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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마태복음27:37)

로마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면서 죄 패를 붙였습니다. 죄 패는 유대인의 왕(oJ basileu'" tw'n jIoudaivwn)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도 역시 유대인의 왕이라 썼습니다(막15:26). 누가복음 역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입니다(눅23:38). 요한복음에는 좀 길게 썼습니다. 요한복음19:19-22을 보면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 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시리아의 총독인 빌라도가 죄 패를 썼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썼습니다. 이 죄패는 2국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 말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의 죄 패에 대해서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Calvin은 3개 국어로 쓴 것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수치를 줄 목적으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습니다. 너희들의 왕이 이렇게 로마의 형법을 적용받아서 사형에 처했다는 것을 빌라도는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의도하지 못했지만, 이 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멀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아람어)야 유대인의 언어지만, 라틴어와 헬라어는 이방인들의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인들만 알면 되는데 굳이 3개국어로 기록된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이후로 여러 곳에 퍼졌습니다. 유월절절기로 인해서 로마제국의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죽음이 회자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만왕이 되신 것입니다. 이제 복음은 더는 유대인의 것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부활이후로 복음은 유대인의 담을 넘었습니다. 유대의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 로마의 군병들, 빌라도 등이 예수님을 정말 우습게보았습니다. 신성모독의 죄를 씌우고, 자기들의 뜻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이미 구약시대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마련하신 것이기에 오차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길에는 천상천하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약한 죽음으로 마귀를 이기고, 그것으로 자신의 백성을 살리신 예수그리스도는 그들의 말대로 유대인의 왕이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약한 인간 예수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군병에 꼼짝 못하는 예수님, 세상의 권력에 꼼짝 못하는 예수님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심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의 한 사람, 박애주의자인 예수님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And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골고다(마태복음27:33-36)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곳은 ‘해골의 곳’ 즉 골고다입니다. 골고다(Golgoqa')는 아람어의 ‘두개골’의 음역입니다. 아람어 ‘골고다’는 히브리어 굴고레트(tl,GOl]Gu/gulgôleth)민1:2/수,해골)와 같은 말입니다. 누가는 셈족어를 쓰지 않고 헬라어 ‘크라니온’(kranivon)으로 번역해서 썼습니다(눅23:33), 이것은 ‘갈보리’(calvaria/라틴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영어 Galvary리는 라틴어 읽기에서 유래했습니다.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 다메섹 문 북동쪽 230m지점에 위치한 약 20m 높이의 작은 언덕입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골고다에 도착하자 쓸개를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었습니다. 이것은 몰약입니다(막15:23). 그런데 예수님은 맛을 보신 후에 마시지 않았습니다. 마취제였기 때문입니다. 마시지 않은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마취제는 아무래도 고통을 경감시킵니다. 따라서 완전한 대속자가 되기 위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을 온전한 의식 중에서 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리고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가졌습니다. 그리고 지켰습니다.

십자가형은 유대의 처벌법이 아닙니다. 십자가형은 Semiramis가 고안한 것입니다. 페르시아, 앗시리아, 이집트, 칼타고, 스키타이, 그리스, 로마, 게르만 사람들의 사형법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강도들과 암살자들과 반역자들을 처형할 때 사용했습니다. 노예들이 죄수가 되었을 때 처벌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중간 부분에 나무로 된 막대나 뿔 같은 것이 튀어 나와 처형된 죄수의 몸이 그 위에 걸쳐졌습니다. 십자가는 높이가 약3m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서는 죄수의 옷이 벗겨졌습니다. 이 옷들은 집행자들에게 부수입이었습니다. 죄인은 사지가 쭉 뻗게 된 상태에서 십자가에 묶였습니다. 커다란 쇠못이 팔과 다리를 박았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불쌍한 죄수는 죽을 때까지 방치되었습니다. 보통 죽는데 2-3일이 소요되었습니다. 죄수가 죽은 후 그 시체는 굶주린 새나 야수들에 의해 뜯어먹게 버려졌습니다.

히브리서 13:11-13절을 보면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출발점입니다.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음으로 구원의 기초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골고다는 치욕의 장소입니다. 골고다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수치의 장소이며, 저주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저주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고, 사람들의 오랜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장소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생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골고다의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And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구레네 시몬(마태복음27:32)

십자가 죽음으로 정죄된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가다가 구레네 사람 시몬(Sivmwn)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가시다가 기진맥진했습니다. 예수님은 밤새 불법재판과 기획재판으로 인해서 육체적으로 심히 탈진했습니다. 그래서 멀리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때 구레네 시몬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시몬을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했습니다. ‘억지로 같이 가게 하다’ 앙가류오(ajggareuvw)는 페르샤어에서 유래했는데, ‘억지로…시키다’입니다. 당시에는 급한 일들을 보내려고 하여도 우체국이 없었습니다. 고레스왕은 왕의 명령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제국의 각 지역에 전달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모든 대로를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기사들을 배치하였습니다. 배치된 기사는 그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기사에게,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전해 줌으로써 정보를 신속하고 안전하게 전달하였습니다. 페르샤의 종복이나 사신은 필요할 경우에는 말, 선박, 심지어 그가 만나는 사람들까지도 강제로 징용하여 일을 시킬 권리가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징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인들은 예수님이 쓰러지셨을 때 속국에 대한 명령권을 행사했습니다.

시몬은 아프리카에 있는 구레네로부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기독교회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로마서16:13을 보면 바울의 문안인사가 나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했습니다. 구레네 시몬과 그의 아내와 아들 알렉산더 루포가 로마교회의 구성원이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도록 했지만, 시몬에게는 큰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어느 누구도 그 무거운 십자가를 같이 지고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도왔습니다. 시몬은 처음에 마지못해서 십자가를 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있었던 주님의 말씀과 행동에 의해서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몬의 십자가는 처음에는 억지로 했지만, 자신과 가족과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복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왕국을 사모하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같이 지려하는 사람은 많이 없었고, 현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납니까?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맛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판에 뛰어드는 목사들도 생기고 돈만을 아는 목회자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으로 다시 회귀하고 있는 아이러니입니다.

And

역설적인 왕권을 행하시는 예수님(마태복음27:27-31)

빌라도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민란이 두려워서 저들의 요구대로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군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27절에서 31절을 보면 로마의 군인들의 행동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로마 군인으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을 조롱하려고 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홍포를 입혔습니다. 가시관을 씌웠습니다. 홀을 들려주었습니다. 경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었습니다. 때렸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려고 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 없음과 왕권을 인정했고,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해서 구속자로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삼중 직분을 모두 행하셨습니다. 선지자 직분(신18:15, 눅4:18-21,13:33, 행3:22), 제사장직분(시110:4, 히3:1,4:14-15, 5:5-6, 6:20 7:26, 8:1), 왕의 직분(사9:6-7, 시2:6, 45:6, 110:1-2, 눅1:33, 요18:36-37, 히1:8, 벧후1:1, 계19:16)을 수행하셨습니다.

선지자직분을 수행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8:26-28, 12:49-50), 백성들과 우리와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으며(마4:17), 미래의 일들을 예고하시거나 예언하셨습니다(마24-25장).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시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켜드리고 교회와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희생제물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롬3:26, 히2:27, 9:14,28). 지금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오는모든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중보 하십니다(요17:6-2, 히7:25, 9:2). 왕의 직분을 수행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택하신 백성을 세상에서 불러내시어 자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사55:5, 요10:16,27). 그들 가운데 관리들과 법을 세워 견책하게 하시고, 이로써 그들을 통치하심을 보게 하십니다. 택하신 백성들이 겪는 모든 시험과 고난 속에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세 가지 직분 모두를 수행하셨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고 그리스도를 공격합니다. 교회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모든 모욕을 모두 참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이 받아야 할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아버지 앞에 순결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러셨습니다. 이제 마귀와 세상은 로마 군인들의 한 행동에 반대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2000년 전의 로마 군인들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한 사람으로 보는 우(愚)를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조롱당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And

바라바를 선택하는 군중들(마태복음27:15-26)

불법으로 인해서 피해를 보는 것 같이 속이 터지는 것은 없습니다. 법이란 애초에 존재할 때 약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현재는 악법입니다. 현재의 법은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입니다. 그래서 약자들은 법의 보호를 오히려 받지 못합니다. 어떤 집에 전세를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은행에 담보를 잡혀 경매에 넘어갔습니다. 이때 약자인 세입자를 정부에서 보호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전세자금 얼마 이상은 받지 못합니다. 그것도 연도별로 계산해서 받습니다. 따라서 거리에 나앉는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 한국의 법입니다. 약자를 죽이는 오늘 한국의 악법입니다. 겨우 어떻게 해서 전세자금을 마련하여 전세를 잘못 들면 망해버리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 수가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그렇게 자랑하는 OECD국가에서 일어나는 악현상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의 불법체포, 기획재판으로 사형을 판결하고, 이제 사법권이 있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사형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아무리 보아도 예수님께 죄가 없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판결한 사형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마지막 카드를 들었습니다. 명절에 죄수하나를 놓아주는 전례를 썼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놓아달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바라바와 예수님을 비교하면 답이 환히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라바를 마태는 ‘유명한 죄수’(마27:16)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한 사람’(막15:17)이라고 말했으며, 누가는 그가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눅23:19)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그를 ‘강도’ 또는 ‘약탈자’(요18:40)라고 불렀습니다.

빌라도와 군중들의 마음에는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물었을 때에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했습니다. 이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선동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재판이 불법재판인 줄을 알았지만, 빌라도는 이 일로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마저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의 피에 대해서 무죄하다고 손을 씻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에게 예수님의 피 값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몰랐습니다. 이후로 유대인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세상은 예나지금이나 무분별한 세대입니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지를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땅에 오신 메시아를 철저하게 배반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입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약시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죄한 예수님은 사형에, 흉악한 죄인은 방면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탄의 계획입니다. 조금 후면 자신들의 왕국이 박살날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And

예수님을 심문하는 빌라도(마태복음27:11-14)

예수님은 산헤드린의 법정에서 대제사장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의 질문에 ‘네가 말했다’고 하셨습니다(26:63,64절). 빌라도의 법정에서빌라도가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고 했습니다(27:11). 예수님의 재판에서 두 가지가 밝혀진 셈입니다. 빌라도의 심문과 대제사장의 심문은 예수님의 무죄성과 왕이심을 강조하였습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그에게 넘겨준 것은 유대인들의 시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18절).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많은 고소를 받았지만 전혀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이 답변이었습니다(4절). 빌라도는 그의 아내가 보낸 메시지를 통하여 예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19절). 빌라도는 유월절을 기념하여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를 풀어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했습니다(7절). 그러나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요구할 때 그는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사형언도를 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했습니다(24절). 바라바를 석방시킬 것을 요구한 모든 백성은 예수의 피를 그들과 자기들의 휴손이 책임질 것이라고 함으로 예수님의 무죄성을 시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한 말 중에 네가 그리스도냐? ‘그렇다’가 주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즉 자기백성을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묵으로 일관하신 것입니다.

사도신경에는 빌라도에 대해서 심히 정죄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죽이려고 기획재판까지 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인데 왜 빌라도가 사도신경에 등재되어 후세에까지 계속 정죄를 당하는가?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그리스도의 최종 수난에 관계된 여러 인물들 가운데 빌라도의 이름만 기록된 것은 어떤 이유인가?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38)은 말하되 ‘그는 어찌하여 재판관으로서의 본디오 빌라도 아래 고난 받으셨는가? 그가 무죄하시되 오히려 세속재판관에 의해 정죄(定罪)를 받으신 것은 그것에 의해 우리를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엄준한 심판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게 함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사적 사실성이 매우 특별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로 가는 길의 여러 계단들의 하나인 빌라도의 정죄를 전기적(傳記的)인 묘사함에 관심두지 않고, 이 수난의 구원적 의의에 치중한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죄의 용서와 영원히 사는 것으로 결론하는 그 신경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하여 이름을 기록한 것은 관원 빌라도가 아니라 로마사람 재판관 빌라도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재판권은 하나님의 주신 바로서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을 선언한 후에 사형을 선고함으로 그의 죽으심이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빌라도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이지만 빌라도는 단지 세속재판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And

가룟 유다의 가치 없는 죽음(마태복음27:3-10)

사람들이 정치판에 들어가면 그 당에 속한 수장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판에서 나와야 합니다. 따라서 정치판은 패거리들의 집단입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정치철학이 좋다고 해서 그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설득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아도 하고자 하는 사업들이 사문화되어 버립니다. 양상은 달라도 유다는 애초에 산헤드린과 나누었던 밀담과는 뜻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기획재판을 받고 정죄됨을 인하여 무엇이 잘못되어가는 상황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무죄한 피값을 받았음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유다는 무를 것을 표방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호구(虎口)에 들어온 먹이를 풀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돈을 다시 주고 예수님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유다는 가책이 되어 예수님을 판값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버리고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이에 돈에 환장했던 제사장들이었지만 피값을 쓸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값이었던 돈을 더러운 돈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즉 비율법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돈을 버려진 땅인 토기장이의 밭을 샀습니다. 그리고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였지만, 그 밭은 후에 그들의 죗값을 묻는 ‘피밭’(1:19)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판값이 예수님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지만, 그들은 묘지를 볼때마다 피 값으로 샀다는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이 행위는 예레미야가 한 말을 성취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에는 ‘정가한 자’라는 말이 없습니다. 스가랴11:12,13절에 있습니다. 은 30은 스가랴당시 노동자의 값이었습니다. 스가랴가 노동한 대가로 은30을 던져주듯이 예수님의 몸값 은 삼십도 토기장이에게 던져졌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베드로와 가룟유다를 비교해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강도 높게 부인했습니다. 어쩌면 유다와 거의 같은 죄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죄가 작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닭이 울자 심히 통곡했습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뉘우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예수님께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자살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실 얼굴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회개했느냐? 안했느냐가 문제입니다. 회개한 베드로는 후에 엄청난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영원한 배반자로 남습니다. 그는 돈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베드로의 죽음과 유다의 죽음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돌아오는 회개가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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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마태복음27:1-2)

하루사이에 엄청난 일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군대를 보내서 체포했습니다. 그 밤에 불법재판으로 사형을 가결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은 죄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결하는 재판이 아니었습니다. 기획재판((企劃裁判)이었습니다. 이미 각본이 다 짜여져 있었습니다. 증인도 거짓증인을 선택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증언으로 무조건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은 산헤드린의 공회원들 거의였으며, 장로들이었고,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빌라도(Pilavto")는 빌라도(본디오 빌라도)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통치한 다섯 번째 로마총독(26-36/27-37년)입니다. 빌라도는 로마를 위해 본도(흑해 지역)에서 싸웠기 때문에 ‘본디오’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빌라도의 총독본부는 가이사랴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월절과 같은 주요 절기에는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방문객의 쇄도로 무질서가 야기되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유대통치는 분별없는 대실책이었습니다. 그는 우상의 사용을 반대하는(출20:4) 유대인의 사상에 거슬리도록 예루살렘에 로마법을 적용시켰습니다. 그는 무질서를 제압하기 위해 병사를 고용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솔로몬의 연못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수도관을 건설하는데 성전기금을 전용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모세가 그곳에 숨겨두었다고 전해진 성전 황금 기물을 찾으러 그리심 산으로 모여든 무장하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이 마지막 대실책 때문에 그는 로마로 소환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누가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은 이 사건입니다(눅13:1). 그러나 빌라도가 저지른 최고의 실책은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불법재판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획수사, 기획재판으로 인해서 시끄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로잡은 자들은 예수님을 결박해서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함은 사형권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들에게 사형권이 있었다면 바로 그날 저녁에 예수님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증오와 미움이 컸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귀의(歸意)되지 않았을 때는 악해집니다. 인간의 생각과 사상이란 잘못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재판들과 처리들이 엉터리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코로 숨 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으로, 또는 이권으로 굽은 재판을 하는 예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월절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코 그것은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증거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서 그들의 백성을 지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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