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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 폭행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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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1.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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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폭행죄(출애굽기21:15)

자기 부모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하셨습니다. “친다”hk;n:(나카)는 것은 여러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한 번의 치명적인 타격으로 대상을 “치거나 때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나귀와 같은 동물을 때릴 수 있습니다(민22:23,25,27). 또한 사람의 뺨(시3:7)이나 눈(출21:26)을 칠 수 있습니다. 이때에 “나카”를 사용합니다. 또한 ‘나카’는 어떤 대상을 매질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모에게 여타한 매질을 하거나 폭행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여하한 악행으로 그 부모를 폭행한 사람을 발견하면 반드시 죽이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론에 뉴스를 접하다 보면 별일들이 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형법상 폭행은 사람에 대한 것이든 물건에 대한 것이든, 모든 종류의 유형력(有形力) 즉 보여진 傷害의 行事를 말합니다. 소요죄(형법 115조)와 다중불해산죄(116조)에서 말하는 폭행이 이에 해당합니다. 또한 ②사람에 대한 직간접적인 유형력의 행사입니다. ③ 사람의 신체에 대한 직접적 유형력의 행사를 말한다. 제125조에 규정된 폭행이 이에 해당한다. ④ 상대방의 반항을 억압할 만한 유형력의 행사입니다. 형법 260조 2항을 보면 존속폭행죄가 있습니다.

제260조 (폭행, 존속폭행) ①사람의 신체에 대하여 폭행을 가한 자는 2년이하의 징역, 500만원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 [개정 95·12·29]②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에 대하여 제1항의 죄를 범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95·12·29]

성경은 네 부모를 주안에서 공경하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부모와 자녀간은 하나님의 은혜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들을 있게 하는 도구의 역할이 부모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주안에서 양육하는 책임을 맡은 역할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부모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을 성경은 중한 형벌로 다스렸습니다. 이 법은 가정과 사회를 지키게 하기 위한 법입니다. 가정이 건전해야 사회가 건전합니다. 가정이 온전해야 사회가 온전합니다. 가정이 파괴되면 사회도 파괴됩니다. 그래서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을 세우려면 가정에서부터 잘되어야 했습니다. 가정은 작은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가정은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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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하나님 자녀들이 힘써 할일

역대상1:1-4

우리들은 이 세상에 영혼과 몸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영혼과 몸은 따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영혼 따로 몸 따로 있는 자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반드시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주어야 합니다. 추우면 불을 피우거나 덮어주어야 합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피할 곳이 필요합니다. 더우면 더운 것을 역시 피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많아도 귀찮아도 그 모든 것들을 다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몸이 요구하는 것들을 다 들어주지는 못합니다. 아마도 그러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재물이 많다고 해서 다 들어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요구는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고 나만 의지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약속을 하셨습니까? 1절과 2절을 보면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성경에는 족보가 많이 나옵니다. 전체적으로 나오기도 하고, 일부분만 나오기도 합니다. 창세기5장에서도 족보가 나옵니다(창5:4-32). 마태복음에도(마1:1-17), 누가복음에도(눅3:23-38) 족보가 나옵니다. 성경의 족보에 사람들이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첫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I. 예배를 드리는 사람(1-2절).

역대기 저자는 노아까지 10명의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아담부터 시작해서 바로 셋으로 들어갑니다. 그 사이에 있는 가인과 아벨은 제외시켰습니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났기 때문에 제외시켰고, 아벨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제외시켰습니다. 그래서 아담 다음으로 셋이 등장합니다.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았습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냈습니다. 그간에 수많은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930세를 일기로 죽었습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v/na>)를 낳았습니다. 셋도 에노스를 낳은 후 807년을 살았습니다. 그간에 수많은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912세에 죽었습니다. 셋은 아들의 이름을 “에노쉬”라고 붙였습니다. 사람마다 이름이 뜻이 있는데 “에노쉬”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에노쉬는 “약하다”(vn"a;)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인간은 약해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는데, 이때 아담의 나이가 235세였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이 땅과 사람들은,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약해진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셋 시대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인간은 저주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인간 혼자서 살아갈 수 없음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창세기12:8, 13:4을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단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찬양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여호와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왜 드립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신비(musthvrion)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기도 하고, 억제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속에서 섭리하심으로 드러내십니다. 예배 속에서는 초월해(transcendence)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초월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것이 초월입니다.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계시는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어디에나 동시에 계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도 초월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immanence)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초월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예배는 누가 드립니까? 자신의 약함을 아는 자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일단 예배를 드리러 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를 형성한 자세입니다. 다음으로 할 일은 우리가 예배의 가치입니다. 공중예배는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해서 드려야 됩니다. 예배는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낮예배는 대예배고, 오후예배는 소예배가 아닙니다. 똑같이 소중한 예배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파격해야 복을 받습니다. 예배를 우리가 고르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예배에 참석해서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드리는 만큼 하나님의 파격적인 복이 내려집니다. 또한 예배드리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예배는 참석하는데 의의가 있지 않습니다. 찬송을 할 때는 열심히 크게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시간에도 경건하게 해야 합니다. 설교는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들은 뒤에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배에서 손님이 되지 말고,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정말 한 번이라도 바르게 정식으로 예배를 드립시다. 하나님의 뜻에 딱 맞는 예배를 드립시다. 내가 이렇게 예배를 드려서 주님께서 받으실까 스스로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이왕 우리가 예배드리러 왔으니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립시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예배를 드립시다.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예배를 드립시다.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의 생활에 복된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시다. 오늘도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1-2절)일뿐만 아니라 두 번째로 우리는

II.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3절).

에녹, 므두셀라

여기에 나오는 두 인물은 각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므두셀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에녹은 아버지이고, 므두셀라는 그의 아들입니다. 성경은 에녹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창세기5:21-24을 보면

21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다른 사람들은 “몇 세에 누구를 낳고, 몇 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몇 세에 죽었더라”고 했는데 에녹은 설명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또한 히11:5에 에녹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22절).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죽지 않고 천국에 간 것입니다. 이때가 아담이 죽은 후 57년 후입니다. 그러나 셋을 비롯해서(857세) 에노스(752), 게난(662), 마할랄렐(592), 아렛(527) 므두셀라(365)는 모두 살아 있었습니다. 손자인 라멕도 살아 있었습니다(113세).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느 날부터 에녹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에녹이 갑자기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갈만한 곳을 찾아도 에녹은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에 의하면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갔습니다. 어떻게 에녹이 죽음 없이 천국에 갔습니까? 에녹은 300년간을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eujarestevw).

에녹은 365년을 이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므두셀라를 65세에 낳았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같이 걸었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출생으로 그 시대의 비극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보낸다)로 지었습니다. 즉 “그가 죽을 때에 심판의 홍수를 보내리라”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므두셀라가 죽습니다. 이런 이유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300년간을 매일같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에녹시대의 사람들은 매우 악했습니다. 죄로 인해서 점점 약해지면서 악해졌습니다. 에녹의 선한 마음과 그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에녹은 심히 마음이 상했을 것입니다. 또한 에녹의 일생이 편안했다면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저히 땅에 소망을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우리의 고난이 오히려 은혜가 됩니다. 내가 어렵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힘들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고난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서로 동행하려면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에 에녹이 맞았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습니다. 그것을 어디에서 알 수 있습니까? “동행하며”(창5:22,24)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계속 걷고 있었다”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영적 친교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나 뜻을 따라 그를 기쁘게 하는 생활이 동행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참 지키기 어렵습니다. 어떤 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복을 기다리다가 지쳐 죽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감수하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우리의 모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우리의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강력하게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것들만 보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 우리가 감각하는 것을 뒤집어엎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쁜 중에서도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날마다 그를 만나야 합니다. 앉으나 서나 하나님 생각,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관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과 뜻을 같이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는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노력과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에녹의 시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불완전했습니다. 아주 초보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폭력적인 사회였습니다.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때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하나님이 강에 가자고 하면 강에 갔고, 산에 가자고 하면 산으로 갔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에게 비위를 맞추는 것은 아첨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조조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면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 큰 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취미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재미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래서 우리가 방관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충성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지금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힘들어도 동행해야 합니다. 기뻐도 동행해야 합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나의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것이 동행입니다.

어떤 그림이 한 박물관에 게시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구경하러 왔습니다. 그 때 독일의 젊은 백작 중의 한 사람이 여러 그림을 보다가 어떤 구석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림을 보았습니다. 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는데 그 날은 이상하게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림에 있는 예수님의 얼굴이 그 사람을 붙잡은 것입니다. 오래 동안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라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그 글자가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생각되어 그 시간에 자신을 주님께 바치기로 했습니다. 이 사람이 모라비안 교회의 진젠도르프입니다. 당시에 카톨릭의 박해로 성도들이 피해야 했습니다. 이때 진젠도르프는 그많은 피난민들을 자기 성내에 살게 했습니다. 그 사람들과 같이 기도하며 그 사람들과 같이 교회를 조직하여 몇 사람 안 되지만 온 천하에 선교 운동과 경건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전도를 하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사실 전도를 해도 잘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서 전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힘듭니까? 그래도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래도 우리교회는 내가 부흥시켜야 한다고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마음부터입니다. 우리교회가 내세울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교회처럼 교회가 화려하지 않습니다. 성도들도 보다시피 아주 적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 영광을 드리려는 소망이 있습니다. 성경대로 하려고 애쓰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이런 교회를 위해서 우리 모두 교회를 부흥시킵시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도합시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죽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홍수이전에 천국으로 들려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헌신할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충성할 자를 찾으십니다. 헌신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성합시다. 우리가 헌신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받읍시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늘 기다리고 계십니다. 헌신하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힘써 할 일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 항상 동행해야 할뿐만 아니라 오늘 세 번째로

III. 심판을 대비하는 사람(4)

라멕, 노아, 셈, 함과 야벳

우리가 똑같이 잔치 집과 상가에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어느 집에 가야 합니까? 물론 두 집에 다 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정이 있어서 한 집만 가야 할 경우에 어디에 가야 합니까? 초상집에 가야 합니다. 저는 지난주 작년에 목사안수를 받은 분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 있을 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죽은 그 순간부터 이 세상 사람들과는 영원히 격리됩니다. 조금 전까지도 죽고 못 살 만큼 가까워도 죽음은 그 관계를 분리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생물들에게 있어서 아주 두려운 존재입니다. 사람이 이것을 이기려고 많은 연구를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라멕의 아버지는 므두셀라입니다. 므두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았습니다. 라멕의 아들은 노아입니다.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라멕은 아들의 이름을 특이하게 지었습니다. 노아(j'nO)“안식”이라고 지었습니다. 창세기5:29을 보면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우리는 이 구절로 당시의 상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당시의 족장들은 이 지상의 생활에서 극한 괴로움을 느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은 할아버지인 에녹이 승천한 지 69년에 노아를 낳아서 노아의 이름에 소망을 걸었습니다. Lamech은 노아에게 이름을 지어주면서 더 좋은 변화를 바랐습니다. 저주로부터의 구속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원하던 방식으로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Lamech과 Noah는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하였습니다. 홍수를 기점으로 해서 Lamech과 Noah는 갈라집니다. Lamech은 홍수전 시대이고 Noah는 홍수이후시대로 대홍수를 실제 경험했습니다. Lamech은 대홍수가 일어나기 전 5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Noah는 하나님의mission을 받습니다. 어떤 mission을 받습니까? 심판에 대비하라는 mission을 받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집이 미국에 있습니다. 미국의 동남부 플로리다 팜비치에 있는데 매종 드 라미티에(Maison de L'Amitie)라는 집입니다. 그 가격이 1억2500만 달러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1300억원이 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집은 어디이겠습니까?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삼성그룹 회장의 집입니다. 2006년도 공시가격으로 85억2천만원입니다. 지금은 아마도 거의 1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뿐 아니라 지금 무섭게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 땅을 천국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 땅에 투자하고 있습니까?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는 중국의 스촨성에서 지진이 일어나 10,0000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어제는 일본에서 지진이 나서 100여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6월9일에는 그리스에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댐이 무너지고 산이 무너졌습니다. 해일이 밀려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태풍이나 허리케인으로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사고로도 죽고, 수명이 다 되어서 죽기도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람들이 죽습니다. 방법만 다르지 죽음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무차별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곧 죽음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심판을 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유대의 국회의원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서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예루살렘의 국정에 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유대민족의 앞날에 대해서 묻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구원에 관한 말이 주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심판(krivsi")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을 가른다는 말씀입니다. 현재는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는데 이것을 철저하게 골라낸다는 것입니다. 알곡은 모아서 곡간에 넣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심판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습니다. 아예 심판을 받기로 작정하고 있습니다. 심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심판에 대해서 말합니다. 심판을 경험하지도 않았으면서 심판이 없다고 말합니다. 심판을 받겠노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심판에 대한 참상을 적나라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있는 상황을 꺼지지 않는 불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이 지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말의 대심판 때는 죽음이 사람들을 토해냅니다. 바다에서, 강물에서, 땅에서 죽었던 사람들을 다시 돌려줍니다. 심판을 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심판은 이론이 아닙니다. 심판은 현실입니다. 심판은 실제입니다. 심판은 올 수도 있고, 안 올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해져서 반드시 오는 실제적인 미래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심판을 대비했습니다. 무려 120년간이나 심판을 대비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우리가 힘써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항상 심판을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만 심판에 대비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웃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친지나 친구들 모두 심판을 대비시켜야 합니다. 차일피일 하다가 영원히 그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노아의 때 심판을 예고했습니다. 그대로 물심판으로 세상이 멸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심판을 예고했습니다. 말씀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예루살렘이 A.D.70년에 멸망했습니다. 그래서 심판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에 대비하는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심판의 대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이 우리를 영원토록 살게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람들은 저마다 세상에서 힘써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힘쓰는 것은 우리의 죽을 때까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 힘쓰는 것은 영원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열심히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을 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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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존중함(출애굽기21:12-14)

개인의 자유보다 더 귀한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이 세상에 있을 권리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이나 인권에 손해를 입히게 되면 보복의 원칙인 형벌을 두게 하였습니다. 12-14절을 보면 사람을 쳐 죽인 자는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는 반드시 죽음으로 형벌을 주었습니다.

창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레24:17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사람을 쳐 죽인 자는 그 자리에서 죽거나 나중에 죽었거나를 막론하고 반드시 죽여야 했습니다. 생명을 끊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인데 감히 인간이 수명이 다하지 않은 생명을 앗아간다는 것은 아주 사악한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반적인 법칙은 偶發的인 殺人과 計劃的인 殺人을 구분하였습니다.

그 규정은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즉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하여) “나 하나님의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다른 사람을 죽이라고) 예로 어떤 사람이 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을 때릴 생각조차도 안했고 미움이나 적개심에서 그에게 해를 가할 생각도 갖지 않았다면 예외였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였기 때문에 우리의 이해력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우발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위해서 피난할 수 있는 장소를 지정하여 주셨습니다. 거기서는 그가 피의 복수로부터 보호되었습니다. 민수기 35:9-15을 보면

9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0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11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12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13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으로 도피성이 되게 하되 14세 성읍은 요단 이편에서 주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15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계획적인 살인은 용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을 붙잡고 있다하더라도 끌어내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이고 배반적인 살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발적인 살인자는 제단 뿔을 잡고 있으면 살겠지만 고의적인 살인은 용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생명의 보호처가 계획적인 살인자에게는 허사였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빼앗았기 때문에 마땅히 받을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잘못된 살인이 저질러지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살인자들이 버젓이 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前 대통령들의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을 굉장히 많이 죽였습니다. 그러나 전직이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아주 잘못된 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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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권리(2)(출애굽기21:7-11)

고대 국가에서 종들은 그 수에 있어서 자유인보다 많았습니다. 아테네에서 사회의 4/5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자유인은 누구나 종을 거느릴 수 있었습니다. 어떤 자들은 수백 명씩을 거느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란의 위험이 있었으므로 노예들을 아주 가혹하게 다루었습니다.

노예가 된 動機들은 원래 노예의 가족이었거나 전쟁포로 등으로 노예가 되어서 종들은 주인의 사유재산이었습니다. 따라서 종에 대한 처우는 매우 혹독했습니다. 종들은 대개 사유 재산이었으므로 전적으로 그 상전의 기분에 의하여 좌우되었습니다. 그들은 거칠거나 또는 온화하거나 야만적인 폭군이거나 또 어리석게 관대하거나 했습니다.

노예 가족은 언제나 離散되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에 따라 다른 상전에게 팔리기도 했습니다.

종은 어느 곳에서나 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큰 상처가 없으면 조사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매우 혹심한 노동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들은 감옥같은 생활로 동일한 일터에 유폐되었고, 갱 안에 들어가서 일해야 했습니다. 배안에서 노만 저었습니다. 노에 사슬로 묶여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법적인 제약도 없었습니다. 의식주마저도 정도이하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거의 어느 곳에서나 상처를 입었습니다. 죽음직전에 있어도 구제책이 없었습니다. 법마저도 노예의 생명에 대한 기록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그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같이 나오지 못한다 하였습니다(1절). 고대국가들에서는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가 일반적으로 자녀들을 팔수 있었습니다. 트리키아 사람들이나 아테네사람들은 자식들을 공공연하게 매매를 했었습니다. 여종은 남종과 달리 6년이 지나도 나갈 수 자유인으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여종에 관해서는 특별한 법이 따로 있었습니다.

8절을 보면 상전이 그 여종을 자기의 첩으로 기뻐하지 않으면 그녀를 속신해야 했습니다. 다른 이스라엘사람으로 하여금 첩으로 사게 했습니다. 가난해서 딸을 팔았기 때문에 사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허나 그 여자는 속임이 되었기 때문에 타국인에게는 팔지 못했습니다.

9-10절을 보면 그 여종을 자기 아들에게 주었으면 딸같이 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들이 다른 아내에게 장가를 들었다 해도 의복과 먹는 것과 동침함을 끊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상전은 아들에게 여종을 내쫓거나 학대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11절을 보면 세 가지(속신하고 딸같이 여김, 아들에게 주고 딸같이 여김, 학대와 의식주를 끊지 못함)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그 여종에게 贖錢을 받지 않고 거저 나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시행함은 비록 종이라 하나 인권을 유린하지 못하도록 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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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권리(1)(출애굽기21:2-6)

히브리 종은 6년 동안 섬기고 난 다음에는 아무런 보상을 지불하지 않고서도 자유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신 15:12에 의하면 이 율례는 히브리의 여종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히브리란 말이 조건이었습니다. 외국인 계통의 노예들은 달리 취급되었습니다. 도적질하다가 잡혀서 법정에 의해서 팔리게 되었을 때나 혹은 가난하여 자기 스스로를 팔려고 할 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의 동포를 돈 주고 살 수도 있었습니다.

제7년이 되는 해에 해방시켜 주는 일은 안식년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네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7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 할 것이며”그는 자유롭게 될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그를 빈손으로 내보내지 말고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로부터 그에게 짐을 주었습니다.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그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해방시켜 줄 때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갔습니다. 장가들었으면 그 아내도 같이 나가야 했습니다. 남자 때문에 아내가 은혜를 입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자유함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종으로 있던 사람에게 아내를 주었고 그 아내가 그에게 자녀를 낳아주었다면 그 경우에는 아내와 자녀들이 계속 주인의 소유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신으로 나갈 수는 있었습니다.

5절을 보면 “종이 말하기를 내가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주인은 그 말을 공증을 시켜야 합니다.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정에게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로 하여금 자기가 자유를 포기했다고 선언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에 주인은 그 從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데리고 가서 그로 하여금 자기가 자유를 포기했다고 선언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이나 문설주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어야 했습니다. 종의 권리로서는 안식년에는 풀려야 했습니다(2절). 독신이면 혼자 해방되었고, 결혼을 했으면 그 아내도 함께 해방되었습니다(3절). 상전이 종에게 아내를 주었을 경우에는 아내와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하였고 단신으로 해방되어야 했습니다(4절). 종이 해방되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5절).

이스라엘의 노예법은 당시의 타국인들의 노예법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근저에는 이스라엘이 430년간의 노예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노예의 처절함을 어느 나라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종이 되었지만 안식년에는 해방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人權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반드시 해방이 되도록 법으로 제정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약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종 되었던 우리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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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율례(미쉬파트)(출애굽기21:1)

“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하니라” 즉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세워야 할 미쉬파트는 이러하다고 하였습니다(21:2-23:13). 모세의 전함을 받는 이스라엘은 일종의 공화국으로 발전될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학실한 질서가 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율례(미쉬파트)는 정치질서를 확보시켜줄 권리들이었습니다. 이 권리는 개인의 권리와 공동체가 갖게 될 권리였습니다. 미쉬파트는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중요한 사상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전체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사상이 무엇인지를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입법, 사법, 행정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면에서 미쉬파트를 심판이라는 면에서는 불완전한 번역입니다. 미쉬파트는 일반적인 재판장 앞에 가져온 소송사건을 판결하는 행위에도 사용되었습니다(신25:1, 수20:6 등). 그러나 소송사건을 판결하는 장소로 미쉬파트라 하기도 했습니다. 소송의 과정을 미쉬파트라 하였습니다(사 3:14). 실제적인 소송사건(즉 관원에게 가져온 특수한 소송사건)을 미쉬파트라 하였습니다.(왕상3:11). 심판의 때를 미쉬파트라 합니다(시1:5, 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미쉬파트로 가져 올 것입니다”(한글개역,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심판하시리라”). 따라서 미쉬파트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미쉬파트의 권리를 주셨습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미쉬파트(재판)는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신1:17). 재판장의 미쉬파트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권위를 세울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미쉬파트로 세워야 합니다. 이 세상의 미쉬파트는 공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미쉬파트는 완전히 편견적입니다. 모든 참된 미쉬파트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 하나님의 미쉬파트를 따라야 합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하나님의 미쉬파트 아래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일차적인 미쉬파트는 피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미쉬파트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생활해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미쉬파트의 적용을 받아야 합니다. 애굽의 미쉬파트는 폐하여졌습니다. 우리역시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미쉬파트에 의해서 살아야 합니다. 마귀의 미쉬파트는 폐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숨이 붙어있는 한 계속되어야 합니다.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의 적용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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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에 관하여(출애굽기20:24-26)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인간들이 제물을 바칠 제단을 순수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흙이나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만들라 하셨습니다. 만일에 돌로 제단을 만들 때는 原石 그대로 사용하라 하셨습니다. 연장으로 돌을 쪼아서 만들면 부정하다 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연 상태 그대로의 흙과 돌만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들과 얼마나 다른가? 인간들은 무엇이든지 위대하게 만들면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교하고 높게 만들면 마치 신들이 자신들을 복주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순수하게 원석이나 흙의 모습 그대로 해서 그것도 계단을 쌓지 말고 낮게 해서 하나님께 제물의 희생을 드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단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인간들이 공교하게 만들어 그것자체를 섬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적인 예배는 외적인 형식으로 드리는 것이 아님을 미리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의식과 절차만 강조하고 마음은 드리지 않음을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거룩한 美는채색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주후 313년 콘스탄틴이 기독교박해를 풀었습니다. 그야말로 기독교에 완전히 봄이 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라 하였습니다. 교회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핍박이라는 기독교 장애물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에버리트 퍼거슨은 “순교는 종종 기독교로 관심을 이끌고 선전도 하는 공개적인 광경이었다. 2세기의 기독교 변증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맞이한 방식은 그들에게 기독교의 진실성을 확신시켰다고 증언”했습니다. 터툴리안의 선언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는 격언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된 후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습니다. 긍정적인 면에서는 기독교 공인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박해받는 지하 종교에서 공인된 종교로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 외형적으로 기독교가 상당히 확산되었습니다. 새로운 교회 건물들이 들어섰고 교회는 국가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정교의 밀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이 상실되었습니다. 교회가 영적인 생명을 상실하면서 교회에는 세속화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예배의 형식이 영적인 성도의 교통에서 외형적인 형식 위주의 예전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토단과 원석의 종교가 아니라 이방의 혼잡물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외형으로는 성장했지만 내적으로는 심하게 곪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경대로 생활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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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예배를 금지하시는 하나님(출애굽기20:22-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택하신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일을 모세에게 위임하셨습니다. 全權을 모세에게 맡기시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모세에게 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섬길 목적으로 은이나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지 말라 하셨습니다. 신상이라고 할 때 우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들입니다. 예배를 위해서 형상예배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비겨서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금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2계명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절대로 우상숭배에 빠지도록 하시지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는 아주 더러운 죄악이었으며, 가장 하나님을 배반하는 大逆罪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10계명을 주셨지만 모세는 첫 두 계명을 이스라엘에게 잘 설득하도록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22절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나 후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實存에 대해서 잘 깨달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不在中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자기들이 원하는 곳에 세워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형상을 절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그들은 음성으로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음성으로만 그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를 할 때에 말씀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로 교제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굉장히 집착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실존이라고 합니다. 즉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고, 인간의 형상도 만들고, 각종 형상을 만들어서 실존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대단히 배역한 일이며, 패역한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형상을 만들어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히 말씀(엘로힘 다바르·로고스)으로만 교제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하나님을 인간보다 못한 下等體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하등체로 전락시켜서 인간이 얻을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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