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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서 기도하는 제자들(사도행전1:12-14)
제자들은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웠습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였습니다. 그들은 기거하는 다락방에 올라갔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시몬(열심당원), 유다(야고보의 아들)였습니다. 그 외에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기도에 계속 열중했습니다(12-14절).
사도들은 주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소에 기거하던 다락방에 모여서 주님의 명령대로 했습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절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기다리라고 했을 때 이들은 다락방에서 모여서 열정적인 기도를 했습니다. 소위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많이들 말하지만, 그 말은 신빙성이 없습니다. 어쨌든 이들은 기도에 열심 했습니다. 이들 기도는 개인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합심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목적을 두고 합심하여 전심으로(proskarterou'nte")기도 했습니다.
누가는 사도들 외에 ‘여자들’(gunaixi;n)과 마리아를 기록했습니다. 누가에게는 여자들을 많이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8:1-3을 보면 누가는 여성도들이 예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기록했습니다. 여자들의 신앙이 사도들의 수준에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가의 보기에 예수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사람들,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차별당하는 사람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죄 있는 모든 사람들, 죄인들의 ‘구주’였습니다. 또한 고대에 사회적으로 업신여김을 당하던 특별한 한 집단으로 여자들을 들 수 있었습니다.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는 그들에게 특별한 한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여 주셨으며, 그들과 특별한 한 방식으로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태도는 제자 공동체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가치 척도를 세웠습니다.
눅1-2장의 어린 시절 역사에서 마리아가 중심점이었습니다(마1-2장의 중심은 요셉). 자주 한 남자가 등장하는 자리에 곧바로 한 여자가 옆에 세워졌습니다. 시몬 옆에 여예언자 한나를(2:25-35), 가버나움의 백부장 옆에 나인성의 과부를(7:1-10) 세웠습니다. 여자들은 예수를 따라감에 남자들과 똑같이 받아 들여 졌습니다. 이것은 유대적 사고방식 및 고대의 이방적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여자들을 사도들과 나란히 예수의 공생애 등장, 그의 죽음과 부활의 유자격한 증인들로 세우셨습니다.
또한 이 기도모임에 예수님의 아우들이 함께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생전에는 거의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마리아와 함께 동참했습니다. 이제 이들은 전 세계에 전해질 복음을 위해 기도의 불을 붙였습니다. 그들의 모임과 기도는 곧 다이나마이트 폭발의 심지였습니다. 기도의 심지가 서서히, 그러나 뜨겁게 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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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과 성령의 역사하심/성령세례(사도행전1:1-3)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순절 사건에 대한 해석문제, 성령세례와 중생과의 관계,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의 문제가 성령론에서 주된 논제가 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오순절 성령세례의 의미와 성령세례의 단어의 어의를 고찰해야 찾을 수 있다.
사도행전에 있어서의 성령역사
가핀은 “성령세례는 한마디로 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이다. 오순절 사건은 약칭 성령세례, 성령강림, 혹은 성령선물 등으로 불리며, 또한 성령에 의한 세례라는 뜻이 있는 동시에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어느 쪽을 택해도 큰 차이가 없으나 이 말의 요점은 신자가 성령에 의해서 영적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뜻이다”고 말했다.
핀녹은 성령세례의 용어에 대하여 특수한 용어가 아니라 융통성 있는 은유적 용어라고 했다. 즉 성령의 임함을 말하는 통칭적인 의미로 받아들여 때로는 성령 충만의 동의어로 볼 수 있으며 회심의 경우를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안영복 교수는 오순절 날에 각 사람위에 '성령이 임한 것'을 가리켜 '성령의 세례'라고 말함이 타당하다고 했고 박영선 목사는 "성령의 부어주심"이라고 표현하면서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와 성령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를 구분했다.
또한 우희영 목사(성실)는 "성령세례란 성령 속에 잠기며 성령 자신으로 말미암아 기름 붓듯, 혹은 물 붓듯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로이드 죤스는 "성령의 보증" 혹은 "성령의 인침"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했고 부루너(Fredick Bruner)는 세례 받는 것이 곧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며 성령의 세례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위스 개혁신학자 파디(Ren'e Pache)도 "성령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책에서 동일한 견해를 표현하였다. 칼빈 또한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동일시했다.
이러한 모든 견해는 대체로 두 가지 주장으로 분류 될 수 있다. 즉 오순절파와 웨슬리안 및 케직파의 견해와 개혁주의(칼빈주의)의 학설이다. 전자는 중생 후에 받는 이차적 경험으로서의 체험을 성령세례라 해석하며, 후자는 중생시에 받는 어떤 것으로서의 성령세례를 말한다. 이렇듯 성령세례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주의 깊게 고찰되지 않으면 그 실체를 분간하기 어렵다.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성령세례라는 말이 7회 나타났다(마3:11, 막1:8, 눅3:16, 요1:33, 행1:5, 11:16, 고전12:13). 여기에 인용된 성구들은 세례요한이 자신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하면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1:8)고 말한 예언적 내용이다. 그리고 행1:5의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 후에 승천하시기 전 사도와 같이 모인 무리에게 하신 예수님 자신의 예언이며 행11:16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쓴 것이고 고전12:31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었던 교훈에 포함되어 있다.
성령세례가 직접 언급된 복음서와 사도행전1:5을 살펴보면 성령세례는 예언과 약속의 성취로서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이다. 성령으로(ejn pneuvmati baptisqhvsesqe aJgivw/)세례요한에 의해 예언되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약속된(행1:5) 성령세례가 오순절 날에 성취된 것이다. 베드로는 구약을 인용하여 이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했다.
Sanders도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내린 성령의 은혜를 가르쳤던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문법적으로 약속된 세례의 태가 수동태(baptisqhvsesqe/세례를 받으리라/ 미래수동태)인 것은 성령세례가 받은 자의 행위의 결과가 아님을 의미하며, 예언과 약속의 성취임을 말해준다. 오순절 사건의 특성과 의의를 살펴보면,
첫째, 오순절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이는 전혀 없었던 성령이 강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은 오순절 이전에도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계셨고 사역하셨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인간을 위한 성령의 주된 사역이 시작됨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시대가 끝나고 성령의 주도적 사역이 시작됨을 알리는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은 역사성을 가진다. 렌스키도 마태복음 3:11절을 주해하면서 “오순절 전에는 성령이 없었고, 오순절 후에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순절 전에는 한 영혼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차이는 구속 사역이 실제로 완성되기 전에는 성령의 사역이 제한된 예비적이었으나, 그 후에 이르러 성령의 충만이 있었다는 차이다.” 렌스키 역시 오순절 사건이 성령의 주도적사역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입장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오순절 사건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것의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성령시대의 시작이다. 고든(Gordon) 또한 오순절 사건을 성령시대의 도태의 축으로 해석했다.
둘째로 오순절 사건은 구속사적인 사건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성역초기에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분이라고 말한 다음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3:17)고 말함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 주는 일이 어떤 일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사역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직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역사상에 구속 성취를 이루시고 그 구속을 받아들이는 알곡은 곳간에 모으고, 그 구속을 배척하는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요엘2:28-32을 인용하여 오순절 사건을 설명하면서 요엘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입장에 비추어 인용했다. 베드로는 요엘서의 '그 후에'를 '말세에'로 고쳤을 뿐만 아니라(행2:17) “저희가 예언을 할 것이요”(행2:18)를 첨가하여 인용하였다. 그 이유는 오순절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아울러 말세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의 오심과 자신의 죽음을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16:7-8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예수님의 생각의 방향은 자신이 죽음과 부활, 승천을 거쳐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에 있음을 본다. 예수님 자신이 죽으신 후 부활해야만 보혜사가 오실 것을 명백히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오순절 사건은 구속적 드라마의 한 부분으로 성취된 사건이며 다른 구속 사건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의 성육신, 수난, 죽음, 부활, 승천과 함께 고려되어져야 한다. 스타트(Stott)와 가핀(GaGaffin)도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의의를 구속사적인 면에서 이해하고 있다. 가핀은 오순절의 의의를 3가지 차원에서 조명하였는데, 기독론적 차원, 교회론적 차원, 그리고 경험적 차원이다. 기독론적 차원에서 볼 때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시는 자는 바로 성자이시다. 오순절은 약속의 성령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날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적이며 기능적이며 종말론적인 섭리사건이다. 십자가로 절정을 이룬 성자의 사역의 절정이었다.
세째, 오순절 사건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가시적 현상의 체험이다.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과 방언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먼저 상징적 의미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예언과 약속이 성취되었고 새로운 언약시대의 도래가 이루어졌다는 확증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가시적 현상이 나타날 수는 있겠으나 모든 경우와 간구에 의해 이러한 동일 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합당치 않다고 하겠다. 성령행전이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성령의 끊임없는 역사가 상존했던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에 방언을 비롯한 가시적 현상이 교회선교사역에 반복되었다는 제시가 없다. 오순절 사건의 가시적 현상들은 주의 깊게 언급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네째, 성령의 충만을 모든 믿는 자들이 받았고 특별한 능력이 임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되고 능력의 은사가 임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목격한 후 분명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님에 대한 간절한 사모와 전혀 기도에 힘쓴(행1:14)의지의 순종이 막 주도적 사역을 시작하시는 성령님을 그들 속에서 충만히 역사하시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역사했던 능력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예정과 인정하심에 의한 것이지만 성령 충만함으로 은사와 능력이 나타났다고 봄이 더욱 보편적이며 일괄성이 있다고 하겠다.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고린도서에 나타난 성령세례의 언어적 의미를 고찰 해보면 성령세례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먼저 세례(baptivzw)라는 말의 헬라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상태 또는 이전의 환경이나 상태와의 관계를 바꾸기 위해서 사람이나 사물을 그 외에 어떤 것과 결합 시켜 놓거나 새로운 환경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으로 정의되며 그 번역은 ‘-로 들여놓다. 또는 -로 끌어들이다’라고 K.S 위스트는 설명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의 31절에서 “성령으로”는 수단을 말하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또는 성령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의 영역에서의 세례를 뜻하며, 성령은 세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K.S 위스트는 말한다. 또한 “믿는 자를 예수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결합으로 이끄는 것이지 성령에 의한 세례가 능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결국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의 헬라어 의미는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와 생명적인 결합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삼으신 것을 의미 한다” 성령이 믿는 죄인을 주 예수께서 살아계신 머리가 되신 그 신비체에 들여놓거나 이끌어 들이는 것을 뜻한다. 렌스키와 칼빈도 요1:33과 행1:5을 주해하면서 세례라는 개념을 구속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이상근 박사 또한 성령의 세례는 위에서 오는 선물로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같이 살아 그의 몫이 되는 것이라 하여 성령세례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연합으로 해석했다. 또한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역사적이든 개인적이든 단회적 사건이다. 막1:18, 마3:11에서 “세례를 주실 것이리라”는 뜻이 단어 (밥티세이)는 미래능동태 3인칭 단수 동사로서 한번 이루어질 것이 예언되었기에 성령세례는 단회적이라 할 수 있다. 요 1:33의 "세례를 주는" 단어 (밥티죤) 역시 현재 분사 능동태 주격 남성 단수 동사로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단회적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고전12:3절도 마찬가지로 그 동사는 과거의 행동을 가리키는 과거 시제이며 단 한번만의 행동을 가리키는 부정과거이다. 이와 같이 성령세례에 관한 주석가들의 해석과 언어적인 의미를 고찰해 보았을 때 성령세례는 죄 씻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표식으로서의 역할과 생명이 임하는 단일성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이상의 고찰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성령세례는 어떤 능력이나 은사의 체험이 중심이 아닌 역사적 구속사적인 사건이요 예수그리스도의 몸과의 결합이며 단회적 사건으로 성령 충만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성도가 성령의 은사는 마땅히 사모해야 하겠지만 성령세례를 사모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1장에서 7장까지는 성령님의 오심에 대한 예언입니다. 8장에서 10장까지는 사마리아와 유대전도를 주도하시는 성령님을 볼 수 있습니다. 13장 2절과 4절은 땅끝 전도의 시작을 주도하신 성령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6장6절에서 19장 20까지는 유럽전도의 시작을 주도하십니다. 20장에서 27장까지는 예루살렘으로 경유하여 로마로 가는 것을 주도하셨습니다.
1 한규상, “사도행전을 엮는 몇 가지 주제들”『사도행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2 신약개론.
사도행전의 내용분해(사도행전1:1-3) 2011.10.1
제I부 예루살렘에서 증거/1:1-7:60
1:1-2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을 예비하심.
1. 예수님은 그의 제지들에게 명령하시고 승천하심(1:1-11)
2. 성령을 기다림: 유다의 후계자(1:12-26)
2:1-8:1a: 예루살렘에서의 선교사역
1. 오순절 장면; 베드로의 설교(2:1-36)
2. 메시지를 받아들임 ; 예루살렘의 공동생활(2:37-45)
3. 활동, 선포 및 사도들의 재판(3:1-5:42)
4. 헬라파 유대인들; 허용; 스데반의 재판과 순교(6:1-8:1a)
제2부 사마리아와 유대에서의 선교사역/8:1b-12:25
1. 예루살렘에서 흩어짐; 사마리아에서의 빌립과 베드로(8:1b-25)
2. 빌립과 가사로 가던 에디오피아 내시(8:26-40)
3.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 예루살렘과 다소로 돌아감(9:1-31)
4. 룻다, 욥바, 가이사랴에서의 베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감(9:32-11:19)
5. 안디옥; 예루살렘, 헤롯의 박해; 베드로의 떠남(11:19-12:25)
제3부 바나바와 사울의 이방인 전도 사역; 예루살렘에서 인정/13:128:31
1. 안디옥 교회에서 보냄을 받은 바나바와 사울: 구브로와 소아시아 남동쪽에서의 선교 사역 (13:1-14:28)
2. 예루살렘 회의와 승인; 안디옥으로 돌아감(15:1-35)
15:36-28:31: 땅 끝까지 이르는 바울의 선교 사역
1. 안디옥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그리스로 갔다가 돌아옴(15:36-18:22)
2. 안디옥에서 에베소와 그리스로, 가이사랴로 돌아옴(18:23-21:14)
3. 예루살렘에서 체포됨 ; 가이사랴에서의 투옥과 재판(21:15-26:32)
4. 죄수로서 로마 여행(27:1-28:14a)
5. 로마에서의 바울(28:14b-3l.
1. 예루살렘에서의 증거(1:1-7:60):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악속하신 오순절사건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지 열흘 후에 성취되었다. 성령의 권능을 체험한 제자들은 복음을 담대히 증거 하기 시작하였으며, 놀라운 결실을 또한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내적으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외적으로는 핍박과 순교 사건 등이 뒤따랐다.
2. 유대와 사마리아에서의 증거(8:1~12:25): 교회가 확장되는 가운데에서 세 가지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 집사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활동이 성공적으로 전개되었다. 둘째,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의 회심사건이 등장한다. 끝으로, 이제껏 유대인들만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던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도 증거 하였다.
3. 땅 끝까지 증거 함(13:1~28:31): 13장에서부터 본서의 초점이 베드로에게서부터 바울에게로 옮겨지며, 교회의 근거지 또한 예루살렘으로부터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차츰 대치되었다. 그리고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47-4년), 제2차 전도여행(50-52년), 제3차 전도여행(53-55년) 이 나오고 복음과 함께 로마로 호송되는 바울의 동향을 자세하게 기록했다(59년).
사도행전의 개관(사도행전1:1-3)
서 론
‘서문’(1:1-3)에서 저자는 사도행전이 누가복음의 연속임을 알린다. 사도행전의 저자와 누가복음의 저자는 동일하며 사도행전도 누가복음과 같이 데오빌로에게 헌정되었다. 누가는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듯이 구원사건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전 세계적 선포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눅24:6-47). 그래서 누가는 이 복음 선포가 이미 그의 시대에 취했던 선교의 길을 답습하여 그리고 있다. 이스라엘의 중심부요 메시야의 도성이요 최초의 기독교회의 발생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방세계의 심장부인 로마에까지이르는 선교의 행로를 그리고 있다. 서술의 큰 틀은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미리 정해졌다(1:8).
1. 저자
누가복음1:과 사도행전 1:1을 보면 한 저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사도행전20:4절과 5절을 보면 ‘우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곧 바울과 누가를 가리켜서 우리라고 한 것이다. 골로새서4:14, 디모데후서4:11을 보면 누가는 바울과 항상 같이 동행했다. 따라서 저자는 의사 누가이다.
2. 저작 장소
저작 장소는 바울의 로마체제 이후로 보아 로마에서 기록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은 누가복음과 마찬가지로 로마에서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3. 수신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수신인은 데오빌로(눅 1:1, 행 1:1)이다. ‘데오빌로’의 문자적인 의미가 ‘하나님을 사랑 하는 자’이기 때문에, 누가의 저서가 특정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던 1세기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낸 기록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눅 1:3에서 ‘데오빌로’ 뒤에 ‘각하’라는 말에 주목한다. 당시 그 직함은 로마의 관원을 지칭할 때만 사용되었다. 따라서 데오빌로는 이방인이었으며, 로마사회의 상류층이고, 누가가 그에게 신앙의 확신을 주기 위해 기록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4. 저작 연대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연대를 보통 61-67년경으로 보나, 61-63년경으로 보기도 한다.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써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바울이 로마에 간 것(60년)과 네로박해(64년)를 본서에서 다루지 않았다. 또한 70년에 로마의 멸망이 기록되지 않았다. 만일에 그 시기에 기록했더라면 틀림없이 그 사건을 기록했을 것으로 보아 60년 이후 64년 이전으로 61-63년경으로 추정한다.
5. 저작의 동기와 목적
기독교의 기원에 관해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그것에 대하여 보다 정확히 차례대로 설명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누가는 사도들이 어떻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위임령 즉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다음으로 세계의 수도 로마까지 전파하는 과정을 저술하고자 했다.
6. 신학적인 특징
본서에는 성령의 사역,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님의 지상사역에 부름 받은 사람들, 구약성경의 연장의 강조, 열두 사도의 역할, 정확한 복음사역,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라는 사실 등을 다루었고, 선교론적 관점에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베드로(유대)와 바울(이방)을 통합하려는데 애쓴 흔적이 있고, 히브리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학적인 측면에서 설명함으로 이 복음이 이방인과 무관하지 않음을 제시하였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은 바울에 대한 전기를 쓰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역사 즉 초대교회의 발전사이며 사도들의 활동사를 서술하기 위해서 사도행전을 기록하였다. 즉 사도행전은 교회의 확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책이다. 교회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증거 되고(1장-7장),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증거 되며(8장-12장), 그리고 땅 끝까지 증거된(13장-28장) 것을 기록하였다.
결 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서 자신이 고난을 받고 3일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들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언대로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으셨다. 그리고 예언대로 살아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선교명령을 하셨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하셨다. 이에 사도들이 복음을 유대와 이방에 어떻게 전해지는가를 기록했다. 그러나 사도들이 주관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주관하여 로마제국 전체를 거의 복음이 전해지게 하셨다. 과거 복음시대는 주로 예수님께서 전해진 복음을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 성도들,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였다. 과거에는 겁쟁이였던 사도들이 이제는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한 것은, 구약시대에 이어 신약시대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이런 열정으로 인하여 2세기가 채 못 되어 복음이 엄청난 속도로 유럽에 전해졌다. 이것은 곧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는 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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