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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4.12.21
    성령님께서 전하시는 구원

회개의 권고(사도행전2:37-42)

성령의 역사가 강렬하게 역사하신 예루살렘에서는 사도들에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보도 듣도 못한 기적이 사도들에게 일어났는데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본 예루살렘 사람들은 마음이 심히 찔렸습니다.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을 박도록 종용한 사람이 하나님일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말을 듣고 보니 큰 일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어찌할고’(Tiv poihswmen/티 포이에소멘)하면서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는데 어떤 대책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보긴 해야 하는데 어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들에게 살 방법을 제시합니다. ‘너희가 회개하라(metanohvsate/메타노에사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각 세례를 받으라‘(baptisqhvtw e{kasto" uJmw'n ejpi; tw'/ ojnovmati jIhsou' Cristou'/밥티스쎄토 헤카스토스 휘몬 에피 토 호노마티 이에수 크리스투)입니다. 이것이 너희들의 죄를 용서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단체로 대표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 세례는 단순한 세례가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이 회개는 말하기 좋게 잘못했다고 한 다음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그런 회개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십자가를 진 한쪽 편 강도, 평생 남을 못살게 한 삭개오, 그리고 이스라엘의 산헤드린의 의원인 니고데모 등의 회개처럼 이전의 잘못을 완전히 뒤집는 것입니다. 이전의 삶을 180도로 유턴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이전에는 나의 주인이 나거나, 세상이거나, 마귀이거나 했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삶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회개는 단회적(單回的)입니다. 계속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회개를 해야 그리스도예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를 함으로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됩니다. 39절을 보면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회개함으로 죄를 용서함 받는 약속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너희자녀, 모든 먼데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곧 동양이나, 서양, 과거나 미래에 모든 회개하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하신다는 약속입니다.

회개의 신비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동인(動因)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어떤 죄인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40일전에 주님을 배반했던 사람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도록 종용한 사람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신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한 자들은 어떤 상태에 있거나, 어떤 사람도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심판은 형벌을 동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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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사도행전2:37-42)

사도들의 말과 베드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을 박도록 종용한 사람이 주와 그리스도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을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제일로 잘 섬긴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른다고 생각하여(물론 잘못된 생각이지만)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는데, 알고 보니 자신들이 너무나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음이 심히 찔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심히 찔렸던 것입니다. ‘찔려’(katanuvssw/카타뉫소)katav/카타/-에 대하여)nuvssw/뉫소/찌르다)에서 유래했으며, ‘마음에 예리한 고통을 주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데 잘못알고 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색깔론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소위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쓴 소리를 하면 무조건 좌파/빨갱이라고 예단해버립니다. 일부 언론들이 조장하고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몰고 갑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나라는 절반이상이 좌파입니다. 보수라고 하면서 보수 아닌 사람들은 절반도 안 됩니다. 아주 적은 숫자에 불과합니다. 대단히 잘못된 예입니다. 좌파를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모릅니다. 보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자신들을 보수라고 하는지 모릅니다. 나라가 이렇게 될 때 힘이 극히 감소됩니다.

창세기50:15에서 21을 보면 요셉의 형들이 야곱이 죽은 뒤에, 요셉에게 부탁하는 말입니다. “16…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찌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만난 뒤에 야곱의 그늘 밑에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의 죄를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죽은 뒤에 후환을 생각했습니다. 죄책감이란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도둑 제 발 저린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려면 죄책감도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 외에 ‘당신 죄인이지?’라고 묻는다면 그 말에 대한 긍정은 아주 희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지 않아도, 능히 자신들이 그 죄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죄책감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전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많은 죄책감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 죄책감이 없어집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없다고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 저 죄인입니까? 아니’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으로 인해서 죄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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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라는 것(사도행전2:37-42)

구원(swvzw/소조)는 고전 헬라어에서 신이나 사람이 위험에서 힘으로 구해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로 전쟁 중에서나, 바다에서, 또는 병에서 구원받을 때 소조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LXX에서 히브리어 야사([v'y:/yâshaʽ)와 야사에서 파생한 번역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소조는 일차적으로 육신의 생명에 대한 위험으로부터 ‘구원하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다가 영혼과 육신의 구원으로 확대되었습니다(마1:21). 육신의 구원에서 영혼까지의 구원을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서 확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까? 그것은 곧 사람들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일부가 죄를 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람의 생성에 대해서 많은 설들을 발표했습니다. 그중 지금까지 믿고 있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가장 저등한 생물에서 사람이 출발합니다. 저등에서 고등동물로, 고등동물에서 사람으로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숭이를 인간의 조상으로 보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설들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먹혀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창1:26-28). 그런데 사람이 범죄 한 것입니다(창3:6). 마귀의 유혹에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 한 것입니다. 이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범죄 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불교도니까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로마-카톨릭이니까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동양에 사니까 서양의 종교와는 맞지 않아’라고 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한낮 핑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사람마다 필수적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신경을 쓰든 쓰지 않든지 간에 구원은 사람마다 받아야 합니다. 이 구원 때문에 다른 세계에서(천국)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이루고 가신 것입니다. 자신이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내심, 예수그리스도의 순종하심, 예수님의 속죄로 죄를 용서하심,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그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하심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있는 사람들의 선택하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 하나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 모든 은혜가 적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입니다.

에베소서1:4-5을 보면 ‘성부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해도 오늘에야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역시 신비입니다. 어떻게 나의 구원을 창세전에 예비하셨을까? 놀라울 뿐입니다. 여기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우리가 어찌할까?라는 질문은 도저히 인간적으로는 해결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교적으로, 어떤 종교적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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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베드로가 그들에게 살 방법을 제시합니다. ‘너희가 회개하라(metanohvsate/메타노에사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각 세례를 받으라‘(baptisqhvtw e{kasto" uJmw'n ejpi; tw'/ ojnovmati jIhsou' Cristou'/밥티스쎄토 헤카스토스 휘몬 에피 토 호노마티 이에수 크리스투)입니다. 이것이 너희들의 죄를 용서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단체로 대표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 세례는 단순한 세례가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이 회개는 말하기 좋게 잘못했다고 한 다음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그런 회개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십자가를 진 한쪽 편 강도, 평생 남을 못살게 한 삭개오, 그리고 이스라엘의 산헤드린의 의원인 니고데모 등의 회개처럼 이전의 잘못을 완전히 뒤집는 것입니다. 이전의 삶을 180도로 유턴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이전에는 나의 주인이 나거나, 세상이거나, 마귀이거나 했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삶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회개는 단회적(單回的)입니다. 계속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회개를 해야 그리스도예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를 함으로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됩니다. 39절을 보면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회개함으로 죄를 용서함 받는 약속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너희자녀, 모든 먼데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곧 동양이나, 서양, 과거나 미래에 모든 회개하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하신다는 약속입니다.

회개의 신비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동인(動因)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어떤 죄인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40일전에 주님을 배반했던 사람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도록 종용한 사람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신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한 자들은 어떤 상태에 있거나, 어떤 사람도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심판은 형벌을 동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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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데 잘못알고 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색깔론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소위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쓴 소리를 하면 무조건 좌파/빨갱이라고 예단해버립니다. 일부 언론들이 조장하고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몰고 갑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나라는 절반이상이 좌파입니다. 보수라고 하면서 보수 아닌 사람들은 절반도 안 됩니다. 아주 적은 숫자에 불과합니다. 대단히 잘못된 예입니다. 좌파를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모릅니다. 보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자신들을 보수라고 하는지 모릅니다. 나라가 이렇게 될 때 힘이 극히 감소됩니다.

창세기50:15에서 21을 보면 요셉의 형들이 야곱이 죽은 뒤에, 요셉에게 부탁하는 말입니다. “16…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17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찌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만난 뒤에 야곱의 그늘 밑에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의 죄를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죽은 뒤에 후환을 생각했습니다. 죄책감이란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도둑 제 발 저린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려면 죄책감도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 외에 ‘당신 죄인이지?’라고 묻는다면 그 말에 대한 긍정은 아주 희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지 않아도, 능히 자신들이 그 죄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죄책감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전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많은 죄책감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 죄책감이 없어집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없다고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 저 죄인입니까? 아니’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으로 인해서 죄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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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그리스도 되신 예수(사도행전2:22-36)

하나님이 예수를 주(kuvrio")와 그리스도(Cristov")가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언뜻 읽으면 예전에는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아니었는데, 이제 주와 그리스도를 되게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스라엘에게 말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가 바로 너희들의 주이셨고, 너희들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주라는 말은 나의 주인이라는 뜻이 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단순히 듣기 좋으라고 부르는 주가 아니라 나에게 실제적으로 행사하는 권위적인 단어입니다. kuvrio"/퀴리오스는 ku'ro"/퀴로스/)에서 유래했습니다. 물리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력을 뜻하며, 법의 경우에는 유효하다를 뜻합니다.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권위 있거나 자격이 있다는 뜻이며, 통치자의 경우에는 강력한 영향력을 지님을 말합니다. 당시 노예제도하에서는 퀴리오스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한까지 가졌습니다. 그리스도 즉 메시야(j'yvim;/마쉬아흐)는 구약성경에서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오실 구세주, 즉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쉬아흐의 용도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기 때문입니다. ’

사도들이 예수를 전할 때 뭐라고 전했습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했습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5:42),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18:5)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18:28)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는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메시야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인 것은 당연합니다. 허나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하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너무나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 사항을 베드로는 이스라엘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를 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와 그리스도였는데, 부활과 승천하심으로 사람들이 비로소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부활과 승천하심을 목격내지 증언으로 인하여 뒤늦게나마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말할 때 2000년 전의 역사적인 한 인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가 오래전에 출생했느냐? 사람들의 인기가 어땠느냐? 인지도는 어떤가?를 평가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은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을 만드시고, 자신들에 대한 심판주라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들의 주가 되심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구약시대 때 예언한 메시야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먼 훗날 육신의 죽음을 맞고서야 깨달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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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사도행전2:22-36)

110:1내 우편에 앉으라”, 8:1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12:2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35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에서 우편, 보좌 우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셨다고 하는 뉘앙스는 자칫 하나님의 오른쪽으로, 흔히 우의정, 오른팔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보좌에 앉은 자가 모든 주권을 가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과연 보좌우편은 무엇인가? Calvin은 하나님의 다음에 자리할 만큼의 자리라 했습니다. 성경관용어사전은 가장 영화로운 자리라고 했습니다. 허주는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를 누리고 계시는이라고 했습니다. F.F. 부르스는 지극히 높임을 받으신 예수라고 했습니다. 매튜 헨리는 하나님의 우편으로 높임을 받으시고 능력과 권위로 거기에 앉으신 예수라고 했습니다. 카일과 델리취는 하나님의 지배에 동참하면서 그 위엄과 통치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교회가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죽임 당함에서 살아나신 것입니다. 성경대로 죽임을 당하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대해서 저가 음부(a{/dh"/하데스)에 버림을 당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육신이 썩음(diafqorav/디아프도라)을 당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똑똑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에게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오순절에 오신 성령을 주님께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33). 구약시대 때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할 제자들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2:7-11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했습니다.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골로새서1:20절을 보면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주님)로 말미암아 자기(하나님)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보좌우편에 앉으셨습니까?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로 인해서 탄력을 받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 예수그리스도의 심판주이심,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주이심이 하나님보좌우편에 앉으신 신분입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믿지 않는 인간됨에 있어 패역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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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께서 전하시는 구원(사도행전2:22-36)

우리 기독교는 신비입니다. 기적이 신비이고, 하나님께서 신비한 분입니다. 한분 하나님에 위가 셋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가 셋입니다. 세 위격(persons; uJpovstasi"/실체) 안에 있는 한 본체(substance; ei|" oujsiva)입니다. 한 신격(Godhead)이 세 존재 양식/위격으로 동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신격은 나누어진 위격들 안에서 나누이지 않고 존재합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적 명제는 1)영원히 불변하게 불가분하신바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만이 계신다(유일신 교리). 2)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완전하고 동일하게 하나님이시다(삼위 하나님의 신적 본질의 동질성 교리). 3)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구별된 위격들이시다(삼위 하나님의 존재의 구별성 교리)입니다. 1)번 명제를 부정하면 삼신론의 오류에 빠지게 되고, 2)번을 거부하면 본질적 종속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며, 3)번을 거절하면 양태론에 빠져듭니다.

우리는 성경에 많은 것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삼위일체교리입니다. 한분 하나님이신데, 세 위격으로 존재하십니다. 삼위일체교리로 인해서 초대교회부터 중세초기까지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잘못된 교리를 옹호한 사람들은 삼신론, 종속론, 양태론에 빠져들었습니다.

삼위일체(Trinity) 교리는 성경을 믿는 종교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교리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천명하심으로써 자신이 삼위 안에서 명료하게 명상되도록 제시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과 구별되는 실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삼위일체교리는 매우 중요한 기독교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떠한 분이시며, 어떻게 사역하시며, 어떻게 그분께 나아가야 하는가 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단일성은 그들의 실체(實體)”, “본질(本質)”, “본성(本性)”의 동일성을 살펴야 하는데 각 위격들은 하나의 신적 실체, 본질, 존재, 본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각 위격들은 본질적으로 전지하시고, 모든 것들을 아십니다(성부 요일3:20, 성자 마 11:27, 성령 고전 2:11). 하지만 자의식적 자아들의 구별을 나타내는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에 상응하는 신적 존재의 한 가운데에 참된 자의식의 주관적인 차이점들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위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각 위격들은 자신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즉 주관적으로(subjectively) 그러한 것들을 아십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본질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일체성(unity)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여럿이 아니십니다. 삼위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신성은 분명히 인정되어야 합니다. 각 위격은 질적으로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삼위성(threeness)과 단일성(oneness)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에 항상 삼위로 존재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언제나 삼위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해오셨으며, 항상 신적인 존재이셨습니다. 그분들 가운데 한분 혹은 그 이상 되시는 분이 어느 한 시점에서 존재하기 시작했다거나 신성을 소유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은 이제까지 존재해 오셨던 그대로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십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활동하심은 파격적이며, 그 어떤 책보다 실제적입니다. 사도행전 2장부터 시작된 성령의 활동하심은 끝날때까지 계속됩니다. 이렇게 성령의 활동하심이 많은 것은 막 시작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님이 이루시며, 성령께서 전하게 하시는 복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시지 않습니다. 그 복음전함을 사람들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택했습니다. 선지자들을 택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을 택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이 오늘 어떤 성령주의자들처럼 성령님이 어떤 사람들만을 위해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께서 활동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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