 복음과 함께 로마로 호송되는 바울의 동향을 자세하게 기록했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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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개관(사도행전1:1-3)

서 론

서문’(1:1-3)에서 저자는 사도행전이 누가복음의 연속임을 알린다. 사도행전의 저자와 누가복음의 저자는 동일하며 사도행전도 누가복음과 같이 데오빌로에게 헌정되었다. 누가는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듯이 구원사건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전 세계적 선포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눅24:6-47). 그래서 누가는 이 복음 선포가 이미 그의 시대에 취했던 선교의 길을 답습하여 그리고 있다. 이스라엘의 중심부요 메시야의 도성이요 최초의 기독교회의 발생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방세계의 심장부인 로마에까지이르는 선교의 행로를 그리고 있다. 서술의 큰 틀은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미리 정해졌다(1:8).

1. 저자

누가복음1:과 사도행전 1:1을 보면 한 저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사도행전20:4절과 5절을 보면 ‘우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곧 바울과 누가를 가리켜서 우리라고 한 것이다. 골로새서4:14, 디모데후서4:11을 보면 누가는 바울과 항상 같이 동행했다. 따라서 저자는 의사 누가이다.

2. 저작 장소

저작 장소는 바울의 로마체제 이후로 보아 로마에서 기록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은 누가복음과 마찬가지로 로마에서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3. 수신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수신인은 데오빌로(눅 1:1, 행 1:1)이다. ‘데오빌로’의 문자적인 의미가 ‘하나님을 사랑 하는 자’이기 때문에, 누가의 저서가 특정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던 1세기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낸 기록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눅 1:3에서 ‘데오빌로’ 뒤에 ‘각하’라는 말에 주목한다. 당시 그 직함은 로마의 관원을 지칭할 때만 사용되었다. 따라서 데오빌로는 이방인이었으며, 로마사회의 상류층이고, 누가가 그에게 신앙의 확신을 주기 위해 기록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4. 저작 연대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연대를 보통 61-67년경으로 보나, 61-63년경으로 보기도 한다.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써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바울이 로마에 간 것(60년)과 네로박해(64년)를 본서에서 다루지 않았다. 또한 70년에 로마의 멸망이 기록되지 않았다. 만일에 그 시기에 기록했더라면 틀림없이 그 사건을 기록했을 것으로 보아 60년 이후 64년 이전으로 61-63년경으로 추정한다.

5. 저작의 동기와 목적

기독교의 기원에 관해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그것에 대하여 보다 정확히 차례대로 설명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누가는 사도들이 어떻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위임령 즉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다음으로 세계의 수도 로마까지 전파하는 과정을 저술하고자 했다.

6. 신학적인 특징

본서에는 성령의 사역,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님의 지상사역에 부름 받은 사람들, 구약성경의 연장의 강조, 열두 사도의 역할, 정확한 복음사역,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라는 사실 등을 다루었고, 선교론적 관점에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베드로(유대)와 바울(이방)을 통합하려는데 애쓴 흔적이 있고, 히브리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학적인 측면에서 설명함으로 이 복음이 이방인과 무관하지 않음을 제시하였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은 바울에 대한 전기를 쓰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역사 즉 초대교회의 발전사이며 사도들의 활동사를 서술하기 위해서 사도행전을 기록하였다. 즉 사도행전은 교회의 확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책이다. 교회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증거 되고(1장-7장),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증거 되며(8장-12장), 그리고 땅 끝까지 증거된(13장-28장) 것을 기록하였다.

결 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서 자신이 고난을 받고 3일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들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언대로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으셨다. 그리고 예언대로 살아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선교명령을 하셨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하셨다. 이에 사도들이 복음을 유대와 이방에 어떻게 전해지는가를 기록했다. 그러나 사도들이 주관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주관하여 로마제국 전체를 거의 복음이 전해지게 하셨다. 과거 복음시대는 주로 예수님께서 전해진 복음을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 성도들,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였다. 과거에는 겁쟁이였던 사도들이 이제는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한 것은, 구약시대에 이어 신약시대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이런 열정으로 인하여 2세기가 채 못 되어 복음이 엄청난 속도로 유럽에 전해졌다. 이것은 곧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는 발판이었다.

[출처] 사도행전의 개관|작성자 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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