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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 재앙⑧(출애굽기 10:12-20)
모세의 손을 애굽의 땅에 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메뚜기가 올라와서 우박에 상하지 않은 밭의 채소를 먹게 하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자 동풍이 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풍을 하루 밤 하루 낮을 불게 하셨습니다. 이 동풍이 재앙을 몰고 왔습니다. 메뚜기를 불러들이기 전에 동풍이 온 낮과 온 밤에 불었던 사실은 그 메뚜기들이 아주 먼 곳으로부터 온 것임을 시사합니다. 애굽인들에게는 여호와의 권능이 애굽의 경계를 멀리 넘어서까지 미치고 있으며, 그가 온 땅을 지배하고 있음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더구나 이 재앙은 애굽의 온 땅에 퍼졌습니다. 이 심판은 전무후무한 것이었습니다(14절). 메뚜기 재앙이 내리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득죄했다고 고백을 합니다. 다급한 바로였습니다. 바로는 메뚜기재앙을 보며 죽음이라 하였습니다. 푸른 것이라고는 모두 먹어치웠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급하니까 “너희 하나님께 구하고 나의 죄를 용서하라”고 하였지만 급한 불이 꺼지니까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생의 패역함과 고집의 정상을 달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강렬한 서풍을 일으켜서 홍해에 메뚜기를 몰아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측량할 수 없고 영육적입니다. 무한하고 영적인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보편적인 미혹을 제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타락하지 않도록 지키시기 위해 그의 본질에 관하여 완전히 보여주시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무한성과 신령성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어리석은 상상을 제거하시고 인간 정신의 교만을 막으십니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리의 감각으로 감히 그를 측량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고, 또 그의 신령성은 그에 관하여 우리가 세상적으로 또는 육적으로 상상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은 자주 하늘을 자신의 거처로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실로 그는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지만, 땅 자체를 가득 채우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우둔한 정신이 세상에 깊이 빠져 있음을 보시고 우리의 태만과 무기력을 깨우시기 위해 우리를 이 세상 위로 들어 올리십니다.
바로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악함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무능한 사람의 대결은 뻔한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발악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에 더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을 전제할 때 우리의 신앙은 업그레이드됩니다.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하나님의 실존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시니까.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바로를 징계하셨습니다.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사람들의 목전에서.
메뚜기 재앙⑧(출애굽기10:1-11)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모세와 아론은 바로와 그 신하의 마음이 완강한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징을 보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바로와 그 신하들은 자신의 완강함으로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뿐이었습니다. 바로의 완고한 마음을 방치하시면서 철저하게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이스라엘 자손들의 귀에 전하게 하여 자신이 여호와임을 알리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바로가 언제까지 여호와 앞에서 겸비치 않겠느냐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사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완고할 때마다 징계의 수위를 높였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백성도 보고, 애굽의 백성들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겸비하다 “아나”는 “~ 하기에 바쁘다, 괴롭히다, 천하게 하다”라는 뜻이며 원래 의미는 주로 피엘형에서 “억지로 ··· 시키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요구하시는 사항은 바로의 겸비함입니다. 바로가 겸비하면 바로의 국민이 평안합니다. 이스라엘이 평안합니다. 본인자신도 평안합니다. 이 요구사항은 권장사항이 아닙니다. 의무사항입니다. 본인이 미리 알아서 하지 않으면 강제사항이 됩니다.
겸비의 강제사항은 메뚜기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예고는 메뚜기가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 하였습니다. 우박에 남은 식물을 모조리 갉아먹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바로의 신하들이 왕에게 모세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이 망한 줄을 모르냐고 힐문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여호와를 섬기러 갈자가 누구냐고 명단을 제출하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전체와 우양이 함께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바로는 그들의 요구를 一言之下에 거절하였습니다. 남자들만 가라는 바로의 대답이었습니다. 장정들만 가라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바로가 여호와를 조롱하는 말을 합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면 여호와와 너희가 함께 할 것이라”즉 누구 좋으라고 너희를 보내느냐는 것입니다. 바로는 인간인 주제에 하나님을 능욕하였습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역사이래로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긴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나라를 건드린 나라들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威容을 자랑하던 나라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별로 볼품없는 나라들은 살아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식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에 국가의 흥망이 달려있습니다. 바로는 이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요구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엉뚱한 일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에게 순종함입니다. 그의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내리십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언16:3
우박의 재앙⑦(출애굽기9:27-35)
바로는 숨통이 막히면 살길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숨이 트이면 즉시 원상으로 돌아가는 심리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망할 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 살려서 막판까지 갑니다. 지금까지의 이적을 보면 충분히 하나님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함에도 즉시 돌아섰습니다. 불과 우박이 떨어지니까 공포스러워 모세와 아론을 불렀던 그는, 그 요인이 없어지자 즉시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섰습니다. 27절을 보면 바로가 짐짓 회개한 것 같이 보입니다.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이렇게 말했지만 바로의 그 마음이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즉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7:3을 보면 가룟유다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은 30을 도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뉘우쳤다” 할 때 헬라사람들은 metamevllomai(메타멜로마이/마음을 바꾸다)와 metanoevw(메타노에오)를 사용하여 대조하였습니다. metamevllomai는 단순하게 감정적인 변화만을 나타날 때 사용하였습니다.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변화입니다. 가롯유다의 뉘우침이 그랬습니다. 바로가 이러한 뉘우침입니다. 일시적인 뉘우침이었습니다. 따라서 고통과 감정의 변화가 평안해지면 원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뉘우침은 신앙에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聖化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뉘우침은 오히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외엔 없습니다.
이에 비해서 “회개하다”metanoevw는 선택의 변화입니다. 역전입니다. 내가 가고 있는 지금까지의 길이 틀렸습니다. 그런데 사는 길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지금까지의 길이 잘못되었음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길을 선택합니다. 똑같이 죄를 지었음에도 베드로가 가룟 유다와 다른 점이 선택의 변화입니다. 베드로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예수님을 따릅니다. 선택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뉘우치기는 했지만 스스로 목을 매어서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합니다. 요샛말로 사무라이 같은 정신입니다. 남자다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비굴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베드로는 칭찬하고 가룟 유다는 영원히 저주받은 삶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같은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임기응변으로 하는 행위는 회개가 아닙니다. 오직 살려고 연기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회개를 하여야하지만 진심으로 회개를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회개가 상달이 되지 않습니다. 많은 회개라고 하는 것들이 바로의 회개와 같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실로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회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를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진실 된 회개는 말뿐이지 않습니다. 행동이 뒤따릅니다. 바로는 재앙이 거두어지자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2:1-7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약속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평생 지키지 못할 약속이 더 많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다릅니다. 그 약속은 정확하게 지켜졌습니다. 지켜진 하나님의 약속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되어 있는 그 약속은 쉬운 말로 덧붙여 있습니다. 그 약속들은 스파이가 쓰는 것같이 암호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쉬운 말로 가장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절하신 분이십니다. 친절하신 하나님은 자기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을 잊어버리거나 고의로 잊으려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수다스럽게 자신의 약속을 떠들어대지 않습니다.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두워서 빛을 밝혀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이해하고 곧바로 찾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찾기 쉽게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약속 한 가지라도 복잡하거나 제한된 방법으로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모든 것을 믿기가 어렵거나 더디어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장 강하고 간결한 말을 이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부요하십니다. 그는 불필요하게 약속을 남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불필요한 꾸밈으로 그의 약속을 위장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간단하고 명백한 말로 약속을 이행하셨고 지금도 이행하고 계십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오늘 첫 번째로, 우리의 약속을 지키시는
I. 세상의 임금을 사용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1,2).
사람들은 여간해서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약속이란 단어를 처음에 누가 사용했는지 몰라도 그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약속을 하자마자 우리는 그 약속의 속박을 당합니다. 그래서 약속을 하게 되면 속박을 받고, 속박으로 인해서 그 약속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약속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空約에 그치고 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어기고 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약속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약속을 잘 지킨다고 하는 사람도 반드시 약속은 어기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이 때에”(ejn tai'" hJmevrai" ejkeivnai")라고 예수님이 오실 당시의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여러 가지의 상황을 보신 다음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정치적인 입장, 종교적인 입장, 문화적인 입장, 그리고 시기적인 입장을 고려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가장 정확한 시기를 예비하시고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당시 로마의 시대적 배경은 씨저의 양아들이었던 가이사 아구스도(옥타비아누스)가 황제였습니다. 이때 로마가 가장 번성했습니다. 북쪽으로는 알프스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까지 세력을 넓혔습니다. 지중해를 최대한 이용하여 해양중심 통치를 하였습니다. 잘 훈련된 군대를 이용하여 전 유럽을 통치하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행정력이 탁월했습니다. 그 행정력으로 식민지를 잡음 없이 다스렸습니다. 전쟁을 위한 도로망을 거미줄처럼 만들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위해서 곳곳에 어마어마한 건축을 했습니다. 로마제국 내에 모든 도량형을 통일하였습니다. 언어는 헬라어를 썼습니다. 온 로마제국이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사상이 유입되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태의 문화가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되기 좋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우상숭배와 음란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러한 곳에 유대인들이 들어가 깨끗한 기독교 사상이 크게 어필되었습니다. 황제숭배 사상에 대한 반발이 기독교로 흡수된 때였습니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요한은 빈들에서 자라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로마제국에 아우구스투스의 국세조사령이 떨어졌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행정가답게 자기에게 속한 나라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고, 로마의 전 지역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이때가 유대왕 헤롯 때입니다. 이 국세조사는 정확한 인구조사로 세금 등 여러 가지를 참고코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우구스투스의 호적령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의 권력자는 이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다스리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어떻게 예언의 말씀을 이루어 가는지를 유의해야 합니다. 미국은 911 테러 사건으로 인하여 신앙부흥운동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족 중에 어려운 일이 일어남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종재해 등으로 인해서도 하나님께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라고 누가는 기록하였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화학자이고 고고학자이며 성경학자인 램지 경(Sir William Ramsay)은 1923년 터어키 앙카라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시에 세 가지의 무거운 세금이 징수되었다고 새겨진 로마 시대의 비문을 발견했습니다. 그 비문에 특별세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특별세는 유대인들의 심한 원망을 샀습니다. 그러나 수리아의 총독인 구레뇨는 권한 밖이었습니다. 로마황제만이 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사절단을 로마로 파송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너무나 멀었습니다. 그래서 항의는 실패를 하고 유대인들은 호적을 입적시키고 과세하는 것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들과 국민들 간에 심한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유대 땅에 호적조사령이 내렸는데 그 때가 정확히 마리아가 주님을 낳기 위한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점점 그 약속을 이루시는 범위를 좁히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별 수단을 다 쓴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도구밖에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이 세상을 점점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의 환경에 굴복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환경이 하나님의 권능보다 더 크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짓누르려는 환경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정책을 위해서 인구조사를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좁히면 우리를 위하신 하나님의 배려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노심초사 애쓰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도로를 넓히는 것도 우리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은행도 우리를 위해서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부자들이 왜 있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이유로 더 가까이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임금을 사용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II. 성경의 기록대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3-5).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주였습니다. 시리아의 관할 아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 안에서는 호적령으로 인해서 온 제국이 술렁거렸습니다. 더구나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속주에서는 더 술렁거렸습니다. 호적령은 인구조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구조사가 끝나는 대로 군역이라든지 공세를 더 늘리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호적령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유대의 열심당원이나 민족주의자들은 하루 빨리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적하러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고향에 호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로 가야 했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약혼녀인 마리아와 가만히 파혼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오늘 말 할까 내일 말할까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의 천사의 현몽으로 인하여 마리아를 데려 왔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다윗의 왕가를 이어 온 요셉은 호적령이 내렸을 때 갈릴리 나사렛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황제의 명으로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서 고향 유대로 가야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요셉 역시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홀몸이 아니고 임산부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마리아의 임신은 자랑할 임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싫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족속이었던 요셉은 갈릴리를 떠나 유대로 가서 호적을 해야 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가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출생지였습니다. 또한 이곳은 다윗의 후손인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고향이었습니다. 이곳은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로 작정된 곳이었습니다(미5:2,사9:6). 요셉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의 매사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과 이름이 같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 있습니다. 이 요셉이 형들의 시기를 받고서 미디안의 장사에게 팔렸을 때 요셉의 앞일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더구나 형들은 동생 앞에 무릎을 꿇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요셉의 꿈대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정확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붙드시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의도한 목적들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인도하시고 지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는 누구도 훼방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해나가십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우리에게서 인도하시는지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베들레헴은 베트(tyIB'/bayith/house)와 레헴(!j,l/lechem/bread)이 결합된 것으로서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은 유대산지의 한 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에브랏, 에브라다, 유다 베들레헴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베들레헴은 유다지파의 중심지였습니다. 유명한 가문 곧 베레스의 후손들이 여기에 살았습니다. 사사시대에 이 가문에는 다윗의 조상 보아스와 아버지 이새가 속했던 다윗의 고향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전능자의 성막이 이곳에 있다고 예언했습니다(시편132:5-6). 메시야의 탄생지로 예언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가5:2)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떡집에서 생명의 떡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다윗의 고향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메시야의 탄생지에서 메시야로 나오신 것입니다. 이 모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은혜요 성령의 배려이십니다.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고대 유대의 결혼풍속은 3단계였습니다. 양가의 동의로 약혼이 성립되고 공적선언으로 정혼이 성립되었습니다. 정혼은 결혼과 동등한 법적효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파혼하려면 정식 파혼증서나 이혼증서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식을 할 때까지는 동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약혼자가 정절을 범하면 간음으로 취급되며 죽음의 형벌에 해당했습니다. 마리아는 정혼단계에서 임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도 어쩔 수 없는 임신이었습니다. 그 임신이 성령으로 되었기 때문에 마리아에게는 전혀 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연적인 출생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출생입니다. 즉 동정녀(童貞女)탄생입니다. 이 초자연적인 탄생은 이미 예고되었습니다. 죄인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죄 없는 몸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여인의 후손 즉 여인의 단독출생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인의 후손입니다. 이 세상의 여인의 후손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의 이름이 예고되었습니다(마1:21).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그의 이름까지 지어 보내셨습니다(마1:21). 이름에는 오시는 동기와 목적과 사역이 담겨져 있습니다(마1:21). 예수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는 분은 예수 밖에 없습니다(마1:21). 예수는 그 이름대로 모든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엡1:7). 예수는 구원을 베풀어주실 유일한 분이었습니다(행4:12).
예수님의 사명이 예고되었습니다.(마1:21) “백성을 구원할 자라”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막혔던 담을 허시고 화평을 이루신 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속자이셨습니다. 그가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구원시키러 오셨습니다(마9:13). 호적을 마친 요셉은 다시 갈릴리나사렛으로 가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때에는 마리아가 잉태됨으로 해서 여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요셉은 천사가 현몽 하였으므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여행은 멈추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가난한 영혼들에게 일반적인 은혜를 베푸십니다. 일반적인 은혜란 이세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은혜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은혜와 특별한 은혜는 사람들이 와서 받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은혜와 구원을 받으라고 하는데 사람들의 죄가 그것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받고 절대로 지옥에 들어가지 말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요셉과 마리아가 그 고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임금을 사용해서 예수님을 보내실 때 성경의 기록대로 보내실 뿐 아니라 오늘 세 번째로)
III. 세상을 초월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6,7).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1944년 6월 6일에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하였습니다. 이 작전으로 프랑스가 나치 치하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종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의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와 그의 수뇌부들이 6월5일 밤에 술을 잔뜩 마셨습니다. 앞으로 전 세계가 자기의 손에 있을 줄 알았던 그들은 술에 잔뜩 취했습니다. 그들은 내일 아침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에 잠을 청하면서 내일 아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깨우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의 앞에 어마어마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는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연합국은 무사히 상륙작전을 감행하였습니다. 이것이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입니다.
마리아도 예수님 오실 시간을 알지 못했습니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도 예수님의 오실 때를 몰랐습니다. 로마의 세금 징수원도 헤롯도 주님께서 오실 시간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사건에 관한 사명을 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건의 배후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제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길로 바퀴를 잡으시고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움직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로 그 날로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아와 요셉이 때마침 베들레헴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선택된 메시야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통해 예정된 장소 즉 가장 적절한 곳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게 했습니다. 이것은 예언대로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으면 성경이 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꼭 유대 땅 베들레헴이어야 했습니다. 천상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움직임을 주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반응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지시하신 것은 요셉과 마리아를 초자연적으로 보호하라는 명령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상식선에서 보호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베들레헴에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찬 것입니다. 인간들의 죄로 보아서는 하루 빨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 했지만 하나님의 때는 우리와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를 준비하셨습니다. 동시대에 요셉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구스도의 국세조사를 준비하셨습니다. 구레뇨를 수리아의 총독으로 준비하셨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 있는 요셉의 부부를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마리아가 해산 할 날이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날이 찼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날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때를 아십니다. 그리고 그 날을 정하십니다.
7절에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임신부인 마리아를 위하여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관주인이 적당한 숙소를 찾는 마리아를 만났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쉴만한 곳이 전혀 없었습니다. 호적하라는 칙령에 의하여 여행자들은 베들레헴에 입추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자가용인 나귀와 말들이 간선도로를 꽉 메웠습니다. 여관에는 발 들여놓을 곳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태어나실 분께서 존귀하신 분이심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대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위해 예비 된 방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과 마리아는 해산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준비가 다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인간의 때를 초월하십니다.
우리나라 임산부들은 굉장한 대우를 받습니다. 그래서 분만이나 산후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통이 오기가 무섭게 병원으로 달려가서 출산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00년 전의 베들레헴의 마리아는 이 땅을 위해서 유일하신 구원자를 임신하고 진통이 왔으나 그들을 맞아 줄 방 한 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마굿간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귀빈 대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굿간에 태어나셨다고 해서 유대전체를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신분에 맞게 오시려면 아우구스투스의 궁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심을 전 세계에 알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 짐승들이 사는 곳에서 조용히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귀하신 사랑입니다.
오늘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지구를 움직이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주인입니까? 전 세계의 부를 거머쥐고 있는 부자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많은 대중의 인기를 가지고 있는 스타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전 세계의 언론의 중심에 있다 하더라도 주인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단연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죽음의 문을 생명의 문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은 추악한 죄인들을 고결한 사람들로 바꾸셨습니다.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온 우주의 건축자입니다. 동시에 설계자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예수님 오신 날을 맞습니다. 지구상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 오신 날을 맞게 됩니다. 사하라 사막의 대상들에게도 북극의 에스키모인에게도 하늘 아래 첫 동네인 히말라야인에게도 예수님 오신 날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크리스마스는 보통의 휴일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연말에 끼어있는 휴일로서 선물을 주고받고 친구들이나 가족들을 만나서 즐기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맞는 예수님 오신 날은 남다르게 맞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지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예수님과 날마다 같이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와 생명수가 되시어 먹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의로움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의원이 되어 우리를 고쳐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평화를 주려고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예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우박의 재앙⑦(출애굽기9:22-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라”하셨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우박이 애굽의 전국에 내리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雷聲을 보내셨습니다. 우박을 내리셨습니다.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우박을 애굽의 전국에 내리게 하셨습니다. 애굽은 식물들과 나무들을 꺾어놓았던 우박과 함께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덩이들 때문에 공포심이 가중되었습니다. 번개가 불공의 모양이 되어 불타는 횃불들처럼 내려왔습니다. 카일·델리취에 의하면 애굽의 남부와 중부에서는 뇌성이 흔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12월과 4월 사이에는 자주 나타납니다. 그리고 때때로 우박이 동반되지만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뇌성과 번개 그리고 우박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가축이 들에 있을 때인 1월부터 4월 사이에 나타났습니다(Hengstenberg Egypt and the Books of Moses). 하지만 이 재앙의 초자연적 성격은 그 재앙이 모세에 의해 예고되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고센 땅이 제외되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재앙들보다도 더욱 강한 인상을 바로에게 주었습니다. 무시무시하게 광폭했던 우박 폭풍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내 백성은 악하도다”(27절)라고 고백하므로 진실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단지 무서운 뇌성과 번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위엄으로 인해 야기된 공포의 결과였습니다. 그의 죄에 대한 진실 된 고백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사단과 귀신의 질서가 실재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죄 가운데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이 있습니다. 사단은 이 세상의 신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왕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입니다. 악의 顯示들 배후에는 마귀와 그의 하수인들이 있습니다. 바로를 조종하는 사단은 바로로 하여금 갈 때 까지 가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자꾸 자신의 마음을 완강케 하고 마음에 둑을 쌓습니다.
바로는 불순종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의 다스림을 받는 국민들만 엄청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자신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성화되는 길목에서 얼마든지 장애를 받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만이 복된 길입니다. 이 시대에도 바로 같은 인물이 많이 있습니다. 정치계에도, 경제계에도, 문화계에도 바로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따라서 발전이 없습니다. 국격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갑니다. 한없이 내려갑니다. 바로 같은 인물이 있는 곳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우박의 재앙⑦(출애굽기9:22-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라”하셨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우박이 애굽의 전국에 내리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雷聲을 보내셨습니다. 우박을 내리셨습니다.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우박을 애굽의 전국에 내리게 하셨습니다. 애굽은 식물들과 나무들을 꺾어놓았던 우박과 함께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덩이들 때문에 공포심이 가중되었습니다. 번개가 불공의 모양이 되어 불타는 횃불들처럼 내려왔습니다. 카일·델리취에 의하면 애굽의 남부와 중부에서는 뇌성이 흔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12월과 4월 사이에는 자주 나타납니다. 그리고 때때로 우박이 동반되지만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뇌성과 번개 그리고 우박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가축이 들에 있을 때인 1월부터 4월 사이에 나타났습니다(Hengstenberg Egypt and the Books of Moses). 하지만 이 재앙의 초자연적 성격은 그 재앙이 모세에 의해 예고되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고센 땅이 제외되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재앙들보다도 더욱 강한 인상을 바로에게 주었습니다. 무시무시하게 광폭했던 우박 폭풍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내 백성은 악하도다”(27절)라고 고백하므로 진실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단지 무서운 뇌성과 번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위엄으로 인해 야기된 공포의 결과였습니다. 그의 죄에 대한 진실 된 고백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사단과 귀신의 질서가 실재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죄 가운데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이 있습니다. 사단은 이 세상의 신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왕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입니다. 악의 顯示들 배후에는 마귀와 그의 하수인들이 있습니다. 바로를 조종하는 사단은 바로로 하여금 갈 때 까지 가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자꾸 자신의 마음을 완강케 하고 마음에 둑을 쌓습니다.
바로는 불순종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의 다스림을 받는 국민들만 엄청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자신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성화되는 길목에서 얼마든지 장애를 받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만이 복된 길입니다. 이 시대에도 바로 같은 인물이 많이 있습니다. 정치계에도, 경제계에도, 문화계에도 바로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따라서 발전이 없습니다. 국격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갑니다. 한없이 내려갑니다. 바로 같은 인물이 있는 곳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우박의 재앙⑦(출애굽기 9:13-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하셨습니다.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셨습니다(13절). 이번의 재앙은 바로의 마음에 네 신하와 온 백성에게 내려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 하셨습니다(14절). 여호와께서 온역으로 애굽을 쳤다하면 세상에서 애굽이 끊어졌을 것이나 바로를 세워서 살게 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온 천하에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16절). 네가 여전히 자고해서(스스로 높여서) 그들을 보내지 않으냐? 좋다. 그러면 내일 이맘 때 애굽에 중한 우박을 내리는데 애굽의 개국이래로 이러한 우박은 없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사람이나 생축은 들에 있으면 모두 죽을 것이니 반드시 집에 들이라 하셨습니다. 이에 바로의 신하 중에 그 말씀대로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말씀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17-21).
하나님께서 바로를 멸망시키지 않으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바로 자신이 여호와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27절, 10:16,17, 12:31). 또 하나는 여호와의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시 바로를 제거할 수 있지만,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에 대한 소식은 삽시간에 주변의 나라로 퍼졌습니다(15:14). 애굽 뿐만 아니라 중동의 모든 나라에 퍼졌습니다. 후에는 그리이스, 로마에까지 퍼졌습니다(카일·델리취).
“자고하고”란 “자신을 둑(댐)으로 세우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로는 자신의 마음을 둑으로 튼튼하게 막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내일 이맘때”입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신 것은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들에 사람이 있거나 짐승을 방치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얼마든지 재앙에서 피할 시간과 은혜는 충분히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짓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不敬입니다. 창조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은 불이익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의 자손을 볼모로 잡고 있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경고가 있습니다. 앞으로 이루어질 경고가 있습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경고가 있습니다. 바로의 어떤 신하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雨傘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