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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교회(사도행전2:1-47)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교회를 건전한 종교로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이다. 성도들은 다르게 이해한다. 불신자들은 천국과 지옥은 상관하지 않고, 삶을 바라본다. 성도들의 삶을 바라보고 교회를 평가한다.
제1절 불신자들이 이해하는 교회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 1881-1944)감독은 1942년 켄터베리 대주교의 취임식 설교에서 지난 2세기 반에 걸쳐 그리스도교의 선교운동의 결과로 세계적인 대 그리스도교의 출현을 일컬어 “우리 시대의 위대한 새 사실”이라고 했다. 교회의 선교는 유대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아시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래서 웬만한 곳은 거의 복음이 전해진 상태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기독교가 전해진지 2세기도 채 되지 않아 전국 어디에도 교회 없는 곳이 없다. 그래서 한동안 교회가 잘 나갈 때는 전 인구의 25%가 신자라고 했었다. 하지만 IMF이후 교회의 성도들은 급속히 떨어졌다. 그래서 지금은 성장이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마이너스 성장으로 가고 있는 실정이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까?
우리나라에 처음 선교가 되었을 때는 성도들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제에 항거했고, 가난을 타파하려 했으며, 사회의 약자들과 함께 했었다. 특히 기독교는 국민들과 함께 가려 했었다. 국민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불신자들에게 좋지 않은 조짐이 197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회가 대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기독교가 사회약자를 보호하려 하지 않고, 강자의 편에 섰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12월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1980년 5월에는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때 교회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미명하에 폭정을 일삼던 군부에 침묵하거나 두둔하였다. 1960년 3월15일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부정선거,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파동, 1970년대 1인 독재를 위해 제정한 유신헌법에 대하여 침묵하였다. 전두환 소장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였을 때는 그를 위해 조찬기도회를 열어 불법적인 군사정변을 정당화해주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목사와 장로들이 정치의 맛을 알았다. 그래서 정치판에 뛰어들어 수많은 국민들과 적을 만들어 놓은 상태이다. 즉 불신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교회는 종교가 아니라 힘으로 이해하고 있다.
제2절 교인들이 이해하는 교회
주후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되었다. 콘스탄틴이 막센티우스와의 밀비안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성과로 인해서 기독교를 로마제국에서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교회는 약 300년의 피 뿌림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이때부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제국의 종교로 거듭난 기독교는 누가 수위에 있을 것이냐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동방과 서방의 오랜 싸움이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때의 순수함이 사라졌다. 말씀이 예전으로 바뀌었고,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에 더 신경을 썼다.
거기에 교회는 이단들과도 싸워야 했다. 사도 시대부터 발흥한 이단과 계속해서 싸워야 했다. 교리를 세워야 했다. 삼위일체론, 기독론 등의 교리를 세워야 했다. 그리고 밀물처럼 밀려오는 권력인 로마카톨릭과 대전(大戰)을 치러야 했다. 대전을 치르고도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다. 독일에서부터 개혁의 기치를 든 기독교는 프랑스, 스위스를 휩쓸고는 영국에 착륙했다. 거기에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나라에 19세기에 들어왔다. 일제시대에 들어온 한국교회는 시험대에 올랐다. 신사참배, 좌경신학과의 전쟁, WCC로 인한 분리, 교회의 대형화, 교단과의 수위권다툼, 정교유착으로 인한 타협 등으로 인해서 교인들이 이해하는 것도 별로 특별한 것이 없다. 그게 그거라는 인상을 받는다.
제3절 바울이 이해하는 교회
불신자들과 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교회는 부정적이다. 그러면 바울은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1. 바울이 세운 교회
다메섹에서 회심한 바울은 제1차, 제2차, 제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교회들을 세웠다. 그 대표적인 교회들이 고린도교회들, 갈라디아교회들, 에베소교회들, 빌립보교회들, 골로새의 교회들, 데살로니가교회들이다.
2. 바울이 이해한 교회
바울은 교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사도이다. 교회(ejkklhsiva)가 신약에 115회 중 62회가 바울서신에 나타남이 이를 입증한다. 바울은 “에클레시아”를 우주적인 교회를 가리킬 때도 사용하고(엡 5:23,25), 한 장소에서 회집되는 개 교회를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고전 1:2; 4:17). 그러나 바울은 건물을 교회라 부르지 않는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배와 교제와 봉사를 위해 정규적으로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켰다.
가. 성령에 의한 단체(고전 12:3,13, 롬8:9-11)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은 신약교회 설립을 위해 계획된 사건이다. 새로운 사명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요, 신약교회를 인친 사건이며,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덧입힌 사건이다.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며(고전 12:3),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다(고전 12:13).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성령은 성도 안에 거하신다(롬 8:9-11). 따라서 기근의 시대에 우리자신의 신뢰를 새로운 운동계획이나 새로운 유형의 어떤 것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있어야 한다.
나.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심(엡1:22-23)
교회의 건물을 초대형으로 세우고 교회라고 하는데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그 힘과 존재를 그리스도께 의지하여 살아있고, 자라나며, 움직이고, 일하는 유기체로서 우주적인 유기체다. 교회는 그 본질, 기원, 시간(영원성), 목적성으로 보아 그리스도라는 반석위에 단호히 세워졌다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란 유기적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대표성을 말하고, 통치성을 말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1:23의 논리의 방향은 교회로부터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로부터 교회와 우주로 향한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세우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교회의 존재와 사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제공한다고 이해하였다.
다.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기능(고전 12:12-26)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12:12-26에서 성령이 내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유기적 기능인 지체를 이룬다고 가르친다.
(1) 유기체인 교회
교회를 몸에 비유한 것은 몸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교회도 유기적인 단체라는 증거이다. 몸의 각 지체가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몸의 활동을 원활하게 하듯 교회도 유기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각 지체가 협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도바울은 다양성과 통일성을 몸과 지체의 비유를 들어 말했는데, 교회는 다양하나 하나라는 말이다.
(2) 다른 지체를 위한 교회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우리 교회주의’이다. ‘우리교회’가 아니면 ‘다른 교회들’은 거의 적(敵)의 수준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큰 병폐이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교회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 즉 모든 사람들이 우월감을 가지지 않아야 하며, 자기교회 건물이 크다고 독존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 교회의 우월성이 없음
몸의 지체는 귀천의 차이가 없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몸은 서로 경쟁하지 않고, 서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였기 때문에 어떤 교회는 귀하고 어떤 교회는 천할 수 없으며, 어떤 교회는 특별하고, 어떤 교회는 보통의 교회라 할 수 없다.
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의 기능(골 1:18)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교회를 살게도 하시며, 자라가게도 하신다(골 2:19). 그는 교회의 유기체적인 머리가 되신다. 머리로서 그는 교회를 다스리시는 권한을 행사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교회를 통치하신다. 우리의 몸이 우리 자신을 외적으로 대표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교회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는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여기고(롬12:1), 우리 전체 인격을 모두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그리스도를 대신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즉 교회가 움직이면 그리스도가 움직이는 것과 같고, 교회가 휴식을 취하면 그리스도가 휴식하는 것과 같고, 교회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리스도 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과 같으며, 교회가 선한 일을 하면 그리스도가 선한 일을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능은 하나님께는 항상 예배드리는 기능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 교회만 가지고 있는 권리
(1) 구속의 비밀을 책임진 교회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하기를 그리스도자신이 이방인과 유대인과의 막힌 담을 허셨다(엡 2:14)고 했다. 이 막힌 담은 수천 년 전부터 허물수가 없었다. 누구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허물지 못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 담을 허무신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철저하게 분리시킨 이 담은 유대인들만 가지고 있었던 구원이 이방으로 나온 것이다.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철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2) 천국을 미리 알게 한 교회
바울 사도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귀신의 상에 참여하는 것은 신성모독의 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한다(고전 6:13-18). 교회가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연합 때문이다.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고(롬 6:8),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고(롬 8:17),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롬 6:6),예수님과 함께 죽고(고후7:3),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고(롬 6:4),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고(골 2:12; 3:1),예수님과 함께 살림을 받고(골2:13; 엡 2:5) 예수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고(롬 8:17),예수님과 함께 후계자가 되고(롬 8:17),예수님과 함께 통치한다(딤후 2:12). 즉 교회는 이 세상에서 어디에도 없는 기관으로 천국을 항상 맛보고, 미리 천국을 알게 하는 곳이다. 비록 우리는 이 세상에 몸을 두고 있지만 항상 본향인 천국을 소망하며 나그네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주민권을 두고 있지만, 우리의 진정한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소망은 이 세상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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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봉사(사도행전1:12-26)
25절을 보면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이라 했습니다. to;n tovpon th'" diakoniva" tauvth" kai; ajpostolh'", ajf j diakoniva(톤 토폰 테스 디아코니아스 타우테스 카이 아포스톨레스 아포 디아코니아/그 직무, 그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공직자들이 민원을 상대하면서 민원에게 봉사한다고 말합니다. 엄연히 말하면 틀린 말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대민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직무를 행하는 것입니다. 봉사라고 한다면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직자들은 민원이 제기한 사항을 처리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봉사도 이와 비슷합니다. 12절에서 26절을 보면 배반자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뽑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로 뽑혔기 때문에 맛디아는 반드시 그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해야 할 당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봉사’라는 것은 집사의 직무입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입니다. 하지만 그 직무와 봉사들은 반드시 교회와 연결되어 있고, 복음의 확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봉사는 복음의 확장의 일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해야 합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하며, 명예가 없어야 하고, 진심과 열정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봉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봉사는 많이 세분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급화되었습니다. 봉사의 일을 해서 빛이 나게 생겼고, 누가 알아주는 직무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힘든 일이나, 그리고 일을 해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빛이 나지 않는 직무들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교회는 일군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들은 일군들이 희귀합니다. 사람이 많은 교회에서는 교회의 직원들이 해야 할 일들을 작은 교회에서는 목사들이 모두 해야 합니다. 사람이 많은 교회에는 찬양대도 많습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들은 찬양대도 구성할 사람들이 없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이미 교회에서 봉사의 직무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봉사는 주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 봉사여야 합니다. 그런데 봉사가 변질되어 갑니다. 봉사의 주체는 복음의 확장에 맞추어져 있어야 하는데, 봉사의 주체가 사람들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서, 사람을 위한 봉사, 즉 자신을 위한 봉사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을 위한 봉사로부터 사람을 위한 봉사로 변해가면서 복음의 확장은 점점 마아너스 확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들은 차고 넘치기 때문에 자신들이 좋은 프로그램을 하기 때문에 성장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성장한 교인들이 그 교회로 유입된 것을 알아도 모른척합니다. 교회마다 봉사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봉사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돌이키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버렸습니다. 빨리 초대교회의 봉사로 가야 할 텐데…. 갈 길이 요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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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정치(사도행전1:1-26)
변증법(dialectic)의 사전적인 정의는 동일률(同一律)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입니다. 변증법의 창시자였던 엘레아학파에서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써 자기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변증법은 소크라테스에 전개되고, 플라톤에 의해 발전했습니다. 헤겔은 인식이나 사물은 정(正)·반(反)·합(合)(정립·반정립·종합, 또는 卽自·對自·卽自겸 對自)의 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正)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실은 암암리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合)의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합의 단계는 정과 반이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된다는 것입니다. 이 변증법에 따르면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치(政治/politics)라는 것은 진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어떤 압력에 의해서 한 치를 양보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그랬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눅23:4). 유대인의 시기로 재판에 넘겨준 줄을 알았습니다(마27:18). 그러면 소신대로 바른 판결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바른 판결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민란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명절을 당하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제도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께서 죄를 면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그래도 빌라도는 소신껏 재판을 해야 했습니다. 바라바는 정죄하고 예수님은 석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생명력에 영향을 끼칠까하여 바른 판결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후로 빌라도는 신앙 고백할 때마다 등장하는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교회정치는 어떻습니까? 역시 진리를 진리답게 하지 못합니다. 정반합 사상으로 나갈 확률이 많습니다. 이편도 옳은 것 같고, 반대하는 저 편도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타협점을 찾습니다. 중간으로 정하든지 표 대결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항상 진리편이 승리하게 되느냐? 그렇지를 못합니다. 신사참배는 엄연한 우상숭배인데도 변절한 힘 있는 삯군목자들이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떠들면서 회유하고 압박한 사례로도 진리가 승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작금의 교회정치행태가 사회에 비쳐질 때 더욱 선교에 훼방거리만 되었습니다. 자신들은 옳다고 말하며 물의를 일으키지만, 결국 빌라도의 법정과 조금도 다름없는 상황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와 정치는 안할 수는 없지만 많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콘스탄틴의 교회정치나 빌라도의 법정이나 양상만 다르지 같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정치는 아차하면 진리를 그르칠 수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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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보궐선출/맛디아(사도행전1:15-26)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12라는 숫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으로부터 시작된 열두 아들이 후에 열두지파가 되어 구약성경에 신약성경에 깊이 그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3X4=12의 신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숫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12이었다가 빠져나간 가룟 유다의 자리를 메꾸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세례를 줄때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항상 같이 했던 두 사람을 천거했습니다. 바사바/유스도와 맛디아였습니다. 그 중에서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제자의 수에 가입시켰습니다.
이에 대해서 변종길 교수는 사도들이 기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매튜 헨리도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것으로 다른 방법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를 결정하는데 유익한 해결책이었다고 했습니다. Calvin 역시 이 방법이 타당하다고 했습니다. F.F. 부르스도 같은 입장입니다. 기도 후에 투표가 진행되었고, 가룟 유다가 죽어서 투표한 것이 아니고 배신했기 때문에 투표한 것이어서 사도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허버트 로키어는 베드로가 유다의 죽음으로 인한 공백을 채우자고 제안했을 때 선의와 그 선택과정도 공정하게 실행되었으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사바나 맛디아는 더 이상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들 모두 오순절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 후에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를 보기 위해 왔을 때 이미 주님에 의해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유다를 대신해 거룩하게 선택된 자는 누구였을까? 솔로몬에 의하면,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이 맛디아를 선택할 때 다소 사람 사울을 부르심으로써 인간의 도움 없이도 직접 그 빈 사도직을 채우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울은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친히 부르셨을 때와 같이 직접 선택하셨습니다. 바울이 자신은 주님으로부터 직접’임명된 사도라고 여러 번 강조할 때, 그는 바로 다락방에서의 열 한 제자에 의한 선발과정과 관계지어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펀지에서 자신을 가리켜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 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갈1:1)이라고 한 것이 증거입니다. 바울이 사도직을 받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부터입니다. 열 한 사도들이 보궐선거를 하고 있을 그 시간에 사울은 교회에 대한 격렬한 박해자였지만, 오순절 직후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적절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맛디아의 선발에 대해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맛디아도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자신을 “사도 중 지극히 작은 자”(최후의 사람)라고 보았습니다(고전15:8,9). 고린도전서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사도라는 바울의 주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던”것이다(고전1:1)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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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서 기도하는 제자들(사도행전1:12-14)
제자들은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웠습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였습니다. 그들은 기거하는 다락방에 올라갔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시몬(열심당원), 유다(야고보의 아들)였습니다. 그 외에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기도에 계속 열중했습니다(12-14절).
사도들은 주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소에 기거하던 다락방에 모여서 주님의 명령대로 했습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절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기다리라고 했을 때 이들은 다락방에서 모여서 열정적인 기도를 했습니다. 소위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많이들 말하지만, 그 말은 신빙성이 없습니다. 어쨌든 이들은 기도에 열심 했습니다. 이들 기도는 개인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합심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목적을 두고 합심하여 전심으로(proskarterou'nte")기도 했습니다.
누가는 사도들 외에 ‘여자들’(gunaixi;n)과 마리아를 기록했습니다. 누가에게는 여자들을 많이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8:1-3을 보면 누가는 여성도들이 예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기록했습니다. 여자들의 신앙이 사도들의 수준에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가의 보기에 예수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사람들,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차별당하는 사람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죄 있는 모든 사람들, 죄인들의 ‘구주’였습니다. 또한 고대에 사회적으로 업신여김을 당하던 특별한 한 집단으로 여자들을 들 수 있었습니다.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는 그들에게 특별한 한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여 주셨으며, 그들과 특별한 한 방식으로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태도는 제자 공동체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가치 척도를 세웠습니다.
눅1-2장의 어린 시절 역사에서 마리아가 중심점이었습니다(마1-2장의 중심은 요셉). 자주 한 남자가 등장하는 자리에 곧바로 한 여자가 옆에 세워졌습니다. 시몬 옆에 여예언자 한나를(2:25-35), 가버나움의 백부장 옆에 나인성의 과부를(7:1-10) 세웠습니다. 여자들은 예수를 따라감에 남자들과 똑같이 받아 들여 졌습니다. 이것은 유대적 사고방식 및 고대의 이방적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여자들을 사도들과 나란히 예수의 공생애 등장, 그의 죽음과 부활의 유자격한 증인들로 세우셨습니다.
또한 이 기도모임에 예수님의 아우들이 함께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생전에는 거의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마리아와 함께 동참했습니다. 이제 이들은 전 세계에 전해질 복음을 위해 기도의 불을 붙였습니다. 그들의 모임과 기도는 곧 다이나마이트 폭발의 심지였습니다. 기도의 심지가 서서히, 그러나 뜨겁게 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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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사도행전1:9-11)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의 전기를 쓸 때 신비적으로 쓰게 합니다. 있지도 않은 일들을 쓰기도 하고,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도 씁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을 화려하게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기처럼 화려하지 않습니다. 무척이나 약합니다. 한번 죽으면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서 꼼작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산 사람에 대해서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약한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스스로 승천했다든지, 또 이 세상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말은 100%거짓입니다.
주님은 40일 동안에 이따금씩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주님의 모습을 제자들은 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홀연히 나타나셨던 주님께서 승천하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계속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지상에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성령강림의 전제조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혹자들처럼 비밀리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밤에 아무도 몰래 승천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공개적으로 낮에 승천하셨습니다. 성경기록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막16:19-20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눅24:50-53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행1:9-12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그리스도의 승천이 갖는 의미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들로부터 그리스도께서 떠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그의 신격, 위엄, 성령과 관련해서 떠나있음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영적교통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승천해야 할 이유는 더 나은 임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유대인들만의 왕이 아닌 전 세계의 왕으로서, 세상의 구주로 계셔야 했습니다. 유대의 벽을 넘어서 이방인들의 주님으로 계셔야 했습니다. 유대의 통치자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통치자여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들을 제자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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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준비하라(사도행전1:6-8)
우리나라도 외세의 침입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병자호란, 임진왜란 등 고조선시대부터 북방인 중국과 러시아, 남방인 일본의 침입을 수없이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세력의 영향권에 들어가 내정간섭을 심히 받았습니다. 이들의 압제에서 신음하다가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도 지금 분단된 국가로 남아 있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시대부터 오랜 기간 동안 외세의 침입을 계속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721년 앗수르에게 북이스라엘이 정복당했습니다. 이어서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앗수 르와 더불어 유대가 함락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바벨론에 함락되었습니다. 주전 539년에 페르샤는 바벨론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페르샤를 주전 333년에 헬라가 멸망시켰습니다. 잠깐 유대는 마카비형제의 영도하에 독립된 시기를 가졌습니다(주전166-63년). 그러다가 주전 63년도에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갔습니다(폼페이).
따라서 유대는 주전 586(북이스라엘은 722년부터)부터 예수님시대까지 계속 속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누구나 물론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렸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기다린 때가 이때냐고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회복되면 자신들도 유리한 위치에 있게 될 것도 계산에 넣었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때와 기한은 자신도 알지 못하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말을 보류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때와 기한을 상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이 임하시면( ejpelqovnto"/에펠쏜토스)의 권능을 받고(lhvyesqe duvnamin/레프세스쎄 뒤나민) 온 세상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8절을 보면 두 가지의 명령형이 나옵니다. ‘받고’(권능을)와 ‘되리라’(내 증인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사역을 수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증인이란 말씀에서 세상의 중심이 예루살렘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땅 끝으로 복음은 전해져야 했습니다. 결국 사도행전의 주제는 ‘내 증인이 되라’이고, 그 지역은 확장되는 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1-7장, 온 유대와 사마리아는 8:1-11:18, 유대의 경계선을 넘어서 11:19-28:31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전파되는 복음은 전 세계로 전해져야 했습니다. 그 복음을 운반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마귀의 공격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이제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교회와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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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을 보면 ‘사도와 같이 모였다’(kai; sunalizovmeno"/카이 쉬날리조메노스/동사, 분사, 현재, 중수디포, 주격, 남성, 단수/그가 함께 먹으며/eating with them/ARV)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먹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까?
sunalizovmeno"의 원형이 sunalivzw입니다. sunalivzw는 쉰(suvn/함께)와 할리조(aJlivzw/모으다)의 합성어입니다. aJlivzw는 할스(a{l"/(소금을) 함께 먹다, 같은 식탁에서 먹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이사/쉬날리조’는 사도행전1:4에 한번 나옵니다. 이 문맥은 현재형 단수가 아닌 완료형 복수를 요하는 단어입니다. 이 번역은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불가타역본에 의해 ‘함께 먹다’를 의미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교부들의 인용문에는 ‘쉬나올리조마이’(함께 밤을 지내다)에서 파생된 ‘쉬나울리조메노스’로 표기되어 있으며, 개역 표준성경(RSV)은 이 의미를 받아들였습니다. 본문이 이처럼 변형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을 피해보려고 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은 물질적인 자양물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음식을 취하셨다는 사실은 눅 24:4143과 사도행전10:41에 나와 있습니다.
눅24:41-43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행10: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성령의 오심입니다. 요한복음14:16,26, 15:26, 16:7,13을 통하여 성령이 오시리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성령에 대한 약속은 세례요한이 자기에게 회개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1:8)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성취의 날에는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욜2:28). 이 성령세례는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영적인 세례이며, 이를 통해서 복음전파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면 요한의 물세례와 성령세례(행1:5)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는 물로 세례 주느냐, 성령으로 세례 주느냐입니다. 요한이 베푼 물세례는 하나의 ‘의식’이요 ‘상징’입니다.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표로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막1:4). ‘물세례’ 그 자체는 결코 죄 사함을 얻게 할 수 없으며 ‘상징’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께서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케 하며 죄 사함을 얻게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이 베푼 세례(물세례)가 ‘의식’ 이요 ‘상징’이라면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세례(성령세례)는 그 의식의 ‘내용’이며 그 상징이 가리키는 ‘실제’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은 세례의 수종자에 불과했지만 그리스도는 세례의 ‘주인’이었습니다.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은 요한이 베푼 세례의식의 ‘실체적 내용’이 실현될 날이 임박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참된 회개의 역사가 곧 일어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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