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71)
교회소개 (1)
교회약도 (1)
후원계좌 (1)
대요리문답1 (2)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4)
소요리문답 (1)
좋은글들모음 (48)
설교자료 (8)
연관 블로그 (2)
성경의 공인 (1)
홍수까지의 연표 (1)
이스라엘 분열사 (1)
10대 박해 (1)
성경숫자의 상징 (1)
-------------------- (0)
창세기새벽강해 (142)
출애굽기 새벽강해 (262)
마태복음 새벽강해 (267)
사도행전 새벽강해 (366)
로마서새벽기도 (216)
빌립보서 (0)
- 에베소교회 (1)
- 서머나교회 (1)
- 버가모교회 (1)
- 두아디라교회 (1)
- 사데교회 (0)
- 빌라델비아교회 (0)
- 라오디게아교회 (1)
성경 개관 (0)
- 에스라, 느헤미야 (1)
- 학개 개관 (1)
- 스가랴 개관 (1)
- 사도행전 (1)
- 고린도전서 (2)
- 고린도후서 (2)
- 빌레몬서 (1)
- 야고보서 (1)
기도 (1)
성경 각 권의 주제 (1)
예배순서 (4)
예화 (2)
찬양 (0)
- 온전히 (1)
- 창세기 (4)
- 출애굽기 (1)
- 레위기 (2)
- 민수기 (1)
- 신명기 (1)
- 여호수아 (1)
- 사사기 (1)
- 룻기 (1)
- 사무엘상 (1)
- 사무엘하 (1)
- 열왕기상 (1)
- 열왕기하 (1)
- 역대상 (1)
- 역대하 (1)
- 에스라 (1)
- 느헤미야 (2)
- 에스더 (1)
- 욥기 (3)
- 시편 (1)
- 잠언 (1)
- 전도서 (1)
- 아가 (1)
- 이사야 (2)
- 예레미야 (1)
- 예레미야애가 (1)
에스겔 (1)
- 다니엘 (1)
- 호세아 (1)
- 요엘 (1)
- 아모스 (1)
- 오바댜 (1)
- 요나 (1)
- 미가 (1)
- 나훔 (1)
- 하박국 (3)
- 스바냐 (1)
- 학개 (2)
- 스가랴 (1)
- 말라기 (1)
- 마태복음 (3)
- 마가복음 (6)
- 누가복음 (1)
- 요한복음 (3)
- 사도행전2 (2)
- 로마서 (1)
고린도전서 (0)
고린도후서 (0)
- 갈라디아서 (1)
에베소서 (0)
빌립보서2 (0)
골로새서 (0)
데살로니가전서 (0)
데살로니가후서 (0)
디모데전서 (1)
디모데후서 (0)
디도서 (0)
빌레몬서 (0)
히브리서 (0)
야고보서 (0)
베드로전서 (0)
베드로후서 (0)
요한일서 (0)
- 요한이서 (1)
- 요한삼서 (1)
- 유다서 (1)
- 요한계시록 (1)
붓글씨 (9)
수채화 (1)
공지사항 (0)
- 게시판 (29)
철학.인문학 (7)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24.05.19
    말의 힘
  2. 2024.04.27
    기독교
  3. 2024.01.07
    우리의 기도는
  4. 2023.12.21
    콘스탄틴 황제의 세례에 대하여 1
  5. 2023.11.14
    히브리인의 달력 체계
  6. 2023.09.17
    구원에 관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7. 2023.09.03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 1
  8. 2023.08.22
    레위기를 위한 책

총에 맞은 상처는 치료할 수 있어도 말에 입은 상처는 고칠 수 없다.

                               페르시아 격언

'좋은글들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0) 2024.04.27
우리의 기도는  (0) 2024.01.07
구원에 관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0) 2023.09.17
하나님의 표상이신 그리스도  (0) 2023.04.02
신화  (0) 2023.03.18
And

기독교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섭을 이룬다.

 

세종시 베어트리 파크

정원에 피어있는 클레마티스

'좋은글들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의 힘  (0) 2024.05.19
우리의 기도는  (0) 2024.01.07
구원에 관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0) 2023.09.17
하나님의 표상이신 그리스도  (0) 2023.04.02
신화  (0) 2023.03.18
And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가 얼마나 우아하고, 얼마나 균형이 잡혔으며, 얼마나 내용이 다양해야 하는지를 조금도 헤아리지 않으신다. 또 당신의 기도가 얼마나 감미로운 목소리로 진행되고, 얼마나 논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지도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가 얼마나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를 주목하신다.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공인되며 허용되고 기록되고 또 보상을 받는 기도란 없다. 다만 진실하고 온전한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가 있을 뿐이다. 진정한 어머니는 두 마음을 가진 자식을 낳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애통하는 심령을 사랑하신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분리된 마음을 혐오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머뭇머뭇하거나 둘로 나뉜 마음을 사랑하지 않으신다.

                                                                          Thomas Brooks

 

'좋은글들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의 힘  (0) 2024.05.19
기독교  (0) 2024.04.27
구원에 관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0) 2023.09.17
하나님의 표상이신 그리스도  (0) 2023.04.02
신화  (0) 2023.03.18
And

우리는 콘스탄틴 황제가 왜 죽을 때 세례를 받았는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구원을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하는 추측으로 죽을 때에야 세례를 받은 것을 두고 콘스탄틴황제를 많이 비판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궁금증은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으면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도 세례를 연기했기 때문입니다. 고백록 제1권 유아기와 소년기 제11장을 보면 세례의 연기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11장_ 세례를 연기함

(17) 내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영생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 영생이란 교만한 우리들에게 친히 내려오신 우리 주 하나님의 겸손을 통해서 약속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당신을 굳게 믿고 있었던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태어난 후 바로 십자가의 표시로 인 침을 받았고, 당신의 소금으로 간이 배어 있었습니다.

오, 주님, 내가 어렸을 때에 갑자기 배가 몹시 아파서 죽게 되었던 일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그때도 당신은 나를 지키시는 자였으니 내 어머니와 우리 모두의 어머니 되신 당신 교회의 경건에 감화되어 내가 얼마나 열렬한 믿음으로 내 주 하나님이신 당신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려고 열망했는지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내 육신의 어머니는 대단히 당황하며 당신을 믿는 경건의 마음으로 나의 영생을 낳아 주기 위해 또 산고를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여, 그리하여 내가 당신께 참회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의 성례로 깨끗이 씻겨지고, 구원받은 자들의 무리에 들도록 어머니는 열심히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병은 즉시 나았습니다. 이리하여 나의 죄 씻음은 늦어졌으니 그 이유는 내가 만일 더 오래 살면 더 더럽혀질 것이 불가피한 것이었고 또한 세례를 받은 후에 지은 죄는 더 크고 위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脚註/각주 고대교회는 세례를 받은 이후의 죄를 대단히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강경파는 세례 이후의 지은 죄는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고 믿었고, 온건파는 세례를 받은 후에 지은 죄는 두 번까지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믿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교인들은 세례를 의도적으로 죽을 때까지 연기하기도 했다. 그 예로서 기독교 황제였던 콘스탄틴은 337년 임종시에 유세비우스 감독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그때 나는 이미 믿는 자였고 아버지를 제외한 온 집안과 어머니가 다 믿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직 믿지 않았어도 내 안에 있는 어머니의 경건의 영향을 넘어뜨리거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신앙을 방해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어머니는 온 노력을 기울여 내가 그보다 당신을 나의 아버지로 삼을 것을 원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 당신은 어머니로 하여금 그녀의 남편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영적으로는 아버지보다 탁월하셨으나 계속 그에게 잘 순종하였습니다. 이렇게 순종하는 것이 실은 어머니가 당신께 순종하는 것이었으니 이것을 명하신 분이 당신이었기 때문입니다.

(18) 오, 나의 하나님, 내가 당신께 묻사오니 그때 내 세례가 무슨 목적으로 연기되었는지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때 고삐가 늦추어져 죄를 더 짓게 한 것이 참으로 나에게 좋은 것이 되었 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늦춰지지 않았어야만 했습니까? 그렇다면 왜 지금도 사방에서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그를 내버려두어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어라. 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다’ 라고 합니까? 그러나 육체의 건강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를 내버려두어라. 더 상처를 받게 내버려두어라. 그는 아직 치료되지 않았으니 말이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그때 만일 단번에 치료가 되고 계속 나와 내 친구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당신의 보호하에 안전하게 인도되어 왔다면 얼마나 더 좋았겠습니까? 진실로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에게 훨씬 더 좋을뻔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고 큰 유혹의 (바다의 파도가 유년기 후에 나에게 닥쳐왔습니까? 이것을 미리 본 어머니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이루어져야 할 무형의 진흙 덩어리와 같은 나를 그 파도에 맡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설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브리인의 달력 체계  (0) 2023.11.14
레위기를 위한 책  (0) 2023.08.22
회당  (1) 2023.01.07
에릭 리델 선교사  (0) 2022.12.17
회당  (0) 2022.08.13
And

 

 

'설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콘스탄틴 황제의 세례에 대하여  (1) 2023.12.21
레위기를 위한 책  (0) 2023.08.22
회당  (1) 2023.01.07
에릭 리델 선교사  (0) 2022.12.17
회당  (0) 2022.08.13
And

성부 하나님은 택하심을 통해 선택에 관계하십니다. 성자 하나님은 가르침을 통해 소명에 관계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인침을 통해 칭의에 관계하십니다. 이처럼 구원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사역입니다.

                                                 Thomas Adams

'좋은글들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0) 2024.04.27
우리의 기도는  (0) 2024.01.07
하나님의 표상이신 그리스도  (0) 2023.04.02
신화  (0) 2023.03.18
자기부인  (0) 2023.03.05
And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

요한복음1:9 2023.

 

 

배가 좌초되었다는 말을 Greece어로 ajporiva(21:25혼란한)라고 합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배가 좌초되면 순식간에 침몰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안전한 구원의 손길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 우리가 구원 얻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았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 구원이란 말이 우리 피부에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토스토예프스키는 1849년 그가 스물여덟살 때 사회주의 혁명단체에 가입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영하 50도나 되는 추운 겨울날 그는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토스토예프스키는 세 사람이 기둥에 묶이는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최후의 5분이 남아 있었습니다. 28년간을 살아왔지만 5분이 이처럼 귀하게 여겨지기는 처음이었습니다. 5분을 어떻게 쓸까? 형장에 같이 끌려온 사람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한마디씩 하는데 2분이면 됩니다. 오늘까지 살아온 삶을 정리해 보는데 2, 나머지 1분은 대지를 그리고 자연을 한번 둘러보는데 쓰자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곁에 묶여 있는 두 사람에게 최후의 인사를 하고 가족을 잠깐 생각하고 나니 벌써 2분이 지나버렸습니다. 이제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데, ‘3분 후에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찔해졌습니다. 28년간이란 세월을 한순간 한순간 아껴 쓰지 못한 것이 무척 후회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살 수만 있다면 순간마다 값있게 쓰련만 하고 생각했으나 가슴만 아파올 뿐이었습니다. 그 순간 장탄하는 금속성 소리가 철커덕하고 났고 이와 동시에 견딜수없는 죽음의 공포가 엄습 해 왔습니다. 내 생명이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하고 있을 때 드라마 같은 극적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 병사가 멀리서부터 흰 손수건을 흔들면서 황제의 특사령을 가지고 왔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곳에서 풀려나 시베리아에서 긴 유형 생활을 하다가 1859년에야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형의 순간에 느꼈던 시간의 고귀함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고 그 후에 영혼의 문제에 심취하여 그의 소설 속에는 언제나 신앙적 최후 승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시베리아 유배 생활에서 석방된 직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 신앙을 한 편지 속에서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구세주와 같이 그렇게도 아름답고 심오하며 동정심에 가득 차고 여성적이면서도 또 남성 다운 면까지 갖춘 완전한 분이라곤 없다. 정말 질투심마저 느끼는 그런 사랑을 품고 나는 말하거니와, 그와 같이 완전한 분은 절대로 없으며 또한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좀 더 얘기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어느 누구든 간에 나더러 그리스도는 진리의 실천자가 아니고, 실제에 있어서 진리인 그리스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증명까지 해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서슴지 않고 그 진리를 버리고 그리스도 편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의 인간을 상상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참 빛 to; fw'" to; ajlhqinovn이라는 말은 거짓 빛과 대조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희미한 빛조차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사람들이 천사나 인간들을 빛이라고 부르고 숭배할까 봐 미리 차단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해달별들과 같은 빚들은 파생된 빛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시로 만든 빛들입니다. 후에는 이런 빛들이 필요 없습니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이 빛이 하나님 나라로부터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말씀이시고 구원이신 이 빛이 진짜 빛입니다. 가장 이상적이고, 순수한 빛입니다. 이 빛의 광채에 비하면 기타의 모든 빛은 희미한 빛도 되지 않습니다. 빛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빛을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큰 혜택을 주십니다.

그런데 알량한 인간들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이 빛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면서 빛이 아닌 것들을 빛이라고 우깁니다. 그래서 빛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요한복음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사도요한은 예수님 오시기 전 이 세상을 어둠/skotiva/으로 표현했습니. 이 세상이 캄캄한 암흑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짓들을 보세요. 심히 오염된 물을 바다에 방류하는 것,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을 전쟁에 몰아넣는 것, 자신들의 자식을 위해서 타인은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 그로 인해서 많은 사건 사고가 그치지 않는 것, 온통 어둠뿐입니다. 이 세상은 어둠에 있으며, 세상 자체가 어두움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빛에 저항하지도 못합니다. 이 어둠을 위해서 빛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빛으로 성육신해서 온 세상을 비춥니다.

 

세상이 어둡다는 것은 빛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곧 사람마다 빛이 필요한데, 예수그리스도가 없으면 빛이 없는 것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칩니다. 배는 이미 모든 기능이 고장 났습니다. 이제 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소망 없는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세상이 이와같습니다. 그래서 각 사람마다 비취는 참빛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을 swthriva/soterîa쏘테리아라고 합니다. swthriva는 고전 헬라어에서 구출이나 보존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집에 없을 때나 여행 후에 자기 가정이나 모국에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을 soterîa라 했습니다. “안전의 보증soterîa라 했습니다. 위험에 대한 안전swthriva라 했습니다. 파피루스에서 soterîa의 의미는 신체적인 건강이었습니다. 예로 가족의 한 사람이 집에 편지를 쓸 때 여러분의 soterîa에 대하여 편지를 주십시오”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 주세요라고 할 때 soterîa를 사용했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 soterîa일반적인 안전과 보장을 의미했습니다. 잠언11:14에서 조언자가 많으면 soterîa/평안가 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28:21에서 야곱은 만일 soterîa/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계약을 했습니다. 창세기44:17에서 요셉은 잔이 발견되지 않는 자는soterîa/평안히로 아버지께 올라갈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 soterîa일반적인 괴로움에서 구출을 의미했습니다. 시편3:2절을 보면 조롱하는 자가 시편기자에게 말합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soterîa/구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편42:11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시편기자를 후원하는 soterîa/도우시는이십니다. 고라자손은 하나님께 soterîa/구원를 베푸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망하는 자는 그의 soterîa/구원를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라 했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soterîa는 특히 적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사사기15:18에서는 블레셋으로부터의 soterîa/구원을, 사무엘상11:913을 보면 암몬으로부터의 soterîa/구원을, 열왕기하13:5에서는 아람으로부터의 soterîa/구원을. 역대하12:7에서는 애굽으로부터의 soterîa/구원을. 역대하20:17에서는 모압으로부터의 soterîa/구출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통하여 그 적으로부터의 하나님의 soterîa/구원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 Dramaticsoterîa홍해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습니다. 출애굽기14:13에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soterîa/구원를 보라고 모세는 말했습니다. 모든 구원은 주님의 soterîa/구원였지만, 홍해에서의 soterîa/구원는 특별히 뛰어난 soterîa였습니다. 거기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손이 그의 탁월성과 능력에서 보여졌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 종종 soterîa종말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장차 오는 새로운 시대에서만 그 완전한 개화와 영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느 세상에서도 영원한 구원입니다(45:17,52:10,3:23).

일관적으로 이 soterîa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soterîa/도움은 헛되다고 시편 60:1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soterîa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이 무력할 때, 하나님의 soterîa/능력는 주어집니다. 사람의 한계는 언제나 하나님의 기회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soterîa란 말은 감사를 노래하는 승리에 찬 서정적인 귀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모세의 노래에서(15:2), 사울의 손에서 구출된 후 다윗의 노래에서(삼 하22:3), 아들을 얻은 것을 알았을 때 한나의 노래에서(삼상2:1)에서 soterîa가 나타납니다. 구원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큰 기쁨으로 찬송하게 합니다.

 

신약성경 기록자들이 soterîa를 사용했을 때는 이 풍성한 기업에 들어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soterîa 역사나 개인적인 생활의 위기에서 구원과 보존, 섭리하는 능력을 나타내며, 또한 이 세상에서 끝나지 않는 배려나 구원으로 감싸진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으로 찬송케 하는 배려를 나타내기 때문이었습니다.

soterîa하나님의 의도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사람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화해되어야 하는 진노의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릅니다. 또한 그것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어떻게 진노에서 자비로 변해졌는가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릅니다. 신약성서에서 soterîa/구원의 주도권은 모두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노가 아닌 soterîa/구원을 얻도록 정하셨습니다(살전 5:9).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사람을 soterîa/구원에로 선택하셨습니다(살후2:13).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soterîa/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것은 soterîa를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이와같이 soterîa는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에 계시록의 송영에서도 구원은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7:10,19:1). 우리를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3:17). soterîa의 원동력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이론이 아닙니다. 구원은 실제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유명을 달리했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약 100년의 인생이란 굉장히 중요한 삶입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최고로 우선해서 하나님 나라에 자신이 등록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만일에 등록되지 않았다면 빨리 등록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soterîa/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무한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monitor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반드시 받습니다. 아담이 우리에게 상속한 죄는 죽음입니다. 아담이 우리에게 준 것은 죄의 확장이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5:12). 결과는 사망이었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죽음은 죄의 책임을 묻는 행동의 결과입니다. 사망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습니다(5:12 5:17). 죽음은 인정이 없습니다. 죽음은 사정을 보지 않습니다. 죽음은 무정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죽음은 무자비한 괴물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죽음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이 죽음에서 우리가 탈출해야 합니다.

 

죄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줍니까? 세계는 온통 IAEA 나쁜 놈들, 일본 나쁜 놈들, 일본의 편을 드는 미국도 나쁜 놈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쿄전력이 2011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원자로 1, 2, 3, 4호기의 냉각기능이 상실되어 노심이 용해되면서 방사능이 누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접근을 하지 못합니다. 냉각기능이 상실되어 노심이 용해되었다는 것은 원자로를 식히기 위해 오염된 134t의 오염수를 2100년까지 바다에 방류한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수백톤의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는데 2100년후까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짓을 합니까? 돈 때문입니다. 오염수를 땅을 파 묻어야 하는데 돈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에 방류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이에 적극 협조했는데, 1명이 2주에 한 번 정도 검사하는데 서 있을 뿐입니다. 얼마나 나쁜 사람들입니까? 이에 중국에서는 일본의 수산물을 전면 수입금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는 오염수라고 하지 말고 일본에서 쓰는 처리수라고 불러야 한다고 억지를 쓰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오염수를 처리수라고 씁니다. 미국과 유럽도 처리수라고 씁니다. 혹 어떤 언론은 오염처리수라고 씁니다. 중국은 핵오염수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도 오염수라고 하지 말고 핵오염수라고 불러야 합니다. 방류후 삼중수소가 검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가 검증하고 있습니까? 도쿄전력에서 검증하고 있습니다. 도둑이 도둑을 잡겠다고 하는데 전 세계가 이에 거의 협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검증을 하면서 안전하다고 하면서 마스크를 쓰고 방독마시크를 씁니까?

 

죄는 이토록 사람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칩니다. 이 죄들은 영원히 죽을 죄들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언제? 지금 구원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soterîa를 받아야 합니다. 이에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어떤 핑계도 없습니다. 이 결정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 육신이 죽은 후에는 어떤 도옴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구원받아야 하고, 지금 결정 해야합니다. 미적미적하다가는 큰 일을 당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가족이 큰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을 뻔했으나 못받은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를 지을 때 도운 사람들입니다. 방주를 120년이나 걸쳐서 지었기 때문에 구경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품삯을 받고 일하러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방주에 들어가 보았을지는 모르나 방주에 남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소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불가항력으로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널리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멸망당했습니다.

 

Closing 구원받는다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역은 힘든 사역이었습니다. 또 우리 안에서 은혜로 역사하시고, 우리가 타락과 유혹과 혼란의 길을 가지 않도록 이끄시는 성령님의 사역도 어려운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주라 하셨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가 결단을 해야 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결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십니다.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례요한 자신에 대한 증언  (0) 2022.03.02
예수님의 신분  (0) 2011.08.25
And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5583

 

레위기가 불편한 현대 독자를 위한 해설서

[탐독의 시간] 메리 더글라스 <문학으로 읽는 레위기>(시대가치)

www.newsnjoy.or.kr

 

'설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콘스탄틴 황제의 세례에 대하여  (1) 2023.12.21
히브리인의 달력 체계  (0) 2023.11.14
회당  (1) 2023.01.07
에릭 리델 선교사  (0) 2022.12.17
회당  (0) 2022.08.13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