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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사도행전9:19-22)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신이 났었을 것입니다. 보기 싫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체포해서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정통유대인으로 각광을 받고, 촉망을 받는 인물이라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그렇게 살아왔고, 다메섹에 그러한 이유로 왔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에 있는 유대들은 아직 사울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사흘이나 식음을 전폐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성령과 아나니아로부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점점 음식을 먹고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날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각 회당을 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습니다. 사울의 이 말은 유대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말이요, 인정하기 싫은 말입니다. 따라서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22절을 보면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이 말하는 것에 대해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데, 이 사람이 사울이 맞아? 다메섹에 온 이유가 뭐야, 저들을 잡아가려고 오지 않았나?’ 주님께 잡힌 사울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울은 자신을 부른 주님의 이름을 힘있게 전파했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다메섹에서는 사울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정작 도착해서 하는 말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메시아) 전파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달리 교회는 이로써 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회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主(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크고 작음이 없이 모두 교회입니다. 사실 사람들보기에 크고 작은 것이지, 교회는 대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교회자랑이 아닙니다. 교회표어의 자랑이 아닙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축복, 복이 교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보여지는 물질의 복이 전부였다면, 열 두 제자들은 최고로 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도 부자가 없었고, 모두 순교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님의 제자들을 복된 자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계속 전파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사울이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우리들이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교회를 이 땅에 세우셨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오늘 우리들을 이 땅에 존재케 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든지 안하든지, 어디에서나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끝 날까지.

 

 

 

 

 

 

 

 

 

 

And

바울의 사도직(사도행전9:10-18)

바울사도의 사도직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서신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자신을 사도라고 말한 서신들은

로마서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고린도전서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후서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갈라디아서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서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골로새서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디모데전서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디모데후서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디도서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바울사도가 자신을 사도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서신들은 이렇습니다.

빌립보서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데살로니가전서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데살로니가후서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빌레몬서1: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등은 사도라고 했고,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 등은 사도직에 대해서 쓰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로마교회, 고린도교회, 갈라디아교회, 에베소교회, 골로새교회, 디모데, 디도’에게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변증을 하려 했을 것입니다. 곧 사도로 인정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물론 디모데나 디도에게는 그들을 교회의 책임자로 세우면서 사도가 세웠음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빌레몬’에게는 굳이 사도직에 대해서 변증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로서 자격을 부여받은 근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영원토록 살아계신 주님을 실제로 보았습니다(고전9:1,15:8).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했던 그가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And

성직매매의 위험성(사도행전8:18-25)

성령의 능력을 영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 받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성령의 능력은 예루살렘에서만 일어났다고 보는 것은 성경을 잘못 본 것입니다. 시몬은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인해서 성령이 강림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자신도 그러한 능력을 행할 수 있도록 부탁한 것입니다.

시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살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돈을 주고 살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시몬은 생각하기를 그러한 표적들이 자신의 손을 얹음으로서 일어난다면 쿤 권위와 특권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몬이 생각하기를 베드로와 요한이 특수한 은사를 받아서 종교적인 마술을 파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Simon의 이러한 생각 때문에 성직매매를 의미하는 ‘simony’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사람들이 소유할 때는 보이는 것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무엇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시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누가 무엇을 보았다고 하면, 그것에 기독교인들이 정신에 팔립니다. 너도나도 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몇 년 치의 간증시간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고, 사람들의 말은 들을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보편적인 분이십니다. 지구상의 몇 명에게만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불러 모으시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주셨습니다.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은혜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런 은사와 그 능력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 그것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 사도들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베드로는 시몬에게 파멸당하라고 했습니다. 주를 믿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악하다고 했습니다. 즉시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성직매매 남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에 교회가 너무 시끄럽습니다. 전 세계의 교회들이 그다지 평온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파괴하려는 악한 세력들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당회라는 이름으로, 총회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역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직매매를 하고 있습니다.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담즙이며, 불의에 매인바 된 것입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보이는 것,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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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사도행전8:1-3)

1절a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1절b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 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울의 교회에 대한 핍박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우선 스데반이 죽어서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유대교를 배반하는 사람들은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국법을 어기고 종교법을 어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죽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하는 날부터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을 죽인 유대인들은 마치 이리떼 같았습니다. 성도들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된 것입니다. 성도들을 보는 족족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이 기회에 그리스도인들을 없이하지 못하면 기회가 없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하여 혹독하게 박해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핍박을 피해 흩어졌습니다. 일부 성도들이 스데반을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신명이 났습니다. 아예 교회자체를 없이하려 했습니다. 사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그야말로 살기등등했습니다. 자신이 믿는 도가 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없이하고자 한 것입니다. 후에 바울사도는 그런 자신을 회상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디모데전서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 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주님께서는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이 사단을 궤멸시킨다는 것을 사단이 알았다면, 절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세등등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자신들이 100%승리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사단의 나라는 궤멸되고, 유대인들은 엄청난 재해를 당했습니다. 스데반을 기세등등하게 죽인 산헤드린은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 선두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오랜만에 사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의 도를 선동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듯했고, 선봉에 서는 사람들은 감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反轉(반전)을 몰랐습니다. 타고 있는 불에 기름을 붓는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으로 가고 있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기독교가 땅 끝까지 전파되도록 기여했습니다. 그들의 심한 박해로. 그들의 잘못된 종교관으로, 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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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등장(사도행전7:58)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흔히 사울의 뜻은 위대하고 바울은 작은 자라고 해서, 그 근거를 그리스도를 만나기전에는 사울, 만난 후에는 바울이라고 하는데, 성경에 그런 근거는 없습니다. 사울(lWav;/Shâ’ûwl/간구된)이라는 이름은 유대식 이름입니다. 사울의 헬라어음역은 사울로스(Sau'lo")입니다. 그의 다른 이름은 바울입니다. Pau'lo"(파울로스)는 라틴어 파울루스(Paulus)에서 유래한 헬라어 음역입니다. 여기에서 ‘작은’이란 말이 유래했지만, 성경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리기아의 다소에서 났습니다(행9:11,21:39,22:3). 유대인 양친에게서 태어났습니다(빌3:5). 그의 부친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행23:6). 로마의 시민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출생 때부터 로마시민이었습니다(행22:28,16:37). 그는 천막 만드는 일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청년기 초에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인 가말리엘에게서 유대신학을 철저히 교수 받았습니다(행22:3 ,5:34). 바울사도는 스데반의 순교를 마땅하다고 생각할 만큼 유대신학에 미쳐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악하게 공격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리스도께로 개종하였습니다. 이후 지칠 줄 모르고 굽힐 줄 모르는, 그리스도의 전파자요 많은 그리스도 교회의 설립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열심과 교리로 그는 스스로 유대인들의 불구대천적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되고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로 호송되었다가, 2년 후에 로마로 보내졌습니다.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바울사도의 등장은 악인으로 등장합니다. 기독교인들을 잔해하려고 날뛰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많았습니다. 수리아지방에 있는 기독교인들까지 잔해하려고 하는 선봉에 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등장은 기독교회사에 거대한 획을 긋게 됩니다. R. E. D. White는 바울사도를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 가장 심오한 교사, 가장 충실한 친구, 가장 용맹스런 모험과 불굴의 수난자, 가장 눈길을 끄는 성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병사요, 종이요, 그를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의 개종은 급격하고, 극적이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기독교를 히브리사람들만의 종교가 아니라 세계종교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전 세계를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대인과 로마인과 환경들의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죽는 날까지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 순교했습니다. 후에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대열에 자신도 함께 하고 평생을 주님과 동행했던 그 결과 오늘날 전 세계에 복음이 가일층 순조롭게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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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자는 스데반(사도행전7:60)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7:60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다니엘12:2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데살로니가전서 4:13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데살로니가전서4:14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데살로니가전서4:15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고린도전서15:18

…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15:20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마태복음27:52".

잔다는 말은 통상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모든 행동들을 멈추고 육신적인 몸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눈이 감긴 채 의식 활동이 쉬는 상태를 잠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8시간이내의 수면에 빠집니다. 물론 그 이상을 자는 사람도 있고 그 이하의 잠을 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잠을 잡니다. 잠을 자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위의 성경구절들은 ‘잔다’고 하면서 우리의 ‘잠’과는 다른 의미의 잠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잠을 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잠과 죽음사이가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부름 받을 사람과 이미 “잠든 사람”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요한복음11장을 보면 나사로의 죽음을 맞습니다. 그 동생들 마라아와 마르다는 무척이나 슬펐습니다. 예수님께 나사로가 아프다고 기별을 했는데 나사로가 죽은 후에 도착한 것입니다. 분명히 죽기 전에 오셔야 할 예수께서 늦게 오신 것입니다. 이점이 마리아자매에게 야속했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아프다고 기별했으면, 만사를 제치고 오셔서 죽지 않도록 해주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러셨습니다. 나사로의 기별을 듣고도 일부러 죽은 후에 가셨습니다. 나사로의 가족들과의 친분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 예수님이 일부러 늑장을 부렸습니까? 왜 나사로가 죽은 후에 도착했습니까? 전능하신 주님의 손길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슬픔에 젖어서 예수님을 원망하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요11:44).

신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몸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화롭게 된 상태에서 양자삼으심의 충만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충만히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즉 몸이 부활이 됩니다. 어떤 상태로 죽었든지, 시공간을 초월해서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었을지라도 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되고(살후2:14),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습니다(롬8:17). 이것은 신자의 특권입니다. 신자들만 부활해서 영생을 받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지독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당당했던 것은 바로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잔다는 것은 곧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곧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죽음입니다. 죽어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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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박해하는 재판장들(사도행전7:1)

재판관이 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裁判席(재판석)에 앉아서 사람들을 심판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재판이란 공의를 행하는 것인데, 재판으로 불의를 행하였던 것이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습니다. 히틀러의 유대인재판, 각국의 혁명재판, 쿠데타의 군사재판 등은 공의와 정의가 사라진 재판입니다. 재판이라는 要式(요식)을 갖추려는 것뿐 오히려 재판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행위입니다. 1절에 ‘이것이 사실이냐?’의 대제사장의 질문이 그와 같습니다. 이 사람은 가야바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불법재판관입니다. 소위 이스라엘 최고법정의 수장으로서 자리 값을 못한 사람입니다.

가야바는 주후18년에 유대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최고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가야바는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었을 때 10년을 포함 18년을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수리아의 총독이었던 비텔리우스가 36년 빌라도를 소환코자 유대에 왔을 때, 가야바도 해임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로서(요18:13) 세례요한의 선교 시작 전부터 사도행전 초기 박해시대 동안의 대제사장직을 해먹었습니다(눅3:2, 행4:6,7). 가야바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을 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한다고 말했습니다(요11:49-52). 그러나 이 말은 그 해에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이 말로 인해서 유대인들이 오히려 더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기 때문입니다(요11:53).

가야바는 즉 당시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대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사단에게 속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모의 헸을 때, 진위여부도 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앞장을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잡히시던 밤에 대제사장 가야바의 아문(뜰)에 모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습니다(마26:3-5).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써 바른 직분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거짓증인을 세워 예수님을 죽였습니다(마26:59). 사도들에게도 가야바의 박해는 계속되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가야바 앞에 수시로 고발을 당했습니다(행4:1-8). 이제 가야바는 스데반에게도 같은 방법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대체적으로 순탄하게 전해집니다. 약간의 어려움은 있지만, 순탄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종교들이 어떤 진리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상들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은 신들을 섬기면, 힘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이 신과 저 신들을 합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와 종교 간에 부딪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전하는 우리들은 다릅니다. 오직 하나님은 한분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부딪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군왕들과 종교들은 늘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권과 왕권이 위태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역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의 이권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단은 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박해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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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진로를 막으려 했던 사람들(사도행전5:1-11)

교회는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인 것 같은데도, 아닌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막을 둘러서 사단을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배시간에도, 기도하는 시간에도, 찬송하는 시간에도 사단은 우리를 계속 공격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破竹之勢(파죽지세)로 교회가 예루살렘을 강타하고 있을 무렵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등장합니다. 4:36-37에서 바나바와 대조되는 일이 이들에게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이들은 교회에 재산을 바치고 즉사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누가 교회에 재산을 바칠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천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도 교회에 재산을 기부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handicap을 생각하면서 누가는 이 일을 기록했습니다. 왜 그랬으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여호수아시대에 가나안정복에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 40여년을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첫 성인 여리고를 정복했습니다. 다음으로 아이성을 정복할 차례였습니다. 여리고성과 아이성은 그 크기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성을 탐지한 사람들이 여호수아에게 말하기를 온백성이 올라갈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2000-3000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수7:3). 이들의 생각이 잘못되거나 情報判斷(정보판단)이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올라가서 얼마 있지 않아 大敗(대패)했습니다. 약36명이 죽고 혼비백산했습니다(수7:4-5). 도대체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여호수아도 몰랐고, 족장들도 몰랐으며, 백성들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우리를 멸망시키려 하시나이까?’(수7:7). 이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이성에서 패한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아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간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는 것입니다. ‘아간의 죄’‘아나니아 부부의 죄’를 같이 묶어서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아간’은 구약의 교회를 진군을 멈추게 한 죄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신약교회의 진군을 멈추게 한 죄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를 위해서 재산들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는 것을 부러워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일부만 바치기로 모의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전 재산을 팔아서 바친 것처럼 보이고자 했습니다. 즉 재산을 바치려는 마음이 시기심이었습니다. 충성이 아니라 허영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그대로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세상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간의 경우와 아나니아와 삼비라의 경우가 大同小異(대동소이)합니다. 이들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승승장구하고 교회의 전진을 가로막으려는 사단의 계략이 위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들 속에서 사단이 활동했습니까? 교회의 약진을 막는데 이들이 적격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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