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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리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사도행전27: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
4대강 공사를 전 이명박 정권이 한다고 했을 때 생각 있는 사람들은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국토부와 수자원공사 환경부까지 정권에 결탁되어서 말도 못할 엄청난 돈을 들여서 강행했습니다. KBS에서는 우리나라가 물 부족국가라고 하면서 이명박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서 그럴듯하게 홍보를 해가면서까지 강행했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모든 복지예산까지 닥닥 긁어서 4대강바닥을 파는데 꼴아 박았습니다. 환경시민연대 등 생각 있는 사람들의 말은 아예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취재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놓은 4대강은 어떻습니까? 심한 생태계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녹조가 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4대강이 녹조 외투 옷을 입은 것 같습니다. 제대로 4대강 공사를 했다면 가물어도 홍수가 날정도로 비가 퍼부어도 아무런 이상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심한 녹조외투를 강이 입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국토부와 환경부 그리고 4대강을 동조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자꾸 날씨가 가물어서 녹조가 끼었다느니, 강 전문가들이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도 아예 귀를 막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할 노릇입니다. 국민들은 아니라고 하는데 이명박 정권은 해야 한다고 했을까요? 참으로 미스테리한 일입니다.
해서는 안 될 공사를 해놓고 강을 망치고 주변의 환경과 국민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쳤을까요? 공사발주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 관여한 사람들은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어마어마하게 돈을 들여서 만들어놓은 것이 애물단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작금의 평가로서는 분명히 이모든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막았던 보를 터야 합니다. 그리고 원래대로 물이 흐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녹조 외투를 입지 않고 생태계가 파괴가 되지 않습니다. 청계천은 어떻습니까? 돈을 잡아먹는 하마입니다. 그런데도 청계천과 4대강을 연결해서 돈을 잡아먹는 괴물을 만들어놓고 누가 책임을 집니까?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제 두고두고 애물단지인 4대강입니다. 부수자니 엄청난 파장이 오고, 안 부수자니 환경이 계속 파괴되고, 진퇴양난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불합리한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바울사도의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겨울을 지나고 출발했으면,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합리하게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만큼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상선(商船)의 모든 물품을 바다에 버려야 했습니다. 바울사도의 말대로 심한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이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른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른 말을 듣지 않는 데에서 문제가 항상 발생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았으면 생명까지 위협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꾸 떠나려 한 사람들, 마치 4대강공사를 해놓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불합리한 일들은 하지 않아야 됩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소망(사도행전27:14)
13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14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15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16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20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인간의 소망이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소망이란 사람들 개개인이 동화 같은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은 소망일 뿐 실제가 되지 않습니다. 소위 전설 같은 존재, 신화의 인물이라는 말에 속아(?)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발자취를 쫓으려 하지만 어림없는 말입니다. 그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모양도 내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소망처럼 ‘남풍이 순하게 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넘쳐납니다. 즉 ‘득의한 줄 알고’입니다. 그리고 바라던 항구에 순하게 입항(入港)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순항을 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는가 하면, 풍랑이 일기도 하고, 천둥번개가 난무하는 것 같은 날이 너무나 많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고 배가 가는대로 즉 세상의 풍파에 떠밀려 갈수밖에 없는 상황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항구에 다다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삶의 잔이 너무나 써서 인생을 좋게 기술하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회상해보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어릴적에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어떤 직위를 거의 획득한 상태에서 라이벌로 인해서 그 명단에 들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했는데, 그 사람과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이가 어렸을 때 잃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일찍 부모를 여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아직 어린나이에 가장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소망이 없습니다. 순한 남풍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루한 유라굴로가 시작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인간이 준다고 하는 소망은 항상 기대에 어긋납니다. 인간적인 소망은 씁쓸합니다. 인간적인 소망은 인생의 행로가 어둡습니다. 소망이 아니라 절망적입니다. 인생을 바꾸는 15분, 꿈은 이루어진다. 라는 슬로건은 있지만, 그것은 결코 모든 사람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소망은 인간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취될 것 같지 않은 소망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과 세상적인 소망은 같이 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긍정적인 것은 같이 가지 않습니다. 인간이 준다고 하고, 인간이 생각하는 소망은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아예 파멸시켜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는 소망, 성경적이지 않은 소망에 선뜻 발을 내딛지 말아야 합니다. 유라굴로가 언제 엄습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무능함(사도행전27:15-20)
사람의 무능함이란 한이 없습니다. 보통 인재냐 천재냐 할 때에 어떤 것이라도 사람의 무능함을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무너지고 밀려올 때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하지 못합니다. 1980.5.18에 미국에서 휴화산이던 세인트 헬렌 산이 폭발하였습니다. Saint Helens산은 워싱턴 주 서남부 스카매니어 카운티에 있습니다. 1857년 이래 활동을 중지했다가 1980년과 1981년에 큰 화산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높이 2,550m의 조용했던 산은 아침 8:32에 첫 번째 폭발을 시작하였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계속된 이 재앙이 끝난 후 산의 높이는 폭발로 400m가량이 없어졌습니다. 9시간 만에 산들의 모양이 알아볼 수 없게 달라졌습니다. 5개월 만에 거대한 계곡이 만들어졌습니다. 5일 만에 불모지가 생겨났습니다. 다양한 두께의 지층이 3시간 만에 형성되었고, 밤새에 100층이나 쌓였습니다. 많은 지류를 가진 큰 강이 9시간 만에 형성되었습니다. 화산직후부터 10년까지 사이에 호수바닥으로 가라앉은 통나무들이 아주 긴 세월에 걸쳐 여러 개의 숲이 차례로 덮인 것 같은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유라굴로가 Roma로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그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미 배는 선원들의 조종을 떠났습니다. 태풍에 배가 밀려서 바람을 맞추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유라굴로가 모는 대로 배가 떠밀려 갔습니다. 그러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서 간신히 작은 배를 잡았습니다. 작은 배를 끌어올려서 선체에 줄고 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르디스(모래언덕)에 걸릴까하여 배에 있는 각종 용기와 연장을 바다에 다 버렸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선원들이 배에 있는 짐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풍랑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태풍은 계속되었습니다. 여러 날이 되었지만 해와 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이 바다에서 죽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젠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의 소망이 모두 없어졌더라’가 그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이 전능하다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창조라는 말들을 쓸 때 더욱 그렇습니다. 경제이면 경제지, 무슨 창조경제입니까? 옛날 전두환 정권시절에는 새 시대가 도래 했다고도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창조라는 말은 사람의 입에서 내서는 안 될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태풍이 불어와도 속수무책입니다. 그냥 대비를 할수밖에 없습니다. 신이라고까지 했던 역대의 군주들, 어떻게 죽었습니까? 병사했고, 독살당했으며, 비명횡사했습니다. 한낱 곤충과 흡사한 생애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능하지 않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애는 위기가 한번만 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늘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잘 나갈 때 보면 정말 유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감당하지 못할 유라굴로의 태풍이 몰아침을 늘 유의해야 합니다.
불합리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 (0) | 2018.0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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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생각하는 소망 (0) | 2018.01.02 |
태풍 유라굴로 (0) | 2017.1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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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유라굴로(사도행전27:14)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얼마 못되어’ met j ouj polu;/‘길지 않은 후에’ 섬 가운데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순한 남풍이 부는 듯 하더니 갑자기 맹렬한 북동풍의 태풍이 몰아쳤습니다. 격렬한 북동풍이 발생해서 Ida산을 타고 내려와 그들에게 돌진한 것입니다. 이유는 반대방향의 두 기류가 맞부딪혀서 구름과 바다가 소용돌이치게 된 태풍이었습니다.
창세기4:26을 보면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아담-셋-에노스로 이어지는 인간의 족보에서 에노스를 낳고서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까? 셋 시대에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인해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담의 최초의 죄로 인해서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고 인간도 점점 무능해지고, 무력해지며, 연약함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언약을 맺고 성취하시는 여호와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공동예배를 드렸습니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현 세대의 인생은 길어야 100년입니다. 그 안에 모두 유명을 달리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항해입니다. “인생의 항해”란 출생으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통과하는 생애입니다.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 항해하는 것 같이 고통의 항해와 슬픔의 항해와 기쁨의 항해가 있을 뿐 영구적인 항해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삽화적인 사건들 때문에 방향을 전환하는 경우들이 너무도 흔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절대로 변하지 않아야 할 사항도 일시적인 환경과 변하는상황과 당일의 사정이 우리의 시계(視界)를 제한하여 우리로 하여금 정화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유라굴로’라는 태풍을 만나게 되는데 순한 남풍의 삽화적인 것 때문에 얼마나 잘못된 시계(視界) 내지 결정을 하는가? 따라서 우리는 오직 한 길만 응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쾌청할 때나 폭풍 등 외적환경의 온갖 변화 속에서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은 사람마다 비전이 있고 확정된 계획이 있을지라도 즉 인생의 목적과 지혜와 재능과 결의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불가피한 방해물들과 장애물들도 있습니다. 계획을 변화시키고 기회를 놓치게 하며, 온갖 흥망성쇠와 절망적인 일들, 장애물들과 불안하게 하는 일들이 불청객처럼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대비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우리의 믿음을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믿고, 그의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모든 것들을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살아보니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날의 항해를 뒤돌아보고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우리의 일을 정확히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잘못된 결정(사도행전27:12-13)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사람들이 바울의 말보다 경험이 많고 전문적인 지식이 많다고 하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은 이상 그 항구(미항)는 겨울을 나기가 불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나자고 했습니다. Foi'nix/Phoȋnix는 Krhvth/Krête의 항구였습니다. Krête는 지중해에 있는 큰 섬들 중에 하나로서 길이가 256㎞, 넓이는 11.2㎞-53.3㎞ 가량되는 섬입니다. 구약성경에서 Caphtor이며, 아모스9:7을 보면, 블레셋 영토였습니다. Krête는 미노아 문명(주전3,000-1,500년경)의 요람지로 최상의 정치,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Phoȋnix는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뜻같이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잘못된 결정을 너무나 많이 했습니다. 지난 정권만 봐도 국민들 대다수가 하지 말라고 하던 4대강(실은 운하공사)을 고집을 부리면서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좋은 일은 하나도 없고 나라의 돈만 강바닥을 뒤집고 허무는데 사용했습니다. 4대강은 환경파괴공사였습니다. 4대강공사가 아니라 4대강 파괴공사를 한 것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결정입니까?
옆의 나라 일본은 아시아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아시아 사람들에게 아주 못된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을 살육하고, 저들의 정책에 맞추어서 사람을 실험하고 식민지를 만들어서 짐승처럼 부렸습니다. 그러다가 원자폭탄을 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일본의 정권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잘못된 결정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전후에 유럽에 사과하느라고 총리들이 정신이 없는데, 일본은 아직도 웃기는 나라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결정입니까?
우리나라 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사참배, W.C.C.가입, 세속화, 교회의 Mega-Church화, 교회의 정치화, 교회세습화, 이단과 함께하는 목사들 등 잘못된 결정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때는 남풍이 순하게 불어서 득의한 줄 알았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오늘날 한국교회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한때를 풍미하던 목회자들이 오늘날에는 줄줄이 잘못되는 것을 볼 때, 아마도 잘못된 어떤 결정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어떤 결정을 할 때 신중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신중하게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결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신중하게 한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이미 그 결정은 잘못된 결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중하되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당장에 순한 남풍을 믿다가는 큰 일을 당할 수 있으므로.
누가 전문가인가? (사도행전27:9-11)
사람들은 흔히 전문가(professional)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전문가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어떤 사람이 전문가인지, 어떤 사람이 비전문가인지 구별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 사람도 전문가, 저 사람도 전문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문가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가가 본문에서 묘사한 바울의 항해와 난파의 기록은 생생하게 고전적인 필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단순하게 파선에 대한 기록만이 아닙니다. 본문은 “고대 항해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 매우 시사적인 문서 중의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9-11절을 보면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누가는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죄수 아닌 죄수로 Roma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호송책임자는 역시 Roma의 백부장 율리오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들은 모두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리오도 Roma로 가는 길에 바울사도가 성도들에게 대접받음을 허락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3절). 바울일행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항해하였습니다(4절). 소아시아와 고대 시리아 지방의 지중해 연안지방에서는 여름에 서쪽에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습니다. 이 바람을 맞으면 항해가 곤란했기에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면을 타고 항해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순조롭게 소아시아의 한 동쪽지점에 도착해서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무라는 애굽과 로마사이를 왕래하는 곡물선단의 주요항구입니다. 거기에서 율리오는 아드라뭇데노라는 배를 만났습니다. 그 곡물선단은 Roma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Ramsay는 ‘그 배는 정규항로로 운행하여 아마도 빨리 Roma로 가기위해 빨리 달렸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을에는 바람의 방향이 북풍으로 바뀔 위험이 항상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항해하기가 점점 어려웠습니다. 7절을 보면 무라에서부터는 강한 북서풍이 불어와서 천천히 그리고 어려운 항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니도에 도착한 배는 잠깐 생각할 시간을 가졌습니다. 니도항은 애굽으로부터의 상선이 자주 드나들기 때문에 백부장은 니도항에서 알렉산드리아호에 올라타고서 순항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이 말합니다.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보통 금식하는 절기는 9-10월 10경이었습니다. 금식하는 절기는 9월 중순경이었습니다. 9월 중순경이후에는 지중해를 항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11월11일 이후에는 아예 항해가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을 바울사도는 여행을 하면서 익히 알고 있었기에 백부장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위험한 일을 결국 자초한 것입니다. 소위말해서 자격들을 많이 따지는데, 자격이 꼭 능사는 아닙니다.
인생의 항해(사도행전27:1-8)
1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바울일행은 가이사랴를 떠나 시돈으로, 구브로 해안을 지나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서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렀습니다. 무라에서 이달리야로 가려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배는 더디 갔습니다.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간신히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에 , 그리고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이 배에는 바울일행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전혀 예측하지 못한 항해를 이들은 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은 자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과거에 여행을 할 때 되도록 이 시기는 피했기 때문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이 몰아쳐 항해를 할 수 없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함께 걷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지까지 함께 걷는 것이 동행입니다. 사람이 누구와 동행하느냐에 따라서 가치관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달라지며, 가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세상과 동행하느냐, 하나님과 동행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행로가 달라집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꾸 한계를 주고, 한계를 정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한계에 부딪히면 포기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앙을 요구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계시기에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의 인생행로는 정해져 있을지라도 우리들은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은 필히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은 성경에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그 시대에 유독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에녹이었습니다. 그 결과 에녹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은 에녹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70인역에는 에녹이 하나님께 기쁘시게 했다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죽지 않고 천국으로 올려 진 것입니다. 따라서 긴 인생의 항로라도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고통과 환란이 있을 수 있으나 주님께서 건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직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잘못된 결정 (0) | 2017.1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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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전문가인가? (0) | 2017.11.28 |
신약시대의 백부장들 (0) | 2017.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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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무죄를 선언한 Roma 행정관들 (0) | 2017.10.28 |
신약시대의 백부장들(사도행전27:1-8)
1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Roma에서 백부장/eJkatontavrch"/ekatontârches 는 Roma군대에서 백부장은 curia(옛 로마 행정구)를 통솔합니다. curia는 10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한 군단의 1/16). Roma에서 백부장은 군단의 핵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와 사도행전에서 백부장은 여러 직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판결의 집행을 감독할 책임(막15:39), 십자가 아래에서의 백부장의 고백은 공관복음서 저자들에 의해 그리스도론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21:32에 따르면 그 백부장은 군대 사령관의 부하이며, 로마군단 내에서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다 작은 부대의 지도자의 지위로, 그는 예를 들면 형벌(행22:25) 또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며 지킬 책임이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의 백부장은 모두 선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자기 종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눅7:2). 그런 차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습니다. 즉시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고쳐주시기를 청했습니다(눅7:3). 예수님이 가시려는데 주님이 이방인인 저의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내 하인이 낫겠다고 했습니다(눅7:6-7). 이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요구대로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극구 칭찬하셨습니다(마8:10).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책임자인 백부장은 예수님의 운명을 지켜보았습니다(막15:37-39).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최초로 고백합니다(막15:39). 예수님을 정녕 의인이라고 고백합니다(눅23:47).
백부장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살았습니다. 이탈리아대라는 군대에 소속되었습니다(행10:1). 그런데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행10:2). 그러는 중에 고넬료가 환상을 보고 베드로를 경건한 종을 보내어 청합니다(행10:3-5). 그때 베드로는 욥바에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보게 하시고 고넬료의 집에 가라고 하십니다(행10:9-20). 베드로가 그들을 맞으면서 무슨 일로 찾느내고 했습니다(행10:21).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도 기꺼이 가서 말씀을 전한 후에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에게 친절을 베푸는 친구들의 대접을 모두 허용합니다. 바울의 친구들을 막지 않았으며, 모두 호의적으로 대하였습니다. 물론 황제에게 호소한 죄수, 그것도 Roma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바울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죄수의 몸이기에 백부장이 얼마든지 제재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율리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사도에게 친절히 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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