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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들(출애굽기 7:8-13)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로 앞에서 신(엘로힘)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1). 그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첫 번째 이적을 보여주었습니다(8-13). 이 이적은 재앙과는 관계없이 바로와 신하들에게 보이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표적은 재앙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재앙의 요점은 여호와의 사자들이 왕의 오만한 마음을 꺾고,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내보내어 그들의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 바로와 그의 나라에 가져다주기 위한 것입니다. 첫번째와 두 번째(피로 변한 나일강, 개구리)와 네번째와 다섯 번째(파리, 가축의 질병), 일곱번째와 여덟 번째 이적(불우박, 메뚜기)들은 모세가 미리 왕에게 선포했던 것들입니다. 하지만 세번째, 여섯번째, 아홉번째 이적(이, 독종, 3일간 흑암)들은 그와 같은 예고가 없이 나타났습니다. 또 첫번째, 네번째, 그리고 일곱번째 이적들은 바로에게 아침에 선포되었습니다. 첫번째와 네번째것은 나일강 강변에서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일곱번째의 경우에는 선포한 장소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우박). 우박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기에 어떤 특수한 지역과 연관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첫번째 재앙에서 흉내를 내보았던 애굽의 술객들이 세번째 재앙으로 인해 그들은 완전히 창피를 당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섯째재앙(독종)에 의해서 그들 자신이 화를 당하게 되어 모세 앞에 설 수가 없었습니다. 아홉번째 재앙 후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과 더불어 더 이상 협상을 계속하지 않았습니다. 열 번째 마지막 재앙은 모세가 바로를 떠나기 전에 그에게 선포했는데(11:4) 목적과 형식에 있어서 앞에 나왔던 아홉 가지의 재앙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재앙은 강퍅해진 왕에게 하나님 자신이 직접 내리실 심판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다 준 마지막 재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라는 점에는 다른 아홉 가지 재앙과 구별되었습니다. 마지막 재앙은 다른 모든 재앙들의 경우처럼 자연현상을 통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처음 세 재앙들은 온 땅을 뒤덮었습니다. 애굽인들에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임했었습니다. 네 번째 재앙부터 애굽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간의 구별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여섯 재앙은 오직 애굽인들만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세상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 보면 이 세상의 지배자들이 주관자 같습니다. 정치인들, 경제인들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주관자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관하십니다. 이것 모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가 매사를 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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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초전(前哨戰/뱀이 된 지팡이)(출애굽기7:8-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를 만나서 너희에게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네 지팡이를 아론에게 던져서 뱀이 되게 하라 하셨습니다(8,9절). 이에 말씀대로 바로 앞에 가서 아론이 모세의 지팡이를 바로와 신하앞에서 던졌더니 뱀이 되었습니다(10절). 그런데 바로도 애굽의 박사와 박수를 불렀습니다. 이들은 술객이었습니다. 그들의 술법(주문, 마법, 불꽃)으로 역시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지팡이가 그 뱀들을 삼켰습니다. 이러므로 바로의 마음이 돌아설 리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이적적 표적은 고대 애굽에서 프실리(Psylli)들 즉 마술사들에 의해 널리 행해지던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문으로 뱀을 길들이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은 이것을 비법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요술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실제로 바로 앞에서 행하였습니다. 왕에게 자신을 “엘로힘”(1절)으로, 즉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부여받은 것으로 나타내어야 했었습니다. 오늘날의 프실리(Psylli)들은 뱀을 나무로 만들거나, 뱀들을 뻣뻣해지게 만들거나 죽은 것처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익히고 있었습니다(Hengstenberg). 그러나 이교의 마귀적 능력이 연속적으로 몰려올 그 때에, 고대의 프실리(Psylli)들이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는 술객들을 통해서 애굽신들의 힘을 동원하여 히브리인들의 여호와의 힘에 대항하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모세의 지팡이가 그들의 뱀을 삼켰습니다. 따라서 애굽의 신들은 여호와에 의해서 압도되었습니다. 하지만 뱀의 이적도 바로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12:39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표적이란 어떠한 사람을 인정한다는 자격의 요구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표적을 보여봐라”하는 사람들의 요구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사람임의 요구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였을 때 바로는 모세의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그의 강퍅함이 이적에도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바위와 계란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바위가 계란에 떨어지나 계란에 바위가 떨어지나 계란만 파괴됩니다. 바로는 계란과 같습니다. 감히 하나님께 도전을 해보지만 결국 본인이 망하게 됩니다. 바로와 같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려면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자기종교의 고집으로 인해서 영접하지 않으면 본인만 손해를 보게 됩니다. 본인만 망하게 됩니다.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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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출애굽기7:1-7)
여호와께서 낙심하여 좌절하고 있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다”“네 형 아론은 네 代言者가 되었다” 따라서 모세는 바로에게 할 말을 아론에게 하면 되었습니다. 아론은 모세에게서 전달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단서를 붙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많은 이적을 애굽에 행하지만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져서 듣지 아니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애굽에 재앙을 더하므로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놓아줄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보고 여호와인줄 알리라는 말씀입니다. 비로소 모세와 아론이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바로에게 나아갈 때에 모세는 80세였고, 아론은 83세였습니다(1-7).
h[or]p'l] !yhila> *yTit'n] haer] /레에 네타티카 엘로힘 레파르오/전능자이신 “여호와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엘로힘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바로의 권세위에 모세를 놓는다는 말입니다. 아론은 바로에게 모세의 啓示들을 선포할 인물이기에 모세의 대언자로 불려졌습니다. 同時에 모세는 바로에게 신같았습니다. 모세는 바로를 지배할 수 있는 신적권세와 능력을 약속받았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이후부터 애굽의 바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아론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자로서 신이 되었습니다. 바로에게는 그 뜻을 실행하는 자로서 신이 되었습니다(C. F. Keil ·F. Delitzsch).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는데,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일이고 감사할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즉 우리의 하는 말에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면 반드시 권세가 있게 하십니다. 말씀이 사람에게 떨어지면 그 사람이 변하게 됩니다. 돌보다도 강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그 돌을 깨트려버립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은 불같습니다.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대장간의 망치) 같습니다(렘23:29).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고, 항상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일을 할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실제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반드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나타납니다. 모세의 召命은 호렙산에서 끝이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로소 이제 끝이 났습니다. 즉 우리 역시 때로는 소명의 상태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는 신앙의 가장 기초상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이 자라야 합니다. 새벽에 나와서 기도해야 합니다. 정한 예배를 빠짐없이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전진하는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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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한 인간의 모습(출애굽기6:28-3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라 hw:hy] ynIa(아니 아도나이)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너는 애굽왕 바로에게 다 말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모세에게 잔소리를 하시듯 말씀하십니다. “아니 아도나이”라고 자신을 수차례 반복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입이 둔한 자라고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과연 바로가 내 말을 들을지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26:6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우나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모세가 반복해서 하는 말은 ‘자신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러함은 모세자신의 눈으로 애굽의 바로왕과 자신을 비교한 것입니다. 눈으로 본 바 애굽 왕국의 웅장함과 바로가 가지고 있는 권세의 막강함을 분석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약한 자신이 바로 앞에서 당당하게 나아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다” “하라드”(출19:18)는 “전율하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칼형과 히필형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출애굽기19:18에서 물리적인 흔들림으로 시내산의 진동을 묘사하였습니다. 대부분의 用例들은 이례적인 상황 앞에서 느끼는 감정적인 흥분에서 나오는 인간의 떨림(두려움)을 나타냈습니다. 이삭은 야곱의 속임수를 눈치 채고는 떨었습니다(창27:33). 아도니야의 손님들은 솔로몬이 보좌에 앉았다는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아도니야와 함께한 손들이 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 길로 간지라”(왕상1:49). 즉 유다에 새 왕이 등극했는데 아도니야와 함께 하면 禍가 미칠 것으로 알고 “놀라”서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곧 믿음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바로보다 하나님이 위대하신데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마음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 두려움은 믿음으로 제거해야 합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두려움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즉 두려움의 대상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자에게 의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실상 우리는 일생을 두려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每事가 우리를 두렵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그때마다 맡김으로서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결국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나를 비교하면 두려울 뿐이고, 세상에 나갔을 때 오금을 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편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약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편에 있으면 우리는 세상의 희생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우리의 위상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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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아론의 족보(출애굽기6:14-27)
성경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출발하기 전 모세와 아론이 족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족보를 기록하는 목적은 언약관계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 족보는 출애굽사건과 관련하여 족장들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서 모세와 아론의 조상인 레위의 족보적 위치를 보여주기 위하여, 족보는 야곱의 첫째 아들이었던 르우벤부터 시작합니다. 다음으로 시므온의 아들들이 나오고 레위가 나옵니다. 레위의 세 아들의 이름이 나타날 뿐 아니라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도 언급되었습니다(16절). 그의 아들 고핫과 그의 후손 아므람의 연수도 언급되었는데 그들이 모세와 아론의 지파 조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절에서 모세의 아버지로 언급된 아므람이 고핫의 아들이었던 아므람(18절)과 동일인물은 아닙니다. 본문의 족보와 민수기3:27,28을 비교하면 알 수 있습니다.
레위. 고핫, 아므람, 모세 등 네 세대만을 열거한 것은 네 번째 代가 가나안에 돌아갈 것이라고 설명했던 창세기15:16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므람의 아내 “요게벳”이 2:1과 민수기26:59에서는 일반적인 용어로 레위의 딸(레위 족속의 여자)이라고만 언급되었는데 여기서는 아므람의 “고모”(아버지의 누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이 결혼은 모세법에서는 금지된 결혼이었으나 율법이 부여되기 이전에는 허용되었습니다.
21절 이하에서는 아론의 아들들이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23절) 아므람의 형제들 중 두 사람의 이름 즉 이스할과 웃시엘 (21,22절), 그리고 아론의 아들이었던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도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족보의 의도가 주요 제사장의 가족들의 후손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아론과 엘르아살의 아내들이 소개됨으로써 그 두 사람이 특히 눈에 뜨이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모세의 아들들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모세의 위엄이 그 자신에게만 한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출애굽하기 전에 마치 전열을 다듬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 이들은 몰랐지만 하나님의 계획속에는 이미 출애굽의 여정이 세밀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획속에는 우리들의 미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항상 우리는 그분 곁에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이라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을 알고계시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 관계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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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시는 주체(출애굽기6: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의 바로왕에게 명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필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셨습니다(13절). 1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즉 출애굽 사건의 주권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모세나 아론, 바로가 모르는 것이 있는데 사람을 지으신 이가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바로가 어마어마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을 지으신 이가 여호와이십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서 노아까지 이르러 홍수로 멸하셨지만 남은 자를 남겨놓으셔서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증가된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10:1-6을 보면 홍수 후에 인간의 증가에 대해서 나옵니다. “1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2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3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4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5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6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여기에서 미스라임이 나오는데 이들이 바로 애굽의 조상들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의 명령을 받아서 출애굽을 시키는 使臣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서 사신의 의무를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사신이 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大使의 직무는 본국의 訓令을 받아서 그대로 그 나라에 전하는 것입니다. 大使는 자신의 생각을 그 나라에 전하지 않습니다. 본국의 訓令대로 전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의 명령을 받아서 받은 대로만 전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대상은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이들을 그대로 두면 애굽의 학정에 시달릴 뿐입니다. 이들의 사정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십니다. 성경이 없으면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가장 잘 아시는 분입니다. 오늘의 인간들도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미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수천 년을 세상의 학정에 시달려 왔습니다. 인간들은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로가 나옵니다. 바로는 자기가 애굽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애굽의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이 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할 때 一笑에 붙였습니다. 할일이 없으니까 공연히 와서 쓸데없는 일을 저지르려고 한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진정 그 땅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고 여호와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으로 하여금 바로에게서 이스라엘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찾겠다는 것입니다.
나약한 인간의 모습 (0) | 2010.1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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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아론의 족보 (0) | 2010.1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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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삼고 (0) | 2010.11.26 |
나는 여호와로라 (0) | 2010.11.22 |
모세의 변명/저는 할 수 없습니다(출애굽기6:10-1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의 왕궁에 들어가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애굽 땅에서 내어보내라”고 전달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께 대답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과연 내 말을 듣겠습니까? 나는 입이 둔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엄숙한 언약의 말씀을 들려주었을 때 이스라엘이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j"Wr rx,Qomi “숨이 짧아서”(9절;마음의 상함과)인데 사람으로 하여금 정상적으로 호흡하지 못하게 만드는 고민입니다. 즉 바로의 혹독한 명령이 오히려 그들을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내적인 심한 압력을 그들이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초기신앙은 그들의 학대가 증가함에 따라 여호와를 믿는 것보다 현실이 더 가까워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의 상태가 어려워짐에 따라 그들이 철저하게 불신앙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모세로 하여금 낙담하게 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의 입술이 둔하다고 했습니다(12절). “입술이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문자적인 말입니다. 할례제도는 창세기17장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의 표시로서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언약에서의 무지개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직도 모세는 자신이 도저히 이 미션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모세는 헤매고 있다는 뜻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성경의 궁극성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히브리말로 기록된 구약 성서 ··· 헬라말로 기록된 신약 성서는 하나님의 감동을 직접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단독적인 보호와 섭리로써 세세토록 순결하게 보존되어 왔으므로 신뢰할 만한 것이다(마 5:18). 그러므로 그것은 종교에 관한 모든 논쟁에 있어서 교회가 최종적으로 의거할 수 있는 것이다(사 8:20; 행 I5:15; 요 5:39, 46)” “최고 심판자는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이외에는 아무도 있을 수 없다(마 22:29, 31; 엡 2:20: 행 28:25). 이로 말미암아 모든 종교적 논쟁은 결정되어야 하고, 교회 회의의 모든 명령과 고대 학자들의 의견과 인간론과 개인의 정신 문제도 이 심판자의 감독을 받아야 하며, 그의 판결에 순응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대로 하면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세우신 계획이 있습니다. 그대로 움직이면 일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인 우리들은 이럴 때에 곧 환경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빨리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기도하고, 믿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내 백성을 삼고(출애굽기6:6-9.9)
7절을 보면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계약체결 때문에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계약과 상치(相馳)되는 이스라엘의 속박상태 때문에 이스라엘을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내셔서 그들을 그의 나라 백성으로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을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라는 그의 이름 가운데 표현된 그의 본성을 나타내심으로써 밝히셨습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의 독특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한 사실인데, 이스라엘을 애굽인들의 무거운 짐 밑에서 끌어냈다는 것, 이스라엘을 그들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했다는 것, 또한 편 팔과 큰 심판으로 그들을 구속했다는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은 족장들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기 위해 주권적으로 모세 시대에 역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계약에 속한 약속을 말씀하셨습니다(창12:1).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공식적으로 계약을 세운 것은 그 후의 일이었습니다(창15:18). 다윗의 경우 계약 관계가 수립되는 공식적인 인가가 이루어지기 훨씬 전에,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기름 부은 왕으로 지명하셨습니다(삼상16:12;삼하7:1).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중사역은 새 계약에 관한 약속이 실현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임마누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기 원하셨습니다. 자기백성을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의도는 사랑의 발로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굳이 죄인들을 구원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힘없는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오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삼으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정말 힘이 없고 연약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만일에 힘의 원리대로 삼으신다면 우리는 자격이 없습니다. 동물같이 자기새끼가 약하고 힘이 없으면 과감히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의 원리가 아니고 사랑의 원리를 적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빼어내신 분이십니다. 그의 나라로 우리를 위해서 빼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원리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우리를 얽어매려고 하여도, 사단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 하여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한 절대로 세상과 세상의 힘이 우리를 어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