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Title](https://tistory1.daumcdn.net/tistory/974587/skin/images/icon_post_title.gif)
'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1479건
- 2011.03.25
- 2011.03.24
- 2011.03.22
- 2011.03.21
- 2011.03.19
- 2011.03.18
- 2011.03.17
- 2011.03.15
엄위하신 하나님(출애굽기20:18-21)
여호와께서 그의 위엄을 나타내실 때 일어난 두려운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서 산 밑에 진치고 있던 백성들에게 너무도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이 직접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두려움에 떨었는가, 신명기 5:22-33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장로들을 통해서 모세에게 자기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되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성경에 표현하기를,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연기를 멀리에서 보았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서 그들은 “멀리서 떨었”습니다. 감히 산에 가까이 나아가려하거나 오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들의 공포심을 제거해주었습니다. “두려워 말라”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희를 시험하신다” 하였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홍해가 갈라짐을 보았습니다. 그전에 재앙을 내릴 때도 보았습니다. 만나가 내리는 것 하며,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를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런대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자주 계시하셨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무섭게 나타내심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참된 두려움을 갖게 하셨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그들에게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그의 명령에 대한 불신감이나 불순종을 없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셨습니까? 영광중에 이스라엘을 만나십니까? 자신의 실존을 사람들에게 알리시는 모습 중의 한 부분입니다. 소위 종교라고 하여 많은 종교들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신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섬기는 신들은 없거나 죽었거나 합니다. 만일 과거에 살아있었던 존재라면 지금은 지옥에서 신음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상상의 신들이라고 하면 헛것(偶像)입니다. 존재하지도 않거나 죽은 것들을 섬기면서 자신들이 굉장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實存(existence)하시는 분이십니다. 만일에 죽어있는 신이라면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살아있는 실존하시는 분이십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이스라엘을 건지신 분이요, 이스라엘을 분명히 구원하셨음을 그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어쩌면 하나님의 실존하심을 믿는 성도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실존하심을 믿고 안 믿고의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만큼 납니다. 오늘의 우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내일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미래의 우리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우리가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가 의지하지 않는가를 시험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엄위하신 하나님께서 긍휼이 풍성하셔서 오늘 우리들을 사란하시는 것입니다.
제단에 관하여 (0) | 2011.03.27 |
---|---|
우상예배를 금지하시는 하나님 (0) | 2011.03.26 |
제10계명⑩/사람 사랑 (0) | 2011.03.24 |
제9계명⑨/사람 사랑 (0) | 2011.03.22 |
제8계명⑧/사람 사랑 (0) | 2011.03.21 |
제10계명⑩(출애굽기20:17)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너는 탐내지 말라(17절)
탐내는 것은 과도하고, 통제할 수 없는 이기적 욕망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가져야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절대로 만족을 모르고 평생에 남의 것을 탐내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국가와 국가간의 분쟁도 여기에 속합니다. 인간의 모든 分爭이 바로 여기에 속하게 됩니다. 지경을 정한 것 이외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말아야 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손을 대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욕심을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이건 행동이건 이웃에 대한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욕망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탐심(하마드)는 마음으로부터 발생합니다(잠 6:25). 탐심은 죄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 행동으로 옮겨서 자신을 파멸케 합니다(약 1:14,15)(카일·델리취).
앞의 계명들은 우리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은연중에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은 우리자신을 만족시키려고 애쓰는 모든 과도한 욕망을 금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자신의 몫에 대한 불만을 표하지 말고 마음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메튜 헨리).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 영혼이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차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에 배치되는 모든 욕망을 우리 마음으로부터 추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웃에 손해를 끼치려는 탐심을 엄습하지 말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쟌 칼빈).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명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탐심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면 우리자신을 파멸시킵니다. 이것 때문에 망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을 없애려면 이 세상의 도덕과 윤리로는 어림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강권함으로서 탐심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계명을 지키고 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할 수 있습니다.
우상예배를 금지하시는 하나님 (0) | 2011.03.26 |
---|---|
엄위하신 하나님 (0) | 2011.03.25 |
제9계명⑨/사람 사랑 (0) | 2011.03.22 |
제8계명⑧/사람 사랑 (0) | 2011.03.21 |
제7계명⑦/사람 사랑 (0) | 2011.03.19 |
제9계명⑨(출애굽기20:16)
거짓 증거(대답) 네 이웃(친구) 하지 말라
.rq,v; d[e *[}rEb] hn<[}t' Aal
제9계명은 위증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로마카톨릭에서는 아홉째계명의 자리에 열째 계명을 둘로 나눈 전반부를 옮겨 놓았습니다. <비교>로마교회- “남의 아내를 원치 말고.” 로마교회는 열째계명 자리에 둘째 계명을 삭제함으로서 생긴 자리를 메우기 위해 열째 계명을 둘로 나눈 후반부만 남겨 두었습니다.<비교>로마교회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천주교 요리문답 1권, 28). 로마카톨릭의 계명과 우리의 계명은 다르게 나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십계명에 칼질을 했습니다. 그리고 짜깁기를 했습니다. 덧붙였습니다. 따라서 로마카톨릭의 십계명은 성경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법에서도 僞證罪는 그 죄질이 무겁습니다. 여기에서 “증거”는 “증인”입니다. 의식적으로 헛된 것, 가치 없는 것, 근거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말이 금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짓되고 근거 없는 증거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법관 앞에서뿐만 아니라 생명, 결혼관계, 이웃의 소유가 위협을 당하게 될 모든 종류의 거짓 증거가 금지되고 있습니다(출23:1, 민35:30, 신17:6, 19:15, 22:13)(카일·델리취).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중상이나 거짓된 비난 등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거짓으로 남의 재산에 해를 주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험담이나 몰염치 등으로 남을 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은 각자의 명성과 소유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칼빈).
하나님은 우리가 거짓을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이 사회는 위증이 많습니다. 거짓증언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그랬습니다. 또한 현재사회가 그렇습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진실이 왜곡되어 위증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지난3공화국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위증으로 죽어나갔습니다. 따라서 위증은 본인들에게도 죄가 되지만,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위증에 의한 재판을 받았습니다. 위증도 증언입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목격자가 번연히 알면서도 이해관계로 인해서 바른 증언을 할 때 분명히 위증으로 인해서 피해를 보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교통사고의 목격자가 위증의 예가 많습니다. 재판 때에도 위증의 예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약백성인 우리들이 거짓으로 남을 헤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짓으로 이웃을 해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 말씀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거짓으로 이웃을 해하는 자들은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성직자들이 이 거짓된 것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거짓으로 이웃을 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엄위하신 하나님 (0) | 2011.03.25 |
---|---|
제10계명⑩/사람 사랑 (0) | 2011.03.24 |
제8계명⑧/사람 사랑 (0) | 2011.03.21 |
제7계명⑦/사람 사랑 (0) | 2011.03.19 |
제6계명⑥/사람 사랑 (0) | 2011.03.18 |
제8계명⑧/사람 사랑(출애굽기20:15)
.bnOg]Ti al 도적질 하지 말라 bn"G: “훔치다, 도둑질하다”의 가나브(動詞)는 기본어근으로서 “동의를 받지 않고 혹은 몰래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취하다”입니다. 제8계명은 이웃의 재산권 보호에 대한 명령인 동시에 재산의 사유권을 인정하는 戒名입니다(톰슨). 은밀하게, 공공연히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아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주의나 무관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재산에 손해를 입히거나 혹은 사기 행위에 의한 착복까지 금하고 있습니다(출 21:33, 22:13, 23:4,5, 신 22:1-4)(카일·델리취).
도둑질에는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폭력에 의한 것으로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힘이나 약탈을 자행함으로서 훔치는 경우입니다. 악의적인 기만에 의한 것인데 사기로 횡령하는 경우입니다. 또한 은폐된 술수로서 외관상 합법적인 수단에 의해 사람의 재산을 가로채는 경우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아첨에 의한 것인데 선물을 빙자하여 남의 재산을 사취하는 경우입니다. 부정은 돈 문제나 토지 상품의 문제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권리에 있어서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를 이행치 않을 경우 우리는 그들에게서 재산을 갈취하는 것입니다. 만약 게으른 종이나 관리자가 주인의 재산을 횡령하였을 때는 도적질입니다. 맡겨진 재산을 부당하게 썼거나 방탕하게 낭비할 경우, 또 종이 자기 주인을 조롱하거나 주인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그의 생명이나 재산을 어떤 방식으로든 배반할 경우, 또 반대로 주인이 권속들을 야비하게 학대하는 경우 등 이 모든 행동들은 하나님 눈에는 도둑질로 보여집니다(칼빈).
정치자금과 정경유착 등의 검은돈들은 끊임없이 정계를 괴롭히고 국민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경제계에서 정치자금을 대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검은 대가를 바라겠다는 것입니다. 도둑질을 하는 것입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겁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돈을 모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렇다고 아예 내팽개치고 살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지키고 하나님께 맡기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우리들은 완전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완전하신 주안에서 우리가 생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십계명은 아직 우리들에게 살아있는 계명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고 말씀에 의지해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계약백성으로서 성결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제10계명⑩/사람 사랑 (0) | 2011.03.24 |
---|---|
제9계명⑨/사람 사랑 (0) | 2011.03.22 |
제7계명⑦/사람 사랑 (0) | 2011.03.19 |
제6계명⑥/사람 사랑 (0) | 2011.03.18 |
제5계명 (0) | 2011.03.17 |
제7계명⑦/사람 사랑(출애굽기20:14)
.#a;=n]Ti al/로 티느아프 ‘간음(#a'n:/nâ’aph)하지 말라’ 나아프(動詞)는 “간음하다, 비유적으로 '우상 숭배하다”를 의미합니다. 간음은 불법적인 성적교제입니다. 고대의 법전은 간음을 정죄하고 사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원하면 형벌을 철회하거나 경감시켰습니(Eshmunna법전28; 함무라비 법전 129-32, 155, 156; 중앙 앗수르 법률 12, 14, 17, 18, 22-24; 힛타이트 법률 195, 197-28 등). 姦淫은 유부녀의 모든 婚外情事, 남자와 有夫女나 약혼 중에 있는 여자의 婚外 情事(창16:1-4,30:1-4,38:15, 레19:20, 신22:28 이하는 남자 편에서의 혼외정사의 실례들)를 포함합니다.
제7계명에서 간음은 사회법의 한 기본 요소를 성립시키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종교적 신학적 사용은 이스라엘 종교에서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제 7계명은 성적순결을 요구합니다. 이 계명은 고대 근동 다른 국가의 공적인 제사에 의해서 공인되고 실행된 부정(不貞) 및 혼음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간음을 하나님, 인간, 사회에 대항하는 가증스러운 범죄로 보았습니다. 가족은 이스라엘 사회의 주춧돌이었으므로, 그것의 안정성에 위협이 되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하는 것으로서(창2:24), 신실과 사랑을 요구하는 언약의 이행이었습니다(말2:14). 그것은 자기 백성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거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간음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였습니다(창 39:9). 하나님께서 가족에게 명령하신 성적순결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간음은 또한 인격적인 성실의 문제였습니다. 간음은 우상 숭배와 같은 것이요, 여호와를 섬기는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간음하는 자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돌로 쳐서(신22:24) 죽이거나 불태워(레20:14, 21:9) 죽였습니다(레20:10, 신22:22). 실제로는 다양한 방법으로 형벌이 가해졌습니다(잠6:32-35, 요8:4-5). 여자가 약혼한 처녀의 몸으로 딴 남자와 통간할 경우에 그 남자와 여자를 함께 돌로 쳐 죽이는 조항을 마련하였습니다(신22:23).
간음은 요사이에 범해지는 죄가운데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범죄입니다. 점점 간음을 다스리는 죄의 항목이 우리나라에서 없어지고 있습니다. 웬만하면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나라가 잘못되려면 이러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간음은 남편이나 여자가 상대를 강탈당하는 아주 나쁜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증식을 위해서 정해놓으신 결혼의 神性性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노아시대 때, 소돔과 고모라, 폼페이, 로마가 모두 이 죄로 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殺人罪와 마찬가지로 姦淫罪도 마음으로 품기만 해도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다른 종교를 가지면 간음죄를 범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간음죄에 성도들이 많이 걸려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9계명⑨/사람 사랑 (0) | 2011.03.22 |
---|---|
제8계명⑧/사람 사랑 (0) | 2011.03.21 |
제6계명⑥/사람 사랑 (0) | 2011.03.18 |
제5계명 (0) | 2011.03.17 |
제4계명 (0) | 2011.03.15 |
제6계명⑥/사람 사랑(출애굽기20:13)
.jx;r]Ti al ‘살인하지 말찌니라’ ‘라차흐’(jx'r:/râtsach/라차흐)는 “죽이다”로 순수한 히브리 용어입니다. 당시의 어떤 언어에도 이 단어의 분명한 동족어는 없습니다. 이 어근은 십계명에서 처음으로 나옵니다. 나머지 다섯 계명들은 이웃에 대한 의무들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레위기19:18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마디 말씀 가운데 요약되어 있습니다. 실제의 침입이나 공격으로부터 생명, 결혼 및 재산을 지켜야 하고 그리고는 활동으로부터 말과 생각에까지 발전해 나가 거짓증거와 탐심을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서는 공공연한 폭력이나 전략에 의해 완수된 살인만 금지하는 것이 아니고(21:12,14,18), 부주의(신22:8), 방종(레19:14)으로부터 증오, 분노, 원한(레19:17,18)으로부터 야기된 인명 등을 위협하는 모든 행동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의 이웃의 몸을 헤치는 일체의 폭력과 상해 및 해로운 것들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은 마음의 살인까지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제의 생명을 구하려는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는 손이 살인을 일으키나 분노와 증오의 영향을 입은 마음이 살인을 계획합니다. 이 계명이 나오게 된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동시에 “우리의 육”이라는 이중적 근거 위에 기초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존중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이웃은 온 세상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몸을 우리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살인은 인위적인 악한 행위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인간 속에 있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의 보호를 구하게 하셨습니다. 인간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경외하게 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우리의 몸을 포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상의 법처럼 단지 피 흘리는 것을 자제하는 것만으로는 살인죄를 피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살인을 계획했다면 이미 殺人罪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최초의 살인은 에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형이 아우를 죽였습니다. 이후에 살인은 급속도로 퍼졌습니다. 지금은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과도 같습니다. 전혀 죽일만한 이유도 없는데 사람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특히 노약자들을 유괴하여 잔인하게 죽이는 殺人者들이 있는가하면 공리주의의 원칙에 의해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소수를 죽이는 살인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은 아까워하면서 타인의 목숨은 천하게 생각합니다. 비단 불신자뿐만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마저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을 이용하고 죽여버리는 파렴치한들이 목회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 목숨이 아까우면 타인의 목숨도 아까워해야 합니다.
제8계명⑧/사람 사랑 (0) | 2011.03.21 |
---|---|
제7계명⑦/사람 사랑 (0) | 2011.03.19 |
제5계명 (0) | 2011.03.17 |
제4계명 (0) | 2011.03.15 |
제4계명④ (0) | 2011.03.14 |
제5계명⑤(출애굽기20:12)
다섯째 계명은 부모공경입니다. 여기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동료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공경심과 경외심을 갖고 섬겨야 되는 것 같이 그의 대리자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루터). 레19:3도 부모에 대한 공경과 똑같이 취급되고 있습니다. 칼빈은 동료 인간들이나 이웃은 사랑해야 한다(레 19:18). 다른 한편으로 부모들은 공경해야 되고 경외해야 된다. 라고 했습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의 정한 질서의 유지가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에 그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자들을 존경하고 또한 그들을 경의와 순종 및 감사함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잘 다스리는 자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딤전 5:17)라는 말은 존경뿐만 아니라 그들의 직분이 그들에게 부여한 보상에 대한 언급입니다.
부모들에게는 마음, 입 그리고 손으로, 즉 생각, 말, 그리고 행동으로 존경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란 말을 단지 우리 육신 생명을 만들어주고 보존시켜 주는 것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예언자들과 교사들과 같이 우리의 영적 생명을 시작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위에 세워진 것을 아는 이상 우리는 그에게 존경과 순종과 감사를 돌리고 의무를 다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부모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권위를 침해하거나 경시하는 자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라 하셨습니다(출 21:17). 불순종하거나 반역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라 하셨습니다( 신 21:18-21).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신 분께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하였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함으로 이 땅에서 날이 길 것이라 하셨습니다. 즉 현세의 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한 자녀에게는 피할 수 없는 저주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시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주안에서만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엡 6:11).
우리가 이 계명을 통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이 그처럼 부모를 통해 공경되고 경외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도 모든 사람들을 통해 신성하게 보존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땅의 부모가 중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우리에게 중요함은 더욱 말할 것이 없습니다.
제7계명⑦/사람 사랑 (0) | 2011.03.19 |
---|---|
제6계명⑥/사람 사랑 (0) | 2011.03.18 |
제4계명 (0) | 2011.03.15 |
제4계명④ (0) | 2011.03.14 |
제3계명③ (0) | 2011.03.12 |
제4계명④(출애굽기20:8-11)
너는 거룩히하라 안식 일(날) 을 기억하여
/v%D]q'l] tB;V'h' !/y Ata, r/kz: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안식일 즉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의 휴식에서 의미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영적 안식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를 통하여 자기들의 일을 버려둔 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허용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일정한 날을 제정하여 모여서 율법의 말씀을 듣고, 의식을 행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종들 및 다른 사람들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에게 안식할 날을 주어 노동으로부터 얼마간 휴식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안식일은 이중의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차원적 근거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완성입니다(창2:1-3). 이차원적 근거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완성입니다(신5:15). 이러한 이중적 근거로 인해서 구약시대 안식일은 신약시대에 주일로 승화됩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신구약이 동일합니다. 안식일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는 다른 어떤 계명에서도 이보다 더 엄하게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민15:32-36:참조, 출31:13, 35:2).
우리는 주일(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시도록 전적으로 쉬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를 포기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육적 욕구들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도모하는 모든 활동으로부터 쉬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게 함으로써(히13:12), 사도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히4:9). 주님께서는 제7일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마지막 날에 임한 그의 안식의 완성을 묘사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평생 동안 안식일에 대한 끊임없는 명상을 통하여 이러한 완성을 동경하게 함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유대 인들에게 안식을 신중히 생각하도록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단지 육체적인 노동을 중지하는 것만으로서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날이었음을 상기하여야 합니다.
구약적인 의미에서 안식일은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남아 있습니다(1). 말씀을 듣고 신비의 떡을 떼며 공중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정해진 날에 한 자리에 모입니다(행2:42). 종들과 일꾼들에게 일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왜 우리는 왜 주일을 지키는가?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고집하며 지킴으로 인해서 자기들이 제대로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느 누구도 이 날의 준수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것이 장래 일의 그림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골2:17).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영적인 것들의 그림자로 유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빛을 그만큼 흐리게 하였습니다. 고대인들이 안식일을 신중한 고려 없이(우리가 부르는 바와 같이)주일로 대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대의 안식일에 의하여 묘사된 참 안식의 목적과 성취는 주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 그림자를 종국으로 몰고 간 바로 그 날까지 그리스도인들은 그림자 의식에 집착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즉 과거의 안식일은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주일로 대치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이것을 변경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