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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09
    예수님이 죽으신 후/백부장의 고백
  2. 2010.09.08
    예수님이 죽으신 후/죽은 자들이 살아남
  3. 2010.09.07
    예수님이 죽으신 후/땅이 진동, 바위가 터짐, 무덤들이 열림
  4. 2010.09.06
    예수님이 죽으신 후/성소의 휘장이 찢어짐
  5. 2010.09.05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간과하시는 하나님
  6. 2010.09.04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대제사장과 장로들
  7. 2010.09.03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지나가는 사람들
  8. 2010.09.02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예수님과 함께 죽임 당한 강도들

예수님이 죽으신 후/백부장의 고백(마태복음27:54)

백부장과 로마의 군사들이 예수님의 죽음 후에 지진과 그 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54절).

백부장(eJkatontavrch"/헤카톤타르케스)는 헤카톤(eJkatovn/100)과 에르코(a[rcw/다스리다))에서 유래했으며, 로마의 ‘백부장’을 의미합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다국적 용병들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들은 통솔력이 뛰어났으며, 책임감이 강해 상관들로부터 신뢰를 받았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백부장들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오히려 유대인들보다 나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버나움에 거주하는 백부장은 부하의 중풍병을 고치기 위해 친히 예수를 찾아왔습니다(마8:5-13).

예수님의 십자가 형장에 있던 백부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끝까지 지켜보면서 주님을 가리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였습니다(마27:54).

가이사랴에 거주하는 백부장 ‘고넬료’는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자로서 베드로를 초청하 여 설교를 듣던 중 그와 온 집안 식구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행10:1).

바울 당시 예루살렘의 치안을 담당한 백부장(행22:25) 역시 바울을 도왔습니다.

‘율리오’라는 이름의 백부장은 로마 근위대 아구사도대의 백부장으로서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호송될 때 책임을 맡았습니다(행27:1,6).

이들 백부장들은 이방인임에도 자기 종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거나 직접 찾아갔습니다(눅7:1-7, 마8:5,6).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마8:7-9). 이로 인해서 예수님은 그들을 칭찬했습니다.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차린 사람은 백부장 한 사람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이 이 사람을 특별히 지적하는 것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백부장은 율법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의 체험도 없었습니다. 오직 로마정부를 위해서 속된 명령을 받았던 그가 보는 징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였는데, 백부장은 되어지는 일들을 보고 거룩한 고백을 했다는 것은 본 백성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여, 그 도성이 매우 무서운 저주아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도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하는 말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말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 행세를 했기 때문에 처형 받는다는 소문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이 그리스도를 의로운 사람이요 이런 혐의가 그리스도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동시에 선언한 셈인데, 이것은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가 되었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신령한 무엇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Calvin ).

And

예수님이 죽으신 후/죽은 자들이 살아남(마태복음27:52-53)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밝은 낮이 캄캄해졌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습니다.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과연 이들은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이 구절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난해구절입니다.

이에 대한 유상섭은 성도들의 부활사건은 옛 시대가 종식되고 부활의 새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구약시대의 많은 성도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했으나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였다고 언급함으로 저자는 이들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에 기인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로써 저자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로 제시한다고 했습니다.

Hendrikson은 이 성도들이 누구인지는 진술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의 부활이라고 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죽는 순간에, 다른 표적들과 함께 발생했고, 그 죽음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변화한 이들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순간에 얼어나 무덤을 떠났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무덤을 떠난 순간부터 소위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기까지 어느 곳에 있었는지 설명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내 보이신 때 이외의 시간 동안에 그가 어디 계셨는지에 대해서도 아무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것을 통하여 볼 때 이들 성도들이 다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틀림없이 그들이 잠시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보인 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늘에 계신 당신께로, 그들의 영혼이 있던 곳으로 데려가셨을 것이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의 재림 때 우리의 영광스런 부활의 보증이 됨을 보여준다고 했다.

Calvin은 예수님이 사망의 감옥에 들어가신 것은 거기에 갇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서 노예살이하며 갇혀 있는 자들을 모두 해방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올 증거하는 전조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누추한 육신의 연약성이 드러난 그 시각에 그의 죽음의 찬란하고 신령한 능력은 지하 세계까지 미쳤다. 이것이 곧 무덤에 갇히기로 되어 있던 그가 다른 사람들의 무덤을 열어 제친 이유다. 그리스도의 임종 시에 무덤이 곧 열렸으며 그의 부활 시에 경건한 자들 가운데 얼마가 숨을 되받아 가지고 나와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던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는 그의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셨으며, 그(예수)는 비로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Matthew Henry는 먼저 일어났던 사람들은 최근에 죽었던 성도이다. 그들이 부활하여 더 이상 죽지 않았으며, 그와 함께 영광스럽게 승천했다고 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상이한 견해로 난해한 구절이지만 예수님이 부활후에 무덤에서 이들이 나온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성도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표론적인 것입니다.(마태복음27:52-53) 2010.1.6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밝은 낮이 캄캄해졌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습니다.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과연 이들은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이 구절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난해구절입니다.

이에 대한 유상섭은 성도들의 부활사건은 옛 시대가 종식되고 부활의 새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구약시대의 많은 성도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했으나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였다고 언급함으로 저자는 이들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에 기인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로써 저자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로 제시한다고 했습니다.

Hendrikson은 이 성도들이 누구인지는 진술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의 부활이라고 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죽는 순간에, 다른 표적들과 함께 발생했고, 그 죽음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변화한 이들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순간에 얼어나 무덤을 떠났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무덤을 떠난 순간부터 소위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기까지 어느 곳에 있었는지 설명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내 보이신 때 이외의 시간 동안에 그가 어디 계셨는지에 대해서도 아무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것을 통하여 볼 때 이들 성도들이 다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틀림없이 그들이 잠시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보인 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늘에 계신 당신께로, 그들의 영혼이 있던 곳으로 데려가셨을 것이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의 재림 때 우리의 영광스런 부활의 보증이 됨을 보여준다고 했다.

Calvin은 예수님이 사망의 감옥에 들어가신 것은 거기에 갇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서 노예살이하며 갇혀 있는 자들을 모두 해방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올 증거하는 전조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누추한 육신의 연약성이 드러난 그 시각에 그의 죽음의 찬란하고 신령한 능력은 지하 세계까지 미쳤다. 이것이 곧 무덤에 갇히기로 되어 있던 그가 다른 사람들의 무덤을 열어 제친 이유다. 그리스도의 임종 시에 무덤이 곧 열렸으며 그의 부활 시에 경건한 자들 가운데 얼마가 숨을 되받아 가지고 나와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던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는 그의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셨으며, 그(예수)는 비로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Matthew Henry는 먼저 일어났던 사람들은 최근에 죽었던 성도이다. 그들이 부활하여 더 이상 죽지 않았으며, 그와 함께 영광스럽게 승천했다고 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상이한 견해로 난해한 구절이지만 예수님이 부활후에 무덤에서 이들이 나온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성도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표론적인 것입니다.

And

예수님이 죽으신 후/땅이 진동, 바위가 터짐, 무덤들이 열림(마태복음27:51)

예수님이 죽으시자 흑암이 계속되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다음으로 땅이 진동했습니다. 그리고 바위가 터졌습니다. 이어서 죽어 있던 사람들의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모두 다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찢어지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시에 땅이 진동했습니다. 왜 무덤들이 열렸습니까? 골고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 성전에 있던 사람들은 큰 변고가 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두려운 시간에 지역적인 지진이 왜 하필 예루살렘에 났습니까? 그것도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죄를 심판하시는 듯 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지각변동에 의해서 일어나는 지진은 그 부근의 모든 지역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골라서 일어난 것입니다. 예루살렘 전체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골고다 전체지역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일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천하에 최고의 수행(修行)과 수양(修養)을 쌓았다하더라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천국을 바라보지도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통달했다고 하더라도 천국의 근처에도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믿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연장이 천국인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면 다음 세상으로 편안하게 이어질 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지식, 어떤 종교를 가졌을지라도, 예수 이외에 구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후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기적입니다. 밝은 낮이 밤으로 변했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고, 지진이 나서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렸습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라는 것을 알린 것입니다. 더는 사망의 권세가 이 땅을 다스리지 못함을 알리신 것입니다. 창세 이래 죄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처형을 비웃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사람들 등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사람의 죽음보다 초라했습니다. 초라하기보다 저주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일어난 것은 어떤 사람보다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필두로 지구상에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새 하늘, 새 땅의 주인이신 분, 지진의 주인이신 분,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분 이 이 세상의 심판하는 권한을 가지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렸는데, 이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시기전에 이미 성경에 예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생애도 예언대로 사셨습니다. 이제 죽음마저도 성경을 성취케 했습니다.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사망의 권세를 주님께서 깨트리셨습니다.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And

예수님이 죽으신 후/성소의 휘장이 찢어짐(마태복음27:51)

이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고”. 휘장은 출애굽기 26:31-33을 보면 성소와 지성소를 분리하는 휘장입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들어올 수 있고,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속죄제를 드릴 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짰습니다. 거기에 금으로 그룹들을 수 놓았습니다(출26:31). 두꺼운 천으로 짠 휘장은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했습니다. 제사장들은 매일 성소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고 그곳에 놓인 진설병과 기름을 새로 갈았습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대속죄일에 제물의 피를 들고 들어가 언약궤에 뿌렸습니다. 휘장은 기본적인 영적실재를 상징했기 때문에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지만,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면전에 자유롭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간단한 베로 된 휘장일까? 그래서 사람이 능히 찢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짰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서는 찢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황소 두 마리의 힘으로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찢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로 통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 휘장은 곧 예수그리스도의 육체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하고 단번에 드린 제사로서 그의 백성들을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더 이상의 희생제사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성전시대는 종식된 것입니다. 히브리서6:9절과 10절을 보면

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10:20을 보면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성전휘장이 갈라짐으로 인해서 율법시대는 종식되었으며, 예루살렘시대 역시 종식되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의 시대도 종식된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라도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모든 백성을 위해서 대제사장이 되셨고, 희생제물이 되셨으며, 그로 인해서 우리들의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처럼 약한 육신을 입으시고, 약한 우리들을 몸소 체휼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를 믿지 않는 것은 교만입니다.

And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간과하시는 하나님(마태복음27:45-46)

45절 46절을 보면 예수님의 절규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hjlivv hjliv lamav sabacqaniv)였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말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이며 ‘사박다니’는 ‘내버려두다’라는 아람어 ‘쉬바크’의 음역이며 ‘당신이 나를 버렸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입니다. 이 상황은 제6시로부터 제9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계속된 후 제 9시에 하신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시간들은 약간 다릅니다.

밤중기점(로마식)

새벽기점(유대식)

시간

성경

요한복음

공관복음

아침

마16:3

제 6 시

제 0 시

오전 6 시

요19:14

제 9 시

제 3 시

오전 9 시

마20:3

제 10 시

제 4 시

오전 10 시

요1:39

정오

행22:6

제 12 시

제 6 시

오전 12 시

마20:5

제 3 시

제 9 시

오후 3 시

마20:5

저녁

마16:2

제 5 시

제 11 시

오후 5 시

마20:6

제 6 시

제 12 시

오후 6 시

요4:6

제 7 시

제 1 시

오전 7 시

요4:52

제6시는 유대의 시간입니다. 로마식의 시간으로는 제12시로서 오전12시입니다. 제9시는 오후3시입니다. 그러므로 오전12시부터 오후3시까지 암흑의 시간이었습니다. 오후3시쯤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절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언뜻 생각하면 마치 아버지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신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과연 이 외침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외침과 암흑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그가 대신 받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주님께서 피하지 않고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이었습니다. 흑암은 곧 심판으로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세 시간동안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습니다(갈3:13). 하나님은 예수님의 인성을 제한된 의미에서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자기 백성의 죄를 인하여 철저하게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버림을 받고 있다고 탄식했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한 외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 깊숙이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 외침은 우리들이 져야 할 죄의 형벌들입니다.

And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대제사장과 장로들(마태복음27:41-43)

사람의 시기심은 큰 산도 불태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시기심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있습니다. 다만 이 시기심을 어떻게 제어하느냐입니다. 시기심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일들이 큰 손해를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은 유대의 상위그룹들입니다. 즉 많은 기득권들과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방에서 박사들이 유대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묻는 말은 청천벽력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유대의 왕이 어디에서 나느냐?’고 물었습니다(마2:2). 그들에게는 유대의 왕이 필요 없었습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에 어느 때보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헤롯은 왕위가 위태로울까봐서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의 정적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틈을 잡지 못했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스파이를 보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로부터 정말 반가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것도 밤에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혹시 잘못될까봐 그 밤에 거짓증인을 내세워 기획재판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최종 재판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술수를 썼습니다. 민란이 나려는 것같이 해서 그 고비도 넘겼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큰 정적을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최소한 예루살렘에 종교최고책임자들이라는 사실도 잊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나가는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희롱했습니다(41절). 군중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입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조소는 증오와 시기로 섞여 있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가증스럽고 야비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공격한 것입니다. ‘네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능히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53:3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에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120명의 사람들입니다. 그의 제자들입니다. 그의 치료를 받고 나음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이외는 모든 유대인들이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은 마귀에 얽매어 있었습니다. 죄로 온통 꽉 차있습니다. 그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비하의 신분 중에서 가장 절정입니다. 그러나 곧 이 세상을 심판하고 마귀의 왕국을 송두리째 파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과 마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분들은 삼위의 하나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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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지나가는 사람들(마태복음27:39-40)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는 것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목격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무죄라는 것을 모두 알 것입니다. 무죄한 사람이 사형을 당하는 것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이 사람들은 전혀 그러한 마음들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데 불쌍한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기를 구원하라’고 조롱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모욕했습니다. 말로만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고 하지말고 우리의 눈에 보이게 하라고 모욕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공개처형의 날, 십자가형이 집행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저희가 나를 본즉 머리를 흔드나이다(시편109:25).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시편22:7). 머리를 흔들며(kinevw)는 긍정적인 흔듦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흔듦입니다. 메시아라면 표징을 보이라는 흔듦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그들은 아예 신이 난 듯 했습니다.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시펀22:8).

그들이 주님을 조롱했던 것은,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는 아들로서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죽는 순간까지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주님자신과 우리를 동시에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했습니다. 이 표현도 그들이 놀라움이나 존경의 태도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인간적인 냉담함을 보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교회를 조롱하고, 복음을 믿지 않습니다. 복음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복음에 대해서 예단(豫斷)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자신들을 위해서 죽었지만,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티그리스도가 나오고,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리에 지식이 들어있다고 해서 이 세상의 주관자를 몰라보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그들의 요구대로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될까? 참으로 아찔하기만 합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 후에 그 조롱으로 인하여 조롱을 당할 것이 뻔한데, 왜 조롱하는지 그 영혼들이 불쌍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은 예언된 대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필연적으로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주님의 깊은 뜻을 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해서야 그때의 정경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인간들의 죄가 이토록 큽니다. 그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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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예수님과 함께 죽임 당한 강도들(마태복음27:38,44)

예수님과 함께 그날 그 시에 함께 사형당한 사람들은 강도 둘이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았습니다(38절). 이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어서 예수님의 능력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다른 사람들처럼 욕하고 능력을 보이라고 했습니다(44절). 마가요한도 역시 마태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강도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같이 살자고 했습니다(막16:32). 그러나 누가복음은 더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23:39-43을 보면

2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Hendrikson은 주석하기를 진실하게 회개한 모든 죄인들에게 귀한 위안을 주는 기사라고 했습니다. 두 강도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했습니다(마 27:44, 막15;32). 그러다가 한 사람이 침묵하고 회개했습니다. 그 사람이 오른편 강도라는 것은 신빙성이 없습니다. 둘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동료 강도를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자신들은 마땅히 형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가 회개했을까? 우리는 잘 모르지만 추론은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내세를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태도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령께서 역사하셨음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주님께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낙원은 어디인가? 우리에게 낙원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낙원(paravdeiso")은 천국입니다. 이 낙원은 과거의 성도들이 현재 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도 역시 이 세상을 떠나면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완성된 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완성된 천국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집니다. 모든 성도들이 부활 후에 영혼과 변화된 육체가 합해져 완성된 천국에 가게 됩니다. 따라서 강도들이 가 있는 곳에, 베드로도 있고, 사도요한도 있으며, 아브라함도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은혜의 구원입니까? 죽기 전에 구원받는 다는 것은, 정말 귀한 구원입니다. 따라서 숨이 붙어 있을 동안에 구원입니다. 숨이 떨어지면 그 영혼은 인간이 어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도 그 영혼에 손댈 수 없습니다. 만일에 손을 댈 수 있다고 하면 사기꾼입니다. 죽기 전에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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