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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안드레(사도행전28:30-31)

 

안드레/!Andreva"/Andêas는 ‘남자다운’이란 뜻입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로 어부였습니다.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마4:18, 눅6:14, 요1:44). 안드레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요1:40). 안드레는 본래 세례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하고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요1:41,42). 안드레는 갈릴리 해변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마4:18,19). 안드레는 군중들 중에서 오병이어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소개하였습니다(요6:8,9). 안드레는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헬라인의 청을 예수님께 전하였습니다(요12:20,23). 안드레는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마10:2, 막3:16). 안드레는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강론하실 때, 성전의 멸망과 주의 재림이 어느 때에 일어날 것인지를 물었던 네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막13:3,4). 안드레는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했습니다(행11:12-14).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는 스구디아 지방에서 복음을 증거했으며, 아가야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가 X자로 된 십자가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러한 모양의 십자가를 안드레의 십자가라 부르고 있습니다.

성실한 인도자였던 킴 볼((Edward Kimball)은 보스턴의 젊은 신발 판매인 무디(Dwight L. Moody)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설득하였을 때,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될지 몰랐습니다. 안드레는 자기형제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했던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제 베드로의 탁월함 때문에 제2의 베드로가 되려는 어떠한 열망도 품지 않았습니다. 대대로 벳새다에 살았던 어부(요한복음1:44)인 안드레는 당시의 어부들만큼 거칠고 굳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제 베드로가 결혼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같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함께 잡았습니다. 복음서에서 안드레에 관한 언급이 드물긴 하지만, 그가 주님과 특별히 친밀하였고, 겸손하고 헌신적이며 변함없는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베드로의 동생이었던 걸로 믿어지는 안드레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에서처럼 그 형의 이름을 빌어 소개됩니다. 아마도 그의 아버 지 요한은 이 두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 당시 죽고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벳새다를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라고 언급하는 자리에서 독특한 순서로 기록합니다(요1:44). 동생이 먼저 나오고, 그보다 연상이 더 훨씬 더 중요한 형이 나중에 나옵니다. 그 이유는 예수가 직분을 수행하기 전, 그러니까 사도들이 기름부음을 받고 또한 베드로가 그분을 뵙기 이전의 시기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엔 유일하게 안드레만 제자였습니다. 아직 베드로는 등장하지 않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는 시기에 이르면 베드로가 제자들 명단 중에서 맨 앞에 나오고 이어 그의 헌신적인 형제 안드레가 두 번째로 나옵니다. 안드레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베드로보다 먼저 주님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을 우리도 존경해야 합니다.

안드레는 예수의 첫 번째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성경에서 맨 처음 안드레를 보게 되는 곳은 그가 살았던 갈릴리가 아닙니다. 요단 건너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서 3km지역입니다. 갈릴리에서 베다니는 약90km정도 떨어진 지역입니다. 세례요한은 거기서 설교를 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을 탐닉하던 유대인 안드레가 거기서 예수님의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안드레는 요단강 계곡의 하류에서 일어난 새로운 운동의 소식을 듣고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안드레는 광야의 엄한 설교자로부터 시몬과 빌립과 함께 그들에겐 친숙한 율법학자의 가르침과는 아주 딴판인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당시 유대 회당의 가르침은 냉혹하고 형식적이며 생명감이 없었습니다. 종교적인 성격이 거의 없었습니다. 안드레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형식주의는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그에게 들렸습니다. 세례요한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사정없이 쳐서 외쳤습니다. 그들에게 충격을 주면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외식하는 자들과 위선자들에게 준열한 질타를 퍼부었습니다. 자기보다 더 크신 분이 곧 오시리라는 요한의 말에 진리를 열심히 추구하는 젊은 안드레는 감화를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그리스도께서 곧 오시리라는 것을 전파하였습니다. 만약 안드레가 하나님을 향한 열성을 품지 않았더라면 그가 요한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리하여 안드레는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안드레는 항상 베드로의 그늘에 있었습니다. 서신서도 한권 남기지 않았습니다. 어떤 교회의 설립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열성적인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았으나 소박한 마음이나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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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사도행전28:30-31)

 

‘사도’/ajpovstolo"/apôstolos는 ‘보내다’를 뜻하는 동사 ajpostevllw/apostêllo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기본적 의미는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도라는 말이 관용화(慣用化) 되어서 아무데나 ‘사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칭 자신들이 ‘사도’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기에 ‘사도직’을 실제로 계승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모두 틀린 말이며, 틀린 생각들이고, 망상에 사로잡힌 자들의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직책이란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한정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란 계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끝나버린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기독교사상에 있어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문학에 있어서 상당한 분량이 그들에게 할애되고 있으며, 복음이 전해지는 지역에 그들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이 사도들에 관해서 우리에게 전해 주지 못하는 내용이 더 많습니다.

사도들의 인척관계를 우리들이 훑어볼 때 다음과 같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요나 즉 요한의 아들들입니다(요1:42, 21:15). 야고보와 요한은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들이었습니다(마20:20, 27:56, 막15:40,16:1). 레위 마태는 알패오의 아들이었습니다(막2:14). 작은 야고보도 역시 알패오의 아들이라 불리고 있기 때문에 그와 마태는 형제인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9:25과 마가복음15:40절을 보면 글로바(눅24:18절의 글로바가 아님)의 아내 마리아는 작은 야고보의 모친이며, 따라서 글로바는 알패오로 추정합니다. 유다는 야고보의 형제가 아니라, 다른 야고보의 아들입니다(눅6:16). 가룟 유다는 시몬의 아들이었습니다(요6:71,13:26). 가룟이란 말은 유다에게 붙은 게 아니라 시몬에게 부속되었는데, 이는 아버지 시몬과 아들 유다가 유대의 가룟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거주 지역은 주로 갈릴리였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빌립은 벳세다에서 살았습니다(막1:16-24, 요1:44,12:21). 이들 넷은 나중에 가버나움에서 살았습니다(막1:21,29).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살다가 후에 에베소로 옮겼습니다(행3:1,15:6, 갈2:1,9). 마태는 벳세다에 속해 있었습니다(막 2:1,14). 나다나엘이라고도 하는 바돌로매는 갈릴리의 가나에서 살았습니다(요21:2). 도마, 작은 야고보, 유다 및 열심당원 시몬은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사도 중에서 유일하게 유대지방에서 살았습니다.

사도들의 직업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어부였습니다(막1:16,19). 마태는 세리였었습니다(마9:9). 다른 일곱 제자들의 직업은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의 상호관계는 열 두 제자는 서로 관련되어 있었고, 갈릴리의 예수 그리스도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형제지간이었고,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했으며, 또한 작은 야고보와 마태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빌립과 바돌로매도 아마 형제지간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안드레가 그의 형제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었는데, 빌립도 그의 형제를 그분에게 인도하였던 것 같습니다(요1:40-45). 만약 세베대의 아내였던 살로메가 동정녀 마리아의 누이였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사촌입니다(요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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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세계화(사도행전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바울사도는 Roma에 도착하는 즉시 재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두 해나 걸려서 재판을 받은 듯 합니다. 두 해란 Ramsay에 의하면 고소자들이 자기들의 고소를 진술해야 하는 법정기간인 18개월도 포함된 기간이라고 주석했습니다. 그 사이에 바울사도는 셋집에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다른 곳에 갈 수는 없었지만, 오는 사람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몸이 감옥에 있었지만, 복음은 감옥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후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파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을 어떤 성도들은 심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오늘날의 curtain처럼 얇은 것이 아닙니다. 약30cm의 두께였습니다.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는 누구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의 헤롯성전이 파괴되어야 했습니다. 헤롯성전이 파괴되고 난 후에 1세기의 랍비들은 마지막 10년까지 유대교를 다시 조직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랍비들은 ‘나사렛 사람들’을 배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예배에 공식적으로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만드는 저주를 회당기도에 삽입시켰습니다. 그만큼 교회는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교회는 애초부터 유대인들과 Roma인들의 이중적인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사도적 메시지는 점점 커가기만 했고, 확장되어가기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주후 100년이 되었을 때, 기독교는 小Asia, Syria, Macedonia, Greece, Roma 시에 등장했습니다. 마치 화살에 끈을 달아서 금을 그은 것 같았습니다. 지중해 동쪽해안의 작은 지역, 그것도 나사렛이라는 알아주지 않는 지역에서 시작된 종교는 전 세계를 급속도로 복음화시켰습니다. 1600년에 걸쳐서 유럽 온 대륙에 퍼진 복음은 곧 아메리카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불과 300년에 걸쳐서 미국을 변화시켰습니다. 19세기에 비로소 복음이 아시아에 전해졌습니다. 현재는 미국과 한국에서 복음을 전세계에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거침없이 진군했습니다. 복음은 마치 미사일처럼 날아서 가기도 했고, 저돌적인 탱크처럼 험지에도 거침없이 진군했습니다. 왜 이렇게 복음이 거침없이 진군했습니까?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을 향해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멸망하지 말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는 종교도 필요 없고, 선행도 필요 없으며,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재물 또한 필요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복음 안에 모두 들어있습니다. 복음은 곧 영생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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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는 거절하고 이방은 받아들이고(사도행전28:23-29)

 

Roma에 있는 유대 거류민들 대부분은 계속 복음을 반대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하던 것처럼 바울사도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유대 거류민들 지도자이건 아니건 간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유대에서 이방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방인들은 복음의 진보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복음을 계속 거부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사야6:9을 인용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사야6장은 이사야가 선지직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를 이스라엘로 보내면서도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백성들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활동하겠지만, 사역의 결과는 이미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고 하시지 않고, 이 백성이라고 부르신 것으로 보아 이미 하나님을 떠난 백성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그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야 할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냉혹하게 해야 했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문자적으로는 ‘듣고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보고 보아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이사야가 아무리 설교하고 외쳐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깨닫지 못할 것이요’와 ‘알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으로 보아서 이미 심판의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둔하게 하며’/@mev]h'/hashmen은 하나님의 은총의 효과를 감지하거나 느끼지 못하게 살이 찌는 것입니다(시119:70). 귀가 ‘막히고’는 dBek]h'/haqbhed는 청력이 무디어지는 것입니다(사59:1). ‘감기게 하라’[v'=h;/hāshaʽ 는 두껍게 바른다는 뜻입니다. 즉 시력이 약한 사람에게 밤에 감추어 놓았던 접착성물질을 단단히 붙여놓아 완전히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눈은 멀게 될 것이고, 귀도 멀게 되며, 마음은 무감각으로 뒤덮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10-11절을 보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세상/kovsmo"/kôsmos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긴 했지만 하나님의 생명에서 벗어난 인류입니다. 거기에서 유대인들은 더 특별합니다. 이스라엘은 매우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소유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고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자기백성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이방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방에서는 엄청난 역사가 성경 밖에서 일어났습니다. 해마다 지금까지 성도들의 숫자가 이방에서는 늘어나고 유대에서는 복음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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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게임(사도행전28:17-22)

 

바울사도는 Roma에 도착하여 먼저 유대인 지도자들을 찾았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Roma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대적자들로부터 연락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보나마나 바울사도에 대한 편견에 빠질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죄수로 된 이유를 사전에 그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했습니다. 바울자신은 이스라엘의 백성이나 조상의 관습(규모)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Roma인에게 자신을 내어주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Roma인들은 나를 심문한 결과 죄가 없으므로 놓으려 했는데, 유대인들이 극력 반대하여 마지못해 내가 황제의 재판을 받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유대에서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 바울에 대해서 좋지 못한 것을 말하든지 또는 이야기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훼방으로 봐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충분히 Roma시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알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통상 진실을 왜곡 보도할 때 진실을 ‘호도’한다고 합니다. ‘호도’라는 말은 풀을 바른다는 뜻입니다. 즉 어떤 사실을 얼버무려 넘김으로써 속이거나 감춘다는 말입니다. 역사에 이런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진실이 가려졌습니다. 그리고 불의가 승리하고, 비리가 덮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진실을 호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파에 대해서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고 했습니다. 진실을 심하게 호도한 것입니다. Roma제국 내에 있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증거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3:14,15 14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가복음4: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결국 유대인들은 그 좋은 복음을 밖으로 차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구약에 가두기로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복음은 전 세계에 전해졌습니다. 복음은 마라톤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누가 가두려고 해도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복음은 어떤 종교도 아닙니다. 복음은 종교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반대하든지, 어떤 국가의 유력자가 반대하든지 간에 복음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진실게임은 복음이 합니다.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사이에 복음은 유대에서 turn을 했습니다. 유대를 간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 것입니다. 자신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후손도 영원히 못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And

그리스도를 위한 갇힘(사도행전28:17-22)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바울사도는 Roma에 들어가는 즉시 황제의 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재판을 받기까지 한 군사와 함께 다른 죄수들과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 있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감금된 장소는 주위에 웅대한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들은 공화국의 말기에 세워졌습니다. 초기 황제들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전면에는 Capitoline Hill이 있었습니다. Gauls가 침공하기 오래전부터 유명한 건물이었습니다. 정상에 Jupiter 신전이 있었습니다. 왼쪽 가까이에는 그 언덕을 덮고 있는 넓은 구역의 궁전이었습니다. ‘가이사의 집’에는 Gauls의 이름이 황실의 찬란함과 함께 현대의 온갖 유럽언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궁전에는 궁궐에 소속된 근위대에 宿營(숙영)하는 황실부대가 있었습니다. 율리오는 그의 죄수들을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도록 되어 있는 모든 피고들을 감금하는 것을 공식임무로 하고 있는 집정관 Burrus에게 넘겼습니다.

바울사도는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곳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속박은 custodia libera/자유로운 감금이었습니다. 하지만 통상 이런 죄수는 그를 지키는 한 군사에게 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감금을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빌립보서1:17,13,17 7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13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7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에베소서3:1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골로새서4: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경비원의 끊임없는 교체는 그 군사들로 하여금 바울사도의 감화를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황실에서 복음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의 Mega-church는 고난에서 제외됩니다. 이들은 고난을 받을 이유도 없고, 고난을 절대적으로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소형교회들은 엄청난 고난을 받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많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자율적 감금입니다. 하지만 이 고난을 성도들은 달게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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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을 격려하시는 하나님(사도행전28:11-15)

 

바울일행은 10월 하순경에 멜리데섬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더는 항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배다 파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태풍과 바람이 거세게 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겨울을 할 수 없이 멜리데섬에서 나야 했습니다. 다음해인 61년 2월 이른 봄에 Roma로 떠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때에야 비로소 항해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서풍이 불어서 Roma로 항해하기가 멜리데섬에서 다른 배가 겨울을 났는데 그 배는 알렉산드리아의 배였습니다. 배의 이름은 디오스구로였습니다. 곡물상선단 배로 추정합니다. 당시에는 Roma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Roma의 군인들은 어떤 배라도 탈 수 있었습니다.

멜리데에서 출발한 배는 Sicily의 동쪽 해안의 큰 항구인 수라구사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에서 사흘을 멈추었습니다. 수라구사는 고린도의 식민지로 주전734년에 건설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212년에 Roma의 지배지였습니다.

수라구사에서 바람부는 쪽으로 배를 돌려 ltaly 남단에 있는 레기온(Reggiodi Calabria)으로 향하였습니다. 하루가 지난 뒤에 Napoli만에 있는 보디올에 도착했습니다. 보디올에서 비로소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성도들의 청함을 받아 일주일을 함께 있다가 Roma로 향했습니다(14절).

Roma에 도착하자 바울의 소식을 듣고서 압비오 거리와 삼관까지 성도들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이것을 본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아피아 로는 남부 Itaiy에서 Roma로 가는 큰 길이었습니다. 바울일행이 Roma에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성도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바울사도를 Roma까지 데리고 가려했습니다. ‘맞으러 오니’ eij" ajpavnthsin에서 ajpavnthsi"는 귀한 방문자를 성읍전체가 환영하거나 또는 새 통치자가 그 수도에 승리의 입성을 하는 것입니다. 즉 그 성읍의 대표단이 나가서 고위층의 방문을 영접하고 그 남은 거리를 호위하는 공식적인 환영을 의미하는 전문용어입니다. 따라서 형제들이 바울을 극진히 환영한 것을 말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Roma로부터 55km나 떨어진 삼관까지 마중나왔습니다. 삼관은 삼여관(Three Tarerns)으로서 로마와 압비오 시장 사이 압비오 도상에 있는 여인숙 또는 휴게소입니다. 어떤 성도는 삼관에서 16km나 더 걸어와서 바울사도를 영접했습니다. 압비오 광장은 당시에 세금쟁이들과 뱃사람들로 붐벼서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Roma에 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행23:11). 그리고 땅 끝까지(당시에 서반아) 가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Roma에서 환대를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어떤 대접을 받을 지 몰랐습니다. 한순간에 모든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격려하심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격려하심은 우리의 염려를 일순간에 제거하십니다. 하나님의 격려하심은 모든 성도에게입니다. 하나님의 격려하심은 우리의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하나님의 격려하심은 우리가 가장 필요할 때 하십니다. 하나님의 격려하심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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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갚게 하시는 하나님(사도행전28:7-10)

 

보블리오는 바울일행을 친절하게 사흘이나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로 고생을 하며 누워 있었습니다. 그것을 안 사도바울은 기도하고 안수하여 고쳤습니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섬 전체에 퍼졌습니다. 이러저러한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보블리오를 비롯한 섬 주민들이 바울일행을 후하게 대접하고 Roma에 갈 때까지 쓸 것을 배에 실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와 손을 통해서 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바울사도 독자적으로 병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이 병을 고친 양 말을 하고 떠벌립니다. 자신이 위대해서 병을 고친 것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무엘상6:1-12을 보면

1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지 일곱 달이라 2블레셋 사람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3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찌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4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5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6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7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 8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 9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줄 알리라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워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전리품으로 취합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가 블레셋에서 큰 재앙을 일으켰습니다. 무려 블레셋사람 5만 명쯤이 죽었습니다(삼상6:19). 그래서 블레셋은 연방회의를 합니다. 회의결과 여호와의 궤를 보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내되 금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형상을 만들어서 멍에메지 아니한 젖 나는 어미 소 둘을 끌어다가 새 수레에 메우고 송아지는 집에 매어두고 어미 소가 가면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블레셋에 여러 재앙들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미 소는 이스라엘 쪽으로 갔습니다. 암소들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였습니다. 갈 때에 새끼 때문에 울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나보려고 블레셋 방백들이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갔지만 암소들은 그대로 갔습니다.

이 상황을 어떤 유명하다고 하는 목회자가 설교를 했는데 성도들이 소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새끼들을 돌보지 않은 암소들처럼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암소만 생각했지, 암소를 움직이게 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소는 특성상 새끼를 떼고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벧세메스로 향한 암소들은 갔습니다. 누가 움직인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소같이 되라고 설교하는 것은 무리한 설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낫게 하셨습니까? 바울로 하여금 은혜를 갚게 한 것입니다. 죽음의 바다에서 살아난 276명을 사흘간이나 융숭하게 대접한 보블리오를 비롯한 섬주민들에게 은혜를 갚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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