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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한 인간성(마태복음26:69-75)
유월절이후의 베드로의 행적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라 했을 때, 베드로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26:33). 그러나 겟세마네에서 주님께서 기도할 때에 베드로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26:38-45). 예수님이 잡혔을 때에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베어버렸습니다(26:51).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제지를 당했습니다. 그후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려고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함께 앉았습니다(26:58).
이들과 같이 있을 때 대제사장의 한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갈릴리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예수와 함께 있었노라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네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이었습니다(69-70절).
베드로는 앞문으로 이동했습니다. 문을 나섰는데 다른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아까보다 강도를 높였습니다.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나는 도무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부인이었습니다(71-72절).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네 말소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갈릴리 사람들은 말투나 어감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두 번째보다 더 강도 높게 말했습니다. 자신을 저주하며 맹세를 했습니다. 내가 도무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닭이 울었습니다. 세 번째 부인이었습니다. 참으로 베드로는 죽고 싶었습니다.
오늘 이 땅에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 많은 설교자들과 성도들이 베드로의 입장에 있었다면 베드로같이 하지 않았을 까?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생명의 위협이 올 때는 비굴해질 정도로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넘어짐은 우리 자신의 연약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건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거울이 베드로의 부인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주님을 부인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부인사건에서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약한 우리들을 그럼에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용감하고 믿음이 있을 줄 알았던 우리들이, 신상에 어떤 사건이 터지면 그야말로 조금의 믿음도 없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평소에는 모두 믿음이 많은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삽니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마치 우리믿음도 카멜레온처럼 변화해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존재할수 없다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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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를 몰라보는 산헤드린(마태복음26:57-68)
산헤드린(sunevdrion/공회)는 쉰(suvn//함께)와 헤드라(e{dra/자리)에서 유래한 말로 ‘함께 앉은 자들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산헤드린은 로마의 세나투스(Senatus/ 원로원회)의 번역어입니다. 유대교에서 산헤드린의 역사는 포로기 이후입니다. 제사장 신분의 귀족들과 여러 지파의 우두머리들은 예루살렘에 원로회의를 구성했습니다. 그 회의의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이 예루살렘의회는 시리아왕 안티오쿠스Ⅲ세의 칙령에 의해 처음으로 게루시아(gerousia/원로회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통치기구는 일찍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이 의회는 하스몬 왕가가 왕직과 대제사장직을 접수했을 때 그 권한을 박탈했습니다. 주전76-67년에 여왕 알렉산드라 치하에서 바리새파 서기관들이 그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산헤드린의 용어가 예루살렘 의회에 대해 최초로 사용된 것은 로마황제 가비니우스(Gabinus/주전57-55) 통치 아래 있을 때였습니다. Gabinus는 팔레스타인을 5개의 쉬네드리아(sunevdriva)로 나누었습니다. 그 후 가이사의 통치 때 예루살렘 회의는 다시 이스라엘 전체를 지배하였습니다. 이 때 산헤드린은 특별히 예루살렘 의회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구성은 71명의 의원, 즉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중 지도급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원래 사두개파 제사장계 귀족들이 세력을 잡고 있었으나 알렉산드라 여왕의 시대에 이르러 그 의원 자격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포함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위한 공회가 아니었습니다. 강도 집단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집단이었습니다. 없어져야 할 못된 집단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의 법정은 낮에 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 여력이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습니다. 가야바 법정에 끌려간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안달이 났습니다. 거짓증거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허사였습니다.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그 말로 채근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그리스도(메시아)인지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맞다고 말했습니다. 재림하실 때 인자의 영광을 말씀했습니다. 이에 세상에 눈먼 대제사장은 신성모독의 죄를 적용하여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침을 뱉으며, 주먹과 손으로 때리며, 희롱했습니다.
시편35:11에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라고 예언되었고, 109:2에는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성취가 마26:59,60입니다. 또한 미가5:1“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찌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했고, 이사야50:6에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했는데, 이에 대한 성취가 마26:67,68입니다. 주님은 예언된 대로 우리들을 위하여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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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수호해야 할 진리
요한이서1:1-3
진리를 사전에서는 “참된 이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생각하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Eusebius의 교회사를 보면 우리 선배들이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순교한 모습은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합니다.
성도들의 순교 장면을 둘러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로마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채찍으로 맞아 찢어진 그들의 몸에서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으며, 속살과 창자까지 드러났다. 그 후에 그들은 조개껍질이나 땅 위에 놓인 창끝에 눕혀졌다 그리고 갖가지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그 중에 게르마니쿠스(Geranicus)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순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였다. 지방총독은 그를 설득하려 했다. 그에게 젊음을 생각하여 스스로를 긍휼히 여기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공격하는 사나운 짐승들을 자극하여 불의하고 무법한 세대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이 사람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본 군중들은 이 경건한 순교자의 용기,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의 강건한 믿음에 놀랐다.
사도요한은 진리를 수호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1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 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I.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1-2절)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생각 없이 읽어도, 자세하게 읽어도 장로가 어느 여성도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우리 머리에 언뜻 떠오르는 것은 신앙이 돈독한 어느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는 모습입니다. 13절을 보면 그 어머니의 조카가 그 여인에게 인사를 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과연 요한이서는 장로 요한의 개인적인 서신인가? 아닌가?
그런데 요한이 개인적으로 보냈다면 개인적인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4세기 이후로 ‘선택받은 부녀’를 단체적인 호칭으로 이해했습니다. 구약의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는 어떤 도시를 말할 때 반드시 성을 부여했습니다. 시혼 성(@joysi @/jysi/민21:28)이라 했을 때 그 도시를 여성형으로 표시했습니다. 고린도, 에베소 그리고 특히 교회를 표현할 때는 반드시 여성형으로 표시했습니다.
따라서 택하심을 입은 부녀(kuriva/)와 그의 자녀들(tevknoi")은 개인적인 가정이 아닙니다. 한 가정교회와 그곳에 속한 믿음의 식구들을 여성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우리교회에 헬라식으로 편지를 한다면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 전체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장로인 사도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받은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장로라는 직책도 오늘날의 장로의 직책이 아니라 당시 교회지도자들을 지칭하는 ‘사도적인 인물’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나 요한이 자신들을 장로라고 불렀음을 이해해야 합니다(벧전5:1/요이1:1).
장로인 사도요한은 교회를 향한 사랑을 ‘진리를 아는 자’(pavnte" oiJ ejgnwkovte" th;n ajlhvqeian)라 했습니다. 장로인 요한 자신이 교회에게 진리 안에서 무척 사랑하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이 그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 했습니다. 즉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이 그 교회를 사랑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장로인 요한도 진리를 사랑합니다. 그 편지를 받는 교회도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진리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진리 때문에 서로 사랑하며, 진리 때문에 서로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성도들은 하나입니다. 전 세계에 퍼져 있지만 하나입니다. 모든 교회들이 하나입니다. 유럽에 있는 교회와 우리 교회와 하나입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교회와, 아메리카에 있는 교회와 우리 교회가 하나입니다. 아시아에 있든지, 오세아니아에 있든지 교회는 하나입니다. 왜 하나입니까? 우리가 진리로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라는 끈으로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의 교회와 연합되었습니다. 신약의 교회들과 연합되었습니다. 교회사의 모든 교회들과 연합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연합되었고, 에녹과 연합되었습니다. 셋을 우리의 조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사도를, 요한사도를 우리의 선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진리로 묶여진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라고 간판을 건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행하여야 교회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수촌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촌교회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촌교회는 많은 교회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교회 중에 오로지 예수촌교회만 유일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어디서나 같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나 미국장로교회, 스위스장로교회, 대한예수교장로교회나 같은 부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에베소서1:23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같은 이유는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로만-카톨릭은 다르게 말합니다. 모든 교회가 교황에게 복종해야하기 때문에 통일성이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전 세계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교회일 수 없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한 성령에 의하여 한 세례를 받아 한 머리와 한 주(主)를 가진 한 몸으로 접붙여지게 됩니다.
교회가 진리를 가지고 있어야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있어야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습니다. “택하심을 입은(ejklevkto")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란 하나님의 보호하에 있다는 말입니다. 원래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가장 질이 좋은 것들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택했다’는 것은 ‘많은 것 중에서 골라낸 것’입니다(겔19;12,14).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백성들을 말합니다.
종말의 때에 천사들이 우리를 소집합니다(막13:27). 택하신 자들을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환란을 감하십니다(막13:20). 택함 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으로의 초대를 받습니다(계17:14).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들을 누구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진리를 소유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도 우리를 대적하지 못합니다. Martin Luther는 ‘술은 강하다. 그러나 왕은 더 강하다. 하지만 여자는 왕보다 더 강하다. 그러나 최고로 강한 것은 진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한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들이 무너지고, 나라가 캄캄해도 주의 진리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힘들어도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즐거워도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즐거우나 괴롭거나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성도이기를 바랍니다.
II. 주님과 함께 하는 교회의 본분(3절)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원래 말은 좋은 말인데 그 말이 어떤 잘못된 것에 쓰여질 때 왜곡된 말들이 있습니다. 그런 말 중에 낙하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낙하산은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땅에 부드럽게 떨어지도록 사용하는 기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 낙하산이야’라고 말할 때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아닙니다. 권력의 비호를 받고 힘안 들이고 어떤 기관을 접수한 사람을 낙하산이라 말합니다.이들은 자격이 있어서 그 자리를 맡은 것이 아닙니다. 자격은 쥐뿔도 없는데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죽기보다 힘든 상황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들이 진리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을 크게 하면 그 교회는 진리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처럼 소형교회는 진리가 없는 것처럼 사람들이 생각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교회를 건전한 종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입니다.
불신자들은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유대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아시아로 급속히 확장해나갔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확장해나갔습니다. 그래서 지구촌은 거의 복음이 전해진 상태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선교 2세기가 채 되지 않아 교회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교회가 잘 나갈 때는 전 인구의 25%가 신자라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IMF이후 교회의 성도들은 급속히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성장이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마이너스 성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졌습니까?
우리나라에 처음 선교가 되었을 때는 성도들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일제에 항거했고, 가난을 타파하려 했으며, 사회의 약자들과 함께 했었습니다. 특히 국민들이 기독교와 함께 하려 했었습니다. 국민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조짐이 1970년대부터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대형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기에 기독교가 사회약자를 보호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강자의 편에 섰습니다. 1960년 3월15일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부정선거,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파동, 1970년대 1인 독재를 위해 제정한 유신헌법에 대하여 침묵했습니다. 전 재산 29만원밖에 없는 불우한 대통령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했는데도 교회는 그를 위해 조찬기도회를 열어 불법적인 군사정변을 정당화해주었습니다. 이제는 목사와 장로들이 정치의 맛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정치판에 뛰어들어 수많은 국민들과 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동기를 만들었습니다. 즉 불신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교회는 건전한 종교가 아니라 힘이 있는 종교로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주후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되었습니다. 콘스탄틴이 막센티우스와의 밀비안다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인해서 기독교를 로마제국에서 인정하였습니다. 이로써 교회는 약 300년의 피 뿌림에서 건짐을 받고 제국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때부터 문제가 되었습니다. 제국의 종교로 거듭난 기독교는 누가 크냐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크냐? 너냐? 나냐? 그래서 동방과 서방의 오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초대교회 때의 순수함이 사라졌습니다. 말씀이 예전으로 바뀌었고,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에 더 신경을 썼습니다.
거기에 교회는 이단들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사도 시대부터 발흥한 이단과 계속해서 싸워야 했습니다. 교리를 세워야 했습니다. 삼위일체론, 기독론 등의 교리를 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밀물처럼 밀려오는 권력인 로마카톨릭과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전쟁을 치르고도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습니다. 독일에서부터 개혁의 기치를 든 기독교는 프랑스, 스위스를 휩쓸고는 영국에 착륙했습니다. 거기에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나라에 19세기에 들어왔습니다. 일제시대에 들어온 한국교회는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신사참배문제, 자유주의 신학과의 전쟁, WCC로 인한 분리, 교회의 대형화, 교단과의 수위권다툼, 정교유착으로 인한 타협 등으로 인해서 교인들이 이해하는 것도 별로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힘을 과시하고 세상사람보다 더 세상적인 것이 교회라는 인상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진리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장로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계시한 말씀으로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요14:6). 그 예수님 안에 사는 것입니다(요8:31-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예수님과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요이1:9). 진리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아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요14:16/요6:29). 그를 증거하며 그 안에서 서로 하나 되어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요17;20-26). 이것을 우리가 행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이 땅에서의 삶입니다.
성경대로 살려고 애쓴 사람 중에 애굽 출신 콥트인 성 안토니(256-356)가 있습니다. 이 안토니는 250년경에 이집트의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신앙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안토니는 20세가 되기 전 양친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누이 손에 맡겨졌습니다. 그러던 안토니가 교회에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마19:21)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즉시 자신의 유산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부동산을 팔아 자신의 누이를 돌볼만큼만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그 후 안토니는 인간사회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 사회와 완전히 동떨어진 사막에서 마귀와 투쟁하며 금욕주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 사도나 사도요한, 그리고 사도들은 교회가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아야 한다고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님과함께 죽으며, 함께 부활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어디에도 없는 기관입니다. 교회는 천국을 항상 맛보고, 미리 천국을 알게 하는 곳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 세상에 몸을 두고 있지만 항상 본향인 천국을 소망하며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시민권을 두고 있지만, 우리의 진정한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소망은 이 세상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이러한 것들을 수호해야 교회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진리를 수호해야 합니다.
체포당하신 예수님(마태복음26:47-56)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신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어떻게든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있는 한 자신들의 입지가 너무나 좁아졌습니다. 자신들의 과거가 모두 들통이 났습니다.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가 아무것도 안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살아 있는 한 그들은 큰일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람들을 붙여서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간해서 틈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님은 제거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회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회의결과는 회의적이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님을 잡으면 아무래도 민란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자가 제 발로 찾아와 잡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이래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비밀리에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가롯 유다 편에는 큰 무리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공회원들을 모두 소집했습니다. 관계될만한 사람들은 모조리 소집했습니다. 속전속결로 처리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미 가룟 유다와는 사전에 암호를 짰습니다. 유다가 입맞추는 자만 잡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약속한대로 예수님께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사주를 받는 자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손을 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었습니다. 이 제자는 베드로였습니다(눅22:49). 그러나 베드로의 그 충심(?)을 제어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다시 꽂으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잡혀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하는 길이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미 예언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능자께서 이 일을 허락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천사에게 지시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인간의 구속사의 기초를 놓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친구에 의해 배반당할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시편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시편55:12-14 12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찐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찐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
주님은 제자들의 저버림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스가랴13:7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이에 대한 성취가 마26:47-56, 요13:18,13:21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만일에 허락하지 않았다면 로마의 황제를 소환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총독과 대제사장들을 단시간에 목을 벴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인간들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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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마태복음26:36-46)
예수님은 평소에 많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있을 때 기도했으며(눅11:1), 혼자서도 기도를 했습니다(요12:27). 산에서 기도했습니다(마14:23, 막6:46, 눅6:12, 28). 광야에서 기도하셨습니다(눅5:16).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요11:41,42). 그러나 가장 힘들게 기도한 곳은 겟세마네였습니다(마26:36-44, 막14:32-35, 눅22:41-44). 평소에도 기도를 하실 때 혼자서였지만,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할 때는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열한제자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여기 앉아 있으라고 했습니다(36절). 그리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가시면서 괴로워하셨습니다(ajdhmonei'n). 슬퍼하셨습니다(lupei'sqai). 그리고 세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지경이니, 너희들은 여기에서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36-39절). 예수님은 거기에서 조금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기도내용이 처절했습니다. ‘만일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피하게 하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39절). 한숨을 돌리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한밤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마음은 기도하고 싶었지만, 육신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41절).
두 번째 주님은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처음과 비슷했습니다. 주님이 마셔야 할 잔을 피하게 할 수 없으면,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다가 다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역시 제자들 모두 자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이 한밤증이어서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 번째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동일한 내용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즉 도저히 이 잔을 피할 수 없거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이제는 너희들이 자고 쉬라. 그러나 이제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린다고 하셨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유다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인성을 볼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면에서도 완전한 인간입니다. 인간적인 내적인 마음을 가졌습니다. 배신당하심을 느꼈고,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는 무척 괴로워하셨습니다. 슬퍼하셨습니다. 절대로 같이 하겠다고 했던 제자들은 한 사람도 주님과 같이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마시는 잔은 여인의 후손 혼자서 마셔야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마시는 잔은 단순한 잔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에게 주는 진노의 잔이었고, 저주의 잔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받는 잔은 구원의 잔입니다. 제자들이 마시는 잔이나, 오늘 이 시대에 우리들이 마시는 잔들이 모두 구원의 잔입니다. 주님께서 마신 진노의 잔의 대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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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지 못할 제자들의 약속(마태복음26:31-35)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갈 때에 제자들이 자신을 모두 버릴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목자를 치는데, 양의 떼가 흩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31절). 하지만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에로 간다고 하셨습니다(32절). 이때 베드로가 주님께 말했습니다. 제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33절).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내가 참으로 말하는데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한다고 했습니다(34절). 이에 베드로가 다시 한 번 맹세를 합니다. 내가 주님과 같이 죽겠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35절).
스가랴13:7을 보면 “칼아 깨어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다. 내 목자, 내 동료인 그 사람을 대항하여 그 목자를 치면 양떼들이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내 손을 작은 자들 위에 돌이킬 것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스가랴13:7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에서는 목자를 치는 자가 누구라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목자를 치라는 명령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하신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목자를 치라는(hk;n:/때리다, 죽이다)분이 여호와이십니다. 그런데 작은 자들 위에 돌이킬 것(bWv/슈브)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아들에게 지우는 짐은 단순한 개인의 짐이 아닙니다. 제자들만의 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의 짐입니다. 따라서 제자들과 베드로의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님을 살릴 힘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짐을 져야하는 것은 인간들의 죄 때문에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짐을 지러가는 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은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위시한 모든 제자들이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절대로 그럴 리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제자들의 의도와 달랐습니다. ‘버리다’(skandalivzw/스칸달리조)는 ‘실족케 하다, 범죄케 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스칸달론(함정)에서 유래했으며, ‘덫을 놓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실족(범죄)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약속과 맹세는 참으로 무기력합니다. 목숨 앞에 무너지고, 권력 앞에 무너지고, 돈에 무너져 버립니다. 아무리 맹세하고 다짐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기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들 제자들의 무기력함을 이미 아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떻게 넘어질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회개의 실마리를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어떻든지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십니다. 제자들을 확신시키시는 말씀입니다. 즉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허투루 들었겠지만, 후에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허둥대지 않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소명 받은 제자들은 다시 그 소명을 확신시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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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람산으로 가신 예수님(마태복음26:30)
예수님과 열한 제자들은 찬송하면서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유월절 식사 때의 찬송은 주로 시편115편-118편입니다.
시편115편 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2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
시편116편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2 그 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편117편 1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찌어다 2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118편 1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찌로다
시편115편은 현존해 계시며 살아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주의 이름의 영광을 찾으라고 간청하는 시입니다. 시편116편은 죽음에서 피한 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찬송시입니다. 시편117편은 하나님의 왕국으로 그의 백성들을 초대하는 시입니다. 시편118편은 새 성전 봉헌식 때 축제의 시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신 것입니다. 그것도 자원하심으로. 어떤 사람이 자신이 죽을지 번연히 알면서 그 길을 가려하십니까? 없습니다. 또한 미래를 확실하게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 아셨습니다. 이 길 말고는 사람을 구원하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P.D.의 말대로 움직이는 탈렌트처럼 움직이고 계십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 1.1km지점의 해발 814m의 산입니다. 감람산 아래로는 기드론 시내가 흐르는 여호사밧 골짜기가 있습니다. 감람산 서쪽 기슭에 겟세마네동산이 있습니다. 감람나무가 무성하게 있어서 감람산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우리의 구원을 확보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들을 모두 싹 쓸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에 그렇게 하지를 못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이루시어 죄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을 찾으셨는데 곧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죄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죄 없으신 아들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서 나심은 바로 이것을 행하시려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드려야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이지만 십자가 고난의 길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의하여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은 필연적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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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을 제정하심(마태복음26:26-29)
예수님은 열 한 제자와 함께 유월절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들어서 축복하셨습니다(eujloghvsa"). 그 축복하신 떡을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받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떡이 ‘내 몸’이라고 하셨습니다(26절). 또 잔을 가지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잔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이 잔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 하셨습니다(27절). 주님은 이제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마실 때까지 마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 제29장은 성찬(Of the Lord's Supper)에 관해서 말을 합니다.
제1항.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그가 잡히시던 날 밤에, 그의 몸과 피로 세우신 성례, 곧 성찬을 제정하여, 그의 교회에서 세상 끝날 까지 지키도록 하셨는데, 이는 그가 죽으심으로 자신을 친히 희생 제물로 드린 것을 영구히 기념케 하시고, 참 신자들에게 그 희생이 주는 모든 은혜들을 보증하시며, 그 안에서 그들이 영적인 양식을 먹고 성장케 하시며, 그들이 그에게 마땅히 행해야 되는 의무들을 보다 충성스럽게 이행케 하시며, 그들이 그와 더불어 갖는 교통과 그의 신비한 몸의 지체들로서 그들 상호간에 갖는 교통의 매는 줄과 보증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고전11:23-26; 10:16,17,21; 12:13)고 했습니다.
제2항. 이 성찬 예식을 행할 때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실제로 바쳐지거나, 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희생 제물이 실제로 드려지는 것도 아니다(히9:22,25,26,28). 다만 이 성찬 예식은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스스로 자신을 드린 그 희생을 기념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찬미를 영적으로 봉헌하는 것에 불과하다(고전11:24-26; 마26:26,27).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의 희생 제사인 소위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선택자들의 모든 죄를 위한 유일한 희생 제물이 되시고 유일한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을 가장 극단적으로 손상시키는 것이 된다(히7:23,24,27; 10:11,12,14,18).
제3항. 주 예수께서는, 이 의식을 행함에 있어서 그의 사역자들을 택정하시어 이 예식에 대한 자신의 말씀을 일반 회중에게 선포케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며 떡과 포도주를 축사하게 하시고 그렇게 축사하여 그것들을 거룩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다른 일반 떡이나 포도주와 구별하게 하시고, 떡을 들어 떼게 하시고, 잔을 들게 하신 후에 떡과 잔을(자신들이 나눌 뿐만 아니라) 수찬자(受餐者)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마26:26-28; 막14:22-24; 눅22:19,20; 고전11:23-26). 그러나 그 예식이 거행되는 시간에 회중 가운데 참예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에게도 나누어 주지 못하게 하셨다(행20:7; 고전11:20).
제4항. 사적(私的)인 미사, 즉 성례를 사제(司祭)나 기타 다른 사람에게서 혼자 받는다든지(고전10:6), 또는 잔을 일반 회중에게는 나누어 주지 않는다든지(막14:23; 고전11:25-29), 떡과 포도주에게 절을 한다거나 숭배할 목적으로 높이 치켜들거나, 아니면 가지고 돌아다닌다거나, 혹은 겉치레만의 종교적인 용도를 위하여 그것들을 남겨 두는 일이 있다고 하면 이 모든 것들은 이 예식의 본질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예식을 제정하신 본래의 뜻에도 어긋난다(마15:9).
제5항. 이 성례에 사용되는 외형적인 요소들인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용도를 위해 정당하게 구별되어 있는 까닭에 이 요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 관계는 참된 것이지만 상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요소들은 때로는 그것들이 나타내고 있는 것들의 이름으로 불린다.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불린다(마26:26-28). 그렇다 해도 그것들은 실체와 본질에 있어서는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떡과 포도주로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고전11:26-28; 마26:29).
제6항. 신부가 축사하거나 또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바뀐다고 하는 교리(일반적으로 '화체설'이라고 불리운다.)는 성경에 모순될 뿐만 아니라 일반 상식과 이성에도 모순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리는 성찬의 본질을 뒤엎는 것이요, 여러 가지의 미신과 조잡한 우상 숭배의 원인이 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한 요인이 되고 있다(행3:21; 고전11:24-26; 눅24:6,39).
제7항. 합당한 수찬자들은 이 성례의 가견적 요소를 외형적으로 받을 때에(고전11:28) 또한 내면적으로는 믿음으로 받으며 물질적으로나 신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에서 오는 모든 은혜를 받으며 또한 먹는다. 그러나 성찬을 받는 그 때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또는 밑에,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루터교의 공재설). 그렇지만 그 가견적 요소들을 그 의식에 참예하는 신자들이 그들의 외적 감각에 의해 알아보는 것처럼 실제적인 동시에 영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고전10:16). 8. 비록 무지하고 사악한 사람이 이 성례의 외적 요소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 요소가 의미하는 바의 것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례에 합당치 못하게 참예함으로 해서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지어 자신의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무지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교통을 갖기에는 부적합함으로 주의 상(床)에 참여할 자격이 없으며, 그들이 무지하고 불경건한 상태에 있는데도 이 거룩한 성찬 예식에 참여하거나(고전11:27-29; 고후6:14-16)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는 때에는(고전5:6,7,13; 살후3:6,14,15; 마7:6) 그리스도에 대하여 큰 죄를 반드시 짓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떡과 포도주의 잔은 성취된 십자가 죽음의 결과로 제자들이 참여하게 될 구원의 축복을 내다보는 언약의 복으로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죄용서를 위해서 부어지는 언약의 피입니다. 너희와 세운 언약의 피(출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와 죄용서를 보장하고 약속하는 새언약(렘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과 많은 사람들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죽음에 쏟아 부으신 여호와의 종(사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에 관한 예언의 성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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