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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신비(사도행전22:4-16)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10절)

바울사도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계속 묻지 않았습니다. 왜 내가 다메섹에 들어가야 하며, 누가 나를 만나줄 것이며, 그 후에는 어떻게 되며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요즘의 신비주의자들 같다면 반드시 물어야 할 사항을 바울사도는 묻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교회는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우리는 신비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서는 하셨습니다. 소위 신들이라고 했던 것들이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자체부터가 신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우주공간에서 사는 것 자체가 신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mystery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3장을 보면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붙은 나무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불이란 것은 태우는 것입니다. 즉 나무가 불에 붙으면 나무는 재로 변해서 나무의 고유 형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떨기나무가 불에 타고 있었으나 나무의 형상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바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40년간을 생활합니다. 당장 물이 필요했습니다.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약 300만 명의 물과 식량입니다. 광야이기 때문에 길러서 먹는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이 물과 식량을 조달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매일 물과 만나를 제공하셨습니다. 신비입니다. 창세기1장1절부터 요한계시록22:21절까지 신비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권능이 무한하고 영원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무한하기 때문에 증가되거나 소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뜻하시는 바를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지구의 자전을 멈추실 수도 있고, 태양을 없앨 수도 있으신 분입니다. 천문학자들이 상상하고 있는 것들을 직접 다루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인간들에게 많이 맡기셨습니다. 즉 인간의 전 생애를 100% 하나님의 신비로만 생활토록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 다메섹에 들어가면 너를 도울 사람이 있으니까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선 이미 아나니아에게 사울이 오면 이래저래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신비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모두 신비로움으로만 채우시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하실 일을 지정하셨습니다. 물론 그때그때 다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돕기도 하시지만 모든 것을 신비로움으로만 해결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또한 그 신비로움의 용도가 어떤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위하려고 할 때에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비함의 사람이지만, 신비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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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하는 자의 태도(사도행전22:4-16)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10절)

바울사도는 주님을 만나기전까지는 정상적인 유대인으로 살았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유대의 엘리트생활을 했습니다. 다소에서 태어나 유대의 한 일원으로 촉망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유대교에 열심히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유대인을 위해서라면 앞장을 선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리아의 다메섹까지는 상당한 거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갔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바울의 질문에 주님은 ‘나는 네가 그렇게도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주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일어나서 다메섹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할 일을 알려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말씀대로 했습니다.

순종하는 태도와 불순종하는 태도와의 차이는 대답은 yes와 no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은 쉬워도 행동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의 질문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주님께 순종하려면 회심할 각오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회심은 180도를 유턴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궤도수정을 하는 것입니다. 180도로 돌아서서 지금까지의 길의 반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언행일치가 쉬울 수가 없습니다. 즉 아무라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사도가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로마제국의 전도판도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만일에 바울사도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복음의 전파속도와 전파율이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주님의 음성을 듣자 곧바로 순종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주여 무엇을 제가 하리이까?’ 바울의 이 질문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수시로 이 세상에서 시험을 받습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가운데에서 망설임 없이 순종으로 가야하는데도 불순종에 많이 기울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기하고, 인내하고, 또 포기하고, 또 인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고통과 환란이 덮치기도 함으로서 이 세상에서의 삶이 힘들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사도와 같은 마인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순종의 길로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내 사정에 얽매이다보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명령하시는데, 우리는 행여 불이익을 받을까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이 없는 제사는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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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길(사도행전22:4-16)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4)

바울사도는 이 도를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도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도입니다. ‘도’/oJdov"/hodôs는 ‘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길/way, road, 대도/highway, 생활방식/way of life’입니다. hodôs의 일차적 의미는 동작/action입니다. ‘도보’ ‘항해’ ‘군대의 행진’이라는 의미입니다. 지역적이나 공간적 의미로서는 사람이나 차량이 다니거나 행진하는 장소인 ‘길/way, 도로/road, 강 줄기/course, ’항로‘를 hodôs라 했습니다.

하지만 hodôs가 회화적이면서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어떤 것에 도달하거나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 방책, 절차, 무엇을 행하거나 살아가는 방식의 의미로 hodôs를 사용했습니다. ‘삶의 길’, ‘삶의 양식’으로 hodôs를 사용했습니다.

헬라문헌에서는 두 길에 대해서 자주 묘사를 했습니다. 즉 악으로 가는 길과 선으로 가는 길, 경건한 자를 위한 장소에 이르는 오른편 길과 불의한 자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로 이끄는 길에 대해서 자주 언급했습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hodôs는 죽음 이후에 인간이 가는 두 길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LXX역에서 hodôs는 &r,D,/dherek-/데레크(길, 도로, 거리, 여행, 방식, 방법 등)의 번역어로 사용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데레크’는 생명나무의 길(창 3:24), 술로 가는 길(창16:7), 중요한 대로(민20:17, 21:22), 해변의 길(사 9:1)로, ‘여행’(창24:21,45:23 수9:13), ‘'활동, 행위’(시1:6 창6:12)로, ‘여호와의 길’(창18:19, 신9:16), ‘태도, 습관’(창19:31, 31:35), ‘창조의 역사’(욥 26:14, 40:19 잠8:22)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로 가야 합니까?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오직 두 길밖에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사람은 그냥 구원되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구원되지도 않습니다. 어떤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구원받지 않습니다. 자신은 여태까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짓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롬3:10,23). 그래서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예수그리스도의 길로 가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도’에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허탄한 신화를 믿고, 멸망될 지식으로 인하여 이 ‘도’를 사람들이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그리스도의 길로 가야 합니다. 그가 종말에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 이것을 몰랐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예수님을 심판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식할 때 성도들은 하나님이자 인간으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은 사람으로만 인식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데서 실패합니다. 사람이자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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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을 부르시는 주님(사도행전22:5-16)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7-10)

바울사도는 사도이면서 사도가 아니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선교지에서 계속 시비를 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서신의 머리말을 보면

로마서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고린도전서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고린도후서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갈라디아서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서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빌립보서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골로새서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데살로니가전서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데살로니가후서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디모데전서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디모데후서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디도서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빌레몬서1: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어떤 지역과 어떤 사람에게 서신을 보낼 때 ‘사도된 바울은’이란 말을 썼습니다. 그렇지 않은 곳과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라는 말을 밝힌 서신은 로마서, 고린도전서,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서,후서, 디도서입니다. 밝히지 않은 서신은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후서, 빌레몬서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 물고 늘어져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승천하시기전까지는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불러야 사도입니다. 따라서 사도직을 계승한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계승한다고 하는 교도들은 모두 이단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때 주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사도입니다. 바울사도를 부르신 주님께서는 바울사도에게 어떻게 할 것을 알려줄 사람이 있을것이라 했습니다. 물론 바울의 소명은 복음을 이방에 퍼나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사도의 소명이었습니다. 핍박자가 이젠 핍박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복음이 경제살리기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경제는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을 살립니다. 살리되 영원히 살리는 것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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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만난 바울(사도행전22:5-16)

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우리가 흔히 지나가다가 누구를 만났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만났다는 것은 내가 상대방을 눈으로나 다른 감각에 의해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만남은 스치는 만남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만남이 깊은 만남입니다. 그래서 만난다는 것은 상호적입니다. 상대가 나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내가 상대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만남이 이러할진데 잘못된 만남이 있고, 좋은 만남이 있습니다. 나를 파괴하려고 접근하는 사림이 있는가하면 나를 도우려고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만남으로 해서 인생이 파괴되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좋은 만남으로 해서 그 인생이 꽃을 피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2차세계대전의 원흉들, 히틀러, 무쏠리니, 천황이라고 하는 작자들을 만난 사람들은 엄청난 피를 흘린 것들을 볼 수 있고, 가까운 예로서 국가가 잘못된 정치인들을 만나서 힘든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하늘로서 갑자기 세찬 빛이 둘렀습니다. 당연히 사도바울은 엎드러질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일은 이전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사도바울은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시더니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생 들어보지 못한 음성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더니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말씀에 바울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바울은 음성의 주인의 신분을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러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같은 일행들은 빛은 보면서도 말씀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바울에게만 일어난 일입니다.

바울은 이제 주님께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일단 다메섹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네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알려줄 것이라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주님을 만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곧 주님을 핍박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핍박할 때 예수님이 자신을 핍박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핍박하는 사람들로서는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볼때 핍박자들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자신을 핍박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핍박자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전능자를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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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을 핍박했던 바울(사도행전22:5-16)

4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바울사도는 이전에 자신이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는지를 그들에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바울자신이 핍박한 것을 예루살렘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이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의 도는 정상적인 핍박이 아니었습니다. 지나칠 만큼 그 도가 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서 힘을 얻은 유대인들이 바울사도에게 살인면허를 주었습니다. 로마제국 내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전부 살해를 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시리아의 다메섹에는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서 많은 성도들이 피신해 있었습니다. 그들을 바울사도는 자진해서 전부 잡아다가 대제사장에게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당시에는 바울자신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율법에 찌들어 있는 유대교에 충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일어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시리아 다메섹으로 피신한 성도들의 명단을 대제사장에게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체포해 오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헌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핍박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사람일뿐입니다. 고대 왕들이나 로마의 황제들은 사람이었으나 신으로 추대를 받았으며, 자신을 신으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아닙니다. 사람일뿐입니다. 그들 스스로 아무런 신적인 일들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신적인 일들도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과 다릅니다. 하나님이자 사람이고, 사람이자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했습니다. 수많은 기적과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살리시고 고치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먹게 하셨습니다. 죽었던 사람들을 살리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를 세우기 위해서입니까? 자신의 신적인 것들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에 소외되고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을 당시 유대인으로 있던 바울사도가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중에 유일하게 그리스도인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정이 돌아섬으로써 오히려 복음의 최전선에서 엄청난 활동을 했습니다. 핍박했던 사도바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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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이라는 것(사도행전22:2-4)

핍박하여(4절)ejdivwxadiwvkw/디오코/‘박해하다’과거, 능동, 1인, 단수동사로서 ‘내가 박해하였다’입니다. diwvkw/디오코는 divw/‘도망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디오코는 ‘재촉하다’는 의미에서 ‘빨리 움직이게 하다’ 또한 ‘서두르다’ 그리고 ‘박해하다, 쫓아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을 ‘뒤쫓다, 추적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디오코’는 70인역본에서 주로 #d'r;/rādap/‘라다프’를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라다프’는 본래 적군에 의해(출15:9), 또는 적의를 가진 사람에 의해(창31:23) 추격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다프’는 ‘추적(격)하다, 괴롭히다, 박해하다’는 것으로 사람이나 집단이 전쟁을 하거나 복수를 할 목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추적하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라다프’는 신학적인 문맥에서 하나님께서 악인을 추적하신다고 언급했습니다.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열방 중에서 저주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렘29:18).

신약성경에서 ‘디오코’는 보편적으로 종교적 의미로 ‘박해하다, 쫓아내다’를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마5:12). 예수님께서 박해를 받으셨습니다(요5:16). 한 때 교회의 박해자였던 바울은(고전15:9 갈1:13, 23 빌3:6) 영광의 주님이 그를 주님의 사자로 만든 후 그 자신이 박해를 겪었습니다(갈5:11).

박해는 시험입니다. 박해를 피하는 것은 전하는 말씀을 타락시키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갈6:12). 기독교 신자들은 핍박을 받는 동안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데 특히 도전을 받습니다. 그들은 축복의 말로 박해자의 증오를 맞아야 했습니다(롬12:14/마5:44).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핍박 속에서 그리스도의 도움과 힘과 구원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바울은 핍박 속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핍박을 감당함으로써 사도의 본보기를 보였습니다. 누가복음21:12에서 박해는 시험(test)이라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박해는 특권입니다. 박해를 받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편에 있다는 표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초대교회 때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아서 고난을 당했는데 거의 순교했습니다. 또한 250년간 로마의 박해로 로마제국 내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중세암흑시대에 로마카톨릭에 의해 수 천 만명의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순교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교묘하게 박해를 받고 있는 성도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박해로 인해서 성도들은 신앙이 더 자라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박해를 받을수록 신앙이 자란 것처럼 오늘날의 성도들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자라가고 있습니다. 결코 박해로 마귀는 성도들을 제압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 안에는 박해라는 프로젝트도 함께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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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출생과 배경(사도행전22:2-4)

22:2-21은 3-4절은 바울의 출생과 배경, 5-16절은 바울의 회심, 17-21절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경위를 변증하고 있습니다.

어떤 타국인이 우리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데 유창한 한국어로 말을 한다면 아마도 말할 동안에는 조용히 할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바울을 죽이려 했던 폭도들이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바울사도의 말을 일단 들어보자는 것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Kilikiiva/Killikiîa ‘다소’tarsov"/tarsôs 출신이었습니다. 길리기아는 소아시아의 한 지역입니다. 다소는 길리기아의 수도입니다. 바울이 다소에서 출생했습니다. 다소는 유속이 빠른 키드누스 강변의 도시입니다. 지중해에서 16km, 타우루스 산맥에서 남쪽으로 48k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했습니다. 다소는 소아시아의 산맥의 녹은 눈으로 이루어진 차가운 강물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평원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해수면 위로 21m되는 지점에 위치한 이 도시 아래에 항구호수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중해 선박이 접근하기 용이하고 안전한 곳입니다. 이 독특한 수로 때문에 다소 내륙은 해상 무역이 번창하였습니다.

주전41년에 이 내륙 호수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를 만나 사랑에 빠진 장소입니다. 유브라테스로부터 시작되는 고대 무역로가 안디옥 및 다소에서 동쪽으로 80km 되는 동지중해의 대로와 결합하여 길리기아 중앙을 통과하여 북으로 돌아 다소산맥을 통과 소아시아의 고지에 이릅니다. 다소인들과 그 이웃들은 주전1,000년에 이 고지대로 가는 자연상태의 협소한 통로를 넓히기 위해 암벽을 깎아서 뚫는 위대한 공학적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이 성문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산악 통로 중 하나입니다. 육지의 대로와 바다의 길로 인해 다소는 동과 서가 만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다소는 총독의 지배권이었습니다. 크세노폰은 다소를 “위대하고 번영한 도시”라고 했습니다. 주전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다소를 점령하고 헬라적 요소들을 더욱 가미시켰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주전171년 길리기아에 체류했습니다. 그는 동양적 영향보다 헬라적 요소를 고무하기 위해 다소를 헬라 자치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통치초기에 다소에 산업과 상업을 육성시키려고 유대 식민자들을 이주시키고 헬라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었습니다.

폼페이가 주전64년에 길리기아 속주(Province)를 재편성하였을 때 다소는 로마 정부의 사령부였습니다. 안토니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모든 다소 주민에게 하사하고 세금을 면제해주고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특권을 더욱 확실히 보장했습니다. 다소에서 화폐가 주조되었습니다. 이웃의 길리기아 성읍들은 이러한 면에서 동과 서의 혼합지역이었습니다.

다소에는 그 밖의 Greco-Roman 도시처럼 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학이 있었습니다. 스트라보(주전63년)는 다소인들의 교육과 철학에 대한 열정은 아테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인들을 능가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길리기아 생도들은 토착민이었지 위의 두 도시의 경우에서처럼 타지에서 온 자들이 아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정치적 성향을 가진 스토아 철학자 아데노도루스(주전74년-주후7년)는 Augustus의 고문이자 교사로서 길리기아 태생이었는데, 그의 지도 아래 다소는 플라톤의 이상적인 정부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주전15년 아데노도루스(Athenodorus)가 황제와의 오랜 관계를 유지한 명성을 지닌 채 다소로 내려왔을 때 다소의 몇몇 민주적 절차들을 복원하라는 임무가 이 유능한 철학자이자 지도자에게 떨어졌습니다.

따라서 다소는 많은 시민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을 발전시켰습니다(행 21:39).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습니다. 개종 후 약 10년간을 그곳에서 지냈습니다(행9:30/갈1:21). 다소의 복합적인 문화는 바울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엄격한 교육방침 때문에 바울은 다소의 대학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청년기 바울에게 바리새적 교육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행22:3).

사도바울은 ‘가말리엘’Gamalihvl/Gamalliêl은 그들의 미쉬나(Mishnah)에 인용되어 있는 탁월한 타니임, 즉 교사들의 대가족 우두머리였습니다. 사도행전에 언급된 한 사람은 가말리엘 하자켄(Gamaliel ha-saqen)입니다. “장로 가말리엘”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조부는 원로원 의원 힐렐(Hillel)이었다고 합니다. 장로 가말리엘은 Torah에 관한 랍비의 주석서 미쉬나의 많은 구절에 인용되었습니다. 가말리엘은 교사에게 주어지는 모든 유대식 칭호 중에서 가장 높은 Rabba/on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요20:16). 그에 대한 기억은 랍비의 전승에서 가장 큰 찬사와 존경의 하나가 되어왔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에 관하여 말한 그의 정확한 의견은 교계에서 많은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은 사로잡힌 사도들에 관하여 온건한 실용주의자의 입장을 주장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은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의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가말리엘이 자기의 선생이라고 주장할 때에 언급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이름을 자기 자신의 경우 가말리엘의 방침이 군중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은근한 암시로서 언급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울사도는 출신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앞길이 푸르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복음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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