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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1.25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로마서6:1-11)
요즘의 성도들은 세례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야 하는데 세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매우 성경적이지 못하여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고 요소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뭇하느뇨?’라고 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8장1-7항을 보면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신약의 성례로서 세례 받은 당사자를 유형교회에 엄숙하게 가입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로써 그 당사자에게는 은혜언약의 표호와 인호가 된다. 또한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고 중생하고 죄를 사함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기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나타내며 확증한다. 이 성례는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명하신 것이기에 세상 끝 날까지 그의 교회 안에서 계속 집행되어야 한다. 이 성례에 사용되어야 하는 외형적 요소는 물이며 이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되 합법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복음의 사역자인 목사에 의해서 집례 되어야 한다. 세례 받는 사람을 물속에 잠기게 할 필요가 없고 세례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물을 붓거나 뿌려서 베푸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신앙과 순종을 실제로 고백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양친이 다 믿
거나 어느 한 편만 믿는 집의 유아들도 세례를 받을 수 있다. 이 의식을 모독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커다란 죄가 된다. 그렇지만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중생할 수 없다거나 구원 못 받는다든가 또는 세례 받는 사람은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중생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세례의식에 은혜와 구원이 불가분하게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세례의 효력은 그것이 집행되는 그 순간에 꼭 발생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식을 옳게 집행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에, 하나님 자신의 뜻하신바 계획을 따라서 약속된 은혜를 받도록 되어 있는 사람(어른이든지 유아든지)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가 제공될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로 나타나고 부여된다. 세례 의식은 어떠한 사람에게든지 한 번만 베풀어져야 한다.
사도바울 당시의 세례는 오늘날의 세례와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성인세례(成人洗禮)였습니다. 당시에 유아세례는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하나의 개인으로 그것도 곧 자기가족을 뒤에 두고 그리스도에게 나왔습니다. 또한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신앙고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교회에 들어올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교(異敎)에서 직접적으로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세례는 그의 생애에서 분계선이었습니다. 세례로 자기의 생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뿌리로부터 찢어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자기 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세례는 전신 침례였습니다. 사람이 물속으로 내려가 물이 그 위에 덮일 때면 그것은 무덤 속에 파묻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올 때 그것은 무덤에서 나오는 것과 같았습니다. 세례는 상징적으로 죽고 부활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사람은 한 가지 생에 죽고 다른 종류의 생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는 옛 죄악생활에 죽고 은혜의 새 생활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사람으로 물속으로 내려갔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교인(異敎人)이 유대교에 들어갈 때 세 가지 일을 수반했습니다. 제사와 할례와 세례입니다. 이방인은 세례로 유대교에 들어갔습니다. 세례의식에서 세례 받을 사람은 자기 손톱, 발톱과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리고 옷을 완전히 벗었습니다. 세례수(洗禮水)는 약 40세아 약 500ℓ정도의 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몸의 어느 부분이나 물이 닿아야했습니다. 그가 물속에 있을 때 세 명의 세례 집례자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고 권면과 축복이 그에게 주어집니다. 이 세례의 효과는 완전히 중생(重生)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하루 밖에 안 된 갓난아기라고 불려졌습니다. 그의 모든 죄는 다 용서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낳기 전에 지은 죄를 하나님은 별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William Barclay는 헬라인들의 세례이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헬라의 종교는 신비종교였습니다. 그들에게 신비종교들은 이 세상의 염려와 걱정과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방은 어떤 신과의 결합이었습니다. 그들의 신화는 수난극(受難劇)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난을 당해 죽고 다시 살아난 신들의 이야기에 근거했습니다. 그들은 신의 이야기를 연극화(演劇化)했습니다. 누구나 그 연극을 관람하기 전에 기초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그 연극의 내적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기나긴 사전교육을 받아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행을 해야 했습니다. 이어서 조심스레 관람할 수 있게 만들어지고 준비되어졌습니다. 드라마는 음악, 조명, 향과 제물 등 모든 방편을 다 동원하여 연출되었습니다. 연극이 연출되는 동안 그 사람은 그 신과 하나가 된 것 같이 느꼈습니다. 그는 신과 일체가 되는 감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 경지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입신식(入信式)을 받았습니다. 이 입신식은 인간이 영생을 위해 재생하는 새 출생이 뒤따르는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입신식을 받은 사람은 자기는 “자발적인 죽음”을 체험했다고 말해야했습니다. 어떤 신화극에서 입신식을 받을 사람을 죽을 사람이라고 부르고 그는 도랑에 머리까지 잠겼습니다. 그가 입신식을 받을 때 그는 어린아이라고 불리고 갓난아이와 같이 우유를 먹였습니다. 어느 다른 신화극에서 입신식을 받을 사람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신이여, 나의 영과 나의 생각과 나의 전생(全生)으로 들어오시오. 당신은 곧 나요 나는 곧 당신입니다.” 철저하게 이교였던 헬라인은 아무라도 바울이 죽었다가 세례 안에서 다시 산다고 하는 중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지를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사도가 그의 아이디어나 그의 말들을 유대교적 또는 이교적 관계에서 빌어 왔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함께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말과 예화를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우리자신 스스로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소유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 우리들은 먼저 우리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을 상징으로 나타내는 것이 세례입니다. 죽은 우리가 다시 부활할 모습으로, 세상 사람인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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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과 성령의 역사하심/성령세례(사도행전1:1-3)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순절 사건에 대한 해석문제, 성령세례와 중생과의 관계,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의 문제가 성령론에서 주된 논제가 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오순절 성령세례의 의미와 성령세례의 단어의 어의를 고찰해야 찾을 수 있다.
사도행전에 있어서의 성령역사
가핀은 “성령세례는 한마디로 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이다. 오순절 사건은 약칭 성령세례, 성령강림, 혹은 성령선물 등으로 불리며, 또한 성령에 의한 세례라는 뜻이 있는 동시에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어느 쪽을 택해도 큰 차이가 없으나 이 말의 요점은 신자가 성령에 의해서 영적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뜻이다”고 말했다.
핀녹은 성령세례의 용어에 대하여 특수한 용어가 아니라 융통성 있는 은유적 용어라고 했다. 즉 성령의 임함을 말하는 통칭적인 의미로 받아들여 때로는 성령 충만의 동의어로 볼 수 있으며 회심의 경우를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안영복 교수는 오순절 날에 각 사람위에 '성령이 임한 것'을 가리켜 '성령의 세례'라고 말함이 타당하다고 했고 박영선 목사는 "성령의 부어주심"이라고 표현하면서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와 성령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를 구분했다.
또한 우희영 목사(성실)는 "성령세례란 성령 속에 잠기며 성령 자신으로 말미암아 기름 붓듯, 혹은 물 붓듯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로이드 죤스는 "성령의 보증" 혹은 "성령의 인침"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했고 부루너(Fredick Bruner)는 세례 받는 것이 곧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며 성령의 세례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위스 개혁신학자 파디(Ren'e Pache)도 "성령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책에서 동일한 견해를 표현하였다. 칼빈 또한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동일시했다.
이러한 모든 견해는 대체로 두 가지 주장으로 분류 될 수 있다. 즉 오순절파와 웨슬리안 및 케직파의 견해와 개혁주의(칼빈주의)의 학설이다. 전자는 중생 후에 받는 이차적 경험으로서의 체험을 성령세례라 해석하며, 후자는 중생시에 받는 어떤 것으로서의 성령세례를 말한다. 이렇듯 성령세례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주의 깊게 고찰되지 않으면 그 실체를 분간하기 어렵다.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성령세례라는 말이 7회 나타났다(마3:11, 막1:8, 눅3:16, 요1:33, 행1:5, 11:16, 고전12:13). 여기에 인용된 성구들은 세례요한이 자신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하면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1:8)고 말한 예언적 내용이다. 그리고 행1:5의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 후에 승천하시기 전 사도와 같이 모인 무리에게 하신 예수님 자신의 예언이며 행11:16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쓴 것이고 고전12:31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었던 교훈에 포함되어 있다.
성령세례가 직접 언급된 복음서와 사도행전1:5을 살펴보면 성령세례는 예언과 약속의 성취로서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이다. 성령으로(ejn pneuvmati baptisqhvsesqe aJgivw/)세례요한에 의해 예언되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약속된(행1:5) 성령세례가 오순절 날에 성취된 것이다. 베드로는 구약을 인용하여 이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했다.
Sanders도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내린 성령의 은혜를 가르쳤던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문법적으로 약속된 세례의 태가 수동태(baptisqhvsesqe/세례를 받으리라/ 미래수동태)인 것은 성령세례가 받은 자의 행위의 결과가 아님을 의미하며, 예언과 약속의 성취임을 말해준다. 오순절 사건의 특성과 의의를 살펴보면,
첫째, 오순절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이는 전혀 없었던 성령이 강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은 오순절 이전에도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계셨고 사역하셨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인간을 위한 성령의 주된 사역이 시작됨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시대가 끝나고 성령의 주도적 사역이 시작됨을 알리는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은 역사성을 가진다. 렌스키도 마태복음 3:11절을 주해하면서 “오순절 전에는 성령이 없었고, 오순절 후에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순절 전에는 한 영혼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차이는 구속 사역이 실제로 완성되기 전에는 성령의 사역이 제한된 예비적이었으나, 그 후에 이르러 성령의 충만이 있었다는 차이다.” 렌스키 역시 오순절 사건이 성령의 주도적사역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입장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오순절 사건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것의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성령시대의 시작이다. 고든(Gordon) 또한 오순절 사건을 성령시대의 도태의 축으로 해석했다.
둘째로 오순절 사건은 구속사적인 사건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성역초기에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분이라고 말한 다음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3:17)고 말함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 주는 일이 어떤 일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사역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직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역사상에 구속 성취를 이루시고 그 구속을 받아들이는 알곡은 곳간에 모으고, 그 구속을 배척하는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요엘2:28-32을 인용하여 오순절 사건을 설명하면서 요엘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입장에 비추어 인용했다. 베드로는 요엘서의 '그 후에'를 '말세에'로 고쳤을 뿐만 아니라(행2:17) “저희가 예언을 할 것이요”(행2:18)를 첨가하여 인용하였다. 그 이유는 오순절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아울러 말세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의 오심과 자신의 죽음을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16:7-8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예수님의 생각의 방향은 자신이 죽음과 부활, 승천을 거쳐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에 있음을 본다. 예수님 자신이 죽으신 후 부활해야만 보혜사가 오실 것을 명백히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오순절 사건은 구속적 드라마의 한 부분으로 성취된 사건이며 다른 구속 사건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의 성육신, 수난, 죽음, 부활, 승천과 함께 고려되어져야 한다. 스타트(Stott)와 가핀(GaGaffin)도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의의를 구속사적인 면에서 이해하고 있다. 가핀은 오순절의 의의를 3가지 차원에서 조명하였는데, 기독론적 차원, 교회론적 차원, 그리고 경험적 차원이다. 기독론적 차원에서 볼 때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시는 자는 바로 성자이시다. 오순절은 약속의 성령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날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적이며 기능적이며 종말론적인 섭리사건이다. 십자가로 절정을 이룬 성자의 사역의 절정이었다.
세째, 오순절 사건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가시적 현상의 체험이다.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과 방언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먼저 상징적 의미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예언과 약속이 성취되었고 새로운 언약시대의 도래가 이루어졌다는 확증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가시적 현상이 나타날 수는 있겠으나 모든 경우와 간구에 의해 이러한 동일 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합당치 않다고 하겠다. 성령행전이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성령의 끊임없는 역사가 상존했던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에 방언을 비롯한 가시적 현상이 교회선교사역에 반복되었다는 제시가 없다. 오순절 사건의 가시적 현상들은 주의 깊게 언급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네째, 성령의 충만을 모든 믿는 자들이 받았고 특별한 능력이 임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되고 능력의 은사가 임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목격한 후 분명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님에 대한 간절한 사모와 전혀 기도에 힘쓴(행1:14)의지의 순종이 막 주도적 사역을 시작하시는 성령님을 그들 속에서 충만히 역사하시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역사했던 능력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예정과 인정하심에 의한 것이지만 성령 충만함으로 은사와 능력이 나타났다고 봄이 더욱 보편적이며 일괄성이 있다고 하겠다.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고린도서에 나타난 성령세례의 언어적 의미를 고찰 해보면 성령세례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먼저 세례(baptivzw)라는 말의 헬라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상태 또는 이전의 환경이나 상태와의 관계를 바꾸기 위해서 사람이나 사물을 그 외에 어떤 것과 결합 시켜 놓거나 새로운 환경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으로 정의되며 그 번역은 ‘-로 들여놓다. 또는 -로 끌어들이다’라고 K.S 위스트는 설명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의 31절에서 “성령으로”는 수단을 말하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또는 성령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의 영역에서의 세례를 뜻하며, 성령은 세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K.S 위스트는 말한다. 또한 “믿는 자를 예수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결합으로 이끄는 것이지 성령에 의한 세례가 능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결국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의 헬라어 의미는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와 생명적인 결합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삼으신 것을 의미 한다” 성령이 믿는 죄인을 주 예수께서 살아계신 머리가 되신 그 신비체에 들여놓거나 이끌어 들이는 것을 뜻한다. 렌스키와 칼빈도 요1:33과 행1:5을 주해하면서 세례라는 개념을 구속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이상근 박사 또한 성령의 세례는 위에서 오는 선물로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같이 살아 그의 몫이 되는 것이라 하여 성령세례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연합으로 해석했다. 또한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역사적이든 개인적이든 단회적 사건이다. 막1:18, 마3:11에서 “세례를 주실 것이리라”는 뜻이 단어 (밥티세이)는 미래능동태 3인칭 단수 동사로서 한번 이루어질 것이 예언되었기에 성령세례는 단회적이라 할 수 있다. 요 1:33의 "세례를 주는" 단어 (밥티죤) 역시 현재 분사 능동태 주격 남성 단수 동사로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단회적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고전12:3절도 마찬가지로 그 동사는 과거의 행동을 가리키는 과거 시제이며 단 한번만의 행동을 가리키는 부정과거이다. 이와 같이 성령세례에 관한 주석가들의 해석과 언어적인 의미를 고찰해 보았을 때 성령세례는 죄 씻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표식으로서의 역할과 생명이 임하는 단일성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이상의 고찰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성령세례는 어떤 능력이나 은사의 체험이 중심이 아닌 역사적 구속사적인 사건이요 예수그리스도의 몸과의 결합이며 단회적 사건으로 성령 충만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성도가 성령의 은사는 마땅히 사모해야 하겠지만 성령세례를 사모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1장에서 7장까지는 성령님의 오심에 대한 예언입니다. 8장에서 10장까지는 사마리아와 유대전도를 주도하시는 성령님을 볼 수 있습니다. 13장 2절과 4절은 땅끝 전도의 시작을 주도하신 성령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6장6절에서 19장 20까지는 유럽전도의 시작을 주도하십니다. 20장에서 27장까지는 예루살렘으로 경유하여 로마로 가는 것을 주도하셨습니다.
1 한규상, “사도행전을 엮는 몇 가지 주제들”『사도행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2 신약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