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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람산으로 가신 예수님(마태복음26:30)

예수님과 열한 제자들은 찬송하면서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유월절 식사 때의 찬송은 주로 시편115편-118편입니다.

시편115편 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2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

시편116편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2 그 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편117편 1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찌어다 2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118편 1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찌로다

시편115편은 현존해 계시며 살아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주의 이름의 영광을 찾으라고 간청하는 시입니다. 시편116편은 죽음에서 피한 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찬송시입니다. 시편117편은 하나님의 왕국으로 그의 백성들을 초대하는 시입니다. 시편118편은 새 성전 봉헌식 때 축제의 시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신 것입니다. 그것도 자원하심으로. 어떤 사람이 자신이 죽을지 번연히 알면서 그 길을 가려하십니까? 없습니다. 또한 미래를 확실하게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 아셨습니다. 이 길 말고는 사람을 구원하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P.D.의 말대로 움직이는 탈렌트처럼 움직이고 계십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 1.1km지점의 해발 814m의 산입니다. 감람산 아래로는 기드론 시내가 흐르는 여호사밧 골짜기가 있습니다. 감람산 서쪽 기슭에 겟세마네동산이 있습니다. 감람나무가 무성하게 있어서 감람산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우리의 구원을 확보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들을 모두 싹 쓸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에 그렇게 하지를 못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이루시어 죄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을 찾으셨는데 곧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죄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죄 없으신 아들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서 나심은 바로 이것을 행하시려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드려야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이지만 십자가 고난의 길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의하여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은 필연적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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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을 제정하심(마태복음26:26-29)

예수님은 열 한 제자와 함께 유월절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들어서 축복하셨습니다(eujloghvsa"). 그 축복하신 떡을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받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떡이 ‘내 몸’이라고 하셨습니다(26절). 또 잔을 가지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잔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이 잔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 하셨습니다(27절). 주님은 이제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마실 때까지 마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 제29장은 성찬(Of the Lord's Supper)에 관해서 말을 합니다.

1항.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그가 잡히시던 날 밤에, 그의 몸과 피로 세우신 성례, 곧 성찬을 제정하여, 그의 교회에서 세상 끝날 까지 지키도록 하셨는데, 이는 그가 죽으심으로 자신을 친히 희생 제물로 드린 것을 영구히 기념케 하시고, 참 신자들에게 그 희생이 주는 모든 은혜들을 보증하시며, 그 안에서 그들이 영적인 양식을 먹고 성장케 하시며, 그들이 그에게 마땅히 행해야 되는 의무들을 보다 충성스럽게 이행케 하시며, 그들이 그와 더불어 갖는 교통과 그의 신비한 몸의 지체들로서 그들 상호간에 갖는 교통의 매는 줄과 보증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고전11:23-26; 10:16,17,21; 12:13)고 했습니다.

제2항. 이 성찬 예식을 행할 때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실제로 바쳐지거나, 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희생 제물이 실제로 드려지는 것도 아니다(히9:22,25,26,28). 다만 이 성찬 예식은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스스로 자신을 드린 그 희생을 기념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찬미를 영적으로 봉헌하는 것에 불과하다(고전11:24-26; 마26:26,27).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의 희생 제사인 소위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선택자들의 모든 죄를 위한 유일한 희생 제물이 되시고 유일한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을 가장 극단적으로 손상시키는 것이 된다(히7:23,24,27; 10:11,12,14,18).

제3항. 주 예수께서는, 이 의식을 행함에 있어서 그의 사역자들을 택정하시어 이 예식에 대한 자신의 말씀을 일반 회중에게 선포케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며 떡과 포도주를 축사하게 하시고 그렇게 축사하여 그것들을 거룩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다른 일반 떡이나 포도주와 구별하게 하시고, 떡을 들어 떼게 하시고, 잔을 들게 하신 후에 떡과 잔을(자신들이 나눌 뿐만 아니라) 수찬자(受餐者)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마26:26-28; 막14:22-24; 눅22:19,20; 고전11:23-26). 그러나 그 예식이 거행되는 시간에 회중 가운데 참예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에게도 나누어 주지 못하게 하셨다(행20:7; 고전11:20).

제4항. 사적(私的)인 미사, 즉 성례를 사제(司祭)나 기타 다른 사람에게서 혼자 받는다든지(고전10:6), 또는 잔을 일반 회중에게는 나누어 주지 않는다든지(막14:23; 고전11:25-29), 떡과 포도주에게 절을 한다거나 숭배할 목적으로 높이 치켜들거나, 아니면 가지고 돌아다닌다거나, 혹은 겉치레만의 종교적인 용도를 위하여 그것들을 남겨 두는 일이 있다고 하면 이 모든 것들은 이 예식의 본질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예식을 제정하신 본래의 뜻에도 어긋난다(마15:9).

제5항. 이 성례에 사용되는 외형적인 요소들인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용도를 위해 정당하게 구별되어 있는 까닭에 이 요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 관계는 참된 것이지만 상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요소들은 때로는 그것들이 나타내고 있는 것들의 이름으로 불린다.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불린다(마26:26-28). 그렇다 해도 그것들은 실체와 본질에 있어서는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떡과 포도주로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고전11:26-28; 마26:29).

제6항. 신부가 축사하거나 또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바뀐다고 하는 교리(일반적으로 '화체설'이라고 불리운다.)는 성경에 모순될 뿐만 아니라 일반 상식과 이성에도 모순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리는 성찬의 본질을 뒤엎는 것이요, 여러 가지의 미신과 조잡한 우상 숭배의 원인이 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한 요인이 되고 있다(행3:21; 고전11:24-26; 눅24:6,39).

제7항. 합당한 수찬자들은 이 성례의 가견적 요소를 외형적으로 받을 때에(고전11:28) 또한 내면적으로는 믿음으로 받으며 물질적으로나 신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에서 오는 모든 은혜를 받으며 또한 먹는다. 그러나 성찬을 받는 그 때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또는 밑에,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루터교의 공재설). 그렇지만 그 가견적 요소들을 그 의식에 참예하는 신자들이 그들의 외적 감각에 의해 알아보는 것처럼 실제적인 동시에 영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고전10:16). 8. 비록 무지하고 사악한 사람이 이 성례의 외적 요소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 요소가 의미하는 바의 것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례에 합당치 못하게 참예함으로 해서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지어 자신의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무지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교통을 갖기에는 부적합함으로 주의 상(床)에 참여할 자격이 없으며, 그들이 무지하고 불경건한 상태에 있는데도 이 거룩한 성찬 예식에 참여하거나(고전11:27-29; 고후6:14-16)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는 때에는(고전5:6,7,13; 살후3:6,14,15; 마7:6) 그리스도에 대하여 큰 죄를 반드시 짓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떡과 포도주의 잔은 성취된 십자가 죽음의 결과로 제자들이 참여하게 될 구원의 축복을 내다보는 언약의 복으로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죄용서를 위해서 부어지는 언약의 피입니다. 너희와 세운 언약의 피(출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와 죄용서를 보장하고 약속하는 새언약(렘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과 많은 사람들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죽음에 쏟아 부으신 여호와의 종(사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에 관한 예언의 성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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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말씀하심(마태복음26:20-25)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1일전입니다. 밤에(저물 때) 예수님이 유월절식사를 하시기 위해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이 식탁은 제자들과 다시는 같이 먹을 수 없는 마지막 식탁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아는 사실이었습니다(20).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서로 심히 근심했습니다. 많지도 않은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판다는 사실에 그들은 무척 근심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질문을 합니다. ‘주여 접니까?’ 왜냐하면 혐의를 벗어야 함은 물론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자기냐고 물은 것입니다.

Hendrikson은 이에 세 가지 질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건전한 자기 의심과 혐오스런 위선의 질문,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의 질문입니다.

건전한 자기의심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의 반응과 질문입니다(22). 이 질문에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이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음만 못하다는 것입니다(23,24절). 이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무척 황당했었습니다.

위선의 질문은 모든 것을 숨긴 질문입니다. 가롯 유다 한 사람의 질문입니다. 번연히 알고도 ‘랍비여 내니이까?’ 가룟 유다는 이 질문을 하기 위해 많이 머뭇거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문할 수도, 안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질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도다’.

어린 아이와 같은 질문은 ‘주여 누굽니까?’ 베드로의 독촉을 받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요13:23-30). 베드로가 요한에게 묻습니다. 요한이 주님께 묻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요13:26절).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회개할 기회도 많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성찰할 기회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회개하지 않았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음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차피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이 지상에서 사셔야 했습니다. 고난 받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창3:15/사53장/시22편 등).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가셔야 했습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셔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을 뻔했다가 한없이 낭떠러지로 추락한 것입니다. ‘주여 내니이까?’ 전능한 주님 앞에서 물어보는 뻔뻔함은 아마도 자신일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제주님의 고난은 가속도가 더 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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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만찬 준비(마태복음26:17-19)

무교절의 첫날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유월절을 어디에서 드실 것을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의 만찬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17절). 그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18절).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키신 대로 유월절을 예비했습니다(19절). 무교절은 본래 니산월(종교력1월/민간력7월)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니산월 14일인 유월절 저녁부터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13일경부터 미리 집안의 모든 누룩을 제거했습니다. 따라서 ‘무교절의 첫날’이란 니산월 13일로 목요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체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공적으로 지키기 전날 유월절 의식을 하셨습니다. 마태는 유월절에 쓸 양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유월절 양은 며칠 전에 잡은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14:13에 의하면, 예수님의 지시는 제자 중 두 사람에게 내려졌습니다. ‘아무에게’도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막14:9-13).

당시에 이스라엘은 누구든지 쓸만한 공간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 가족이나 또는 그룹이 그것을 신성한 용도로 쓰고자 하면, 무료로 또는 유료로 내주는 것이 규례였습니다. 그런데 집주인은 아마도 그리스도의 추종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일행에게 편의를 제공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때가 가까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을 것입니다. 유월절이 제정된 것은 출애굽 때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의미는 몰랐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출애굽의 유월절만 알았지,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유월절은 몰랐을 것입니다. 주님의 ‘내 때’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구속사업의 종결이기도 합니다. 이미 예수님의 수난의 시간은 바짝 돌아가고 있습니다. 유월절의 식사는 태풍전야입니다. 자신들을 구원하러 온 예수님을 궤계로 잡아서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종교지도자들,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는 가룟 유다 등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 주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면서 다가오는 수난의 길을 묵묵히 맞으셨습니다.

And

칭찬받는 성도

요한삼서1:1-4

바울 곁에는 항상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나바를 비롯해서 실라, 마가, 디도, 디모데, 의사 누가, 브리스길라, 아굴라 등 이름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같이 했습니다. 바울이 3차전도 여행까지 한 것도, 그와 같이 한 사람들의 덕택입니다.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것도 모두 그들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었던 일들입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들도 이들의 도움으로 복음을 빨리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를 도왔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가 위험에 처했을 때 도왔습니다. 루터 혼자하지 못했습니다. 칼빈 혼자서 그 일들을 다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곁에는 항상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도왔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할수 있었습니다. 복음의 전파는 복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일을 돕는 것은 복 받을 일입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1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편지를 보내는 자신을 장로라고 하는 사람이 가이오에게 편지를 보낸 내용입니다. 오늘 첫 번째로

I. 가이오에 대한 장로의 간구(1-2절)

이 편지는 장로가 가이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기쁨(Gavi>o")이라는 뜻을 가진 가이오에게 사도요한이 보내는 편지입니다. 성경 66권 중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는 요한삼서밖에 없습니다. 요한삼서는 이중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의 편지를 통해서 가이오에 대한 인물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세기의 교회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이오는 휼륭한 성도였습니다(th'/ ejkklhsiva//9절).

사도요한의 편지체로 보아서 가이오는 사도요한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가이오는 요한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 기쁨도 그냥 기쁨이 아닙니다. ‘참 기쁨’입니다(ejn ajlhqeiva/). 시도요한의 편지에 의하면 가이오는 진리를 굳게 붙잡는 사람입니다. 바르게 생활하는 성도였습니다. 얼마나 가이오가 장로의 마음을 시원케 했습니까? 장로는 가이오가 아까워서 부를 수 없을 만큼 표현했습니다.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 사랑하는 자여…”라고 몇 번이고 말합니다.

가이오는 사도요한의 심중에 항상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이오는 소아시아에 있는 한 교회의 신실한 성도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이오는 진리 안에서 행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교회에는 순회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순회전도자들이 교회마다 돌아다니면서 교회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순회자들을 각 교회는 영접하고 잘 돌봤습니다. 이런 순회전도자인 데메드리오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이오는 이들을 극진히 대했습니다. 순회전도자들이 불편이 없도록 배려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교회 안에 디오드레베(Diotrefhv")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장로의 평가는 교만하다고 했습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순회전도자들 및 사도들을 접대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편지를 교회에서 읽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도요한을 헐뜯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반대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한답시고, 말은 하면서 행동은 반대로 했습니다. 장로요한이 이 편지를 쓰는 목적도 디오드레베를 경계하도록 함이었습니다. 디오드레베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것’(filoprwteuvw)입니다. 교회에서 첫째가 되고자 했습니다. 자질이 있어서 첫째가 되면 좋습니다. 그런데, 자질도 없으면서 첫째가 되려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동기로 인해서 디오드레베는 교회의 모든 일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형제사랑은 늘 강조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기본적인 윤리였습니다. 그런데 디오드레베는 이러한 것들을 교회 안에서 행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가이오를 위해서 이렇게 간구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jAgaphtev, peri; pavntwn eu[comaiv se eujodou'sqai kai; uJgiaivnein, kaqw;" eujodou'taiv sou hJ yuchv.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은 말할 수 없이 잘되고 있다. 그와 같이 너의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란다. 항상 건강하기를 바란다. 이것을 내가 기도하고 있다. 가이오의 영적상태를 장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이오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와 건강이 항상 잘되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기도합니까? 영육간에 안녕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이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장로요한은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 사랑하는 자여…”라고 했습니다. 가이오는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 영혼은 말할 것도 없이 잘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kaqwv") 너의 육신적인 일도 잘되기를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됨같이”입니다. 영혼이 먼저 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아무리 강건하고 좋아도 영혼이 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멀리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앞으로 100년 후인 2109년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어디에 있을까요?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 1000년 후인 3009년을 생각해도 마찬가지, 10000년 후인 12009년 후를 생각해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영혼이 어디에 있을까요? 곰곰이 생각하면 심각한 것이 영혼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이 먼저 잘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잘되면 다음으로 육신이 잘되어야 합니다. 육신을 위해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고용불안시대입니다. 계속 해고된다고 하는 뉴스뿐입니다. 이 세상은 만만치 않음을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습니다. 고용불안사회, 그 안에서 생존 경쟁해야 하는 우리,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영혼이 잘됨같이 우리들의 범사(pavntwn)가 잘되어야 합니다. 장로가 가이오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장로가 주님의 이름으로 가이오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들의 범사가 잘되기를 축복합니다. 성도들이 속해 있는 직장이 튼튼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의 사업장이 튼튼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잘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는 모든 일마다 영혼이 잘됨같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로는 하나님의 교회에 열심인 가이오에 대하여 마음껏 축복했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II. 가이오에 대한 장로의 기쁨(3-4절)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 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基督敎新聞 7월19일자(1981호) 1면에 [장로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다짐]하자는 기사가 났습니다. 뉴스앤조이를 보면 ‘세습 삼총사를 탄생시킨 감리교의 수치’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교회들이 다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일들은 기자들이 신문에 게제하거나 방송을 할 때만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터넷매체가 있기 때문에 즉시 전 세계로 뉴스들이 즉시 알려집니다.

제발 교회들이 싸우지 않았으면 하는데, 교회들이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20년, 어떤 교회는 10년, 어떤 교회는 5년간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이들교회들은 교회에서 싸우고, 길거리에서 싸웁니다. 법정에서 신랄하게 상대를 공격하면서 싸우고 있습니다. 교회의 싸움들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줍니까? 아주 악한 영향을 교회에 끼치게 됩니다.

IMF를 기점으로 해서 한국교회는 사람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질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IMF상황으로 모두들 죽어가고 있는데, 교회는 마천루를 세우더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행하면서 하면 좋은데 진리는 어디로 도망가고, 교회만 커져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교회대로 싸우더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디오드레베’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자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영원히 문제의 교회로 전락해버립니다. 디오드레베 같은 장로, 디오드레베 같은 집사들이 있는 한 더는 교회의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모든 것들을 제 뜻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시라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로는 이어서 가이오에 대한 칭찬을 합니다. 너에게로부터 갔던 형제들이 돌아와서 너의 신앙에 대해 말했다는 것입니다. 네가 진리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 안에서 행하더라는 것입니다. 언행이 일치된 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나무랄 수 없는 신앙을 가졌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복음과 예수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즉 가이오는 예수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며, 성경대로 행하는 사람이더라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장로요한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내가 심히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성도여러분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제가 집사 때부터 따라주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사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인정한 것입니다. 오랜 기간 축도도 없이 여러분들이 참아주었습니다. 결국 준목을 거쳐 목사안수까지 마치게 해주었습니다. 우리 모두 감사할일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신앙을 보면서 심히 기뻐합니다. 목회자로서 성도들의 신앙성장을 보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습니다. 이제 있을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5:13-16을 보면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주님께서 우리더러 세상의 소금이라 했습니다(ejste to; th'" gh'"). 우리더러 세상의 빛이라 했습니다( JUmei'" ejste to; fw'" tou' kovsmou). 교회 내에서만 빛이 소금이 아니고, 교회 내에서만 빛이 아니고, 세상 속에서 소금이고, 빛이라 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빛과 소금입니까? 예수그리스도로 거듭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하늘의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금의 가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소금은 방부제(antiseptic)가 아닙니다. 소금은 다만 방부성을 가졌을 뿐입니다(aseptic). 방부제는 독을 막습니다. 방부제는 그 독을 제거합니다. 그러나방부성을 가진 것은 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소금은 독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즉 소금은 결코 부패를 제거하지 않습니다. 소금은 썩는 확산을 방지합니다. 오염된 고기에 소금을 넣는다고 하더라도 그 고기를 신선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고기가 신선할 때에 소금을 넣었다면 썩지 않습니다.

우리의 옆에 있는 악한 사람을 우리가 고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의 옆 자리에 앉아 일하는 선한 사람에 의해서 영향은 줄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의행동이나 말이 직장에서일하는 옆 사람에게 기회를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그 행동이나 말이 악한 사람에게 제동을 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소금은 방부성을 가진 것입니다. 악의 확산을 막는 것이 소금입니다. 우리들의 기능은 죄의 상태에 빠져 있는 인간세계 내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악의 확산을 막는 것입니다. 주님 나라의 백성들 타락한 인간들에게선하게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타락의 세력을 억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려면 진리를 소유해야 합니다. 진리를 소유해야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한글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수정과 서상륜입니다. 이수정은 일본에서 서상륜은 만주에서였습니다. 서상륜은 성서의 번역과 함께 목판을 일일이 깎아서 성경을 인쇄까지 했습니다. 서상륜은 1,5000부나 인쇄한 성경을 만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그 위험한 행로를 마다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인 황해도 솔내에 솔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마을 58세대 중에서 50세대가 그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And

배반자 가룟 유다(마태복음26:14-16)

가룟 유다는 사도였습니다. 열 두 사도 중 마지막에 언급된 그는 제자들 중에 악명이 높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다고 말씀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와 가롯 유다는 사람들의 삷을 욕되게 하는 표현을 쓸 때 꼭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나쁘게 사용되거나 조롱거리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악한 죄이지만 특히 가룟 유다는 죄질이 더 나쁘고 중합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미미하게나마 구하려는 노력은 했지만, 유다는 과감하게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들은 유다를 가장 비열한 모습으로 묘사하거나 표현했습니다.

14절에서 16절을 읽어보면 다른 제자들은 유다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기 사흘 전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은밀하게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유다가 태어났던 가룟(그리욧)은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였습니다. 사도로 택하심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돈궤를 맡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가장 좋을 뻔한 기회를 놓친 사람입니다.

유다는 처음부터 심중에 배반을 꿈꾸었습니다. 수시로 돈 궤에 손을 댔습니다. 각 복음서 저자들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마10:4/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마26:14/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마26:25/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마26:47/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마27:3/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막3:19/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막14:10/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막14:43/말씀하실 때에 곧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눅6:16/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눅22:3/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눅22: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요6:71/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요12: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13:2/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요13:2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요13:29/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요18:2/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요18:5/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행1:16/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행1:25/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유다는 사단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유다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유다의 배후에 유혹자가 있었습니다. 떡 조각을 건네받은 후(요13:2), 유다는 예수님이 아니라 사단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사단이 유다의 마음을 휘어잡았습니다.

26:1-5을 보면 예수님을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의 음모가 있었습니다. 물론 사단이 사주한 것입니다. 이제 사단은 예수님의 최측근의 사람을 이용한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흥정을 합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들에게 넘겨주겠다. 너희가 얼마를 주겠느냐?’ 그들은 지체할 것 없이 은화 30을 달아주었습니다. 은화 삼십을 받은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팔아넘길 기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매우 불쌍한 처지가 된 것입니다. 천국에 갈 뻔했던 사람이 이제는 지옥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And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하는 한 여자(마태복음26:6-13)

예수님의 일행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었을 때였습니다(6절). 예수님의 일행은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여자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깨트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옥합은 매우 귀한 향의 옥합이었습니다(7절). 이것을 본 제자들은 매우 성질이 났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에 매우 값나가는 향유였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줘야 했다는 생각입니다. 9절을 보면 많은 값이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 옥합이 얼마나 비싼 화장품이길래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까?

먼저 ‘나드’(navrdo")는 발레리아나'(Valeriana/쥐오줌풀)속(屬)에 속하는 향기로운 동인도산 식물의 줄기에서 채취한 값비싼 향유입니다. 이 식물은 날카로운 모양의 잎과 붉고 탐스러운 꽃이 곧은 줄기에 달려 있으며, 고대인들은 매우 값진 향유를 준비할 때 이 즙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막14:5을 보면 제자들이 옥합의 가격을 대충 이야기했습니다. 300데나리온 이상에 판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옥합은 직장에서의 1달 월급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300X10,0000=300,0000원 이상 되는 옥합입니다. 제자들은 옥합의 귀중함만 알았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녀가 옥합을 깨트린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어째서 이 여인을 괴롭게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주님께 좋은 일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만, 이제 나는 항상 함께 있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오히려 혼낼 일이 아니라 칭찬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10-13절).

기름을 부은 이 여인은 지상최대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제의적인 상황을 마련했습니다. 여인(마리아)은 이번이 예수그리스도를 공경할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것을 받으셨습니다. 지상의 누구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시는 예수님께서 한 달의 월급에 해당하는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여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음은 예수님에 대한 헌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죽음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수난이 바로 임박했음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헌신은 슬픈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조금 후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이 여자의 한 일은 내 장례를 위함이니라’한 말씀을 우리는 두고두고 기억하여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이신 예수그리스도는 이제 전 세계로 향하기 위한 걸음을 한 걸음씩 딛고 나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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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사사기1:1-7 

 

설교 작성을 하기 위해서 어떤 단어를 사용하고자 할 때 사전을 종종 찾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상식과 사전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이런 뜻이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전을 찾아보면 전혀 다른 뜻이었을 때, ‘사전을 찾기를 잘 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실수를 줄이기 위한 가장 좋은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직장인들은 결재권을 가진 자에게 결재를 얻은 후에 처리해야 합니다. 건축을 하는 사람들이 설계대로 짓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건축을 할 때에는 그 건물은 얼마 있지 않아 부숴야 합니다. 설계자가 설계한 것이 의심스러울 때는 설계자에게 물어서 시공해야 합니다. 건축자 마음대로 철근을 이렇게 많이 넣을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시공한다면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물어서 일들을 원만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물론 일에 자신이 있어서 일일이 묻지 않아도 될 사항들은 묻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이라든지 본인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일들은 반드시 물어서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괜찮겠지, 하는 자신만의 생각으로 일을 처리했다가 낭패를 본 사건들이 대단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반드시 확인을 하고 모르는 것들은 물어서 처리해야 될 줄로 생각합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덥석 일을 처리하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기 일수이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사사기를 여는 말씀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입니다. 상당히 암울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느 지파가 올라가서 가나안과 싸울 것을 여호와께 물었습니다(1).

 

성경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죽음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셋의 죽음을 비롯해서(5:8), 노아의 죽음을 기록했습니다(9:29). 데라의 죽음이 기록되었는가하면(11:32), 아브라함의 죽음도 기록되었습니다(25:7).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었습니다(34:5).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들여놓은 여호수아도 죽었습니다(24:29). 사람들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죽음 뒤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어떠한 상황으로 바뀌는가에 성경은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상당히 세력 있는 교회들이 전임자들은 잘했었는데, 후임이 잘못 들어와 교회가 상당히 시끄럽습니다. 이런 면에서 여호수아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앞날에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홍수 후에 노아의 뒤를 셈이 잇습니다. 아브라함의 뒤를 이삭이 이어나갑니다. 요셉이 이스라엘을 돌보다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인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24:29). 여호수아의 뒤를 이을 하나님의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에게 큰 handicap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께 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묻고 의지해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서 가나안 정복을 일단락 지었습니다. 그리고 각지파별로 가나안을 분배하였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정복된 땅이 아니었습니다. 未征服 상태였던 땅이 상당 했습니다(13:1-7). 그러나 이 땅들은 각 지파들에게 맡겨진 mission의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이끌어나갈 이렇다 할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는 이미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가나안을 정복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사람이 나올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현재 당면한 문제를 타계해나가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와서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여호와께 묻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의중을 묻는 것입니다. ‘우림과 둠밈의 판결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의중을 물었습니다. !yriWa/’ūrîm!yMiTu/thummhîm은 대제사장의 흉패 안에 넣어 휴대한 보석입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 그것을 꺼내어 보았습니다(삼상14:41, 28:39, 33:8, 8:7, 27:21) 우림과 둠밈 둘 중 하나는 '', 하나는 ''로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인간적인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민수기27:21을 보면 여호수아가 대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사무엘상22:10을 보면 대제사장 아히멜렉이 여호와의 뜻을 묻고, 다윗에게 골리앗의 칼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사무엘하2:1을 보면 다윗이 전쟁을 할 때마다 여호와의 의중을 물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를 물었던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맞는 것인가? 내가 하는 일들이 옳은 것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일인가?를 물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묻습니까? 사람이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타락함으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해졌습니다. 죄는 아담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닙니다. 온 인류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전적으로 무능해졌습니다. 죄로 인해서 우리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혹자들의 말대로 예수 믿는 사람이 덜 떨어져서 하나님께 묻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자신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많이 물을수록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앙의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많이 물었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 그리고 여호사밧, 히스기야 왕 같은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본적인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무엇이 모자라서 하나님께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매사를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처리하지 말고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내 고집대로 처리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내 의도대로 하지 말고 성령님의 의도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의 인생에 black hole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이 제 길을 찾아갑니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쳐도, 앞으로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의도를 먼저 물은 후에 처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감동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인생입니다.

 

중공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헝다그룹(恒大集団, Evergrande Group)이 부도가 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헝다는 연말까지 이자로만 68000만달러(7909억원)를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갚지 못할 상황입니다. 헝다그룹은 중공 광둥성 선전시에 본사를 두고 있습니다. 창업자 쉬자인은 미국 포브스에 따르면 20193월 현재 362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해 세계 22, 현재 중국 2위의 부호였습니다. 헝다 부채는 19700억위안입니다. 355조원입니다. 우리나라 2022년 예산이 603조원입니다. 우리나라 예산의 약 69%입니다. 중공이 헝다그룹의 부도처리에 고심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경제가 휘청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께 절대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할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관계를 맺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염려와 근심은 엄청 합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irony한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뒤에는 기도한 것 이상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까지는 결코 기도한 이상으로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자주자주 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모세를 잃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여호수아마저 잃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초비상사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광야생활 40년 후에 가나안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아직 mission의 땅이었습니다. 가나안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이 혼재하여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는 지도자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없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같이 가나안에 들어온 갈렙이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이제 나이가 많았습니다. 유대정벌을 직접 지휘했던 그는 이제 나이로 인해서 헤브론에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노심초사하여 하나님께 물을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2절에서 7절을 보면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3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7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응답하셨습니다(2-7).

 

우리 선배들의 믿음은 대단했습니다. George Muller목사가 Canada 퀘벡(Quebec)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가 Newfoundland에 왔을 때 짙은 안개로 인해서 배가 22시간이나 꼼짝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Muller 목사는 선장을 찾아가 오늘이 수요일이므로 토요일까지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Quebec에 도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선장은 안개가 이토록 짙은데 어떻게 갈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라고 했습니다. Muller 목사는 나는 내50평생에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사람이요. 어떻게 해서라도 가야하오.”라고 하자 선장은기꺼이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저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Muller 목사는 그렇다면 우리 해도실로 들어가서 기도합시다.” “목사님 지금 안개가 얼마나 짙은지 아십니까?” “난 모르오, 나는 안개의 짙은 정도를 보는 게 아니라 나의 삶을 조정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소.”라고 하자 선장은 못 마땅해 하며 해도실로 들어갔습니다. Muller목사는 주님, 주님의 뜻이라면 이 안개를 5분 내로 치워 주십시요. 주님이 Quebec에 만들어 놓으신 약속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가 기도를 끝내자 선장이 기도할 차례였습니다. Muller목사는 당신은 하나님께서 안개를 치워주실 것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이미 치우신 것을 믿습니다. 더 이상 기도하실 필요 없습니다.”하고 밖으로 나가자 안개는 곧 걷혔습니다.

 

전 이스라엘이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하자 곧바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의 손에 이 땅을 붙였노라하셨습니다. 문자적으로 표현하면 나 여호와가 이 가나안 땅을 그 손에 쥐어주겠노라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들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보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대 하나님께서 내가 쥐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유다입니까? 창세기49:8-12절을 보면 야곱은 유다를 엄청나게 축복했습니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라 했습니다. 유다는 마치 사자 같아서 누구든지 유다를 무서워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처럼 유다지파는 가나안 정복 후에 요단 서편지역을 가장 먼저 분배받았습니다(15). 그렇다고 유다지파가 여호수아처럼 이스라엘의 전체 선봉장은 아니었습니다. 유다지파 경내에 아직 몰아내지 않은 가나안을 정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시므온지파에게 같이 전쟁을 하자고 부탁합니다. 3절을 보면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왜 유다가 시므온지파에게 같이 전쟁을 하자고 합니까? 시므온의 기업이 유다의 지역 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19:1).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시므온이 유다와 같이 전쟁에 가담한 것은 유다와 시므온의 기업에 아직 남아있는 가나안을 멸망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다와 시므온은 전쟁에 나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흔히 실현성이 없는 헛된 이론만 전개하는 것을 卓上空論이라 합니다. 즉 말뿐인 실천입니다. 이론은 좋습니다. 그러나 실천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탁상공론은 헛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전쟁준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올라가지 않았다면 가나안을 멸망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유다가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유다경내에 있는 강력한 사람들을 멸망시켰습니다. 가나안사람과 브리스 사람 1,0000명을 죽였습니다. 이 시대에 말로만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로만 사탄을 정복하고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로만 정의를 외치고, 말로만 헌신합니다. 그리고 막상 실행에 옮기고자 할 때에는 쏙 빠져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탄이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사탄이 위로하고 그런 사람들을 심히 장려합니다. 강력한 우리 편이라고 자랑하면서 자기경내로 끌어들입니다.

 

당시 중동지방에서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연합전선을 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어느 날 풀무 같던 애굽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놓아두었다가는 큰 일이 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사이가 좋지 않던 나라들이 뭉쳤습니다. 이들은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나라를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그래서 연합전선을 펴서 이스라엘을 진멸코자 했습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을 치고 있을 때에 아도니베섹이 북쪽에서 유다와 베냐민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와 시므온은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를 치기 전에 먼저 아도니베섹을 쳤습니다. 그를 사로잡아 다시는 전쟁하지 못하도록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끊어버렸습니다. 아도니베섹을 먼저 잡지 못한다면 전쟁이 힘들어지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붙이시니까 마치 날선 낫으로 보리를 추수하는 것 같았습니다. 칼 한번만 휘둘렀는데 여러 명이 죽었습니다. 화살을 한 개 쏘았는데, 죽은 사람은 여럿이었습니다. 화살에 맞아죽고, 그것을 본 대적들이 심장마비로 죽고, 도망가다가 밟혀서 죽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붙이시니까 전쟁이 일방적이었습니다.

 

종교 중에 가장 강력한 종교가 그리스도교입니다. 왜냐하면 전능자이신 창조주를 주님으로 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동으로 모든 것을 해주셔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자동(automatic)으로 처리하시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분담이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기를 원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전쟁을 하시지만 우리도 action을 취해야 합니다. 앉아서 생각과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일어서야 합니다. 일어서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묻는 일입니다. 다음으로는 전쟁준비입니다. 다음으로는 싸우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유다와 시므온이 싸우러 갈 때에 적들을 이스라엘에게 붙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건너뛸 것은 없습니다. 어떤 것 하나만 빠져도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인데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책입니다. 시험에 합격할 때마다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나 불합격할 때마다 고난과 패배를 주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이 죽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순종할 것을 강력하게 피력했습니다. 만일에 너희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가나안을 너희들에게 붙이실 것이지만, 만일에 너희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한다면 너희들을 가나안의 손에 붙일 것이라 했습니다. 순종하면 복이고, 불순종하면, 저주(23:6-16)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할 때 우리가 그 혜택을 입습니다.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자녀라도, 은혜를 절대로 베푸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복이 됩니다. 우리들의 복은 항상 긴장가운데 유지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약속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무조건적인 약속이 아닙니다. 그 약속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우리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한 것들을 기대하고 소유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우리들에게 성경의 언약을 보증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언약을 버리면 세상 사람들보다 오히려 못한 존재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성경의 언약들이 내 것이 되지만, 순종하지 않을 때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순종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한다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관심사를 돌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나에게 엄습하는 갈등과 고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을 포기한다면, 우리의 고백은 헛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관심사는 불투명해질 것입니다.

 

사사기의 중점 내용이 무엇입니까? 언약을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그들을 인도하던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는 자세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 이스라엘과 대적들 간의 관계가 긴장해야 함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중점내용이 무엇입니까? 언약을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와 이 세상과 대적들 간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에서 혼란이 오면 모두 흩어져 버립니다. 우리와 세상과의 관계는 적대관계입니다. 우리와 대적의 관계는 싸워야 할 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긴장관계입니다. 긴밀한 유대관계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꾸어서 세상과는 긴밀하게 유대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소원하거나 적대관계를 맺으면 뻔한 인생이 됩니다.

우리에게 아도니 베섹 같은 강력한 대적들이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가나안과 브리스사람들과 같은 세상의 세력과 연합하여 우리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파김치가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겨우 숨만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들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응답한 기도에 믿음과 순종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럴 때 아도니 베섹 같은 문제들을 힘을 쓰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같이하심을 잊지 마시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묻고 응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절대 비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과 같이 하십시다. (closing)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맙시다. 우리는 미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미래를 붙들고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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