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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가나안인 시몬(사도행전28:30-31)

 

12사도 중에도 같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야고보와 시몬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알패오와 세베대로 구분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로 구분한 것입니다. 시몬 역시 둘 있습니다. 베드로와 가나안인 시몬입니다. 베드로라는 시몬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 “가나안인”이라는 명칭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인이라고 하니까 가나안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인은 ‘가나’나 ‘가나안’이란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Kananai'o"/Kananaȋos는 an:q;/qānā’/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말로, ‘열심인’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Zhlwthv"/Zelotês/열심당원으로 나오는데 이들은 민족주의자들로 팔레스틴 지방을 다스리던 로마정권에 반대하여 싸웠습니다. 이들은 민족주의자들로 팔레스틴지방을 다스리던 로마정권에 반기를 들며 속박에 대한 증오심을 폭동으로 획책하였습니다. 따라서 요새 소위 보수라는 일부 목사들은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을 종북자로 몰면서 척결해야 한다고 설치고 있는데, 예수님은 열심당원이었던 시몬까지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열심당원”이라는 시온의 별명은 열광적인 애국자였다는 것입니다. 열심당은 마카비 시대부터로 추정합니다. 당시는 종교적 영역에서 이방의 영향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있었던 해였습니다. 열심당원들은 바리새인들 중의 바리새인들이었는데, 바리새인들은 랍비들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이들로서 전해 내려오는 율법의 문자적 준수를 주장하였습니다. 열심당원들은 옛날 전성기의 다윗왕국의 영광을 꿈꾸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국을 회복시켜 줄 멋지고 힘있는 메시야를 고대하였다.. 열렬한 이스라엘의 애국자들은 Uudas of Samala/유다 사말라의 지휘아래 한데 뭉쳐 유대지방을 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애국이라는 명목 하에 너무나도 많은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 광적인 유대인들은 로마가 이스라엘의 독립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여러 의식들을 준수하지 못하게 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들은 갈릴리에 본부를 두고 기회만 있으면 소요와 반란을 선동하였습니다. 조그만 구실만 있어도 이것으로 동족의 정복자에 대한 적개심에 불을 지르고자 했습니다. Elder Cumming은 열심당은 특수한 단체라고 하면서

바리새인도 아니다. 바리새인은 예배에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대체로 무관심했다. 사두개인도 아니다. 사두개인은 율법의 해석에 있어서 그들보다는 훨씬 회의적이고 염격하지 않았다. 엣세네파도 아니다. 엣세네파는 어떤 대중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헤롯당도 아니다. 헤롯당은 헤롯과 한패였다.

 

따라서 열심 당원들은 독불장군식으로 로마의 요구에 대항하였습니다. 언제든지 무기를 들고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시대에도 그들 중 몇몇 지도자들이 잡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때 예루살렘에 큰 세력을 구축하고 국사(國事)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들은 법도 없이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법이었습니다. 바라바도 열심당의 일원으로써 소요와 살인의 혐의로 투옥되었었습니다. 결국 70년에 Titus 휘하의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약탈했습니다. 이로보건데 시몬도 팔레스틴의 해방을 위해 기꺼이 칼을 뽑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을 만나자 전혀 다른 길을 갔습니다. 그의 대적이 로마군이 아니었습니다. 시몬의 대적은 사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마귀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순교를 했습니다. 그것이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의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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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빌립(사도행전28:30-31)

 

빌립/Fivlippo"/Phîlippos는 ‘말(horse)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빌립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인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사역할 초기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요1:28). 예수님께서 빌립을 선택하여 제자로 부르셨습니다(요1:43). 빌립의 고향은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벳세다입니다(요1:44). 안드레와 베드로도 벳세다 사람입니다(요12:21).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예수님에게 소개하였습니다(요1:45).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요1:49). 종려주일(Palm Sunday)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몇몇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하여 빌립에게 간청하였습니다(요 12:20-23). 빌립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더디게 깨달았습니다(요14:8-21).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기도한 신실한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행1:12-14).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기 전에 그를 시험하셨습니다(요6:5-7).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으로 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요14:8-11).

사람들은 모두 같을 수 없습니다. 지구상에 여태까지 같은 얼굴을 가진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비슷하긴 해도 똑같지는 않습니다. 얼굴뿐만 아닙니다. 심성도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착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성이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질이 급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느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말을 해도 이해를 빨리 하는 사람이 있고, 이해를 늦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빌립이 이해사 느린 사도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빌립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의 명단에서만 빌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제자들의 명단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인간성과 개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합니다.

요한복음6:5-7 5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6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7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12:20-23,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2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오늘날에 목사청빙요건을 보면 참으로 세상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합니다. 4년제 대학교졸업, 이름 있는 신학교3년을 마치고 석사를 끝내고 박사학위를 소지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봐야할 자격인 인간성은 안두에도 없습니다. 사람이 되지 않은 사람을 인간적인 자격에 맞추다보니 교회가 시끄럽고, 기독교계가 야단이며, 전도의 문을 아예 이 사람들이 막아버립니다. 빌립은 다소 우둔했던 사도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빌립은 냉철한 합리적 생각과 물질주의적인 사고경향을 가졌습니다. 그 예를 우리들은 갈릴리해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장소에서는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먹을 때가 이미 지나서 사람들은 배고플 때였습니다. 당장에 먹을 것을 제공해줘야 했습니다. 더구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남자만 5000명이었습니다. 여기서 5000명이란 20세 이상 60세미만의 남자들입니다. 즉 전쟁에 나갈만한 나이입니다. 따라서 남자도 20세미만이 빠졌습니다. 60세 이상 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자와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거기에 모인 사람의 숫자는 어마어마합니다. 그 사람들을 먹이기 전에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복음6:5-6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도 어디에서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음을 알면서도 빌립에게 물으신 이유를 ‘시험코자’peiravzw/peirâzo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어떤 해결책을 듣고자 하심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그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심은 빌립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럼에도 빌립은 계산을 했습니다. 떡을 살수만 있다면 200데나리온의 떡은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적은 떡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200데나리온은 회중들의 숫자를 계산해서 200데나리온의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공금의 전부였습니다. 그 돈으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에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에스겔37:1-3을 보면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사람의 마른 뼈가 심히 많은 곳으로 데려가신 후에 이 뼈들이 살아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에스겔은 주께서 아신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에스겔과 빌립의 사이에서 늘 갈등하는지 모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데 세상에 속아서 믿음으로 하지 못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늘 성경을 대하면서 갈등합니다. 항상 말씀이 나를 주관하게 한다고 하지만, 망설이고 갈등하다가 세상에 늘 끌려 다닙니다. 통상 우리는 하나님을 전능하시다고 하면서도 부분적인 것만 믿을 때가 많습니다. 영적인 통찰력도 부족하고 믿음도 없고, 천상 우리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 삼아주심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Rufinus는 390년경에 옛 로마신경에서 거룩한 교회를 언급했습니다. 700년경에 채택된 사도신경은 거룩한 보편적 교회라고 했습니다.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첫 번째 공의회에서 작성된 신조는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했습니다. 381년도에 작성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에서는 ‘우리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고 했습니다. 열 두 사도를 선택하신 주님은 그 중에 어떤 한명이나 특정인에게 교회를 맡긴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나 바울에게만 맡긴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성격상 활달하거나 차분하거나 많이 알거나 적게 알거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을 때 거의 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모두 순교당합니다. 사도 빌립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이란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뭐가 잘났다고 마천루 같은 교회를 세우고 마치 한국교회의 대표인양 행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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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베드로(사도행전28:30-31)

 

유능한 회사에서 사원을 뽑으려면 많은 것들을 걸러냅니다. 사원에 대한 많은 기준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사원들을 선발합니다. 그 기준에는 회사만을 위한 기준입니다. 인격, 부지런함, 성실함, 희생정신 등 오직 회사를 위한 기준만 들어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생산량이 증대되고 회사가 번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격사유가 될 만한 것들을 걸러내려고 입사시험을 치를 때 많은 항목을 만들어 놓습니다.

좌충우돌이란 이리저리 치고받고 부딪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상당히 피곤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떤 조직 내에 있으면 사람들이 항상 경계하고, 항상 조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조직에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있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돌발행동을 수시로 하는 사람과 같이 생활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피곤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하고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전술했지만 예수님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오늘의 회사경영원칙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시려면 성경에 능통한 서기관이나 유대의 전통에 정통한 산헤드린을 선택하셔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곳에서 한 사람의 제자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다 자격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세상 끝까지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한마디로 말해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요나(요한)의 아들 곧 바요나 시몬입니다(마16:17-요21:15). 베드로는 게바라고도 했습니다(요1:42). 시몬/Sivmwn/Sîmon은 들음이란 뜻으로 히브리어를 음역한 유대이름입니다. 게바/Khfa'"/Kephȃs는 아람어의 음역으로 반석이란 뜻입니다. 베드로/Pevtro"/Pêtros는 게바를 헬라어로 표기한 이름으로 ‘(4074, 페트로스) 바윗 조각, 돌, 바위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요한(요나)의 아들이며((마16:17-요21:15), 안드레의 형제(마4:18)입니다. 베드로는 결혼을 했고(막1:30, 고전9:5), 그리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행4:13). 가버나움에 살았으며(막1:21,29), 어부였습니다(마4:18, 5:1-7, 요21:3). 형제인 안드레에 의해 예수께 인도되었습니다(요1:40-42).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마4:18-20, 눅5:11).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셨습니다(마10:2). 믿음으로 갈릴리 바다 위를 걷기도 했습니다(마14:28-31).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야)라고 고백했습니다(마16:16-19).6:69). 그런가하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예수를 말리다가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마16:21,22, 막8:31-33). 경솔하게 예수의 물으심을 가로채서 답변하기도 했습니다(눅 8:43-45).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들 고치는데 참석하기도 했습니다(막5:37, 눅8:51).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의 변모하심을 직접 목격했습니다(마17:1-4, 막9:2-6) 예수님께 여러 가지를 물었습니다. 용서에 대하여 물었습니다(마18:21). 더럽히는 것에 대하여 물었습니다(마15:15-18). 종의 비유에 대해 물었습니다(눅12:41).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에 대해 그 내용을 자세히 물었습니다(막13:3,4). 예수님의 유월절 예비를 위해 요한과 함께 보냄을 받았습니다(눅22:8,9,22:13).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주신다고 할 때에 거절했습니다(요13:6-10).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마26:33-35). 예수님을 잡아가는 말고의 귀를 칼로 내려쳤습니다(마 26:51). 잡히신 예수님을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 가만히 들어갔습니다(마26:58). 잡히신 예수를 세번 부인하고 회개했습니다(요18:17,18,25-27, 26:69-75). 부활하셨다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눅24:12). 부활한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보리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막16:7). 그럼에도 다시 이전처럼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요21:1-14).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눅24:32-34). 베드로가 예수님임을 알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요21:7).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요21:15-19).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했습니다(28:16-20).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행1:12,13),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합심 기도했습니다(행1:12-14). 유다의 죽음에 대해 증언한 후 새로운 사도의 선택을 제안하였습니다(행1:15-22). 오순절에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성령의 강림에 대해서 말했으며(행2:14-41),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행2:37-41).

베드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좌충우돌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기도 하는가하면 심한 책망도 받았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바다 위를 걷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이 잡혔을 때에 면전에서 부인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회개했습니다. 그런 후에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다시 사명을 받았을 때,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주님의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순교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앞두셨고 말씀하셨을 때,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자랑스럽게 내가 주를 위해서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까이 함께 가겠노라고 주님께 말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일들을 다 경험합니다. 혹독한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순교했습니다. 그야말로 주를 위하여 한 말이 그에게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릴 만큼 좌충우돌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베드로를 다듬으셨습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기 위해 처음에는 거친 흙을 채취합니다. 거기에는 돌도 들어있고 티끌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토기장이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걸러냅니다. 돌이나 티끌들은 그릇을 만들 때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릇을 빚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걸러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치고 주무른 다음에야 그릇을 빚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해서 바로 완전한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확정적인 성화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성화가 있습니다. 점진적인 성화와 확정적인 성화입니다. 우리는 부르심, 중생, 칭의, 양자됨을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한번 부르시고 중생함으로서 확정적인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주하는 죄로 인해서 갈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 안에 여전히 내재하는 죄와 신자가 아직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세에서의 신자의 상태는 정적인 현상유지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John Murray 2001, 308). 즉 구원을 받았으니까 마음대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좌충우돌했던 베드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던 베드로였지만, 말년에 베드로는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빚으시고 다듬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들도 늘 좌충우돌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우리를 맡기면 주님께서 베드로처럼 우리를 다듬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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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마태(사도행전28:30-31)

 

사람들은 출신성분을 많이 따집니다. 특히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지역, 혈연, 학력으로 평가합니다. 특정지역의 사람이라야 인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학교출신이라야 괜찮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편견입니까? 이들이 나라를 망치고, 사회를 망치며, 그들이 있는 곳에는 부패와 비리가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것들을 따지고 치며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삼으실 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사람들을 쓰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예도 있습니다. 마태는 로마를 위한 세금징수원이었습니다. 말이 세금징수원이지, 로마의 앞잡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이런 로마를 전복시키려는 사람도 예수님은 제자로 불렀습니다. 시몬은 열심당원 이었습니다. 로마의 앞잡이들을 제거하고 독립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바로 열심당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마태와 시몬은 원수지간입니다. 그래서 늘 싸워야 타당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제자로 삼으셔서 한 목적을 세우고, 한 목적지로 가게 하셨습니다.

마태/Matqai'o"/Matthaȋos는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마가와 누가는 그의 이름을 ‘레위’로 나타냅니다. 마태는 유대사회에서 경멸받는 세금 징수원으로 로마에 봉사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마태는 다메섹과 지중해 사이의 육상 관세통로에 위치한 가버나움에서 통행세를 징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이 부름 뒤에 마태는 ‘큰 잔치’(눅5:29-32)를 베풀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힐난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시면서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세리는 유대인들 사회에서 도적이나 창기처럼 가장 나쁘게 평가했습니다. 세리는 압제자 로마정부와 그 속국인 헤롯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은 정상적인 세금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친 로마 유대인들은 로마에 가서 조세 단독권을 획득하여 유대에서 도급을 주었습니다. 도급을 하청 받은 사람들은 그 돈을 만회하려고 엄청난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돈을 내지 않으면 폭력배로 하여금 위협을 가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초과징수, 뇌물, 강제징수 등 온갖 협잡과 부정으로 백성의 돈을 사정없이 착취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이방인과 죄인과 같이 취급하여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회당출입을 금했습니다. 마태는 세리이며, 마태처럼 제자 되기에 부적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마태가(마9:9, 눅5:27),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마9:9),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보편적이고 공의로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로마인의 앞잡이였지만,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마태는 직업과는 다르게 경건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쓴 복음서를 보면 구약과 랍비의 전통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이런 전통을 잘 안다는 것은 그가 유대교에 관한 것에 정통했다는 것입니다. ‘레위’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예비하고 섬기는 일을 위하여 성별된 족속에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갈릴리 태생이었습니다. 레위라는 뜻은 ‘연합하다’입니다. 따라서 마태는 헬라 이름입니다. 세리마태라 함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통상 우리들은 괜찮은 직장이나 잘 나가는 직장에 근무하고 있는데, 그 직장을 그만두고 떠나라 할 때에 떠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망설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요새같이 평생직장이 없고, 직장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라면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직장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이로 인해 전에는 Roma의 황제를 위해서 일했지만, 이제는 만왕의 황제이신 위대한 분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의 유대적인 필치로 하나님께 붙잡혀서 오늘의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나라를 더 잘 알리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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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사도 요한(사도행전28:30-31)

 

참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말들을 합니다. 지옥에 있는 자도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고 하고, 성경에도 없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지점을 만들어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의 공로여하에 따라서 구원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한다고 하는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두 번째의 기회를 주셨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영원한 운명이 이미 결정된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취지로 죽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이미 지옥에 있던 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할 취지로 죽지 않으신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에베소서4:8-10 ‘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과 베드로전서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을 근거로 죽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후에 회개할 기회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9:27과 누가복음16:26절을 보면 이미 죽은 사람의 운명은 바꿀 수 없음을 우리들은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Robert L. Reymond 2004, 857).

요한/!Iwavnnh"/Ioânnēs이란 ‘그에게 여호와는 은혜롭다’라는 뜻입니다. 사도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이며(마4:21), 야고보의 형제입니다(행12:1). 사도요한은 어부였었습니다(눅5:10).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주님을 좇았습니다(막1:19-20). 그리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마10:2).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 하는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막5:36,37, 마17:1, 막9:2, 눅9:28, 마 26:36,37, 막14:33). 요한은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 주의 보좌 좌우편에 앉기를 간구하기도 했습니다(막10:35-37). 요한은 성질이 불같아서 불로 사마리아인들을 멸할 것을 예수님께 요청하였다가 책망을 들었습니다(눅9:54,55). 예수님께서 요한의 형제에게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막 3:17). 사도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유월절을 예비했습니다(눅22:8).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같이 있었고(막14:33),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요18:15,16).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을 지켜보았습니다(요19:26).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봉양했습니다(요19:27). 부활하신 예수님을 갈릴리 해변에서 알아봤습니다(요21:7). 예수님의 승천을 목도했습니다(행1:10). 베드로와 함께 앉은뱅이 된 자를 성전 미문에서 고쳤습니다(행3:5-8). 베드로와 함께 갇혔지만(행4:3,13-15), 관원들에 의해 협박을 받고 다시 풀려났습니다(행4:17,21). 베드로와 함께 사마리아로 파송 되었습니다(행8:14). 박해 시에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계1:9).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요21:24). 요한1서,2서,3서를 기록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계22:8,9). 사도들의 삶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요한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다른 사도들보다 항상 주님과 가까이 있었고, 더 오랫동안 주님과 절친한 교제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성경을 기록하면서도 자신을 최대한도로 절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은 자기들 방식대로 주님을 닮아갔습니다. 그러나 개성이 파괴되거나 억제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더욱 다듬어지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과 사도요한은 사제지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스승과 제자는 모두 주님을 증거 했습니다. 요한은 세례요한이 그 당시에 유대와 복음에서 요한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양 그에게 어떠한 자격이나 혈통관계를 기술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전체 21장의 어디에서도 결코 자기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복음서 중에서 자기 자신이 속한 열 두 사도의 명단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겸손했던 요한은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아무런 암시를 던져주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야고보의 동생입니다. 요한은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러나 교회 중에서 가장 오래 남은 사도였습니다.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가 그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녀의 삶과 증거를 통해 그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역을 세례요한의 제자시절에 준비하였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광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언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메시야의 도래를 애타게 기다렸던 요한은 세례요한이 약속된 분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고 천명했을 때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요한은 세례요한이 주님을 가리켜 가로되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하였을 때, 세례요한에게서 주님께로 자신을 이동시켰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때로는 성급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을 믿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급함은 주님의 방식이 아니라 요한의 방식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을 거절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개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죽이자고 하였습니다. 요한의 성질도 아마 베드로 못지않았을 것입니다.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신 것으로 보아 불같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의 모습에서 주님의 가르침에서 점점 주님을 닮아 갔을 것입니다. 결국은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변모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가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요한이 ‘사랑의 사도’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 함께 누린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복음과 서신 속에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사랑을 말했습니다. 주님의 가없는 사랑을 전하다가 주님께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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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사도행전28:30-31)

 

세베대/는 Zebedai'o"/Zebedaȋos는 히브리어 hy:d]b'z]/zebad-iāh에서 유래했으며 ‘여호와께서 주셨다’입니다. 세베대는 갈릴리의 어부였습니다. 세베대는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입니다(마4:21,22, 마10:2,26:37, 막1:19,20, 눅5:10, 요21:2). 세베대는 살로메의 남편이었습니다(마27:56, 막15:40,16:1).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는 그의 형제 요한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막1:19, 마4:21, 막1:29, 눅5:10). 마가복음3:17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와 그의 형제 요한에게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12제자 중에서 특별히 임원에 속했습니다. 중요한 곳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예수님께서 동행하게 하셨습니다.

반전/反轉이란 어떤 상황에서 완전히 뒤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세베대의 아내 살로메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앞두신 시점에 그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위해서 청탁을 합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 중에서 제일먼저 순교를 합니다. 이런 것을 놓고 볼 때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 연결된 우리의 삶이기에 세상 사람들과 다른 시각(視覺)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형벌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살로메는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살로메는 성경에서 모범적인 인물입니다. 비록 자식들을 위해서 청탁은 했지만, 살로메의 믿음은 확실했습니다.

유대의 관습 중 하나는 아들이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는 일입니다. 따라서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았습니다. 야고보가 성경에 처음 나오는 것은 주님께서 기적으로 베드로가 고기 잡는 것을 도와주실 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바로 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는 다시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요21:2). 세베대의 두 아들들은 참 특이했습니다. 그 중에서 요한은 항상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가장 친밀했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더불어 친구로서, 동반자로서 지냈던 조건들이 야고보로 하여금 사도직에 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직의 권위보다는 그것의 자질에 더욱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성질이 꽤 급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한 사람은 먼저 순교하게 하시고, 또 한 사람은 오래도록 남게 하셔서 핍박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토록 하셨습니다.

야고보의 탁월함은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대략 14년 후에 헤롯 아그립바가 유대인들에게 인심을 얻기 위해서 교회 중 몇 사람을 죽이려 했을 때 야고보가 먼저 죽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교회 중에서 눈에 띄고 열심을 내는 사람을 죽였을 것입니다. 당시에 교회에서 열렬하게 일하던 사도는 베드로와 야고보였습니다. 아마도 당국에서는 야고보가 더 유능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범적으로 야고보를 죽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야고보는 사도들 중에서 제일먼저 순교를 당합니다. 이 세상은 성도들을 죽이면 교회가 없어진다고 생각했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성도들을 죽였고, Roman-Catholic이 성도들을 죽였으며, 무슬림들이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헤롯에 대한 적개심을 느끼는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헤롯은 야고보와 베드로를 죽으면 예루살렘교회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야고보는 스데반에 이어 초대교회에서 두 번째로 순교자의 영예를 얻습니다. 야고보의 비참한 죽음이 유대인들을 기뻐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세속화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죽음을 성도들이 두려워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이 세상의 재물을 좋아하며, 이 세상의 것들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이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사도들이나 성도들은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는 초개처럼 여겼습니다. 순교를 기뻐했습니다. 고난과 환란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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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사도행전28:30-31)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사도이면서 성경에 많은 정보가 없기 때문에 후세의 우리들이 야고보를 알려고 할 때 힘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마가복음15:40의 작은 야고보와 동일한 사람입니다. 아마도 마가는 야고보가 키가 작았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서 작은 야고보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우리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아닙니다. 바울이 언급한 야고보도 아닙니다. 사도 공회시기에 예루살렘 교회를 인도했던 야고보가 아닙니다. 야고보는 사도들의 명단 속에 어울려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성경에서 그렇게 많이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많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사도 야고보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를 부르신 분이 전능하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택하실 때 기도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신실한 사도였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봉사를 했을 것입니다. 다반 우리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야고보는 보편적인 인정을 받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바란 것은 그늘에 가린 제자로서의 직분이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직분을 얻음으로 만족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주님께서 보내시면 갔고, 주님께서 지시하시면 말없이 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선한 일을 위해 분투했습니다. 사도로서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자기의 도리를 다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특이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에 관해서 어떤 것을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훌륭한 일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야고보가 최선을 다하여 살아갈 사도라고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유명한 사람들보다 무명인들이 훨씬 많습니다. 유명한 교회보다 무명의 교회들이 훨씬 많습니다. 유명한 목사보다 무명의 목사들이 훨씬 많습니다. 알려진 장로보다 알려지지 않은 장로, 알려지지 않은 집사, 알려지지 않은 성도들이 훨씬 많습니다. 오히려 무명의 성도들 중에서 훌륭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몰라줍니다. 그리고 유명인들만 알아줍니다. 일반사회에서 그러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마저 세상과 똑같습니다. 주님은 이름 없이 섬기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그러한 것이 대단히 싫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많이 회개해야 합니다. 메가 처치에 다니는 사람들은 더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름 있는 교회에 나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섬기라고 하셨지, 섬김을 받으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숨김 있는 섬김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알려지지 않은 교회에 숨기는 섬김, 아마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지금 전국에 이름 없는 작은 교회는 일꾼들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교회에만 성도들이 몰려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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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바돌로매(사도행전28:30-31)

 

바돌로매/Barqolomai'o"/Bartholomaȋos는 아람어 바르탈메(탈메의 아들)의 음역입니다. 바돌로매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마10:3, 막3:18, 눅6:14, 행1:13). 바돌로매는 납달리 가문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요한이었으나 주님께서 세베대의 아들인 그의 사랑하는 요한 때문에 바돌로매로 개명했습니다. 바돌로매는 나다나엘(하나님의 선물)과 동일인입니다.

탈메의 아들이란 이름은 예수그리스도 시대에 흔하지 않은 이름입니다. 바돌로매란 자신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그의 아버지를 나타내는 이름입니다(Herbert Lockyer 1982, 94). 웹스터 사전에서 부칭(父稱)은 아버지나 부계조상의 이름과 관련된 접두사(接頭辭)나 접미사(接尾辭)를 부가하여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Johnson은 John의 아들(son)입니다. 바돌로매는 44년에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바돌로매를 보시고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1:48,50)고 하셨습니다. 바돌로매는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속속들이 읽히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 양을 만납니다. 안드레와 요한이 그분을 따르며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빌립을 만나십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빌립과 안드레가 주님과의 사제 간의 높은 단계로 맺어지기 전, 그들에게는 우정의 유대내지는 친척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신실하고 올바른 유대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구세주로서 오신 그분을 기꺼이 맞이한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소개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빌립은 자기가 메시야에 대해서 얘기했던 것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는 나다나엘에게 두려움과 망설임 없이 그가 보고 들을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귀를 기울이면서 듣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우리가 나사렛 예수를 만났다”고 외치면서 나다나엘을 찾아갔을 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요1:46)라고 했습니다. 나사렛은 조그마한 벽지였습니다. 그리고 평판이 별로인 동네였습니다. 나사렛/Nazarevq/Nazarêth은 하부 갈릴리의 마을입니다.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지역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는 3일 길의 거리였습니다. 디베랴에서는 8시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나사렛은 탁월한 인물을 낼 수 없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입니다. 즉 나사렛에서는 큰 인물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업신여기고 무시를 당하는 동네에서 나온 사람이 어떻게 우리의 주의를 끌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작은 동네였습니다. 메시야가 나사렛에서 나셨다는 소식은 우선 나다나엘에게 믿을 수 없는 느낌이 들게 하였습니다.

편견이나 선입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John Fitzgerald Kennedy를 미국의 자존심이라 불렀습니다. 미국인들이 Kennedy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을 큰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어떤 특정한 사람, 특정한 지역이 유명한 것이 아닙니다. 편견입니다. 편견은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과 그의 진리에 대한 천박한 거부입니다. 이러한 거부는 진리에 이르는 길을 막습니다. 동서양의 역사에서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이 편견 때문에 우리나라가 지금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큰 상처를 입었었고, 또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편견은 나쁜 것입니다. 다행히 ‘와보라’는 빌립의 초청에 응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인생을 실패해서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그의 인간됨과 생활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맨 처음 뵈었을 때 그분의 ‘전지하심’에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나다나엘은 자기 주님의 ‘전능하심’에 깊은 경외를 느꼈을 것입니다.

사도들 중에 성경에 많은 활약이 나오지 않은 사도들이 많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바울 등은 성경에 지면을 많이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저희들을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들 보기에 약하고 강한 것입니다. 주님의 보시기에는 강하고 약한 사도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인식하기에 따라서 이 세상은 많은 편견에 사로잡히기 마련입니다. 열두 사도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졌지, 몇 명의 사도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역사에는 숨겨진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드러난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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