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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민임을 내세우는 유대인들(로마서4:1-8)
2:1은 ‘그러므로’, 3:1은 ‘그런즉’, 4:1도 ‘그런즉’이라는 접속사를 씁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깊은 골은 여간해서 메꿔지지 않습니다. 요사이 같으면 굴삭기로 산도 옮겨서 골짜기를 메울 수 있지만, 예전에는 깊은 골짜기를 메운다는 것은 상상에만 그쳤습니다. 그만큼 깊은 골은 메꾸기가 어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사용함에 있어서 극히 배타적이었습니다. 죄 지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의 어려움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성전은 여섯 구획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각 구획마다 한 단계씩 높은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결의 정도를 강조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이방인에게 허용한 유일한 장소로서, 성전 경내 바깥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했습니다. 성전 벽은 90cm의 담으로서, 이방인들이 이를 넘어설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여인의 뜰은 이방인의 뜰보다 90cm 높은 곳으로서, 유대 여인들에게 출입이 허용되었으나 그 이상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뜰은 3m가 더 높았으며, 유대 남자들이 들어갔습니다.
제사장의 뜰은 이스라엘의 뜰보다 90cm 위에 있었으며, 제사장들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은 제사장의 뜰2.5m 위에 있었으며, 성소와 지성소라는 두 개의 구획으로 분리되었었습니다.
성전에서 이방인들을 배제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선민으로 간주하고 다른 민족들과 구별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뜰을 계급별로 나누고 출입을 금지하여 유대교 체제의 엄격한 신분 차별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공로를 심히 찬양하고 있습니다. 누가 조금 정의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일들(善行)을 하면 그 사람을 상당히 높이 평가합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血緣과 地緣 그리고 學緣에 의해서 돌아가는 나라입니다. 출세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요구하는데 副應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해도 깎아내리고 끌어내리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같은 출생을 해도 고난과 어려움을 안고 출발해야 하는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공력에 의한 구원을 옹호하는 자들의 가장 강력한 요새로서 아브라함을 내놓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지 바깥으로 굽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배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는 자신들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감히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선민과 특권으로 아브라함을 내세웠습니다.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하면서 다른 말들을 내놓지 못하게 했습니다. 인간의 공력에 의한 구원을 옹호하는 자들이 강력하게 내세우는 것이 자신들의 어떠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전면에 세웠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래? 과연 그럴까? 사도바울은 그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꼭 유대인들만의 조상일까? William Hendriksen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조상뿐 아니라 이스마엘과 에돔 사람의 조상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16: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창세기25:1-4 1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2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3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4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또한 아브라함은 로마서4장에서 바울사도가 말하는 요지는 아브라함이 어떤 의미에서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조상도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꽉 막힌 사람에게 이해를 시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데 그 기간이 120년이었습니다. 현시대의 수명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기간입니다. 노아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방주를 만드는 노아를 120년이나 보았을 것입니다. 어디에 사용하려고 만드느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반드시 노아가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로, 홍수심판 때 피할 배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노아가 무척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홍수라는 것을 그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노아가 만드는 모습을 보고는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곤 어떤 사람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120년의 오랜 기간에 배를 만들었지만, 홍수를 피한 사람은 열 명이 채 안되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물속에서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왜 그들이 홍수심판을 피하지 못했습니까? 꽉 막혔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비가 오지 않을 거라는, 절대로 홍수심판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사람들도 과거의 그들이나 大同小異합니다. 구원에 관한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종교를 선택하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나 현대 비 기독교인들이나 모두 같습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고 수정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큰일입니다. 바로 수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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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의롭다함(로마서1:15-17)
D. M. Lloyd-Jones는 로마서 강해 서론에서 기독교의 역사와 기독교회의 가장 주목할 만한 지도자들의 생애에 있어서 로마서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책이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없다고 했습니다. Augustine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것도 로마서13장의 몇절을 읽음으로써 되었고, Martin Luther가 로마서 1:17을 상고하면서 참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이어서 John Bunyan을 개종시켰습니다. 그로 인해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의 대작을 남겼습니다. John Wesley’s의 구원도 어떤 사람이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만큼 로마서는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로마서는 사람들을 변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지 로마서를 읽게 되면 변화를 받아서 개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로마서에서 뿜어져 나오는 말씀의 힘은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16절에서 17절을 보면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이 어떻게 구원함을 받는가? 그것은 바로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기쁜소식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도대체 믿음은 무엇이길래 사람을 영원히 구원합니까?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우리의 시야는 한계가 있습니다.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망원경이 있다면 한계 밖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망원경이 믿음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저 멀리 있는데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초점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시2:12, 히12:2).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역사가 나타나며, 믿음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시118:8,9/합2:4/행27:25). 믿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속역사를 신뢰하는 것입니다(롬3:21-25,10:9/갈2:20,21).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과 대조됩니다(고후5:7). 그래서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의 밑바탕입니다(딛1:1,4/유1:3).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롬12:3/엡2:8). 그런데 믿음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롬10:9,10).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 생깁니다(고전2:5). 그리고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케 됩니다(약2:22). 하지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살후3:2). 의인(의롭다고 칭하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합2:4/롬1:17/갈3:11/히10:38). 믿음은 의로 간주됩니다(창15:6/롬4:3,5,9/갈3:6/약2:23). 믿음이 있으면 기적을 일으킵니다(마17:18-22/막9:23,11:23/약1:6,5:15). 그래서 성도들에게 꼭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고전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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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사보나롤라(사도행전21:7-14)
교회의 기능을 사람들에게 말하려고 하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한 두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된 의무는 창조주를 예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진리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권세로 말미암아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성경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교회 자체 내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온 세상에까지 선포해야 할 권세와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셋째로 전도하는 기능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의 진리 증거 기능의 한 측면은 전도와 교회성장입니다 교회를 향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마28:18-20),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전파하며”(눅24:47), “땅 끝까지 이르러” 자신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넷째로 성례시행입니다. 교회는 성례를 시행할 책임이 있고, 교회가 성례를 시행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게 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교회는 봉사해야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성도들을 양육하고 덕을 세우는 고귀한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섯째 기능으로 교회는 질서유지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강의 하나님이시며”(고전14:33), 그분께서는 자신의 교회 내에서 “모든 일들이 질서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심”(고전 14:40)입니다. 일곱 번째로 교회는 구제의 기능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 특히 억압의 결과로 가난하게 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판결이 약자와 고아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의 권리를 유지하며 약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한 자들의 손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셨습니다(시82:3-4). 이런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교회의 기능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John Wycliffe는 영국인이었습니다. John Hus는 보헤미안이었습니다. Jerome Savonarola는 이태리인입니다. Wycliffe와 Hus는 Roman-Catholic의 비정상적인 교훈들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Savonarola는 다른 것을 공격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의 도덕적인 면을 공격했습니다. 부도덕한 습관, 악한생활을 공격한 것입니다. Savonarola는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Savonarola는 1452 년에 Ferrara라는 이태리의 도시출생입니다. 그는 잠시 도미니크파 수도원에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38세 때에 Florence로 갔습니다. Florence는 과학과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암흑과 무지의 도시였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기 시작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군중들, 성직자들, 평신도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부패상에 대한 그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큰 성당 안에 수많은 군중들이 들어차서 죄를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열심을 가지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강퍅한 많은 사람들이 옛 생활을 벗어버리고 회개하였습니다. Florence는 Roman-Catholic의 교훈들이 뿌리박혀 있었지만, 부흥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Savonarola의 영향력은 곧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당시 Florence는 메디치가(the House of Medici)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Savonarola의 강력한 설교의 영향력이 널리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로렌쪼 드 메디치(Lorenzo de Medici)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메디치家는 사보나롤라의 가르침과 윤리에 대하여 동감하지 않았습니다. 로렌쪼는 Savonarola의 설교를 잠재워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Savonarola는 듣지 않았습니다. 로렌쪼가 44세 되었을 때 중병을 앓았습니다. 로렌쪼는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Savonarola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로렌쪼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Savonarola는 그를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어 백성들은 로렌쪼의 아들을 추방하고 사보나롤라를 플로렌스의 통치자로 뽑았습니다. Savonarola는 자기의 개혁활동을 쉽게 수행하리라는 생각에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Savonarola는 3년 동안 플로렌스를 다스렸으며, 善政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엄격한 통치에 반발했습니다. Savonarola는 Florence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범죄의 소굴이 소탕되고 도박이 금지되며 남녀를 불문하고 사치스러운 옷이 금지되고 경건한 생활이 장려되었습니다. 차드, 주사위, 사육제 때에 입는 옷, 음란서적, 음화 등이 소각 처분되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반기를 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Savonarola는 자기가 예언의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이 빗나가자 지지자들마저도 불신하였습니다. 그 결과 Savonarola의 영향력은 줄어들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죄악 된 생활로 유명한 알렉산더 보르기아가 교황이 되어(알렉산더 6세) Florence의 Savonarola를 공격했습니다. 교황은 스페인 사람이었습니다. 역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사악했습니다.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세를 최대한 이용했습니다. 그 자식들의 진로, 결혼 등에 있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가의 문제로 유럽의 정치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목표를 추구해 나가기 위해서는 살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계획이 성취되는 일이라면 독약의 사용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음모와 계략에 도취된 교황은 Savonarola를 뇌물로 매수하려 했습니다. 교황은 Savonarola에게 추기경의 직위를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Savonarola는 “나는 순교자의 면류관 이외에 다른 면류관을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Savonarola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하여 다른 책략을 썼습니다. 수도승들을 설득하여 그를 비방하고 그의 권위를 해치도록 하였습니다. 곧 교황은 그를 파문하여 투옥시켰습니다. 이전에는 Savonarola에게 박수를 보내던 시민들도 이제는 그의 가르침을 철회하도록 고문을 가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이어서 단죄하라고 함께 소리를 높였습니다. 결국 1498년 5월에 사보나롤라는 화형을 당했습니다. Savonarola는 친구 두 사람과 함께 화형대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45세의 나이로 Savonarola는 순교했습니다. Roman-Catholic은 순교자들(당시 세 사람이 화형당함)의 유골을 Arno 강에 던져 버렸습니다.
진리는 항상 자기 디스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억압하고 전하지 못하게 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통해서라도, 어떤 사건을 통해서라도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며, 위협하더라도, 진리와 복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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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요한 후스 (0) | 2016.02.27 |
박해에도 불구하고/위클리프 (0) | 2016.02.23 |
박해에도 불구하고/왈도파 (0) | 2016.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