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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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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름들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 아들들이 야곱과 함께 애굽에 이르렀다. 각기그들을 데리고 갔다; 출 1:1)

출애굽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베엘레 세모트(그리고 이것들은 -의 이름들이다)”=“그리고 그 이름들”입니다. 이것은 1:1의 첫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출애굽기(Exodus, “떠남”“출발”)라는 LXX인역의 제목은 Vulgate역이 출애굽기라고 칭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주제는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시작에 관한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번성케 하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속박의 땅에서 그들을 구속하셨습니다. 그들과 민족의 기초로서의 은혜언약을 갱신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과 맺으신 옛 약속을 어떻게 성취시키셨는가를 연관시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산기슭에서 언약을 그 백성에게 주셨고 또한 그들의 거룩한 삶을 지도할 행위의 규범을 그들에게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용서의 은혜에 근거하여 죄에 대한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하기 위한 성소도 지으셨습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사건과 출애굽기의 첫 번째 사건 사이에는 300년이라는 시간 간격이 있습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분리시키는 것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긴 시간입니다(400년). 기록연대는 주전 1446-1406입니다. 저자는 모세입니다.

기록목적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구속사의 핵)을 통하여 택한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구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언약의 신실성을 나타내시고 변개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십니다.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심을 또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는 하나님께 속했으며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율법의 제정을 통해서 성막건립을 통해서 신정국가 이스라엘로 예표된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지상도래를 선포하기 위함입니다(Thompson Bible).

1-18장까지는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의 역사적 사실을 說話體로 전개된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출되어(B.C.1446.1.5)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이르게 되는((B.C.1446.3.15)과정을 유월절 사건을 중심으로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속자(고엘)로 계시하십니다.

19-40장 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시내산상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율법제정과 성막건립이라는 2대사건의 요약입니다. 이스라엘이 새로운 신정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는데 율법이 필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을 떠날 때(B.C.1445.2.20)까지의 약 11개월5일간 발생한 사건의 기록으로서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계시하십니다(Thompson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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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개론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Cogito ergo sum)는 유명하다. 데키르트의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자신이 존재함으로서 세상이 존재하는데, 세상의 모든 것들을 생각해본다는 해석이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생각해서 그것을 밝혀낼 때만,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일단 의심하고 회의하는 것, 그래서 도무지 의심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하는 것이 모든 학문의 시작이어야 한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하거나 악마에게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가설까지 세워가며 의심하고 회의했다. 이후로 모든 학자들이 의심으로부터 출발했다.

우리들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오경’이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성경에 들이댔던 것이다.

1. 서론

2007년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에서 김지연의 “신명기 간음죄 규정(신22:22)과 ‘다윗과 밧세바 이야기’(삼하11-12장) 비교연구”의 논문을 최우수 논문에 선정했다. 간음한 다윗과 밧세바를 왜 죽이지 않았는가를 레위기 20:10절과 신명기22:22절과 관련, 간음한 남자와 여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법적으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그 이유를 초기왕정시대에는 구속력 있는 사법제도가 없었다는 논리를 폈다. 즉 다윗과 밧세바 시대에는 신명기 간음죄 규정과 같은 법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Arnold A. Anderson의 견해에 의해 다윗과 밧세바 시대를 “주전 10세기”로, 신명기 간음죄 규정을 “주전 7세기”로 규정하여 당연히 다윗과 밧세바 시대에는 간음죄 규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신명기의 저작시기가 신명기사가들이 말하는 것이 맞을까?

신명기라는 이름은 !yrI%b;D]h' hL,a(엘레 하드바림/이것들은 말씀이라)이다. 히브리어 성경도 이 제목을 취하고 있다. 신명기는 중요한 정경서들 가운데 하나이다. 신명기 대부분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포함된 율법을 모세가 재 진술하는 내용이다. 모세는 자신이 지상 생애의 마지막 달에 이스라엘 백성의 총회를 소집해 여호와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특권과 의무를 단단히 가르쳤던 책이다.

2. 역사적 배경

이스라엘은 38년간 바란 광야와 가데스바네아 근처를 유랑하면서 살았다. 그러는 사이에 출애굽한 구세대는 모두 죽었다. 그리고 다시 가나안 진군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에돔을 둘러가는 우회로를 따라 요단 동편 모압 평야에 진을 치고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모세가 고별설교를 하였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백성들을 미리 준비시켜야 했다. 따라서 모세의 설교는 언약갱신이었다. 신명기는 고대종주권 조약의 형태이다.

신명기는 시내산 및 광야의 경험과 가나안 정복을 서로 연결시켜주며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옮겨진 리더십의 변화를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신명기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를 효과적으로 해설해주는 오경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모세는 임종이 가까워오자 신명기의 큰 메시지를 구두로 전달하고 이를 책으로 기록하였다. 새 세대에게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포함하여, 과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 관계되는 조항, 정착생활에 관계되는 규정을 적었다. 모세가 5경 중 처음 네 권을 쓴 것은 이보다 약간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모세가 여행할 때부터 매일의 기록과 같은(민33:2) 어떤 종류의 책을 쓰고 있었다는 것은(출17:14), 분명하며. 이것을 보다 정상적인 편찬의 역사적 기초로 이용했을 것이다. 또한 언약서를 받은 직후 그것을 기록하였는데(출24:4-7), 신명기가 완성됨과 동시에 오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넜을 때의 여러 사건에 대비한 중요한 안내서가 되었다.

신명기에 기록된 사건들은 모세 말기, 곧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일어난 것들이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진입하기 직전 모압 광야에 진치고 있을 때 모세가 그들에게 행한 설교로 구성되어 있다.

3. 신명기(오경)의 모세 저작권

(1) 신명기에 대한 고등비평

18세기 계몽주의의 가운데서 태어난 합리주의 철학이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 모든 기독교회가 오경이 주전15세기에 살았던 역사적 모세에 의해 써졌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연신론이 역사비평주의와 초자연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눈에 띄었다. 스피노자는 에스라가 오경을 마지막으로 만든 자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 말이 생전에는 무시되었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그라프, 퀴넨, 벨하우젠에 의해 문서설을 결정짓는데 기여를 했다.

(가) 오경문서설의 초기 진행

오경문서설은 모세로부터 5세기가 지난 후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에 형성된 것입니다. 문서설은 프랑스 의사로서 창세기를 문학적으로 분석하는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진 아스트룩(Jean Astruc)으로부터이다. 창세기 1장에는 엘로힘이 나타나고, 2장에는 여호와로 언급되는 것에 흥미를 가졌다. 1780-1783년에 아이호른(Johann Gottfried Eichhorn))이 구약서론에서 창세기 전체와 출애굽기 첫 두 장에서 여호와문서(J)와 엘로힘문서(E)로 나누었다. 이것이 후에는 오경이 모세 시대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J-E의 구분이 오경전체에 적용하였다.

1806년에 드 베테(Willhelm M.L. De Wette))는 박사학위논문에서 신명기 연구를 했다. 그는 오경 중 그 어느 것도 다윗이전 시대의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신명기는 열왕기하 22장에 의해 요시야 종교개혁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의 모든 표식이 있다고 했다. 즉 예배처를 중앙으로 집중시키려고 한 것인데 모든 왕국의 부분들을 더 가깝게 정치적으로 뭉쳐서 경건한 자들의 모든 헌금을 예루살렘 제사장들의 금고에 쏟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정부의 캠페인을 위한 조작이라고 하며, 그 책의 연대를 주전621년(요시야종교개혁 연대) 혹은 바로 직전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D문서가 발생했습니다. 따라서 오경의 자료가 E(가장 초기의 것) J, 그리고 7세기 문서 D라고 했다.

1853년 후펠트(Hermann Hupfeld)의 작품 “창세기의 자료”가 나왔다. ‘문서설의 역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 했는데 그는 E문서에서 E2를 발견했는데, J와 너무 흡사하다고 했다. 후펠트는 E문서의 나머지 부분(창세기 20장에서 시작됨)을 뽑아내어 가장 초기의 문서설 판정을 한 후 “기본문서”라고 명명하고 E1으로 표기했다. 이 E1문서는 후대의 비평가들이 P(제사문서)라고 명명했다. 후펠트의 문서들의 순서는 PEJD였다.

(나) 문서설의 네 문서 요약

① J는 남조 유다에서 어느 익명의 저자에 의해 주전 850년경에 써졌다.

② E는 이스라엘의 북조에서 무명의 저자에 의해 주전 750년에 써졌다. 또한 주전650년에 무명의 편집자가 J와 E를 결합하여 J-E를 만들었다.

③ D는 요시야 왕이 주전 621년에 부흥을 일으킬 때 대제사장 힐기야의 지도를 따라 공식적인 개혁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다.

④ P는 에스겔의 성결법전(레17-26장, 주전 약570년. H로 알려져 있음)으로 시작하여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 에스라서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편집이 되었고, 에스라는 가장 후대의 제사문서를 율법에 첨가시켰다.

(다) 문서설의 변증법적 발전개요

① 아스트룩은 하나님의 이름이 다른 것이 다른 자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J와 E로 구분했고, 이 아이디어가 아이히호른에 의해 체계화됨. ② 드 베테는 D가 요시야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했다. ③ 후펠트는 E를 초기의 E1(혹은 P)과 후대의 E2(J를 더 닮은 것임)로 구분하여 문서설의 순서를 PEJD로 만들었다. ④ 그라프는 P의 율법적 부분이 가장 후대의 것으로서 포로 시대의 것이라고 함. 역사적 부분은 좀 더 이전의 것으로 봄. P1EJD2의 순서로. ⑤ 퀴넨은 P의 역사적 부분은 율법적 부분만큼이나 후대의 것임을 느꼈다. PEJD순서. ⑥ 벨하우젠은 문서설을 완전히 다듬어 JEPD를 체계적이고 진화론적인 형태로 발전시킴.

이러한 가설을 프린스톤의 그린(William Henry Green)이 철두철미하게 반박했다.

(라) 문서설에 대한 비판

문서설 특히 벨하우젠의 가설은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부인되었다.

1) 하나님 이름으로 문서의 기준을 삼을 수 없다.

1893년 클로스터만(August Klostermann)은 맛소라 히브리 성경이 하나님의 이름을 전승하는데 있어서 무오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문서의 자료를 찾아낼 수 없다고 했다. 1909년 영국에서 위너(Harold M. Wiener) 유대인 변호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자료구분을 한다는 것은 비실제적이고 무모하다고 했다. 1908년에 어드만(B.D. Eerdmans/퀴네의 후계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분리된 문서들을 찾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1930년 노르웨이의 모빙켈(Sigmund Mowinckel)은 J-E의 문서설을 공격했다. 올브라잇(W. F. Albright)은 하나님의 이름이 기준으로 사용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2) J·E·P가 분리된 문서라는 것에 대한 반박

헤르만 궁켈(Herman G)은 휴고 그레스만(Hugo Gressmann)을 양식비평을 원조로 삼고, 양식비평을 했는데, 옛 시대의 문학사를 정확하게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고, 오경문학에 대한 실제적 접근은 문서설주의자들의 분석 비평적 방법이 아니라 종합적 창의적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궁켈이 벤하우젠 학파의 인위적인 문서분석을 분쇄는 하였으나, 모세의 책이 기록된 형태를 갖춘 것은 포로 시대였다고 하는 가정은 히브리인들이 모세시대 이후로 고도의 언어능력을 갖춘 백성임을 도외시했다.

3) J가 E보다 앞섰다는 가설에 대한 반박

1920년 캐넷(R. F. Kennett)은『신명기와 십계명』이란 책에서 J가 아니라 E가 가장 최초의 기록된 문서였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J가 E보다 앞섰다는 반박이다.

4) E가 J 후대의 문서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가설에 대한 반박

파울 폴츠(Paul Volz)와 루돌프(Wilhem Rudolph)는 1933년『해설자로서의 엘로히스트: 오경 비평에 있어서 하나의 오류?』의 공저에서 E의 단락들을 세심히 재검토한 후 독립된 그리고 일관성 있는 E문서라는 것이 없다고 했다. 모빙켈(Mowinckel)도 E란 그에게 있어서 J로부터 독립된 것이 아니고 하나의 과정이라 했다. 페더슨도 J와 E를 분리시킬 수 없다 했다.

5) 신명기가 요시야 시대라는 가설에 대한 반박

20세기 비평가들은 텍스트 자체의 자료와 그 당시를 주름잡았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6) 초기설을 지지하는 비평가들

1919년 케겔(Martin Kegel)은『요시야의 종교개혁』에서 신명기연대를 621년으로 잡은 것은 건전하지 않다고 했다.

1924년 에딘버러의 웰치(Adam C. Welch)는 주전 7세기에 단일 성소에 대한 율법을 공표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 널리 유행된 상황과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브링커(R. Brinker)는 모세의 신명기 제정이 후대에 여러지역 성소에서 보충되었다고 했다. 폰 라드(Gerhard von Rad)는 신명기가 지방 레위인들 가운데서 발생했으며, 주전701년에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로버트슨(Edward Robertson)은 히브리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갈 때 신명기와 언약의 책(출20-23장)을 포함한 핵심적 율법들을 소유한 조직된 공동체였음을 주장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예루살렘의 카우프만(Yehezkel Kaufmann)은 P가 D보다 앞선다고 주장했다.

(2) 신명기적 역사 가설

신명기에 대한 비평은 연대기와 관련되어 있다. 신명기 연대를 어느 시대의 문서로 보느냐에 따라 신학적인 차이가 생긴다.

1943년 마틴 노트(Martin Noth)는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는 가나안 정복에서 바벨론 포로에 이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보여주는 한 권의 책(신명기적; the Deuteronomistic History)이라고 주장했다. 신명기-열왕기가 여러 권의 책들이 하나로 엮어져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 전체가 하나의 독립된 책이라고 주장했다.

신명기적 역사 가설 자들은 하나님 백성의 과거를 예언 정신에 비추어 풀이하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가시는 길을 이해하도록 가르치려고 한다. 하나님 백성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죄를 들추어내고 그로써 신학적으로 책임성 있는 과거극복의 길을 제시한다. 노트는 포로시대의 이 신명기적 역사가(Dtr)는 4:44-30:30에 나오는 신명기법전을 활용했으며, 이 법전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3) 복음주의적 견해

복음주의자들은 신명기의 핵심주제가 중앙 성소 집중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폰 라드는 신명기에서 예루살렘이 예배의 중심장소라는 것은 주관적이며 본문의 근거가 없다고 보았다. 페더슨도 만약 중앙 성소 예배가 신명기의 주제라면 당시 종교관습에서 ‘바못’과 ‘산당’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신명기 12장에서 ‘바못’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홀베르다는 12:13의 ‘택하실 그 곳’이라는 의미를 각 족속에서 한 장소‘라고 해석하여 열두 장소 이상의 예배장소로 이해하였고, 폴은 예루살렘과 지역적인 차원의 예배가 있었기 때문에 중앙성소를 반대하였다. 클라인은 고대근동의 주요 왕들이 체결한 조약을 재발견함으로써 신명기의 구조적 통일성과 통합성을 강조하였고, 키첸은 신명기의 구조가 10세기 이전의 히위족 계약법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카일과 델리취는 신명기는 십계명과 그것이 나타내는 묵시 중에서 가장 정수가 되는 내용을 권고하는 설명이며 강요이고, 교회적이며, 사법, 정치, 사회조직적인 더 나은 발전이 나타나 있어서 가나안 땅에 백성들의 복지와 생활을 위한 영원한 기초라고 했다.

칼빈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언약이 선포된 지 약 40년 후에 그것을 다시 새롭게 하셨고, 그것을 새로운 세대들에게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모세가 선포한 말씀이라 했다. 신명기는 모세의 저작이다.

4. 성경의 바른 해석

성경의 저자와 저자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글이 써진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성경해석자는 저자 자신에 정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석이 전혀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분명히 신명기1:1에 “이는 모세가···선포한 말씀이니라”가 있다. 모세는 자신의 불순종과 이스라엘의 반역성 때문에 그 백성이 안식에 들어갈 수 없음을 고통스럽게 인식하고(신4:21-26),

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익명의 저자가 주전 5세기 안팎에 썼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성경을 세분하여 자기가 연구하는 분야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즉 숲은 바라보지 못하고 한 개의 나무만을 찾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들이 성경을 심히 왜곡하는 것이다(벧후3:16).

5. 결 론

신명기는 모세오경에 속하는 책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유혹에 맞서기 위해 신명기의 구절을 인용하였다(마4:1-11). 그런데 이것을 부인하게 되면, 즉 모세가 쓰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하면 성경을 심히 훼손하게 된다. 주전15세기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고 주전 5세기에 기록되었다고 한다면 성경을 파괴하는 결과가 된다. 분명히 모세가 이미 한 번 실패한 사람들이 거의 죽고, 그들의 후손을 위해서 전에 이미 선포했던(출20장-31장 등) 것을 다시 선포한 것이다. 따라서 중앙 성소 집중과 헌금의 집중을 위한 것과 바벨론에서 실패한 결과 다시는 그러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겠기에 익명의 어떤 저자가 신명기를 썼다는 것은 너무나 편협한 생각과 발상이다.

참고문헌

W.A.반 게메렌.『예언서연구』김의원·이명철 옮김 서울: (주)엠마오, 2004.

강정주. “열왕기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과 수사적 접근의 필요성”『솔로몬과 열왕기 이해』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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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마태복음28:16-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모든 의심을 모두 불식시키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열 한 제자를 갈릴리의 한 산에서 소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그리하여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18절을 보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선언했습니다. ejdovqh moi pa'sa ejxousiva ejn oujranw'/ kai; ejpi; th'" gh'".(에도쎄 모이 파사 엑수시아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하늘과 그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 이 말씀은 이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님께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로 말미암아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수여받은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선언함으로서 온 세계에 복음을 선포케 하시기 위함이십니다. 그의 제자들이 순간순간 날마다 그분을 의지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당시뿐만 아니라 사도시대에 이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주의 주, 만왕의 왕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명령은 ‘가서/명령형’ ‘그러므로’ ‘제자를 삼아/제자를 삼아’ ‘모든 족속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입니다. 가서 소중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제 전 세계로 복음이 전해져야 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는 주님께서 명하셨으므로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힘을 주시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가야 했습니다.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단순히 복음만 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완전히 개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제자삼아야 합니까? ‘모든 족속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심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들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어려움들을 주님께서 모르쇠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끝날 까지 항상 같이 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한다는 말씀입니다. 항상(pavsa" ta;" hJmevra"/모든 날) 같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약한 우리들을 혼자 두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께서는 은밀한 방법을 통해서 기적적으로 일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로 교회는 이 세상에서 자꾸 확장되어갑니다. 세상은 점점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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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마태복음28:11-15)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특히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 계몽주의 신학자들, 자연주의 신학자들이 반대했습니다. 톨란드(John Toland)와 콜린스(Anthony Collins)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라이마루스(Hermann S. Reimarus)의 영향을 받은 렛싱(Lessing)은 예수님의 기적들을 모두 배제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못했습니다. 라이마루스는 렛싱, 스트라우스(D. F. Strauss),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라이마루스와 렛싱은 예수님의 부활을 시체도적설로, 슈바이처는 졸도설로 일축했습니다.

시체(屍體) 도적설(盜賊說)

사람들은 생각할 때 예수님의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해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시체를 예수님의 제자들이 도적질했다고 한다면, 마태복음28:12-15의 설명을 꾸미는 말이 됩니다. 어떻게 당시에 유명한 로마군인의 감시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로마 군인들이 허수아비였는가?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인봉한 돌을 굴려 낼 수 있겠는가? 로마 군인들이 일제히 잠들었어야만 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자기목숨을 부지하기도 급급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숨어있었습니다. 간과 할 수 없는 사실은 로마 군인들이 일제히 잠이 들었다면 어떻게 제자들이 도적질해 간 것을 알 수 있는가? CCTV도 없었는데 어떻게 감식할 수 있었을까? 말도 안 되는 논리입니다(요20:19). 또한 제자들이 외부에 나가서 자신들이 꾸민 것으로 알고 있는 조작사건을 역사적 실제의 사실로 전파했다고 믿어야 하고, 그들이 박해나 처형의 위협을 당할 때도 조작된 사건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시나리오는 불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적들(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없애기로 정했다면 당연히 그들이 왜 그런 일을 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라도 죽여야 했는데 그들이 도적질해 가서 살려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예수의 시체를 그들의 수중에 넣었거나 그 소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더라면, 그들은 그 증거물을 제공하였을 것이고,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하기 시작할 때에 거짓을 전파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증인들을 내 놓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빈 무덤의 사실을 시체도굴범의 소행 탓으로 돌리는 것은 가장 가능성이 희박한 변명일 뿐입니다. 아예 가치가 전혀 없는 주장일 뿐입니다. 만일 도굴범들이 그런 일을 시도했다면 로마 파수꾼들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경계하였을 것입니다. 혹 성공적으로 침투하여 그 무덤을 털었더라도 우선 그 시체의 싼 것을 벗기고 그것들과 함께 벌거벗은 예수의 시체를 취하고 또 그 다음에는 그 뒤에 전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기에 시체 도적설은 거짓말일 뿐입니다(요20:6-7).

졸도설(卒倒說)

알버트 슈바이쳐의 “역사적 예수 탐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라는 견해에 대해서 다비드 슈트라우스(David Strauss)가 치명상을 가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견해를 채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졸도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께서 실제로 죽으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상에서 실신상태에 빠졌다가 무덤에서 깨어나 그 파수꾼들을 지나 제자들에게 왔는데, 제자들은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후 예수는 금방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보통 상식적인 선을 넘어야 가능합니다. 예수의 사형집행을 책임 맡은 사람들은 사형집행자로서도 멍청한 사람들이었 뿐 아니라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들을 최종 확인하는 행위(죽은 자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일/요19:31-33)를 집행한 감독관들도 멍청한 사람들이었어야 합니다.

예수는 손과 발에 몹시 심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 것은 물론이고 아주 심한 고통을 당하고 신체적으로 몹시 약해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만으로도 엄청난 고통과 압박을 받아 온 신체 기관이 심한 쇼크를 받았습니다. 또 인간적인 관심에서 도외시되고, 또 몸의 영향상태가 몹시 안 좋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손과 옆구리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장사지낸 일들을 겪었습니다. 무덤에는 서늘한 냉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 상처 입은 손으로 무덤의 입구에 놓인 거대한 돌들을 밀어내야했습니다. 곧바로 시내로 들어가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까지 가서 자신을 생명의 주라고 확신을 시켜야 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휴 스콘필드(Hugh Schonfeld)의 유월절 음모(The Passover Plot), 도 노반 죠이스(Dnovan Joyc)의 예수의 문서(The Jesus Scroll) 등입니다. 이런 주장들은 학계에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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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주인 예수그리스도

마태복음1:1-17

각 세대마다 나라의 막강한 주인공들이 있었습니다. 동서양을 볼 때 이집트의 바로나, 앗시리아의 앗수르바니팔,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들이 이에 속합니다. 또한 그리스의 알렉산더, 로마의 황제들, 프랑스의 나폴레옹, 몽고의 징기스칸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철학자들, 종교가들 역시 많습니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맹자, 노자, 순자, 그리고 근대현세사의 많은 철학자들이나 종교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한 학파로서 한 개의 종교로서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역사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는 출생과 신분이 다릅니다. “그의 근본은 태초요 상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신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성 즉 그의 사람 되심의 족보를 마태가 기록하였습니다. 1절에서 17절을 보면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I. 왕으로 오신 예수님(1-16)

신약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1:1-17의 족보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3:23-38에 나오는 족보입니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위에서 아래로 족보를 말합니다. 누가는 이에 비해 아래에서 위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위에서 아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왕통에서 나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 성경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Bivblo" genevsew" jIhsou' Cristou' uiJou' Daui;d uiJou' jAbraavm.)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복음서를 쓸 때 저자들은 각각 그 대상을 정해서 기록했습니다. 즉 마태는 유대인에게, 마가는 로마인들에게, 누가는 소외계층에게, 요한은 헬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썼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썼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왕이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자손 중 한 분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셨습니다(삼하7:12-16). 이사야도 다윗의 왕위에 앉아서 공평과 정의로 이 세상을 다스릴 ‘한 아기’를 말했습니다(사9:6,7). 심지어 예수님 당시 유대종파들 간에도 다윗의 자손이 메시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왕통임을 제시하였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 역사 전체와 연결시켰습니다. 이스라엘 계보의 처음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마태는 아브라함을 언약백성 이스라엘의 선조라는 점과 천하만민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아브라함을 기록했습니다(창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스라엘의 왕들은 다윗부터 시작해서 바벨론 포로사건으로 끝납니다(1:17). 그 뒤로는 사실상 왕들이 아니었습니다. 왕통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지 실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 왕의 계보를 왕답게 잇는 분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 분이 곧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다윗-아브라함”으로 시작하고, 1:17을 보면 “아브라함-다윗-그리스도”로 끝내고 있습니다. 족보전체가 세 이름들로 감싸지고(inclusio)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스라엘 역사와 다윗왕조의 목표를 성취한 왕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3x14의 구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다윗부터 바벨론으로 갈 때까지 열 네 대, 바벨론으로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입니다. 그런데 3x14=42명인데 전부 헤아려보면 41명입니다. 그리고 가운데 14명이실제로는 17명입니다(대상3:10-17). 의도적으로 세 명을 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완성의 수 “7”의 곱(2)인 14를 세 번 반복함으로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실 준비기간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왕 중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 속에서 왕이란 백성들 위에 군림한 잔인한 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왕이란 백성들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백성들을 잡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국민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국민들을 섬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왕과 다른 점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은 철저하게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왕 위에 왕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백성들을 위한 왕이었습니다. 왕은 먹을 것을 주어야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에 나가서 싸웠습니다. 백성들이 고난에 처하면 그 현장에 가서 직접 그것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왕이 이스라엘의 왕이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왕이 이스라엘에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셨습니다. 전쟁에 직접 나서서 이스라엘을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광야의 뜨거움을 막으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추위를 막으셨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 함께 하셨습니다. 홍해가 그들을 막았을 때는 갈라서 길을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을 위해서 존재하시다시피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왕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십니다. 교회에도 계시고, 우리의 가정에도 계십니다. 내가 사업장에 있을 때 거기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학교에 있을 때 거기 계시고, 우리가 직장에 있을 때 거기 계십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예수께서 우리를 도우시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첫 번째 기적을 베푸셨는데 곧 가나 혼인잔치의 포도주 사건입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오직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곳에 이러한 예수님의 기적이 믿는 여러분에게 계속적으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셔서 새로운 세대를 여셨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3-6절을 보면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II. 죄인들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3-6).

백악관을 무대로 연기를 펼쳤던 여인이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Jacqueline Kennedy Onassis/1929.7.28-1994.5.19)입니다. ‘재클린 리 부비에’로 태어나 바람둥이 케네디와 결혼을 함으로서 ‘재클린 부비에 케네디’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후에 케네디가 암살을 당하자 당대의 선박왕이며 바람둥이인 오나시스에게 감으로써 “재클린 부비에 케네디 오나시스”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한 나라 그것도 세계적인 나라의 first lady였지만 존경을 받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재클린은 학창시절에 줄곧 우등생이었습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한 후 여기자로 활약하면서 사교계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존 F. 케네디를 만나 케네디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8년 뒤인 1961년 미국의 first lady가 되었습니다. 31세의 우아한 first lady는 유행의 첨단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암살당하자 하루아침에 미망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미국 국민은 경악할 만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재클린이 그리스의 세계적인 부자 오나시스와 재혼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오나시스는 부정하게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바람둥이였습니다. 이런 사람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미국의 국민은 자존심이 심히 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녀는 존경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계보 중에서 여러 명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를 제외한 네 명의 여인들은 유대에서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이 세대에서도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유대주의를 고수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들은 개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다말은 가나안 사람입니다(창38:6-30). 라합은 여리고 여인입니다(수2:1).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룻1:4). 우리야의 아내(삼하11:3).

이들은 결혼생활도 비정상적이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했습니다(창38:13-19).라합은 직업이 창녀였습니다. 룻은 재혼을 했습니다(룻4장). 우리야의 아내는 남편을 죽게 했습니다. 다윗과 간음했으며 그와 재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예수님의 족보에 이들이 올라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족보에서 파버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우리들이 쌍놈이라는 욕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어릴 때 쌍놈이라고 욕을 하면 사람을 아주 비하한 욕이었습니다. 막돼먹은 남자를 상놈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족보란 몇 대조 선조께서 영의정을 지내셨고, 판서를 지내셨으며 하는 판에 상놈이족보에 있다면 당장 족보에서 파냈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본디 없는 여자들이 올랐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넷이나 올라있습니다. 유대귀족의 딸들도 아닙니다. 이방의 유명한 여자들도 아닙니다. 정상적으로 결혼한 여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간음하지 않으면 재혼의 경력 있는 여인들이었습니다.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할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러한 좋지 못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의 족보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왜 마태는 이 사람들을 고스란히 기록했을까요? 치부를 가리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정입니다. 우리들 조상가운데 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족보에서 파낼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왜 이들의 이름을 올렸습니까? 그냥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다윗은 솔로몬을 낳고”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기억하기 싫은 치부를 마태는 건드리고 있습니다. 자존심 상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와, 살몬과, 다윗입니다. 보아스는 과부와 결혼을 했으니까 그래도 한숨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와 다윗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후에 다른 종교인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신의 얼굴에 침 뱉는 격입니다. 그런데 왜 “유다는 다말에게서, 살몬은 라합에게서,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라는 이름을 굳이 넣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은 유대인들만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그리스도도 되십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지혜자나, 야만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오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보아도 다말, 라합, 룻, 밧세바는 죄인들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이방인, 세리, 창기들은 죄인으로 여겼습니다(마9:10). 이러한 유대의 규정으로 보아서 “다말, 라합, 룻, 밧세바”는 죄인들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9:13을 보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으며” 눅12:29절을 보면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죄입니다. 누가 죄인입니까? 아담의 후손들이 모두 죄인들입니다. 사람치고 아담의 후손이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이 죄 때문에 법원 검찰청이 밥을 먹고 삽니다. 경찰청이, 군인들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밥을 먹고 삽니다. 사람들을 통제하는 모든 것들이 죄 때문에 기인했습니다. 우리들을 통제하는 것들이 죄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비록 법원, 검찰, 경찰청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모두 죄인들입니다. 자신을 깨끗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모두 죄인들입니다. 모두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에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우리조상 아담이 모든 인류에게 새카맣게 죄를 유전시켰습니다. 이 죄는 어떤 사람이 와서 없앨 수 없었습니다. 오직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이어야 했습니다.

여인의 후손이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유다를 낳고”입니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16절을 보면 갑자기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리아가 남편 없이 그리스도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사단에게 여인의 후손이 네 머리를 박살 낼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이루어짐을 말씀합니다.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이고 빠른 것인지를 하나님과 아담의 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기사도를 발휘해서 하와는 절대로 죄가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라고 말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러한 남자다움이 없었습니다. “저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까지 끌어들였습니다. “주께서 저와 함께 하도록 만들어 주신 저 여자가”라고 말합니다. 속도 좋으신 하나님은 이제 하와에게 묻습니다. 이럴 때 하와도 남편을 위해서 총대를 메어야 했습니다. 어차피 자신이 먹게 했으니까 “남편은 죄가 없습니다. 모두 제가 한 일입니다.”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와 역시 뱀에게 전가하였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했지만 죄를 짓고 나니 금방 달라졌습니다.

죄가 얼마나 잔인합니까? 최초의 가정에서 형제들 간에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밥그릇 뺏은 것도 아닙니다. 예배를 드린 것 때문에 동생을 죽였습니다. 죄는 이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들 안에 다말의 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우리들 안에 라합의 죄가 있습니다. 룻과 같이 저주를 받아야 할 죄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우리들 안에 밧세바와 같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의 왕으로서 그들을 심판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들을 채우시고 보호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문을 영광의 문으로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문을 생명의 돌파구로 바꾸셨습니다. 이 모두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왕으로 오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죄인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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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종교지도자들(마태복음28:11-15)

로마 군인들이 보초를 서다가 부활한 예수님을 목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되어진 일들을 보고.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 진원지의 입부터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1절에서 15절을 보면 이들은 정말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자격이 아예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1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로마군인들은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몇이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즉각 그 사실 때문에 장로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간단하고 사악한 회의였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로마 군인들에게 돈을 주고 입을 막자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에 예수님이 부활했다면, 그를 죽이고자 했던 자신들의 책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 가지 안을 내놓았습니다. 많은 돈을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명의 보초가 있었고, 보초가 잠을 잤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안은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해갔다는 말을 퍼뜨림으로서, 부활했다는 사실을 막고, 무덤이 비어 있다는 충분한 설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안은 로마군인들의 안전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거짓말이 만일에 총독의 귀에 들리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무마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을 유대인을 위해서 썼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들의 거짓말이 오늘까지 유대인들 가운데 두루 퍼졌다고 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라고 했지만, 그들 산헤드린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깡패들이었습니다. 협잡꾼들이었습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은 작자들이었습니다. 최소한 예수님이 부활했다면 진지하게 회의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믿지 못했지만, 다시 한 번 검증을 해야 했습니다. 저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었다면, 하나님께 물어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하나님께 묻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하나님께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들은 모세의 자리로는 모자라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니 갈릴리의 어떤 잘못된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황, 그리고 자신들이 큰 교회의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의 거드름은 정말 볼만합니다. 사람들을 자신들이 함부로 예단(豫斷)하고 심판(審判)합니다. 정말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코로 숨 쉬는 사람임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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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주님의 제자들(마태복음28:16,17)

마태는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자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시던 산에서 예수님을 보았지만,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했습니다(16절).

마가요한은 예수님이 두 제자에게 나타났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두 제자가 남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말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에 11명의 제자가 음식 먹을 대에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믿음 없는 것(불신)과 마음이 완악한 것(완고함)을 꾸짖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살아나신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막16:12-14).

누가는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마태와 마가와 다르게 기록했습니다. 무덤에 갔다 온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허튼 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 무덤으로 달여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그를 감쌌던 세마포만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그 된 일을 보고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갔다고 했습니다(눅24:10-12). 또한 그 날에 제자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들도 부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며, 부활의 소문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들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헤어졌습니다. 후에 11제자들이 모였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심지어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확실히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제자들의 태도는 사뭇 다르게 기록했습니다. 역시 마리아들이 제자들에게 주님의 시신을 우리가 찾을 수 없다하니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급히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세마포만 있었지,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그때에야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미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그 말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을 보고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말씀은 한 사람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있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목격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상당수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제자직분을 잘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부활했을 때, 같이 하지 못했고,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만국에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사도들로부터 전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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